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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로맨스]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  

번호 : 75     /    작성일 : 2004-01-02 [03:22]

작성자 : Junk    



내 로맨스 책 읽기에 심각한 화두(?)를 던진 글이다. 그래서 리뷰를 하고자 한다. 리뷰라기보다는 로맨스라는 장르에 관한 내 생각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장르소설 애독자이되 로맨스 바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두 명의 지인(知人)이 이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이 두 사람은 대여점에서 로맨스 소설을 빌려 읽기는 하지만 로맨스 사이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나마 한 사람은 내가 로맨스를 쓴다는 것조차 모른다. 우연히 만났을 때 얘기가 나왔던 것이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한 이야기는 '대체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로맨스 애독자로서 당혹스러웠다. 결국 다 읽었으면서 괜히 로맨스라고 깎아내리는 것 같아(공통점은 판타지 애독자)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 대체 어떻길래 두 사람이 그리도 짜증스런 듯이 반응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잘 읽혔다. 이 작가 분은 전에도 두 번이나 작품을 출간한 경험이 있는 분이다. 인기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인상은 받지 못했지만, 술술 넘어가는 그런 문장이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설명하겠다. 어릴 때 남주인 아르젤 백작과 만난 여주 가린은 그를 가끔씩 그리워하면서도 줄곧 자신 옆에 있어 온 정무형과 약혼을 한다. 그런데 결혼 시기가 다가오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와 친한 친구의 정사를 목격함과 더불어, 약혼자 무형의 잔인한 이면을 보게 된다. 충격 받은 여주는 도망치듯 남조 무형을 떠나는데ㅡ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력적인 소재인 삼각관계다. 남주와 남조가 극히 다른 타입일 때 그 빛을 발하는 플롯이기도 하다. 남주와 남조는 나름대로 그 대조성이 잘 묘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장성이 너무 진해서 거부감이 일 때도 있었지만.

문제는 여주였다.
여주의 심리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남조와 친구의 정사 장면을 본 데다가 남조가 자신의 격투 상대의 심장을 꺼내는 장면까지 목격한 여주다. 이 정도 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 수시로 가위에 짓눌리는 트라우마를 가져도 무방할 법하다.

그런데ㅡ

사실 이 부분에서 읽다가 잠시 '응?' 하고 멈췄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뭐지? 하고 되짚어 생각해 보니 이내, 김영희 님의 MASCA에 등장하는 문제의 장면ㅡ 윙크에 연재되었을 당시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놔 주지 않았던 4권 마지막 부분의 장면이 떠올랐다. 마왕 카이넨이 강적 '헤셰드의 여자'와의 전투 후 무표정한 얼굴로 적의 심장을 꺼내는 장면, 말이다.

패자의 심장을 꺼내는 장면은 MASCA의 세계에서는 타당한 이유를 갖고 등장한다. 마왕 카이넨은 그렇게까지 해서 마력을 봉인하지 않으면 '처치'할 수 없는 상대와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에서는 대체 왜 무형이 죽은 자의 심장을 꺼내야 하는 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작가는 단순히 '남조의 피에 파괴적인 본능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대며 그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상당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유였지만,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문제는 여주였다.
여주 가린의 행동이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스카'와 비교해 보자. 마스카의 여주 아사렐라는 '마왕이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이 무표정하게 상대의 가슴을 찢고 피 흐르는 심장을 손에 쥔 순간, 구역질을 시작한다. 그 이후로도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의 다른 일면을 본 괴로움은 수시로 그녀를 괴롭히고 한없이 명랑하고 순수한 그녀를 변화시킨다.

즉, '마스카'의 '심장 강탈(?)' 장면은 타당성이 있을 뿐더러 또한 그 일을 목격한 여주의 심리도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끔 구성되어져 있다. 그런데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의 여주 가린은 어떠한가.

가린은 충격을 받아서 무형을 떠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후 가린의 행동은 별다른 괴로움이 없어 보인다. 프랑스로 가서 아르젤과 재회한 뒤 초콜릿 아이스크림 통을 비워내거나 시종일관 명랑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은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약혼자가 친구와 바람만 피워도 식욕이 사라질 판국에, 약혼자가 '냉혹한 살인마'란 사실까지 알게 된 그녀다.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여자라면 넘어갈 수 있다. 가린은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재벌가의 영양이었다.

이후로도 줄곧 그러하다. 자기 운명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없는 거야 그렇다 쳐도, 자신을 데리러 온 남조를 되려 불쌍히 여기고 순응하는 행동에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야 어릴 때부터 줄곧 같이 자라 온 남조에 대한 애틋함과 미련은 남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행동의 일관성이 많이 결여되어 있어서 수긍하기가 힘들다.

아마 내게 이 글에 대해 언급한 두 사람은 이런 부분 때문에 '대체 말이 되느냐'고 말한 것 같다.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이것은 비단 이 소설만의 문제가 아닌 국내 로맨스 소설의 전반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장면은 있으되 동기설정이 희미하다.
사건은 있으되 인과관계가 희미하다.
인물은 있으되 심리전개가 희미하다.

대체 A에서 왜 B로 전개되는지, 대체 왜 A에서 B라는 심리로 넘어가는지, 독자를 이해시켜주는 게 아니라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남주가 여주를 사랑한다는데,
남조도 여주를 사랑한다는데,
여주는 남조보다 남주에게 더 끌린다는데,
남주나 남조한테 그리 당해도 여주 본인이 상관없다는데.

뭐, 어때?
작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라는 식이다.

물론 사랑이란 감정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랑은 마법이니까 그렇다 쳐도 그걸 제외한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는 어느 정도 납득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실 (나도 그렇고) 많은 로맨스 작가들이 독자를 납득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이 바닥 독자들 다수가 그걸 수긍한다는 것이다.

아마 위 두 사람은 '로맨스만 읽는' 로맨스 마니아가 아닌 '장르문학 마니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분개했던 거 같다. 마치 먼치킨 류 판타지에 중독된 판타지 마니아들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여하간에 화가 나서 이 두 사람에게는 이 작품 그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만도 아니다, 라고 반박하고 한 사람에게는 조목조목 이유를 대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자신도 어딘가 씁쓸했다. 그러면서 헉,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로맨스'라는 장르에 길들여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로맨스'라는 장르를 내가 길들이는 게 아니라 이 장르에 길들여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로맨스니까,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의 읽기와 쓰기에 정당성과 이해를 부여하는 건 확실히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로맨스도 로맨스이기 이전에 소설의 한 장르이므로. 결국 로맨스라는 장르를 기타 독자들이 없수이 여기지 않게끔 하는 방법은, 타 로맨스 독자들도 이해가능한 구도와 심리를 그릴 수 있도록 작가들이 노력하는데서 출발할 거란 조심스런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에는 여러가지 장점들도 있었다. 다만 내 리뷰는 책을 읽고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점 하나를 집어서 풀어나가는 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점에 대해서 생각을 늘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일관적이지 못한 심리 만큼 일관적이지 못한 분위기 묘사도 읽는 사람을 당혹케 만드는 데 한 몫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시종일관 나름대로 심각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다가보니, 라스트의 갑작스런 화해(를 넘어선 화기애애) 구도는 그렇다고 쳐도 남주가 남조에게 뿌린 '구린내 향수'와 남주의 '캬갸갸갸'라고 표현한 음흉한 웃음은 개인적으로 참말이지 황당했다는;

즉 '장미를 사랑하는 남자'를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의문은, '작가님이 무슨 생각을 갖고 이 장면을 여기에 배치하였을까'였다. 단순히 재미있어서 넣었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 작가님은 벌써 두 번이나 출판을 해 보신 분이다. 장면장면 간의 유기성이나 장면 선택의 당위성, 전체적인 분위기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계산하실 수 있고 또 계산했어야 할 짬밥이건만.

허접한 감상을 마친다.



2월화 이글 럽펜에도 올려주심 안될까요? 'ㅅ') 2004-01-02 X

정크 너무 허접해서 No Way; 2004-01-02 X

Lian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시네요. 깊이 공감했고, 반성했습니다. (-_ㅠ) 2004-01-05 X

소냐 가슴 시원한 리뷰입니다.. 가끔 이 작가님의 글에서 그저 억지스럼이 느껴졌거든요 2004-03-09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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