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이름이 뭐야?”

나는 체육관 벽에 무릎을 끌어안고 기대앉은 채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유령에게 물었다.

……, 모르겠어.”

유령은 말하는 게 힘든 것 같았다. 띄엄띄엄 힘겹게 단어를 말했다.

괜찮아, 기억나는 것부터 말해.”

나는 슬쩍 유령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뇌도 물고기 밥이 된 것 같다. 뻥 뚫린 귓구멍 안에 흐물흐물 얼마 안 남은 뇌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영체라는 건 형상기억합금 같은 것이다. 현재는 죽은 자신의 시체를 반영하고 있지만, 온전히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면 깨끗한 몸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물론 어색한 남의 학교 교복이 아니라 학생의 경우 원래 자신이 다닌 학교의 교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된다. 아마도 이 아이는 자신의 시체를 본 상태로 굳어진 것이리라. 죽은 것도 충격인데, 이렇게 엉망인 상태를 반영하다니, 언어능력도 기억력도 엉망인 건 어쩔 수 없다.

하앗!”

스파이크!”

와아!”

바로 앞에서 반 대항 배구가 한창중이다. 체육관의 두 개 필드에서 아이들이 남녀 나눠서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통통통.

하얀 배구공이 내 앞으로 통통 튀며 굴러왔다. 서현이 내 앞으로 굴러온 배구공을 쫓아와 줍는다.

가영아, 배 많이 아프니?”

나는 지금 마법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유령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나는 살짝 찡그리는 척 하며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 오늘이 첫날이라서.”

내가 생리 첫날 아픈 건 사실이다. 다만 생리중이 아닐 뿐.

그래, 오늘은 배구시합이라서 네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됐다.”

난 신경 쓰지 마.”

서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옆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 이건!”

?”

천장이 새나봐.”

? 뭐가?”

그러니까, 물이…….”

서현은 눈을 찌푸리며 내 옆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얼굴이 확 붉어져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 그래. 그렇구나.”

.”

내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지, 서현은 잘 쉬라며 서둘러 나로부터 멀어졌다.

왜 이렇게 당황하지?’

내가 갸웃하는 사이 내 옆에 앉아있던 유령이 추적추적 물에 젖은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내가 눈이 휘둥그레 걷는 유령을 바라보는 사이 그는 서현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 잠깐, 그러면 안 돼.”

가영아?”

내 옆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가리고 다시 주저앉았다.

아냐, 잠깐 두통이 와서 이번 건 좀 심한 거 같아서,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진짜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고, 아이들은 안됐다는 듯이 서로 그때의 경험을 주고받는다. 얘들아……. 우리 옆에 체육선생님이 허둥대고 있다.(참고로 남자다) 나는 아이들이 다른 화제로 시선을 돌렸을 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안 돼! 따라가지 마!

그러자 물에 젖은 유령은 스르륵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에게 급하게 손짓을 하며 제자리로 오라고 강조했다. 유령은 잠깐 망설이듯 서현을 바라보다 미련을 끊듯이 고개를 돌리고 내 옆 자리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요 반년 간 거의 쓴 적이 없어서 잘 될지 몰랐는데.’

 

이건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넌 너무 많이 보이니까, 가르쳐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유령에게 들리는 목소리? 유령은 그냥 말해도 듣지 않아?”

평범한 유령은 그렇지, 하지만 대체로 다 망가져 있어서 실제 육성은 그들에겐 잘 안 맞는 주파수 같은 거야. 때문에 잘 맞는 주파수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가 있지. 다른 사람은 망가진 유령을 보기 힘들지만, 넌 지나치게 눈이 좋으니까.”

……그럼 저게 망가진 유령이야?”

아니, 저건 더 이상 유령이 아냐. 자아도 기억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영체 덩어리지.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을 때만 사용해. 쓸데없는 것도 들을 수가 있으니까.”

 

불렀어?”

!’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내 앞에 과학 선생님이 나타났다.

과학시간 말고는 못 봤는데 불러주다니 기쁘다.”

스윽하고 그 과학선생님이 손으로 내 척추를 따라 훑는다.

이 변태가 귀는 밝아서. 여긴 체육관인데 거기까지 들리디?’

당연히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히 성희롱 중인 이 선생님은 과학실에 상주중인 변태귀신이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당연히 외면하고 무시하고 가끔 밟아줬다) 옛날에 이 학교 선생이었던 것 같다.

당신 안 불렀거든? 꺼져.”

흐음, 이번에 새로 온 학생인가 보네.”

얘 전학 온 거 아니야.”

이 선생 유령이 너무나 무심하게 말하길래 나도 모르게 딴지를 걸고 말았다.

우리한텐 전학이나 마찬가지지. 어라, 교복도 입고 있네. 어려서 좋겠네.”

나는 찌릿 변태교사를 노려본다.

어린 게 좋은 거니, 불쌍한 거지.”

아무것도 모를 때 죽어서 차라리 나은 거지.”

모르니까 불쌍한 거지.”

…….”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가끔 언니들 대화 속에서 튀어나온다. 삶을 산다는 의미도 모른 채 죽어간 어린 영혼들에게 하는 말이다. 서현을 따라가다 말고 다시 내게 다가온 소년은 우리들의 대화를 보고 갸웃 고개를 기울인다. 텅 빈 눈동자가 제법 귀엽게 느껴진다.

아냐, 여기 앉아.”

나는 물웅덩이가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얼버무렸다.

진서현! 뭐하는 거야!”

아이들의 불만 섞인 야유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령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서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 무심한 눈길을 마주한 서현은 얼어붙어있었다.

…….”

입술을 달싹이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면으로 향한 그 얼굴에서 움직이는 입술을 난 읽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것도 들을 수 있으니까

 

설마, 들었어?’

흐응, 우리가 보이나?”

내가 당황해 있는 사이에 이 비틀린 변태교사가 서현에게 흥미를 보인다.

가만있어, 이 변태야.”

나도 이왕이면 예쁜 애가 취향이야.”

……그러시겠죠.”

내가 살짝 삐져서 방심한 사이에 변태교사가 서현에게 다가갔다. 서현은 그 사이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다시 경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변태교사는 흐응, 흐응, 하며 불건전한 신음소리를 내며 서현 근처를 돌아다니지만, 서현은 살짝 귀찮은 기색을 내비칠 뿐, 딱히 변태교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얘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서현 옆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변태교사. 저 변태는 알바 아니고, 이 위화감 언젠가 느낀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 죽다 살아난 놈팽이랑 잘 지내냐?”

이 놈의 변태교사가! 나는 내 생각을 방해하고 쳐들어온 교사를 다시 노려본다.

나한테 신경끄고 과학실에나 처박혀있어.”

생각해보면 그게 다 그 놈 덕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번엔 내 귀에 숨을 불어넣는다. 한기가 목에서 발끝까지 쭈삣 달린다. 나는 내 주먹을 꽈악 쥔다.

이 아저씨야. 당신 숨에서 나오는 건 냉기뿐이야. 성희롱해봤자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분 나쁠 뿐인데 왜 이렇게 포기를 못해?”

최소한 반응은 있으니까. 넌 네가 얼마나 다이나믹한 반응을 보이는 지 모르는 구나? 이게 다 그 놈팽이 덕…….”

퇴치해버리고 싶다.”

…….”

진심으로 퇴치해버리고 싶다.”

알았다, 알았어. 오늘은 이만 하면 되잖아.”

곱슬머리에 빛바랜 카키색 실험가운을 입고 있는 변태교사는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선다. 이 유령은 지박령이라 학교 밖으로 못 나온다. 내가 작정하고 퇴치하고자 하면 꽤 간단하게 봉인할 수 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내가 진짜 화를 내면 물러선다. 물론 그 때만.

당신의 그 끈질긴 집념도 대단하다. 내가 유령을 퇴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왜 자꾸 들러붙는 거야?”

이 유령은 수영이 우리들에 의해서 퇴치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영은 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다른 유령들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변태교사는 틀리다. 아니, 대체로 죽은 유령은 다른 유령을 인식한다. 그 놈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으면 다른 유령을 인식 못한 거야? 도훈은 아직 안 죽었으니 대충 이해가 가지만…….

인간이란 죽든 살든 자신의 낙을 포기 못하는 거야. 유일한 낙을 포기하고 살면 살던 죽든 그냥 죽은 거지.”

말은 잘해요.”

난 굳이 당신은 이미 죽었어! 라고 딴지를 걸지는 않는다. 이 놈의 변태교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변태교사가 된 인간, 아니 유령이다.

철썩!

!”

왜 그래?”

내 앞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더니 금세 질색하는 표정으로 변한다.

아아, 알았다, 알았어. 불러놓고 무시하지 말란 말이지.’

나는 차마 옆을 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체육관 지붕이 새나봐.”

…….”

아이들은 내 오른쪽 어깨가 푹 젖은 모양을 끔찍하게 바라본다. 지붕이 샌 것 치고는 좀 지나치게 젖어있다.

하아, 오늘이 비오는 날이라 다행이야.’

요즘은 조용해서 유령 핑계도 안 통한다. 유령 탓이지만.

 

비도 오는데 웬만하면 쉬지 그랬어.”

비도 오는데 세탁기 돌려야 되나 싶은 심정으로 체육복을 가방에 쑤셔넣고 교문을 나섰건만, 무슨 개근상 받을 기세로 오늘도 교문 앞에 서 있는 강도훈. 비와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오늘도 카페에 가?”

의외로 말투에 기운이 없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영아~!”

!”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구나.

스톱!”

나에게 달려오는 서현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외친다.

, 몰라! 난 오늘은 누구하고도 어울릴 생각 없으니까, 차라리 니네 둘이 데이트 해!”

본의는 아니나 나에겐 오늘 물에 빠져 죽은 소년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 한마디로……, 니들하고 놀 시간 없어!

그래도 돼?”

좋아한다. 나 오늘 너한테 많은 의문점을 발견했고, 너도 좀 나한테 빈틈을 많이 보인 것 같은데 그래도 사양은 안 하는구나. 나는 슬그머니 지그시 뚫어지게 서현을 바라보았지만, 살짝 굳은 표정으로 미소를 유지하는 그녀는 물러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도훈의 팔을 끌어당겨 귓속말을 속삭였다.

네 기억을 되살리는데 많은 영향을 줄 거야. 아직도 거의 생각 안 나지? 쟤랑 데이트라도 해봐, 넌 쟤랑 같이 많이 있었으니까.”

.”

도훈의 얼굴이 굳는다.

?”

도훈이 이번엔 내 팔을 끌어당겨 내 귀에 속삭인다.

그러니까 불편해.”

…….”

나는 잠시 도훈을 올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불안한 지 내 교복재킷 소매를 놓지 않는다.

같이 가줘.”

안 돼.”

!”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

…….”

얼굴은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차마 할 수 없는 지 무의식적으로 내 소매를 끌어당긴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속삭인다.

그럼 카페로 가. 단 둘 보다는 나을 거야.”

카페는 좀…….”

그 이야기를, 사실 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정황상 사실을 들었다면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해준 상대를 찾아가긴 불편한 모양이다.

너 나 도와줬다며.”

하아…….”

내가 크게 한숨을 쉬니 도훈이 움찔거린다.

난 원래 나한테 빚 있는 사람한테는 단호해.”

나한테 그는 유령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자 도훈의 표정이 급변했다.

정말 내가 쟤랑 단 둘이 가도 되겠어?”

…….”

아냐, 의민아저씨는 절대 그런 걸 얘기했을 리가 없다. 섬세한 청소년기의 여자애의 사생활을 훌렁훌렁 까발렸을 리가 절대 없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

이제 도훈은 화가 난 표정이다. 난 속으로 뭔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다.

그래, 알았어! 데이트 까짓 거 하지!”

아니 뭐 그렇게 단호할 필요는…….’

가자, 서현아.”

도훈은 우산을 들고 있는 서현의 팔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까지 잡고 갈 필요는 없잖아.’

내가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도훈에게 팔이 붙잡힌 채 끌려가는 서현의 뒷모습을 보는데 그 뒤를 처벅처벅 느리게 뒤따르는 인물이 있었다.

안된다니까!

이 유령은 대체로 말을 알아듣지만…….

알아, 너도 서현에게서 뭔가 느끼고 있는 거지?”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본능처럼 따라가려는 성향이 있다. 이건 정신적인 인력, 혹은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그 행동을 막으려하니 어쩔 수 없이 명료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 걸 수밖에 없다.

근데 왜 네가 이 주파수에 반응하는 거지?’

내 눈은 분명히 진지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서현은 두려움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네가 우선순위가 아니니까, 뒤로 미뤄두겠어.’

나는 내 목소리에 반응했지만, 아직 망설이고 있는 유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고 싶지?

그러자 유령은 내 손을 향해 손을 내민다. 난 퀭하니 뚫린 눈을 바라보며 웃어준다. 서현이 봐도 상관없다. 만일 네가 무언가를 되돌리고 싶어 한다면, 넌 일어난 비극을 마주해야 해. 난 네가 그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지 않지만, 동시에 막지 못한 너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으니까.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95 너에게 닿기를 : 4.세계는 기억한다(1) 과객연가 2015-11-28
»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6) 과객연가 2015-10-30
393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5) 과객연가 2015-10-27
392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4) 과객연가 2015-10-10
391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3) 과객연가 2015-09-28
390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2) 과객연가 2015-09-25
389 너에게 닿기를 : 3.살인의 기억(1) 과객연가 2015-09-19
388 너에게 닿기를 : 2.너에게 닿기를(8) 과객연가 2015-09-18
387 너에게 닿기를 : 2.너에게 닿기를(7) 과객연가 2015-09-16
386 너에게 닿기를 : 2.너에게 닿기를(6) 과객연가 201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