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내가 서현에게 말하기 전에 그만 그 몸에서 나와.”

닥쳐!”

수영이 가영을 잡은 손의 힘이 더 들어간다. 가영은 살짝 눈을 찌푸리더니 수영의 다리 뒤로 발을 집어넣어 수영의 균형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틈에 손을 비틀어 빼냈다.

웬만하면 그 몸에 상처 내고 싶지 않지만……, 반항하면 용서 없이 패대기 칠거니까.”

붉게 물든 손목을 감싸듯 쥐고 말하는 가영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나는 건장한 고등학생 남자를 앞에 두고 기세등등한 가영이 걱정스러웠다. 그 이상한 놈(연우)에게 호신술을 배웠다고 해도 말투로 봐서는 대단해 보이지 않았는데 뭘 이렇게 무서운 걸 몰라 하는지 모르겠다.

뭔가 배운 것 같긴 한데…….”

수영은 탐색하듯 가영을 훑어본다. 그리고 급격히 둘의 간격을 줄였다. 가영은 깜짝 놀라 근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수영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영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있었다. 수영의 손바닥은 피로 물들었고 팔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었다. , 보기만 해도 아프다. 나는 그게 내 몸이라는 사실은 잊고 기겁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무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가영은 예상했다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남의 몸을 함부로 사용하다니.”

어차피 10일 정도면 못 쓸 몸이니까.”

…….”

, 저거 내 몸이지.’

나는 둘의 다툼을 보며 멍 때리다가 그제서 화가 났다. 가영은 수영의 눈치를 보다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겁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지?”

얌전히 성불한다는 선택지는 없어?”

가영은 산골짜기를 따라 도망치며 외쳤다. , 개성 없이 한결같은 권유구나.

너 같으면 죽으라고 한다고 그냥 죽겠어?”

넌 이미 죽었거든? 그러니까 더 이상 죽는 건 아니야. 그냥 저 세상이 무섭니?”

저차원적 논의인가 고차원적 논의인가 구분이 안가는 대화다.

이미 죽었으니 얌전히 사라지라고? 그게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

도망치던 가영이 갑자기 섰다.

그럼 죽어!”

그 순간 수영의 발밑이 빛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영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무형의 벽이 수영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쪽 팔이 늘어진 채 수영은 무형의 벽을 두드리며 저항했다.

이게 뭐야!”

가영은 그런 수영은 무시한 채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좀 더 수련이 필요하겠는 걸.”

숲 사이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온 연우가 말했다. 가영은 그를 흘기며 답했다.

이런 위험한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걸요.”

네가 유령들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러던가.”

…….”

가영은 입을 다물고 숨을 진정시키더니 덧붙였다.

긴장되니까 몸이 잘 안 움직여요.”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수련은 한 2배 정도 더 해야겠지?”

추가 수련은 기정사항인 모양이다. 둘은 무형의 벽에 막혀 탕탕 소리치는 수영을 무시한 채 느긋한 대화를 지속한다. 나는 안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생각보다 간단했네.”

그러자 가영이 찌릿 노려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인다.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가 손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저 무식한 자식 육체의 한계치를 무시하고 힘을 써 대니까.”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얼굴을 찌푸리고 만 거냐! 내가 화난 표정으로 가영을 바라보니 그녀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내 몸보다 네 몸을 걱정하는 게 좋을 걸? 오른팔은 탈골 됐고, 손가락부터 시작해 팔 전체도 골절 가능성이 높으니까.”

, 이 자식!”

내 몸으로 돌아가 그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게 나다. 화가 나 수영의 눈앞에 알짱대보지만, 결국 이 자식 유령을 못 보는 체질이니.

잡담은 그만하고, 가영아 비디오 좀 잡아줄래?”

어느새 나타났는지 형사님이 비디오카메라를 지지대에 세워놓고 있었다.

! 내가 말했지, 영능력자가 아닌 한 보통은 안 찍힌다고. 대신 영능력자가 찍으면 찍히거든.”

궁금해 하는 나를 향해 가영이 설명해주었다. 가영은 의민에게서 바통터치 하듯 비디오카메라를 잡았다.

증거 영상. 사례 확보 가능한 경우가 별로 없어서. 미안하지만 프라이버시 좀 침해하자.”

그럼 강도훈 학생 이쪽에 좀 서 줄래요?”

가영이 뒤로 은테 안경을 쓴 여성이 나타났다. 가영을 제외한 유일한 영능력자 이정민이라는 여성이다. 소속은 경찰이지만, 연구원의 신분이라고 했나. 그녀는 손을 들어 한번 물러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바닥에 쌓인 낙엽이 빗질을 하듯 스르르 한쪽을 쓸려갔다. 그리고 땅 위에 그러진 원형, 마치 마법진처럼 생긴 진이 나타났다. 두 개의 원과 맨 안 쪽에 사각형의 진 안에 수영은 갇혀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진, 사각형 안에 두 개의 원이 있는 진이 있었다. 정민은 내게 그 안에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영혼을 교체하는 거야.”

가영이 카메라에 눈을 댄 체 말했다.

여기서 꺼내 줘!”

가영의 말을 들은 수영이 무형의 벽을 크게 치며 발버둥을 쳤다. 그 와중에 내 왼 손 주먹이 부서지는 게 보였다.

빨리 하자. 네 몸, 남아나는 게 없겠다.”

…….”

거기엔 동감하지만……, 나는 이제 끝인가 싶어서 주저하게 된다. 그런 내 모습에 의아한 듯 가영이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

다시 볼 수 있겠지?”

…….”

가영이 입을 다문다. 보다 못한 연우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다 말해줘. 어차피 기억 못하잖아.”

박연우씨…….”

정민이 그를 힐끗 노려본다.

기억 못하다니?”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나. 가영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체이탈한 생령의 경우 생령의 상태로 경험한 모든 기억을 잃어.”

, 잠깐 지금 내게 겪은 모든 걸 기억 못한다는 거야?”

정확히는 뇌에 기록된 적 없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게 되는 건데. 암튼 결론적으로 너는 유령 상태에서 겪었던 모든 것을 기억 못해. 그건 몸의 생리적인 문제라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넌 지금 내가 널 좋아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고! 내가 화난 표정으로 가영을 바라보니, 가영은 담담히 서술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모든 걸 잊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라고. 그게 너한테 좋아. 이 이상하고 위험한 경계의 세계에 관여되지 않는 게 좋아.”

너에 대한 모든 걸 잊는 거야.”

나는 그녀의 일말의 반응이라도 바라고 대꾸해보았다. 그러나 가영은 동요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경계의 주민이야.”

내가 널 잊어도 좋다는 거야?”

그게 좋다고 말하고 있잖아.”

어디까지나 평온한 말투다. 나는 화가 나서 가영의 팔을 휘둘러 잡으려 했지만 영체는 허무하게 통과하고 만다. 기를 쓰고 그녀의 팔을 잡는다고 내게 있어 5초정도가 한계겠지.

정민 언니.”

그녀는 조용히 정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우주까지

반짝이는 저 별까지도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자 내 몸이 빨려들 듯 사각의 진에 잡혀 들어갔다.

잠깐,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그러나 그런 내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는 계속되었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슬픔 그 이상의 고통

저주 그 이상의 슬픔

 

손바닥을 뒤집듯

사라져가는 기억과 마음들

당신이 나를 두고 가버린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두고 가겠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다. 분명 TV에서 나온 노래인데, 이게 어떻게 주문이 되는 거지. 나는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런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서 수영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만둬! 닥쳐! 닥치라고!”

진 안에 있어서인지 수영의, 아니 내 몸에서 또 다른 유령이 빠져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치 난시처럼 겹쳐져서 수영은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천에 물든 당신의 기억을 하늘에 놓습니다.

이 천에 물든 당신의 마음을 땅에 뿌리칩니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하얀 마음이 내세를 기약합니다.

그 마음이 나비가 되어 하늘거리면,

당신은 나를 기억해 줄까요.

 

슬픔 그 이상의 고통

저주 그 이상의 슬픔

 

당신이 나를 두고 가버린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두고 가겠습니다.

 

한번 끝난 노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정민은 자신의 발 앞에 빈 유리병을 놓았다.

?’

어느새 나는 가영과 정민과 멀어져 있었다. 나는……, 살아있는 몸에 들어와 있었다. 마치 잘못 씌운 포장처럼 흔들거리던 나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놓아줘, 난 돌아가야, 그 애에게 돌아가야 돼.”

어그러진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온다. 이제 수영의 모습은 확인이 안 된다. 끝까지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은 난 알 수가 없나 보다. 정민이 발밑의 유리병 뚜껑을 꽉 눌러 막는다. 코르크마개처럼 밀폐되는 뚜껑이 막히자, 주변에 횃불이 타오르듯 공중에 불빛이 떠올랐다.

어라?’

나는 몰랐다. 주변 나무에 검은 종이에 황금색 글자가 쓰여 있는 부적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의식이 완전히 육체에 고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의식이 완전히 끝나면 나는 가영을 잊겠지. 나는 필사적이었다. 이 때 만큼은 수영이 내 몸을 부셔놓은 게 행운이라 생각되었다. 고통이 전신을 덮치며 내 의식을 깨워놓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흔들흔들 탈골된 팔을 붙들고 가영에게 다가갔다.

강도훈?”

진 밖으로 걸어 나온 나를 가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영이 붙들고 있는 비디오카메라를 손을 쳐냈다. 힘없이 쓰러지는 장애물을 치우고 나는 가영의 팔을 붙잡았다. 탈골된 오른팔 대신 피투성이 왼팔로.

드디어 닿는구나.”

이게 무슨……?”

나는 진짜 내 몸으로 느껴지는 가영의 몸의 감촉에 감격했다. 그러나 내 의식은 점점 멀어진다. 시간이 없었다.

잠깐, 도훈아?”

계속 뭔가 초조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가영에게 난 고백했다.

좋아해.”

……!”

그리고 그 몸을 끌어당겨 그 아이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게 내 의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다음 순간 난 암흑 속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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