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숙소에 도착하니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다. 숙소는 유스호스텔로 강원도 산 속에 위치한 건물이다. 운동장도 있고, 무대도 있고…….

수학여행이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침대 옆에서 가방을 정리하던 가영에게 물었다. 그녀는 현재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 가방 맨 아래 깔린 옷을 꺼내는 중이었다.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수학여행 치고 산 속이고.”

, 1학년은 극기훈련이야.”

……그게 무슨 수학여행이야.”

그냥 약간 군대식 놀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수학여행이라고 와 놓고 운동장 도는 거냐?”

학교 정책을 나에게 투덜거리지 말아 줄래? 그 보다 이제 그만 방에서 나가 주지?”

슬슬 주변에도 벌써 옷을 훌렁 벗고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영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본다. 간다, ! 내가 복도, 타원이 파도처럼 그려진 카펫 위에서 멍하니 서 있다 보니 민수영이 한 여자애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지나간다.

오늘은 장기자랑한대. 각 반마다 준비한 애들, 기대댄다.”

점심 먹고 뭐 줄타긴지 뭔지 하는 건 걱정 안 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짝 들뜬 진서현. 그리고 그런 그녀를 즐겁게 바라보는 민수영. 나는 오한이 들었다.

내 몸으로 멋대로 무슨 짓을!’

새삼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든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는 지금 내 뒤에 있는 이 방에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애가 아니다.

철컥!

내 뒤의 문이 열리며 막 그들이 지나간 복도로 가영이 나왔다. 초록색 체육복에 윈드브레이커를 하나 더 덧입었다. 동복 긴 초록색 바지에 흰 반팔, 거기에 초록색 체육자켓. 그 위에 주홍색 선명한 윈드브레이커는 언밸런스 했지만, 가영 입장에서는 초록색 체육복도 눈에 띠는 주홍색 점퍼도 선택사항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이해한다. 산에 간다니 챙겨준 언니의 강제지참 물건이다.

언제 실행할 거야?”

그들의 뒷모습이 복도 끝 계단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영이 좀 쓸쓸한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 끝자락을 지그시 바라본다.

오늘은 넘길 거야. 찾아야 하는 것도 있고, 오늘 정도는…….”

…….”

나는 가영이 삼켜버린 말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결국 살인자다. 나도 아직 살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동정하는 가영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가영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세계에 더 긴 시간 살아왔고, 또 더 긴 시간을 살아갈 아이다. 모르지도 않을 잔인한 말을 굳이 다시 그 아이에게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이 아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내가 겁쟁이가 됐지.’

기억도 안 나는 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무섭다고 느낀 건 기억이 있는 한 처음이다. 가영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무슨 배짱으로 가영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나 싶다.

하아.”

내가 깊게 한숨을 쉬자, 그때서야 눈치 챘는지 가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아냐! 분명히 일을 바로잡을 거야.”

아냐, 됐어 뭐…….”

괜찮은 척 하고 싶었지만, 화가 나 시무룩해진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가영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당연히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 목소리와 눈빛에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빛에는 동정이나 그 비슷한 찌끄레기도 섞여있지 않았다. 나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가영은 내 말에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가자. 점심 먹으러.”

가영은 웃으며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식당은 1층이다. 나는 뒤돌아 걸어가는 가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살짝 스쳐본다. 차가운 위화감이 들었는지 가영이 고개를 갸웃 하며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친 손을 숨기고 미소를 돌려주었다.

어차피 난 못 먹잖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너 아까 지나가다 본 그 서바이벌 루트 안 봤어?”

……쓸데없이 본격적이긴 하더라.”

점심을 먹고 극기훈련장 교관들은 가볍게 운동장을 돌고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시켰다.

어디가 약간 군대식 놀이냐?”

……내가 뛰는 거지, 네가 뛰는 거니?”

가영은 좀 질린 듯 한 말투로 투덜거렸다. 하긴, 내가 뛰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올라가든, 기든, 넘든, 떨어지든…….

진짜 군대 훈련소 같더만.”

지금은 장기자랑 시간이다. 가영은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몰래 나와 선생님들 방에 숨어들었다. 그녀는 뭘 찾아야 되는 지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다. 가영은 책상 위를 대충 훑어보고는 바로 손을 움직였다.

하긴 제일 눈에 띠는 데 있는 게 당연하지.”

그녀는 종이 한 장을 쥐었다.

그게 뭐야?”

참가 인원 명단.”

?”

그녀는 그 종이를 쥐고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그렇게 가영은 뿌뜻한 표정을 지으며 선생님들 방을 나섰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나는 바로 벽을 통과해 가영 옆에 섰다. 가영은 종이를 접어 자신의 가슴에 넣는다. 얼굴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굳어서 좀처럼 표정변화가 없다.

그러는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장기 자랑 안 나가?”

제법 친근한 척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지만, 긴장감이 흐른다.

…….”

그는 무언인 채 가영의 가슴을 쳐다본다. 당연히 가영이 방금 숨긴 종이를 신경 쓰는 것이리라.

! 서현아!”

그녀는 힐끗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한다. 그는 순간 움찔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영은 그를 지나 코너 뒤에 숨어있던 서현의 팔을 잡았다.

조심해야지, 아무사이도 아닌데 괜히 이런데서 너랑 둘이 있으니까. 서현이가 오해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수영아.”

어둠 속에 긴장을 유발하던 수영은 코너에서 나온 서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 미안. 혹시 내가…….”

그런 거 아냐!”

수영이 주춤하며 뒷걸음질 치는 서현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가영의 눈에 아픔이 살짝 비쳤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이고 그녀는 웃으며 둘에게 손을 흔들고 뒤로 돌았다.

나쁜 새끼.”

가영은 종이가 숨겨진 가슴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답지 않은 거친 말에 깜짝 놀랐지만, 아무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띠링!

기계음이 울린다. 가영은 스마트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모두 왔대.”

그 둘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확인한 그녀는 내게 말했다.

벌써?”

일정에 내일 아침 산행이 있어. 그때가 제일 좋은 기회야.”

아침에?”

가영은 자신이 집어온 종이를 펴고 살펴보며 말했다.

내일 저녁은 캠프파이어야. 오후 시간은 극기훈련을 하니까 꾀어내는 게 불가능해. 캠프파이어 때는 아무래도 서현이가 붙어있겠지. 그리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흔들어놨으니까 내가 산행 중간에 떨어져나가면 따라올 것 같아. 어쨌든 되도록 내일 오전에 결판을 봐야지.”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냥 넘긴다는 말도 결국 일정표 상 그를 꾀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머리속엔 도대체 뭐가 든거지? 가영은 멈칫하더니 서둘러 종이를 다시 자신의 가슴 품에 숨겼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막 숙소건물을 나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서현.”

가영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서 있는 서현이라는 소녀도 굳은 얼굴로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가영을 바라보았다.

주가영.”

마치 몰랐던 이름을 부르듯 서현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부탁할게 있어.”

?”

딱딱했던 서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아마도 그녀가 기대하던 전개가 아닌 것 같았다.

내일 이걸 꼭 수영이에게 전해줬으면 좋겠어.”

가영은 선생님 방에서 훔쳐낸 종이를 서현에게 건냈다. 서현은 네 번 정도 접혀져 내용을 알 수 없는 종이쪽지를 받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면 봐도 되지만, 안 보는 게 좋을 거야. 네 남자친구가 싫어할 테니까.”

……?”

그리고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러브레터 같은 건 아냐.”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

1시간 전 수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긴 했지만, 설마 그녀도 가영이 상대의 여자친구를 통해 연애편지를 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보면 알겠지만, 난 걔랑 별로 사이 안 좋아.”

…….”

서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가영은 그런 서현을 조금 슬프게 바라보고는 자신의 방문 앞으로 발을 돌렸다.

전달 안할 수도 있잖아.”

…….”

가영은 내 말에 반응하지 않고 뚜벅뚜벅 서현을 복도 가운데 덩그러니 놓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가영은 긴장된 몸을 풀었다.

후우.”

가영은 한숨을 쉬며 문 앞에 주저앉았다.

가영아?”

내가 걱정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지친 표정이긴 했지만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든다.

괜찮아. 그 아이가 전달하지 않아도 나를 신경 쓰고 있는 수영이 알아서 탐색 할 테니까. 중요한 건 내가 서현에게 접근했다는 사실. 그게 수영에게는 제일 두려운 일일 거야.”

왜 수영이 그딴 쪽지에 움직이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영이 미끼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걱정으로 얼굴이 굳었다. 그런 나를 눈치 챈 것인지 가영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걱정할 건 네 자신의 목숨이야.”

아주 당연한 지적에 나는 되돌려 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널 걱정하는 걸 멈출 순 없을 거야.”

뭔가 초조해지고 있었다. 작전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영은 긴장했다. 옆에서 봐도 실패는 절대 안 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의 목숨이, 내 목숨이 걸려있으니 그 무게가 장난 아니겠지. 그리고 나 역시 뭔가 꼭 집어 말 할 수 없는 불길함을 가영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게 때때로 입을 다무는 가영에 대한 의문인지, 점점 긴장하고 있는 가영에 대한 걱정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에는. 그리고, 아침이 밝아왔다.

 

말이 수학여행이지, 체력훈련 같은 일정에 애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더구나 아침 산행은 뭔가. 솔직히 나라도 싫었을 것 같다 싶었다. 나의 그런 불만에 가영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니 선생님이 아마 인성교육의 일환이 아닐까 하던데. 정신 단련?”

선생님이라는 게 그 날 때린 놈이지?”

가영은 도끼눈을 뜨더니 속삭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거든?”

뭐야, 난 또 네가 이것저것 배우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더니.”

내가 말 안 했나?”

안 했어.”

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숨을 죽였다. 서현이 수영에게 쪽지를 건네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현이 속삭이자 수영이 가영을 흘끗 쳐다봤다. 가영은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타이밍 죽여주는구나, 진서현.”

…….”

나의 걱정스러운 침묵을 무시하고 가영은 눈을 빛냈다.

험난한 산행이 되겠는 걸.”

산행 자체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교관의 재촉에 되지 않는 체력으로 낮은 구릉을 올라 내려오는 빠른 산행이었다. 하지만 가영은 조금 늦은 걸음으로 무리와 떨어져 나왔다. 뒤이어 교관이 따라오고 있으니 수영을 유인하는 데는 사실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수영은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가영이 조금 지친 듯 걸음을 늦추니 바로 손목을 끌고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나는 심장이 폭발할 듯 뛰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지?”

수영이 날카로운 목소리고 가영을 질책했다. 그러나 가영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얼굴로 그런 수영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수영에게 붙잡힌 손목은 그대로였지만 가영은 자신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저항했다.

무슨 짓인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민수영.”

수영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여전히 가영의 손목을 잡은 채 부채를 펴듯 접힌 종이를 팍 펼쳤다. 종이는 가영이 말한 대로 수학여행에 참여한 명단이었다. 여전히 그게 왜 수영을 끌어내는 미끼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왜 이걸 서현이한테 줬어?”

그 아이는 그걸 봤니? 일단 보지 말라고 경고는 해뒀다만.”

수영의 가영의 손목을 쥐는 힘이 더 들어간다. 이 자식! 가영은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오히려 당당히 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눈치 채기 전에 그만 떨어져 나와.”

…….”

수영은 분노하면서도 뒤이어 나올 가영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일그러진 영혼은 결국 끝에 가서 뭘 원했었는지 조차 잊어버릴 걸.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지금은 네가 서현이 곁에 있고 싶은 마음으로 움직이겠지만. 머지않아 그냥 습관처럼 몸을 갈아탈 뿐 이야. 왜 그 아이 곁에 있고 싶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겠지.”

…….”

넌 존재하지 않아. 거기 있는 그 명단처럼.”

……!”

납득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가영을 바라보고 있던 수영은 결정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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