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나는 가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조하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근데 왜 여지껏 나한테 밥 안 줬어?”

가영은 멈칫하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 너 배고프지도 않았잖아. 거의 대부분의 유령은 배고픔 같은 거 안 느껴. 먹을 것에 집착하는 것도 생전 취미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솔직히 100퍼센트 음식에 대해서 관심 없을걸.”

그런 거야? 굶어 죽은 귀신은 어쩌고?”

, 아귀(餓鬼) 같은 존재……?”

가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알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답지 않게 꽤 주저한다.

?”

……실제로 그들이 먹는 건 음식이 아니야. , 그들 입장에서는 음식이겠지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다양하겠지만, 뭐 최악을 따지면 인간일까.”

…….”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알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실제로 사람들이 잡아먹히고, 그런다고?”

묻지 마. 나도 실제로 본 건 아니니까.”

가영은 무신경하게 치즈케이크 한 구석을 스푼으로 떠먹었다.

, 무서워! 진짜 있어?”

……괜찮아, 어지간해서 안 만난대.”

그녀는 숨을 돌리듯 아이스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

나는 실체가 없음에도 한기를 느꼈다. 그런 나를 보고 가영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미안, 겁 줄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잠깐 생각을 정리하더니 대답했다.

이쪽 세계에도 경찰? 같은 존재는 있다고 들었어. 그런 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도록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같은 게 있대. 그러니까, 대처 가능하고 그렇게 큰 문제는 어지간해서 조우하지 않는다는 말. 그러니까 궁금하다고 다 물어보지 마. 나랑 다르게 넌 알 필요 없으니까.”

이미 알아버렸잖아.”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는 왜 순순히 대답해 주고는 모른 척 하는 걸까.

다시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넌 못 봐. 그러니 만날 일도 없는 거지.”

내가 못 본다고 내가 안 먹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

가영은 결국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아귀가 출현하는 곳은 주로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나라야. 환경이 나쁘면 출현하는 게 아귀지. 우리나라에 출현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지만 어지간해서 출현하지 않아. 아귀도 종류가 다양해. 인간을 먹는 건 99퍼센트 앞에 말한 피폐해진 나라. 전쟁 등으로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환경이 바로 아귀를 출현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 곳.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어지간해서 없어.”

종류가 다양하다는 건…….”

스톱! 이제 그쪽 종류 금지야.”

가영은 지쳤다는 표정으로 빨대를 물었다. 제법 초조했는지 빨대는 질겅질겅 씹혀 엉망이다.

제발 평범한 종류로 물어보면 안 돼? 넌 자아를 가지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유령도 못 보잖아. 말했잖아. 정말 희귀한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져야 실제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유령이 나타나는 거야. 대부분은 실제 물리적인 위협을 주지 않아.”

그녀는 슬쩍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유령은.”

유령 말고도 위험한 게 있는 거냐. 나는 묻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러다 밤에 잠 못 자겠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쿡하고 웃었다.

걱정 마. 경찰에도 SPDU 부서가 있고,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대처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 있어. 실제 범죄율에 비해 특수현상에 관련된 사고율은 약 절반정도야. 일상생활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서도 살인, 사고는 일어나잖아. 그래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데 이제 와서 겁먹을 필요 없어.”

그건 그렇지.”

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언제 살해당할지, 사고 당할지 걱정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넌 보지 못하니까, 그 확률이 현저히 떨어져. 어지간해서 조우 할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일은 정말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심령현상 강의를 하게 되었니.”

그녀는 자조하듯 한숨을 쉰다. 나는 그녀를 따라 티라미스 한 귀퉁이를 무너트린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박학다식하다.

흐응, 너 많이 아는 구나.”

내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니, 가영은 슬그머니 내 눈을 피한다.

지아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피할 수 있다고 늘 가르쳐주니까.”

…….”

그녀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화제였던 것 같다. 늘 도망치듯 날 외면했던 그녀다.

그에 비해 끝까지 냉정하지 못한 게 흠이지만.’

다 먹었어?”

그녀는 내 앞에 빈 케이크 접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 먹었으면 딱 한 군데 가보고 집에 가고 싶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긍정했다.

뭘 물어봐, 가고 싶으면 가자.”

 

노을이 물드는 저녁, 그녀가 향한 곳은 드물게도 남산이었다. 남산타워를 향하는 긴 경사로를 느긋하게 걸으며 그녀는 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아까 전 일도 있고, 난 더 이상 그녀에게 유령이나 그 밖에 초현실 현상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우와, 무너지겠다.”

그녀는 주렁주렁 자물쇠들이 달려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사랑의 자물쇠를 매다는 데이트 명소! 그래서 그런지 자물쇠도 판다.

딱히 사랑을 빌지 않아도 그냥 소원 같은 거 써 볼까?”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왕 데이트 명소인데 목적에 맞는 걸 써.”

난 내심 기대하며 투덜거렸다.

여기 꼭 연인들만 오는 거 아냐. 가족들끼리 와서도 사랑해 엄마! 이런 것도 쓰여 있다고!”

가영이 나를 불순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90퍼센트 다 연인이거든?”

뭘 새삼, 우린 연인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소원 써도 돼.”

……!’

그렇게 딱 잘라 말 안 해도 되잖아! 나는 가영의 시선을 피해 무형의 말에 얻어맞은 내 가슴을 부여잡았다.

사람 맘도 모르고.’

가영은 어느새 자물쇠를 사서 뭔가를 쓱쓱 적어냈다.

자 뭐 쓰고 싶은 말 있어?”

나는 기대감 없이 쓰윽 가영이 쓴 문장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순간, 말문이 막혔다. 놀라서 가영을 바라보니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피한 채 귀가 조금 빨개져 있었다.

말해두지만, 절대로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네가 잘 살아서 길에서 우연히 스치듯 보고 싶다……, 그 정도니까. 절대 오해는 하지 마.”

오해하지 말라는 게 무린데.’

나는 말을 삼켰다. 저 청개구리, 내가 말하면 바로 쓴 글을 그어버리고 심하면 죽어라 이런 말을 써 버릴 지도 모른다.

,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진심을 꾹 누르고 말한다.

그 밑에 똑같은 말을 써 줘.”

? 이미 쓴 말을 무슨…….”

그건 네 바램, 이건 내 바램.”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점점 새빨개졌다. , 정말! 만질 수도 없는 데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말아줄래…….

일단 쓰긴 할 건데…….”

알았어, 알았어. 오해 안한다니까?”

물론, 난 절대로 아는 척 할 거고 어디서 상주하는 지도 아니까 찾아갈 거거든?’

가영은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요구대로 쓱쓱 쓰고 자신과 내 이름을 맨 끝에 나란히 써 넣었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가영&도훈

 

가영은 빈틈없이 꽉 차여있는 나무 한 구석에 그 자물쇠를 채워 달았다. 스산한 바람이 분다. 저녁놀이 차가운 바람에 섞여 구름을 몰고 오고 있었다. 서서히 야경을 채워가는 도시의 불빛이 문득 가을을 깨닫게 했다.

괜찮아. 다음엔 꼭 살아서 여기에 올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가영이 말했다.

너랑?”

반쯤 진심, 반쯤 농담으로 장난스럽게 대꾸하니, 의외로 가영은 잠깐의 침묵 후 대답했다.

누구랑이든.”

왜 몰랐을까, 그 바램에도,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도 난 불길함을 느꼈는데. 때때로 말을 주저하듯 입을 다무는 그녀의 태도에서 왜 난 눈치 채지 못했을까.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는데…….

 

가영은 사실 창가에 앉아서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졸라서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통로 쪽에 앉아주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게 난 의자에 앉을 수도 없고(다른 사람이 앉아있으니까) 통로에 주저앉아있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데, 모르는 사람 주변에 앉아서 가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가 이 수학여행에 동행하는 이유가 뭔데! 나는 슬쩍 민수영이라는 남자애에게 시선을 보냈다. 가영과 그 떨거지(?)들의 의하면 저 유령도 다른 유령을 못 보는 건 거의 확실한 것 같다고 했다. 일명 유령 네트워크에 의하면 전혀 교류가 없기 때문이란다. 실제 보이지 않는 척 할 수도 있기에 가영 앞에서의 모습은 확신할 수는 없었단다. 하지만 그가 가영을 떠 보는 것에 가영은 아마도 다른 유령은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다른 유령이 보인다면 굳이 자신을 떠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자기혐오에 빠지겠다.’

나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소위 사실 내 얼굴이라는 민수영의 얼굴을 노려보며 혼자 생각했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밖에 안 나는데 저게 내 얼굴이라니. 차라리 나도 유령을 볼 수 있어 그의 진짜 얼굴로 보고 싶었다.

화가 난다는 건 다행이야. 감정이 사라지는 건 삶의 집착이 없는 거랑 비슷하거든.”

수학여행 전, 민수영을 볼 때마다 화를 내를 나를 보며 가영은 그렇게 말했다. 살고자하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 것도 기억을 잃어서 더욱 집착이 안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되살아나야 하는 나에게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네가 저 자식 때문에 다쳤기 때문이야.’

기억이라는 건 참 얄궂은 것 같다. 기억이 없기에 집착도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가영이라는 기억이 내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으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당연히 모르겠지)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고개가 통로 쪽으로 푹 떨어져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누가 보면 이상할 정도로 애매한 위치에서 멈춰있다. 그러나 그것도 5초를 못 넘기고 머리는 내 손을 통과해버린다.

!”

비정상적인 낙하속도에 놀라 깬 가영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내가 손을 댔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 내 손은 차갑지…….’

그 다른 온도가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한 모양이다.

?”

가영과 함께 앉은 다경이 가영에게 물어온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으니 당연한 의문이다.

, 졸다가 통로 쪽으로 고개가 떨어졌어.”

가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경이 짐짓 웃으며 가영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끌어당긴다.

맘 놓고 이쪽에서 주무셔.”

조금 깜짝 놀란 가영이지만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땡큐.”

쟨 여자애다. 쟤한테 질투하면 안 돼. 난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하아, 가끔 있다. 밝고 명랑한…… 남자애 같은 여자애가. 방금 그 터프해 보이는 손길은 살짝 질투가 났다. 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다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가영이 왜 그러냐고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거기에 기대고 있으니 내가 정면으로 잘 보이겠지.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냐. 이놈이고 저애고 내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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