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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오래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20회의 엔딩. 그래서 비로소 완벽해진 이야기. 옥탑방 왕세자. 처음부터 일관적이었지만, 다소 쓸데없이 힘을 준 산만한 곁가지들 때문에 짜증이 나긴 했어도 마지막의 남산 씬으로 인해 모든 오해와 불신을 종식시킨, 근 10주 간의 설렘이었다고 감히 고백해본다.


옥탑방 왕세자는 타임슬립물의 기본인 시간이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시간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간을 '편의상'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서 생각할 뿐, 시간이란 그저 연속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내'가 있고 다른 시공간 속에, 나와 똑같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평행이론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하긴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부분이 '본질'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물리학에서도 아직 연구하고 있는 분야라고만 들었을 뿐.

그러나, 시간의 연속성이든, 평행이론이든 이 이론이 실제적으로 증명되려면 시간을 간섭하는 어떤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타임슬립'이다.


용태용은 처음부터 이각이었다. 박하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이각이 죽고 난 뒤 300년의 시간이다. 박하가 용태용을 처음 만났던 뉴욕에서도, 이각은 30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각은 죽고 용태용으로 환생한 것이, 박하가 살고 있는 현재다. 하긴 '죽음'이라는 자체는 연속성의 개념에서는 별 의미가 없으니 편의상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해두자. 연속적인 시간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개념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과거란 바로 1초 전이라 할지라도 이미 흘러가고, 잊혀지고, 소멸되어버린 것에 불과한데 그 과거의 인물이 현재로 넘어온다는 것 자체가 이런 상식적 개념의 틀을 깨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내가 그저 연속된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미래란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에 따라 가게 될 단 하나의 미래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각각의 미래는 서로 상관할 수도. 상관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시간의 평행이론.


옥탑방 왕세자로 돌아가 평행이론면에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편의상 부르는 '과거'의 시간에서 이각이 하지 않았던 일은 '현재'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300년 후 옥관자가 있던 시점에 그곳에는, 박하에게 보냈던 이각의 편지는 없었다. 3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이각이 박하를 그리워하면서 편지를 써서 숨겨놓기 전까지는. 옥관자든 편지든 현재에서는 이미 일어났던 일인데도 현재에서는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다.

그리고 태용의 방에서 세나가 발견한 태용의 스케치북에 있던 그림. 할머니가 넘겨보던 그 스케치 중에는 연꽃과 나비가 그려진 부용지의 모습도 있었다. 태용이 무의식을 그렸을 수도 있고, 직접 본 것을 스케치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뭔가 끌리는 게 있고, 인상적이어서 태용은 굳이 그 그림을 스케치로 습작했을 터. 그 스케치는 분명 이각으로서의 기억, 환생 전의 기억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이각이 시간을 넘어와서 박하와 사랑을 하기 이전의 기억이다.

이각이 태용으로 환생한 건 처음부터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이각 타임슬립 전의 태용'이라는 환생체 속에는 '박하를 사랑한 이각의 기억은 없다'-는 것.

즉, 용태용은 용태용이되 이각이 타임슬립하기 전의 태용과, 타임슬립 이후의 태용이 다르다. 과거에 있던 일인데, 현재에서는 이 과거의 일들이 시간차를 두고 발견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변수(선택)로 작용한 '이각의 타임슬립'이 바꾸어버린 결과다.


그러므로 20회의 태용은, '이각이 현재에서 몇개월 간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환생'한 존재다.

만약 태용이 태무에게 쳐맞고 바닷속으로 떨어졌던 시점에서 이각이 '과거'에서 날아오지 않았다면 태용은 그렇게 그냥 그렇게 전생의 막연한 기억만 갖고 살았을 것이다. 부용지, 연꽃, 나비 등에 대해 애틋한 이각으로서의 기억만을 갖고. 그리고 뉴욕에서 만남에서 시작된 태무와 세나의 끊임없는 방해공작 때문에 300년 전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각이 타임슬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각의 운명은 '동시대의 부용'이었지, '다른 시대의 박하'는 아니었다. 만약 이각이 '박하'와 이어질 '운명'이었다면, 굳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현재에 남아 있는 결말이 나왔을텐데 이각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갔다.

태무, 세나로 인해 운명이 역리하지 않도록 바로 잡고, 본래 자신의 운명이었던 부용인 박하와 현세에서 결혼함으로써, 이각이면서 태용인 존재와의 운명이 다시는 뒤틀어지지 않도록, 임무 완료. 그 후에야 이각은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각은 박하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악연의 고리를 끊는다는 과제 안에는 분명 박하와의 인연까지 들어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20회에서 왕세자 복장을 하고 끝난 결말의 연출은 생각할 수록 대단하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태용이, 예전과는 달리 '박하를 사랑했던 이각의 기억을 갖고 깨어났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끝나기 때문이다. 혼수상태 전의 태용은 그저 300년전의 이각이 환생한 존재일 뿐이었지만, 혼수상태 후의 태용은 '박하를 사랑했던 이각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깨어난 존재'다. 그러니까, 해피엔딩에 꽉 닫힌 결말이라는 것이 내 생각.


하지만....우리 각이..ㅠㅠㅠ

조선으로 돌아간 이각은 죽기 전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박하를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눈을 감았을 것이다.
어쩜 그런 운명이 다 있을 수 있을까. 조선으로 돌아간 이각은 박하만 그리워하다 살았을 터.

마지막으로 오무라이수를 먹던 그 날, 마지막 박하사탕을 먹던 그 날, 아니면 추억할 거리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 기억에 기억을 곱씹다가 그리워서 일찍 단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조금. 사실 도서관에서 박하가 실록을 찾아보고 슬퍼하던 장면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았으니 상상은 자유겠지만, 어느 쪽이든 슬픈 마감이었을 것은 매한가지.

아마도 이각은 죽는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설탕에 소금을 치면 그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듯, 옥탑방 왕세자는 이런 슬픔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메인 플롯에도 불구하고 매 회마다 유쾌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소동이 이야기를 더욱 깨알같이 풍성하게 만들어주었기에 더더욱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되었다. 이희명 작가의 관록도 관록이지만, 세심하고 아름다운 연출과 그냥 캐릭터 그 자체였던 배우들의 열연 또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알고보면 고만고만했던 세 지상파 박빙의 수목 드라마 전쟁에서 마지막에 웃은 건 옥탑방 왕세자였다더라. 마지막회 시청률이 1위로 끝났다던가.

댓글 '1'

그레이스

2013.10.22 16:18:42

저도 '옥탑방 왕세자' 다시 없을 엔딩 덕분에 명작!!!으로 기억됩니다.  중간중간 편집의 난과 악역인 세나*의 끝간데 없는 패악질과 뭐랄까 박하의 당차다가도 결국은 당하기는 모습들에 때때로 열 받고 화르륵하기도 했지만요.  급 건너띄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감독판 딥디를 구입할 만큼 멋진 엔딩 때문에 그간 롤러코스터 탔던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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