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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시청률로는 최초로 4%대에 진입했다는 기사. 이해한다. 한번 보고 훅 빠져들었으니까. 연기, 연출, 대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성재라니. 희대의 불륜남 리턴즈가 아닌가;

이제껏 매번 참기름 발라놓은듯 반들반들한 차돌같은 연기만 하던 김희애는 여기에서 어리숙하고, 순수하면서도 강단있는 역할을, 마치 자기 옷 입은 것마냥 연기한다. 시댁 때문에 주눅들어 살던 서래가 시원시원한 친구(이태란)를 사귀게 되었을 때, 김희애의 애교섞인 표정이 무방비하게 드러나던 순간들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정말 김희애가 이런 배우였구나 싶을 정도다. 화장품 모델로 나올 때는 찾아볼 수 없던 잔주름이 드라마의 화면에서는 보이던데, 솔직히 화장품 모델할 때보다 만 배는 더 예뻐보인다.


<아내의 자격> 김태오는 노희경의 <거짓말>에 나오던 서준희와 빼닮았다. 그만큼 이성재에게는 이런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린다;; 노희경 작가는 서준희에게 거짓말 하지 못하는 정직한 성품을 부여하여; 사랑과 불륜을 경계하는 인식 자체를 허물었더랬다. 불륜이라는 말이 사실 거짓말로부터 시작되는 원죄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거짓말 하지 않을 때 그 감정은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뭐,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은데.

성우(배종옥)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설레던 마음은 손을 다친 후유증으로 그토록 좋아하는 판화를 할 수 없었던 준희의 떨리는 손과 닮았었다. 게다가 아내를 친구로 생각하고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에 동의했던 이 남자는 성우(배종옥)에게 마음을 빼앗기고도 모자라 그 감정이 첫사랑이기까지 했었지. 물론 그 전엔 오드리 햅번이 있었지만.


<아내의 자격>의 김태오는 남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도 준희조차 느끼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것처럼 묘사된)다. 그게 뻔뻔하다기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의외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한다는 것이 정성주 작가의 필력, 연출이 하얀 거탑의 안판석 PD라는데, 흡인력까지 기가 막힌 호흡과 밸런스를 보여준다는 건 두번 말하면 입 아프다.

자신의 주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해도 죽은 것처럼 살수밖에 없던 여자가 자신을 '여자'로 자각하게 만드는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각성의 계기로 삼게 만드는 타이밍은 어쩔 수 없이 '불륜'의 범주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드라마의 원죄일 터. 하지만 모든 각성은 '부당함을 느껴야 할 때' 일어나는 것이 일반이고,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아'를 각성할 수 있는 계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두 사람도 귀찮아서 혼자가 좋아, 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이 드라마는 뭐 어떤 아침 막장드라마처럼, 성격 드럽고 찌질한 남편에게서 벗어날 결심만 하면 결혼도 안한 새끈한 본부장님이 두 팔 벌리고 기다려 주고 있을 거라는 환상을 채워주는 타입의 SF 공상물과 그 맥락 자체가 다르다.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도록 버려두질 않는다.

더이상 갈데 없는 서래가 밑도 끝도 없이 들이 받는 저 상황에 카타르시스를 느낄망정 그 후를 안심하게 두질 않기 때문에. 그건 아마 두 사람의 밀애가 정말 짧은 시간 내에 발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청자가 안심할 수 있을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만한 시간을 미뤄두지 않았다.

믿는 구석도 없이, 그저 마음만 빼앗긴 상태에서 불륜 사실이 너무나도 쉽게 빨리 발각되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발각된 죄로 남편과 시누이에 의해 핸드폰을 도청 당하고, 시누이에게 머리채 잡히며 미친년 취급 받고, 안 그래도 사람이 아닌 손자 키우는 '저것' 취급을 하던 시어머니에게 이제 드러내놓고 교양 있는 척 우아 떨면서 더러운 물건 취급을 받고, 아이까지 도둑질 당하게 되고.

불륜을 들키지 않으려는 서래의 안간힘이, 본능적으로 '아이를 빼앗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의 흐름은 판타지와 현실을 교묘하게 줄타며 시청자를 롤러코스터 태우면서 '우리 갈데까지 가보자'라는 공감의 교집합을 이끌어낸다. <아내의 자격>을 보다보면 시청자와 드라마 주인공 사이의 담이 어느 순간 무너져 있고,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상황이 뒤바뀐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서래일 수도 있고 동시에 불륜에 기대어 자신들의 위선을 정의로 포장하는 시댁 식구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치게 된다.


불륜이 인생을 구원해줄 동앗줄인 것마냥 분기마다 정해진 커리큘럼처럼 방송사가 계속 불륜에 관한 드라마를 양산해내는 건, 복수와 성공에 대한 여자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판타지가 시청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침드라마처럼 계속 반복되면 결국 그 껍데기만 남고 속내는 공허하게 비어버린 막장만 남는다.


아내의 자격은 그 궤도가 다르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처음 여자라고 생각됐어'라는 고백은 곧 '내가 이제 사람이란 걸 알았어'와 동의어처럼 들린다. 그걸 행간으로 표현한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낀, 혹은 잊고 살았던 사랑의 감정을 각성시킨 현실이 불륜으로 낙인 찍히는 순간, 서래는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위선에 맞서는 일로 복수하기 시작한다. 서래(김희애)에게 악다구니를 치는 현실적인 시댁 식구들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불륜을 그저 천벌을 받을 죄악으로 치부해버리며 자신들의 위선과 패악을 정당화시키는 교묘한 모습이 상식과 정의를 외치는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어쩌면 서래의 상황은 그저 터뜨리지 않으면 수면 아래에 묻혀 있을 얘기를 마치 내부고발하여 수면 밖으로 끌어내는 도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불륜을 소재로 하지만,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쯤 뒤돌아보게 한다는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쉽게 불륜이 사랑인양 포장한다는 얄팍한 감상에서는 최소한 벗어나 있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불륜은 나쁜 것.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인되어 법적인 효력까지 받아놓은 상식과 정의에 위배되는 보편적인 진리에 기대어 우는 것은 차라리 순조롭다. 그러나 불륜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은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당신은, 상대방의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가. 정의로운 줄 알았던 내가 불의하였고, 패륜인 줄 알았던 상대방이 정의였다는 '설득력'과 마주쳤을 때의 공포와 대면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옆에 있어주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댓글 '2'

핑키

2012.05.26 00:28:13

보고 싶었어요. 김희애씨 연기력이야 언제나 보게 되면 빠져 버리게 되는 아우라가 있죠.

tv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글만으로도 보고 싶게 만듭니다. 사람이 아니게 산 사람에게 사람임을 느끼게 되는것은 대단한 일이죠.

리체

2012.05.31 00:31:14

좋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들 연기야 말 하면 입 아프구요. 조연들 연기도 굉장히 좋았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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