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5교시 생물학 실험이 끝나자마자 뒷정리는 재준에게 떠넘기고 샛별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KFC 오리지널 치킨 5조각과 콘 샐러드 3개를 고이 포장해 학원으로 날랐다. 마침 수업을 마치고 자율 학습을 하기 전에 식사를 하려고 드나드는 학생들로 통로가 붐비는 통에 수위 아저씨한테 굳이 뭔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곧장 학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대로 샛별이네 반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원아!"


샛별이 콜라 캔을 들고 자판기 옆에 서 있다.


"단식한다며?"


딱히 콜라를 지적하며 물은 것은 아닌데, 샛별이 보란듯이 콜라 캔을 내보였다.


“그래서 다이어트 콜라야.”


내가 단식이랬지, 다이어트랬냐.


"치킨 사왔는데, 어디 먹을 데 없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 힘들겠지만 평소보다 볼이 많이 홀쭉해진 걸 보니, 그동안 단식 정도는 아니더라도 좌우간 심하게 덜 먹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지하에 식당 있어. 맛없어서 다들 나가서 먹으니까, 지금 별로 사람 없거든."


단식하고 있는 건 맞냐, 싶을 정도로 구구절절한 답변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자꾸만 뒤로 쳐지는 샛별이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속도를 조절했는데도 소용이 없다. 원래 걸음이 느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너, 굶어서 힘없냐? 평소보다 심하게 느리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랑 같이 있는 거, 학원 애들이 보면 귀찮게 군단 말이야."


그게 귀찮고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있잖아, 지원아. 토요일 날 시간 낼 수 있어? 잠깐이면 되는데. 지혜가 너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무 살이나 되어서도 여전히 먹을 거나 밝히고 연예인이랑 연애하는 애를 상대로 내가 지금 짝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기분이 엄청 더러워진다.




"너, 대학 안 갈 거야?"


식당에 자리를 잡자마자 다짜고짜 호통을 쳤다.


"갈 거야."


샛별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테이블 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근데, 왜 갑자기 여름 캠프 타령이야?"


좀 맹하긴 해도 넙죽 넙죽 말은 잘하는 애가 갑자기 침묵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냅킨을 한 장 뽑아 잘게 찢기 시작했다. 너저분하게 날리는 냅킨 조각을 그러모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으며 재차 물었다.


"여름 캠프를 왜 지금 당장 가야 되는데?"


"말하면 화낼 거잖아."


화는 이미 났거든?


"화 안 낼 테니까, 얘기 해 봐."


겉과 속이 다른 말로 샛별일 꼬드겨 보았다. 어차피 한심한 이유겠지,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캠프. 200명이 모여야 갈 수 있는데, 아직 150명도 안 모였단 말이야.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그래서?’ 묻는 얼굴로 샛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제 곧 데뷔하는데, 200명도 못 모아서 캠프 취소되면 오빠가 얼마나 힘이 빠지겠어."


하마터면 욕 나올 뻔 했다. 앨범이 나올 때마다 몇 장씩 사대고 선물이랍시고 떠넘기는 꼴을 매번 귀엽다며 봐줬더니 이 지경이다.


"죽고 싶냐? 잔 말 말고, 이거 먹고, 공부나 해."


"안 먹어."


정작 화 낼만한 일엔 허허실실 넘어가는 주제에 이따위 한심한 일로는 잘도 반항이다.


"너, 대학 간다며?"


"나 다이어트 한다, 그랬잖아."


도대체 단식이냐, 다이어트냐. 한 가지만 해.


"단식이라며?"


"일석이조야. 캠프도 가고, 살도 빼고."


일석이조? 설상가상이겠지.


"너, 잘 들어. 정 그렇게 네가 은지원을 챙기고 싶으면 대학 가서 해. 재수생 주제에 학원 수업도 내팽개치고 캠프 같은 델 쫓아가는 걸 은지원이 알면, 걔도 부담스러워. 여태껏 실컷 먹다가 수능이 얼마 안 남기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너, 설마, 캠프 가서 은지원한테 잘 보인답시고 그러고 있는 거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애다. 대답 듣는 게 두렵다.


"내가 살 뺀다고, 지원이 오빠가 잘 봐주겠어? 오빠는 연예인이랑 팬 하고는 절대로 안 사겨."


...............


또, 시작이다. 10년은 알고 지낸 것 같은 저 친한 척.


"알았으니까, 먹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좋게 타일렀는데도 샛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나, 재수하면서 5kg이나 쪘어."


어쩐지 요전 날 밤, 유난히 청바지가 타이트하더라니.


"옷이 죄다 작아져서 그런지, 갑갑하고 짜증 나. 그러니까, 살 뺄 거야."


보기 드물게 우울한 얼굴이다. 웬만한 일로는 이런 표정을 지을 애가 아니라 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학원에서 누가 놀렸어?"


스무 살이나 먹어가지고 유치하게 남의 뚱뚱한 몸을 재료 삼아 낄낄거리는 유치한 녀석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니! 그치만,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비관까지? 


도대체 무엇이, 이 세상에서 치킨을 제일 좋아하는 (두번째는 돈까스!) 황샛별로 하여금 눈앞에 들이 밀어진 치킨을 거부하게 했단 말인가? 그 대단한 존재를 나는 알아야겠다.


"너, 좋아하는 애 생겼어?"


물어보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까지나 조금. 있다고 해도 일방통행일 게 빤하니 절대로 불안하지 않다. 암. 그렇고말고.


"지원이 오빠 말고?"


은지원을 좋아하는 애로 분류해 놓고 있었냐? 제길, 한심해서 돌겠군.


아무리 샛별이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젓는다.


"없어."


"그럼 왜 그러는데? 왜 갑자기, 단식을 빙자한 다이어트야?"


"말 안할래."


어쭈, 이게 연속적인 반항을! 그러면 내가, 얌전히 물러서든? 아직도 나를 모른다.


"말 해. 안 그럼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테니까."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이 제법 먹혀드는 애라, 편하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예전 치킨과 돈까스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의 표정과 흡사하다. 통통한 이맛살이 가운데로 동그랗게 몰린 게 하얗게 까놓은 알밤 같이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콕 찔러보고 싶어진다.


"예뻤단 말이야, 그때 그 여자."


앞 뒤 죄다 생략한 채 다짜고짜 그 여자라니, 그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곤란한 듯 오므려진 입술을 쳐다보며 한참 생각을 더듬었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누구?”


“네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아, 수연 선배. 


"수연 선배가 그렇게 예쁘든?"


허탈하다. 아니,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샛별이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너도, 여자였구나.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으면서, 새삼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함께 한 긴 세월. 당연히 가슴의 두근거림 이라든가, 얼굴의 홍조 같은, 귀여운 반응은 어지간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인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 이유를 밝혀내서 해결을 해주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런 여자보단, 네가 훨씬 예뻐. 됐으니까, 먹어."


그래서 이런 빤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쿠션처럼 푹신하고 안락한 몸이라며 내심 귀여워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예쁘다고 생각할 만큼 정신 나간 놈은 아니다- 두두두둑, 닭살이 돋지만 한다.


"거짓말! 사귀고 있으면서. 그 여자, 좋아하잖아?"


울음이 섞인 목소리에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던 것이다. 이렇게 불쑥, 갑자기, 학원 지하 식당 같은데서, 해야 할 상황에 몰릴 줄 알았다면 진작 해 버릴걸.


"거짓말이야."


“뭐?”


"그때 그 선배랑 사귄다고 했던 게 뻥이라구."


물기가 빠진 평소의 맹한 눈이 오랫동안 나를 향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을 왜 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알면, 네가 황샛별이냐?


"자극 작전이다."


왜냐고 묻지는 않지만 반드시 설명을 해주어야만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여자한테 나 뺏기고 싶지 않으면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라고."


아무리 샛별이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얼굴이 붉어지는구나. 어쩐지 감개가 무량하다.


"그럼....... 나, 이거 먹어도 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거, 맞냐? 나 지금 고백한 거거든?


치킨 다리를 잡아 뜯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귀엽다고 느끼는 나도 절대로 정상은 아니지 싶다.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왠지 웃음이 난다.


느끼한 자식아. 8년만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의 역전승, 맞지?


"어, 지원아, 지금 그거 먹을라구? 너, 치킨 싫어하잖아."


샛별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가 들고 있는 치킨을 쳐다보고 있다. 


아직 네 조각이나 남아 있는데, 좀 치사한 말이긴 하지만, 내가 사준 건데, 그렇게 아깝냐?!


.......... 진짜, 싫다!












 "제목과 처음의 두 문장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패러디 입니다."





<가족이 되어줘> 외전으로 예전에 올렸던 건데 기억 하세요? ^^
실은 <사랑은 땀방울을 타고> 완결하고 치킨의 얘네를 주인공으로 장편으로 써볼까 생각 중이에요.


근데 저기요, <사랑은 땀방울을 타고> 2편은 담주에 올릴게요.
갑자기 수정을 해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이번 주엔 요걸로 대신해 주시구요,
담주에 뵈어용~ ^^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5)

댓글 '16'

nami

2008.07.21 00:46:06

재밌어요~ 더, 더 읽고 싶어용 ㅋㅋ

핑키

2008.07.21 01:19:49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앙님 화이팅!!!

꿈꾸는 나무

2008.07.21 09:27:55

전 리앙님이 샛별이커플을 완전 잊으신줄 알았어요~
넘 기쁘네요. 빨리 장편으로 만나고 싶어요~~

수정

2008.07.21 10:15:58

장편으로 써주세요 재미있어요

봉봉

2008.07.21 10:46:46

너무 재밌어요~~더 주세요^^

하늘지기

2008.07.21 10:59:02

얘네 둘 대박 귀여워요.
길게 길게 써주세요~

로민

2008.07.21 12:50:12

우와와.....샛별이랑 지원이가 장편!!+_+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 가족이 되어줘, 때부터 얘네들 이야기 장편으로 보고 싶었거든요. 완전 귀여운 커플이라서 좋아해요.^^

시즈

2008.07.21 13:16:58

넘 귀여운 커플이에요. 장편 기다릴게요.^^

연향비

2008.07.21 13:37:23

움......... 지원의 앞길이 좀 험해보이는 건 왤까요; ㅋㅋㅋ

레띠츄

2008.07.21 14:12:32

치킨의 얘네를 주인공으로 장편으로;;; => 감격 감격 ㅠㅠㅠㅠㅠㅠ
이런 날도 오는군요!!!
그럼 어서어서 글 쓰기를!!!! 채찍 휘리릭~~ -_-;;

ßong

2008.07.22 03:37:38

오!!!!!!!!!!!!!귀여워요ㅠㅠ 기다릴게요 +ㅅ+

위니

2008.07.23 13:57:32

아...정말 윗분들 말씀대로 귀여운 커플이네요...^^
저도 저런때가 잇었을까요.?...ㅎㅎ;;

ssuny

2008.07.26 22:23:15

어벙한 여주가 치밀한 남주속을 뒤집어 놓는 스토리는
증말 좋아해요 저의 로망입니당

그냥

2008.10.04 18:16:01

너무 재밌네요. 지윤이랑 재준이 생각도 나고... 지윤이랑 재준이도 잘 살고 있겠죠. 가족이 되어줘 2부 쓸 생각은 없으신지요^^

미스썬샤인

2009.08.13 17:26:52

사랑은 땀방울을 타고 읽고 오게됬는데, 아아아아악 글 너무 좋아요.ㅎㅎ

juju

2009.10.24 21:58:22

이제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읽으니까 '가족이 되어줘' 생각나네요. 다식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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