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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Vs 치킨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치킨이다. 그것이 어느 메이커 이든, 어떤 부위이든, 치킨이라면, 기름으로 튀긴 닭이라면, 나는 식욕이 떨어진다.


초등학교, 3학년, 옆집에 사는 조그만 여자 아이를 상대로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떨리는 경험을 했다. 그때의 나는 감정에 솔직하여 그 애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반 아이들의 계속되는 놀림에도 불구하고 그 애와 함께 등교하고 하교할 때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 책가방을 몰래 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준다고 하는 3월 14일, 화이트 데이 전날 밤. 나는 책상 서랍 속에 모아둔 용돈을 들고 집에서 30분은 족히 걸리는 백화점까지 혼자 걸어가서 커다랗고 예쁜 사탕 박스를 하나 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포장 코너에 들러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포장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감기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하루 종일 몸에 열이 올랐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감기는 아니었고, 멍청하게 떨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걸 지금은 잘 알고 있지만.




"있잖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게 뭐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에 손을 넣고, 곱게 포장된 사탕 박스를 만지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가 물었다. 그 애는 하얀 미간을 모으며 깊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엄마나 아빠를 말한다 해도 그건 용서해 주자. 아직 어린애니까.


동갑인 주제에 나는 제법 의젓한 생각을 하며 재촉도 하지 않고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온 대답이라는 게 "응 - 치킨!" 이었다면, 믿어지십니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있는 대로 충격을 받았지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그럼 두 번째는?"


하고 묻고 말았던 한심스런 나의 미련이여.


두 번째 물음에는 그나마 고민도 하지 않고 단숨에


"돈까스"


처음으로 먹성 좋은 그 아이에게 환멸이라는 걸 가졌다.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게 경우에 따라선 무척 정 떨어지는 일이라는 것도 한꺼번에 알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사탕 박스를 가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성큼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지원아, 너는? 너도 말해 줘야지."


빨리 걷는 내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뛰느라 헉헉 숨을 내쉬며 그 애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탕이 제일 싫어!"


가방에 처박아두었던 사탕 박스를 꺼내어 그 애의 발밑으로 힘껏 던졌다. 아스팔트에 부딪히며 플라스틱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나의 마음도 부서졌다.


"히잇. 왜 던지고 그래. 아까운 걸."


........


내 마음 보다도 사탕 따위를 신경 쓰며 울먹이는 아이를 보고, 화이트 데이 날, 처절하게 외친 말.


"평생 음식이나 밝히면서 살아라, 이 돼지야!"




+ + +




수업이 파하고 나는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 수연 선배는 버스 정류장을 목표로 차량이 이어지는 대로 옆을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으로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느릿느릿 태평스런 걸음걸이가 동그랗고 납작한 뒷모습과 저렇듯 절묘하게 매치를 이루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한다.


"야. 황샛별!!"


꽤 큰 소리로 불렀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다.


또냐. 


조금 빠르게 걸은 것뿐인데도 10초도 안되어 따라 잡히는 어이없이 느린 속도에 감탄하며, 손바닥으로 샛별의 뒤통수를 툭 쳤다.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던 샛별이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한 손바닥의 임자를 확인하자 곧장 눈의 긴장을 풀었다.


“아파.”


뒤통수를 매만지는 손길이 어딘가 맹하다.


"안 그래도 맹한 게, 걸어 다니면서 음악 좀 듣지 마."


"말로만 해. 때리지는 말고."


샛별이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꽉 끼어 타이트한 청바지 주머니에 억지로 꾸겨 넣었다.  


저러니 수시로 고장이지.


"좀 제대로 펴서 가방에 넣어. 그러면 선이 끊겨서 안 들려."


샛별의 주머니에서 힘겹게 이어폰을 빼내어 등에 맨 배낭 주머니에 넣어 주고 있는데, 등 뒤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수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야?"


"아, 옆 집 사는 애."


샛별이 긴 세팅 머리에 민소매 원피스의 화려한 수연 누나를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난 얼굴로 인사를 고했다.


“나 먼저 갈게.”


짧은 다리를 종종종 바쁘게 놀리며 걸어가는 샛별의 뒷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수연 선배가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무슨 사이야?"


"방금 말했잖아. 옆 집 사는 애라고."


"흠. 미모의 선배를 내팽개치고 달려가 이것저것 참견을 하는 사이라....... 좋아하는 애라고 의심을 해야 마땅하긴 한데........"


 말끝을 흐리더니 열심히 걷고 있는 퉁퉁한 뒷모습에 대고는 아니겠지, 라는 듯 고개를 흔든다.


자칭 미모의 선배라니 코웃음이 절로 나긴 하지만 전체적인 의견에는 그럭저럭 동의하는 바이다.


185, 누가 봐도 잘 빠진 미남에, C대 의예과 1학년, 창창한 앞날까지 보장받은 나, 민지원이, 155, 몸무게 극비인 재수생, 황샛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지만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신신애가 그렇게 강조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지겹도록 실감하고 있다. 이 몸을 앞에 두고 치킨을 1순위로 선택하는 (게다가 2순위 역시 입에 담기도 민망한 돈까스) 구제불능의 먹보에게 아직까지 감정을 버리지 못 하고 있다니, 그 엄청난 끈기에는 스스로도 존경심이, 솔직히 한심해 죽겠다. 이제는 굳이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그냥 전생의 업보려니, 체념하는 수밖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샛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야, 너 왜 갑자기 도망은 가고 그래?"


 "아니, 옆에, 여자 친구 아니야? 방해 안 할라구."


멍청이. 그러니까, 수연 선배를 내 여자 친구라고 해석한 거다. 십년을 넘게 옆집에 붙어살면서도 내 취향 하나 제대로 파악 못하는 곰탱이. 그렇게 튀지 못해 안달인 여자를 누가 좋아하냐? 본인 스스로 엄청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순진한 녀석들 몇 명 정도는 꽤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아, 웬일이냐.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고."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어서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러자 샛별은


"나도 그런 정도 눈치는 있어!"


 발끈하는가 싶더니


"근데, 그 여자, 아니, 언니라 그래야 되나? 아무튼 네 여자 친구 되게 날씬하더라. 팔뚝도 엄청 가늘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호칭 문제로 혼자 고민하다가


"나도 다이어트나 할까."


전혀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그래봤자, 작심 3초일 게 분명하지만.


"치킨 안 먹을 수 있어?"


나는 뒤끝 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그러면 그렇지. 평생을 그렇게 먹어 젖혔는데도, 그게 아직까지 그렇게나 맛있냐!


그 우직한 충성심엔 진작 무릎을 꿇었다.




 + + +




2교시 수업이라 느지막이 집을 나서는데, 계모임에라도 나가시는 듯 곱게 차려입은 샛별의 어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셨다.


"어디 가세요?"


"응, 동창 모임. 대학생이라 좋구나. 우리 샛별인 밥도 안 먹고 새벽부터 나갔는데."


"걔가 밥을 안 먹어요?"


설마 그때 그 다이어트 선언 진심이었냐?!


"단식 투쟁. 공부나 할 일이지. 아무튼 점심도 안 싸간 지 3일째야."


"하루 종일 생으로 굶는다구요, 걔가?"


혹시 밖에서 몰래 사먹고 있는 거 아냐? 절대로 의심된다.


"도대체 걔가 단식 투쟁 같은 걸 왜 해요?"


"아휴, 내가 창피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은지원 있잖아. 샛별이가 좋아하는 가수. 걔가 여름 캠프를 2박 3일간 하는데, 갑자기 거기 참가한다고 난리잖아.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엄마, 거기 가면 지원이 오빠가 같은 방에서 얘기도 해주고, 밥도 퍼준단 말이야, 제발, 제발, 이러면서 사정을 하는데 내가 정말 미치겠어. 거기 가려면 학원도 빠져야 되는데 걔 어떻게 하니, 진짜. 안 그래도 너한테 부탁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네가 잘 좀 타일러 봐 줄래? 옛날부터 네 말은 잘 들었잖아."


너무 기가 막히니, 오히려 힘이 쏙 빠진다.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한창 피치를 올려야 할 때에 가수 나부랭이 여름 캠프가 다 웬 말이냐. 아니, 상황이고 뭐고, 그 나이에 그런 데를 가겠다고 설치는 게 제 정신이야? TV로 보는 걸로 만족할 수 없다니, 도대체 연예인한테 뭘 바라고 있는 거야, 진짜. 그 새끼가 퍼 주는 밥 아니라도 밥은 엄청 잘 먹고 있잖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보다도 걱정이 우선이다.


얘, 또 대학 떨어지는 거 아니야?


늘 집에 박혀서 책상 앞에만 붙어 앉아 있는데 성적은 책상에 앉아서 들여다봤던 건 대체 뭐였던 거냐,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질 만한 수준이니 돌겠다.


너, 수업시간에 졸지? 물어 보면 절대로 그건 아니란다. 그럼, 딴 생각 하냐? 그랬더니, 딴 생각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니까, 딴 생각이 저절로 든단다. 수업 시간에는 그렇게 생각이 많은 애가 어째서 하는 일마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고 3,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점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학을 틈틈이 챙겨주다가 수능 전날 한 번호로 일관성 있게 찍으라는 충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그랬는데 이 멍청이가 제 딴에는 인생이 걸린 시험인데 그렇게 성의 없이 찍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꼼꼼하게 문제를 들여다보며 가장 그럴싸한 답을 찍었다는 거다. 수험표 뒤에 착실하게 적어놓은 답을 맞춰보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어쩜 그렇게 교묘하게 정답만을 피해 갈 수 있었는지, 일부러 그런 거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뻔했다. 누구한테 들은 얘기라면 안 믿든지,폭소를 터뜨렸을 어이없는 점수, 0점이라는 게 샛별의 일이 되고 보니 그저 막막했다.


나, 민지원이 황샛별에게 바라는 유일한 한 가지.


서울에서 통학 가능한 대학 좀 붙어주라!


왜냐고? 지방으로 가면 떨어져 살아야 되잖아! 쪽팔린 말 좀 하게 하지 마.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5)

댓글 '8'

핑키

2008.07.21 01:15:28

저두 먹는 걸로는 치킨을 최고로 치는 사람입니다^^;;
민지원같은 넘이면 치킨 끊을 자신 있는데ㅎㅎㅎ

하늘지기

2008.07.21 10:50:51

비오는 어제..
옆에 아무도 없는 자취생이라 치킨 한 마리 뚝딱 해치운..
속이 허해서 그런건데..
샛별이도 그런게 아닐까 하는 뻘 생각을..^^;

로민

2008.07.21 12:46:48

제목보고 반가워서 바로 클릭했답니다.^^ 샛별이랑 지원이 커플 좋아요.ㅋㅋ 그리고 저도 고기류 중에서는 가장 애정하는 것이 치킨이라는. 샛별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달까;;

연향비

2008.07.21 13:23:52

에...... 저는 치킨을 별로 안좋아라 하는뎅; 인기 많은 품목이었군요;;
치킨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는 비참함이란.. ㅋㅋㅋ
귀엽네요~

레띠츄

2008.07.21 14:07:37

아~악!!! 지원이랑 샛별이닷!!!!!!!!!!!!!!! *_*
넘 반가워요, 어흐흑.. ㅠㅠ

둘리

2008.07.22 09:07:54

지원이랑 샛별이당!!!! 저 그 두 커플이 보고 싶었어요~~~ 이 두커플 너무 좋아요~ 가족이 되어줘에서 잠시 비췄지만 내맘에는 오래남았던 그 커플이야기.. 정말 스크롤이 내려가는 게 아쉬워서 야금야금 읽게 되네요^^

둘리

2008.07.22 09:24:16

다시 읽어보니 "수연 선배는 버스 정류장을 목표로" 이 문장에서 수연 선배와 버스 정류장을 목표로 해야지 맞을 것 같은데요^^

Lian

2008.07.22 21:55:50

둘리/ 지원이는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로, 수연 선배는 버스 정류장을 목표로 간 거예요~ ^^ 관심 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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