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준호의 체계적인 파괴프로그램은 세계 어떤 폭력남편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특히 강한 여자에게 끌리는 그들은, 공주가 부럽지 않을 애정표시로 먼저 접근한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주 작은 문제로 성격폭발이 있다. 첫 번부터 얻어맞기도 하지만, 보통은 폭언으로 시작한다. 얼떨떨해 있는 여자가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하는 동안, 남자는 네가 그 작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폭발하지 않았을 거라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여자는 은연중에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폭언이 폭력으로 변할 수도 있다. 네가 그 남자에게 그렇게 추파를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술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을 것이고,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너를 때리지도 않았을 거라 한다. 여자가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면, 나에게는 너 밖에 없다는, 네가 떠나면 나는 죽어버릴 거라는 협박을 불사한다. 곧 따르는 꽃다발, 선물, 그리고 사랑고백. 악순환의 시작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연은 준호에게 길들여져 갔는지 모른다. 그의 앞에서 지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며, 지훈이 함께 있어도 그에게 시선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잘못 선택하거나 웃음소리가 조금 커도 그의 발작을 일으킬 수 있기에, 지연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져갔다. 웃는 일도 없고, 말수도 거의 없어지고, 밖에 나가는 일도 없는 상태가 되어가는 과정은 곧 준호의 여자가 되는 과정이었다.

“지연아.”

커피 두 잔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간의 침묵이 깨졌다. 지연이 고개를 들어, 회색으로  죽어버린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준호와 눈을 마주했다.

“응.”
“너를... 보내주고 싶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이라도 내비치면 당장 불벼락을 맞을 수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냥 떠보는 것인지도 모르는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지연아.”
“응.”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야. 단지.... 아, 그만두자.”
“무슨 일 있어?”
“지훈이쪽 사람이, 날 쫓는 것 같다는 생각 들어.”

준호의 지훈 타령이 또 시작한다 싶어, 한숨이 나오려 했다. 이번엔 또 무슨 혐의를 씌우려나. 지훈이 그를 가만 둘 리 없다느니, 이야기를 해 보려 했으나 협박을 했다느니 늘어놓을 터였다.

“그래.”
“그리고 너도 나를 떠나고 싶어 하니까. 어쩌면 내가 중간에서 방해물만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거기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끔찍한 걸 찾았어.”
“뭘?”
“내 자살노트.”
“자살노트? 무슨 말이야?”

준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필체로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것을 읽기 시작하는 지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훈이 너를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지연이가 나를 떠나간 이상, 너를 죽이는 것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나의 죽음은 지연이에게보다는, 지훈이 네게 돌린다. 네가 나를 죽인 거다. 난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으니까. 지연이만큼은 내 운명을 피해가길 바란다. 네가 마음껏 갖고 놀고 내칠 때에, 지연이는 나보다 조금 더 강하기를.]

“이게...이게 뭐야?”
“몰라. 내 기숙사 방문 아래로 밀어 넣었나봐. 글씨도 내 글씨와 비슷해. 몇 군데 틀린 점을 제외하면 말야.”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만년필로 쓴 것 같아. 난 만년필 없거든. 이 종이도 없고. 그리고 영어로 이렇게 쓸 일도 없잖아. 한국 사람들 영어 필체는 비슷하니까. 그래도 자세히 보면, 여기 저기 틀려.”

지훈이 그런 짓을 할 일이 없다 하면서도,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용히 편지를 그 쪽으로 밀어버리며 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호 오빠....”
“그냥 너를 보내는 쪽이 나을 것 같아.”
“오빠....”
“우리, 오늘로 헤어진 거다. 네 마음대로 해.”

나무토막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준호가 뇌까렸다.
.
.

[매일 매일 꿈을 꾼다. 최대한 지독하게 너를 죽이는 꿈을 꾸고, 지연이를 갈기갈기 찢는 꿈을 꾼다. 어떤 방법을 취하더라도 성에 차지 않거든.

그렇지만 지연이를 죽여 버리면 너와 나를 이어주는 링크를 없애버리는 거니까, 잠깐 속이 시원하고 말 것 같아. 너를 죽이면 이 세상에는 박준호밖에 남지 않잖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뺏고 싶었던 것이지, 네가 더 이상 원할 수 없는 지연이를 원했던 건 아니니까. 네가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박지훈이 될 수 없으니, 그것도 마음에 드는 방법이 아니야. 어떻게 하면 네가 가진 것을 다 뺏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둘을 섞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은 불공평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너와 나, 별 차이 없는데 말야. 같은 나이에다 상당히 비슷하게 생긴 젊은 남자인데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얼마나 다른지 아니. 정신병에 평생 시달렸던 우리 아버지와 시장 잡상인인 어머니, 그나마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셨다.

오늘도 꿈을 꾼다. 너를 만나게 된 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를 끝없이 고민하고, 가끔씩은 네가 좋아한다는 지연이 생각도 해. 스님같은 네녀석이 유일하게 간절하게 쳐다보던 지연이를 너에게서 뺏어가면서, 처음으로 너를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짜릿한 유혹에 빠졌거든.

네가 나에게 돈을 넘겼더라면 그냥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라. 지연 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다, 점점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네 잘못인 것으로 돌려버리자.]

[가끔 생각해. 내가 정말 사랑한 건 네가 아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지연이가 그렇게 미웠던 게 아닐까. 너를 나에게서 뺏어간 것이 지연이라고 은연중에 결론을 내렸는지도. 너라는 사람이 대표하는 것을 원하는지 - 권력이라던지, 재산이라던지 - 아니면 너 자신을 원했던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너를 저주하고 싶은 것은 질투라고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었어. 내가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이는데, 실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잖아.

네가 죽는 날까지, 사람들이 박지훈이라는 이름과 박준호라는 이름이 헷갈리기를 바래. 지훈이 준호를 죽였는지, 준호가 지훈을 죽였는지, 혹시 준호가 지훈을 죽이고 바꿔치기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소문이 가득 차기를. 네 이름이 신문에 날 때마다, 네 이름의 하이퍼 링크를 클릭하면 내 이름이 뜨기를. 토막살인이라는 단어가 박지훈이라는 이름과 영원히 엮이기를. 그건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던 간에 변하지 않겠지. 만약 경찰이 사실을 밝혀내더라도, 가난하고 힘없는 유학생이 자살하도록 몰고 갔을 거란 추측이 난무하기를. 그것을 믿지 않더라도, 내 자신을 박살을 내서라도 너를 저주하고 싶었던 내 마음이 기억되기를.

네가 지연이와 뒹굴더라도 내 기억이 너희 둘 사이에 끼어 있기를, 지연이 너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나기를, 네가 지연을 볼 때마다 지연에게 정액을 끼얹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를. 네 가족이 지연이를 창녀취급하기를. 그리고 지연이가 돈을 받고 나를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기를. 절대로 지연이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래.]

조각이 난 종이를 하나씩 맞추어가면서, 소름돋는 준호의 저주에 데일과 슬레이터는 할 말을 잃었다.
지연을 뺏으면서 느꼈을 짜릿함은 점점 사라져갔을테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욕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준호. 돈을 달라는 요구를 지훈이 거절한 것이 실수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살할 정도로 심한 상태였을까. 그저 지훈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이유? 아니면 자신을 죽여버림으로서 지훈과 하나가 되겠다는, 스토커의 불분명한 논리?

[네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 있을 거야. 너를 흘깃 쳐다보며 네가 박준호가 아닌가 숙덕거리는 사람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을 것이고, 너를 의심할 지연이 옆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박준호과 박지훈의 관계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것이고, 혹시라도 너와 지연이가 이어진다면 있는 힘껏 너희를 저주할 테니까. 너와 내가 현생에서 만나는 것을 그저 우연이라 넘겨버릴 수 없다고 믿거든. 환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네 곁으로 돌아올 것이고, 영혼에 관한 책들 중 하나만 사실이라도 네 안으로 쳐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믿어. 너를 향한 나의 증오, 그런 강한 감정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없어질 리 없다 생각해. 내 자신 그대로 남지 않더라도 말이지.

내가 죽고 나서 내 시체를 네 별장에 가지고 갈 사람들을 구했다. 그들에게 나를 박지훈이라 소개하는 즐거움을 한껏 만끽하고, 네가 나를 죽였다는 증거를 여기 저기 숨겨놓으면서, 지난 이십 몇 년간의 어두움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어.

축제가 될 거다. 내 조각 조각난 몸을 아무 생각 없이 네가 밟을 거고, 지연은 죽을 때까지 죄책감이 아니면 너를 향한 의심에 시달릴 테고.

내 인생 최고의 축제가 될 거다. 그리고 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을 테니까!]
.
.

“지연아.”

지연은 작은 벤치에서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오빠?”
“응.”

지훈이 그녀의 옆자리에 내려앉자 지연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기분은 좀 괜찮니?”
“응.”

그가 손을 내밀면 거북이처럼 움츠러드는 지연은 변하지 않았다. 사건이 대강 마무리 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싶어도 지연만은 그대로였다.

“지연아.”

손을 뻗으려 했던 지훈은, 눈에 띌 정도로 몸을 사리는 지연의 반응에 한숨만 내쉬었다.
사람을 조금씩 망가뜨리는 방법이 몇 백가지일 테고, 여자를 완전히 파괴하는 방법도 셀 수 없이 많겠지만, 한때는 참 싱그럽게 빛나던 지연이 거북이로 바뀌는 과정은 잔인하고도 잔인했다. 그녀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지훈을 지연은 다시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오빠 전화... 안 받아서 미안해.”
“괜찮아.”

보지 못했다. 준호가 지연을 외부 세계에서부터 완벽하게 차단하고 그녀를 부수어 가는 동안, 지훈은 그저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은 그녀를 원망했을 뿐이었다. 진실한 토막살인은 지연이가 부수어져 가는 과정이었는데도, 그는 혼자서의 투정을 반복하느라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었다. 준호에게 심하게도 당했을 지연이 그를 거절하는 데에 절망할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니까.

“...계속 생각해. 준호 오빠.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 내가 잘못한 건지.”
“네가...”
“팔 다리를 다 잘라놓고 풀어준 거야. 다시는 지훈오빠 얼굴 못 보게, 죽을 때까지 준호 오빠 잊지 못하게 잘 훈련시켜놓고 풀어준 거라고. 논리니, 이성이니 하는 건...”
“지연아.”
“파블로프 실험에 나오는 개처럼, 오빠 이름만 들어도 깜짝 깜짝 놀라게 훈련시켜뒀거든. 그래서 오빠 의심했어. 준호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오빠 의심했어. 나 그래서 이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어떤 생각을 해도, 그게 준호오빠가 훈련시킨 대로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인지 알 수가 없어.”

지연은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연필로 찔린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지훈은 다리를 꼭 끌어안은 지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깍지를 낀 손을 덮자, 지연은 그를 뿌리치며 얼굴을 감싸들었다.

“...지금도... 지금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 해. 그리고 지훈 오빠 이렇게 보고 있으면, 끔찍한 저주 받을 것 같아. 내일이면 비디오테이프가 인터넷에 뜰 것 같고.”

준호는 지연에게 Rohypnol 이라는 약을 먹인 후, 혼수상태인 아이를 강간하며 비디오테이프에 담았다. ‘나의 친구 지훈에게’ 라고 라벨이 붙여진 테이프를, 그는 바로 폐기처분해버렸다.

“그 얘기 알아?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를 거절하니까, 팔 다리를 다 잘라서 자기 침대 밑 상자에 두었다는 남자 얘기. 나 꼭 그런 것 같아. 어딜 가도...”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붉게 핏발이 선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햇빛에 반짝였고, 지훈은 볼에서 물기를 닦아내려했다.

“...너를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다는 말, 진심이었어.”
“오빠....”
“많이 아파하는 동안, 옆에서 힘 되지 못한 거 용서해 줄 수 있니.”
“난...”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밝게 빛나는 눈물 자국을 지워가며 지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자, 망설이던 지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첫걸음을 내딛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파도를 발끝으로 느껴보는 아이처럼 조금씩 그에게 잠겨 들어왔다.

너를 위해서라면, 지연이 너를 위해서라면 죽일 수도 있겠다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엉망으로 흩어져버린 너를 어떻게든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져버렸을 뿐.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 수줍은 신입생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네 처음 모습 나 아직 또렷이 기억하거든.









끝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주일동안 들고 있었답니다 -_- 결국 하나도 안 바꾸고 그냥 올리지만 ㅋㅋㅋ

.... (비참;;)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0-13 21:07)

댓글 '1'

비니

2005.12.29 14:12:15

이제서야 글을 읽었네요. 소름돋는데요? 준호의 저 정신상태를 이해할수가 없네요. 자신을 죽여가며 지훈을 파멸시키려 했다니. 음메나 무서운거.
지연이가 과연 지훈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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