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지연씨,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지요?”

살인이 나기 삼 개월 전, 지훈에게 사랑한다 고백 한 후 그 다음날 바로 마음이 바뀌었다던 기록은, 안그래도 꼬여있는 슬레이터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이랬다 저랬다, 지 마음대로 사람 가지고 노는 여자 스타일이 아닌가. 아무 때나 고를 수 있다는 건방진 태도, 딱 질색이다.

“준호오빠가... 같이 있어달라 부탁했습니다.”
“지훈의 마음을 확인했는데도, 준호를 떠날 수 없었다?”
“...네.”
“혹시, 준호가 이백만달러를 나눠 갖자 하던가요?”
“네?”

지연이 고개를 들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연기라면 참 괜찮은 연기이다.

“현찰로 이백만달러, 그러면 지연씨를 넘겨주겠다고 했던 모양인데, 그거 나눠 갖기로 했었냐고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훈 오빠가 그런 제안을 했나요?”

지연에게서는 불확실한 분위기가 자주 묻어났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가는지도 모른다. 지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지훈이 무엇을 했는지 물어볼 때마다 불확신의 구름이 잔뜩 끼지 않는가. 수상하다.

“준호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고, 두 달 후에 다시 지훈씨를 만났죠?”
“네.”
“마음이 변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훈오빠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차분한 지훈에 비해, 지연의 시선은 자주 흔들린다. 눈에 눈물이 고이다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고, 단단하게 묶인 머리카락과 구겨진 면 셔츠가 대조된다. 무슨 마음을 굳게 먹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를 꽉 다물며 야무진 눈매로 대답을 곧잘 한다. 그렇지만 지훈의 이름만 나오면 예쁜 눈이 흐려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지훈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준호오빠는 자살할 타입이 아니었어요. 준호오빠, 죽은 게 맞다면, 살해당한 것이 확실해요.”
“자살할 타입이 아니다?”
“약간의 양극질환 (bipolar) 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울증에 시달릴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편이었거든요. 준호오빠가 지훈오빠를 죽인다는 것이 더 알맞을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지연은 심리학 전공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양극질환이라는 말도 쉽게 뱉어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받아주었을까?

“지훈씨가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군요.”
“...모르겠습니다.”
“우선, 준호씨가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뭐, 벌써 알고 계시겠지만 지연씨와 지훈씨가 의심대상 1호구요. 머리뼈, 골반뼈 부분까지 확인했는데, 설마 그렇게 잘리고 나서도 살아남은 건 아니겠지요.”
“네.”
“어떻게...”
“사실은.”

지연이 데일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네?”
“준호오빠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믿었거든요. 그 오빠 성격 대로였다면, 차라리 그가 지훈 오빠를 죽였을 거예요. 말다툼을 하다가 목을 조를 성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을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아요.”
.
.

“저 사람 맞습니다.”

네 명의 남자들이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훈은 제 별장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으니 혹시 다른 사람이 그의 별장 안으로 드나들었나 싶어 뒤져본 보람이 있었다. 그의 별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꽤 잘사는 이들의 별장이 몇 개나 있었고, 그곳의 경비 카메라에 차 한대가 잡혔다. 라이센스 번호와 차종류로 며칠간을 추적한 끝에, 차의 트렁크에서 박준호의 피를 찾아내었다. 처음에는 전혀 모른다고 우기던 남자는, 증거물을 들이밀자 빠르게 이야기를 토해냈다.

박지훈이라는 남자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정해진 시각에 시체의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 와서 들고 가라는 것. 그리고 그의 별장에 우드치퍼가 있으니 거기에 넣어달라는 것. 원한다면, 나중에 그들이 경찰에 걸릴 것을 대비하여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다 했다.

만 달러를 준다는 데에, 그와 그의 세 친구는 얼른 달려들었다.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사람을 살인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드치퍼에 넣기만 한다는데.

“저 사람 확실합니까?”
“네. 확실합니다.”

창 너머에 있는 박지훈을 보고 네 사람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석연치가 않다. 박지훈이 그들을 찾아가, 시체를 처리해 달라는 거야 뭐 그렇다 치고, 왜 그의 별장으로 끌어들였을까?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닌데, 차라리 근처의 정육점으로 가던가, 강가에 던지는 것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꼭 그의 별장에서 박살을 내어 뿌려야만 속이 편할 것이었나?

“돈은 받았습니까?”
“20% 는 선불로 받고, 사건 후에 약속했던 장소로 가서 돈 가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시체는, 어떤 시체였습니까?”
“20대 아시아계 남자로 보였습니다. 얼굴이 퍼렇게 부어있어서,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바디백에 넣었습니다.”
“생긴 건, 이 사람과 비슷하던가요?”

데일이 박준호의 사진을 내밀었고,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진을 노려보았고, 하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저기...”
“네.”
“이 사람, 저기 저 사람 아닌가요?”

라틴계인 그들이라, 아시아계는 다 비슷비슷하게 보일 거라는 짐작을 했었다. 헨더슨이라는 남자가 준호의 사진을 들고 창 너머에 있는 박지훈을 번갈아 보았고, 다른 세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친구죠. 죽은 사람은 그 사진에 있는 남자고요.”

네 명이 사진과 지훈을 번갈아 보며 숙덕거렸다. 한국 사람들도 비슷하게 봤다니, 비한국인에게는 정말 똑같이 보일 것이다.

“둘이 같은 사람 같은데요.”
“아닌데요. 흠. 직접 보는 게 나을라나?”

직접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그리 꺼려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들도 비슷한 두 사람의 정체에 호기심이 생겼을까.

취조실의 문을 열고, 네 사람을 들여보냈다. 박지훈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알아보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네 명의 남자는 맞다 아니다를 속닥거리며 다투면서 지훈을 슬금슬금 쳐다보았다.

“지훈씨, 이 사람들을 아십니까?”
“처음 보는 분들인데요.”

헨더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응? 저기...”
“네?”

지훈이 헨더슨을 바라보았고, 헨더슨은 혀를 끌끌 차며 그를 살펴보았다.

“저기, 형사님, 저 사람 말좀 시켜보세요.”

데일이 피식 웃으면서, 지훈에게 자기소개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해괴한 부탁에 미간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지훈은 간단히 이름과 다니는 학교를 읊어댔다.

“저기, 형사님.”
“네.”
“목소리가... 목소리가 틀려요. 영어 억양도 틀리고. 생긴 건 똑같은 것 같은데, 키가 조금 더 크나?”
“목소리가 틀리다고?”

사람들의 증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들처럼 확실하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는 거라면 더욱 더 그렇다.

“네.”
“흠.”
“그리고... 그냥 틀려 보여요.”
.
.

“그래? 결국 그 새끼 따라가겠단 말이지? 좋아! 네 마음대로 하라고! 죽어버릴 테니까, 그건 네가 책임질 각오 하라고! 죽으면 그냥 죽을 줄 알아? 지훈이 자식 꼭 같이 죽여 버릴 거야.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더러운 년! 개 같은 년!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였지? 지훈이 자식 친구라고 접근한 거였지? 그 더러운 입으로 네가 나한테 거짓말 한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 널 가만 둘 줄 알아? 다 죽여 버릴 거니까! 흥! 비디오 찍어둔 거, 온 캠퍼스에 뿌릴 테니까 기다리라고!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샅샅히 밝혀서 다 돌려버릴 테니까! 지훈이 아버지한테도 미리 경고를 해 둘 테니까 각오해!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간다고 설친 건 아니겠지! 너 같은 거, 돈 보고 덤비는 그런 천한 것들 제대로 관리하라고 할 거야! 계획적으로 접근 했다는 거, 확실히 증명해 줄 거라고!”

미쳐서 날뛰는 준호를 달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울면서 매달리고, 제발 진정하라고 구걸해도 준호는 온갖 협박과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면 죽어버리겠다, 아니, 그녀와 지훈을 둘 다 죽인 후 죽어버리겠다, 그녀를 최대한 망가뜨려주겠다 등등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협박에 밤낮을 시달렸다. 걸레조각이 된 그녀의 교과서, 옷가지와 박살난 컴퓨터, 죽이겠다고 설치는 그에게 목을 졸린 자국과 자살하겠다는 그를 말리려다 찔린 상처 등, 그녀의 자취방은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겉으로는 호탕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불안한 정신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연이었다. 그 다음날이면 눈물로 애원할 것이라는 것, 이제는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미안해, 나에겐 너 밖에 없는 거 알잖아. 그래서 나 미쳐버렸나 봐. 그러니까 제발 나와 함께 있어줘. 나 요즘 너무 힘드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네가 조금이라도 안다면, 날 떠난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못할 거야.

지연아. 너 없으면 난 하루도 살아남지 못해. 알지? 지훈이 자식한텐 그저 갖고 놀 여자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내 인생 전부라는 거 알잖아. 그 자식, 가지려면 뭐든지 가질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서 뺏어가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너 그거 알 정도로 똑똑하잖아.

지쳐서 이젠 견딜힘도 없다 싶을 때, 준호가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날 구할 수 있는 건 너 뿐이야. 내 생명을 좌우하는 건 너야. 네가 조금이라도 돌아서면 나는 죽어. 날 죽게 내버려 두지 마.

소리 없는 눈물은 며칠을 흘러내렸다. 그리고 영혼까지 말라죽은 듯 피폐한 정신으로, 지훈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미안해요. 나 말 실수 했어요.

지훈을 위한 고려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준호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피곤해서, 너무나도 지치고 견딜힘이 없어 뱉어버린 말이었다.

준호의 보상은 극적이었다. 없는 돈을 털어 그녀를 비싼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그 전날들의 거친 말만큼이나 화려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미안했어. 나 제 정신이 아니었나봐. 나 너를 나에게 주신 신께 감사하는 거 알지? 난 있지, 네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 혹시 그런 기분 알아? 이갈리게 추운 겨울날에 햇빛이 쨍 나는 그런 기분 있지. 네가 나와 있어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랬거든. 나 너 행복하게 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너 행복하게 해줄게.

지훈의 키스에 피어난 아찔한 행복은, 그렇게 밟히고 끝나버렸다.
.
.

“슬레이터!”

저 자식,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지를 내뱉으며 슬레이터가 상체를 일으켰다. 컴퓨터 앞에서 잠에 빠져들었던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시.

“개새끼.... 자는 거 보면 불쌍하지도 않냐?”
“에이, 빅뉴스라니까.”
“무슨 빅뉴스?”

데일이 헤벌죽한 얼굴로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뭔데?”
“준호 일기장 종이 생각나지?”
“응.”
“쓰레기장 뒤졌어. 슈레더 (문서절단기) 쓰레기까지 들춰보다가, 일기장 종이랑 같은 색깔 종이가 있길래 다 모아봤지. 준호 필기랑 같아.”
“절단 된 건데 어떻게 봐?”
“아, 제 마음대로 집어넣었나봐. 일기장 종이가 좀 작잖아? 그래서 세로로 잘리지 않고, 가로로 잘린 게 하나 있었어. 그건 금방 맞췄는데, 다른 건 뭐, 그대랑 나랑 밤새면서 맞춰봐야지. 퍼즐 좋아하지?”
“맞춘 거 내놔봐.”

맞춰진 노트는 비닐 안에 들어있었고, 데일은 그것을 복사한 것을 내밀었다.

“...한국말이잖아!”
“대강 번역해왔어.”

그가 내미는 A4 흰 종이를 받아 슬쩍 훑어보던 슬레이터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했다.

“이거...”
“응.”

[사랑하는 친구 지훈에게

열명의 인디언 인형인가 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거든. 열명의 사람들이 한 섬에 갇혀있고, 한 명 한 명씩 죽어간다. 나중에는 열 명 모두가 죽어버리는데, 도대체 누가 죽였을까 하는 질문이 남지. 살인자는,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서를 유리병에 넣었던가 그래. 나도 뭐 그런 이유라고 해 두자.  

처음 너를 만났을 때가 중학생이었을 거야. 나를 보고 혹시 네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하나 있었거든. 그 때부터 생각했어. 혹시 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까. 혹시 나는 네 이복형제가 아닐까. 아니면, 우리 둘은 어릴 때에 바뀌지 않았을까. 사실은 네가 사생아이고 내가 네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닐까, 뭐 시나리오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어. 그 중 가능성이 있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은 너를 죽여 버리고 네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까.

...
]

“...빨리 맞춰보자.”
“그래.”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0-13 21:07)

댓글 '3'

페르스카인

2004.10.03 04:34:51

준호는 진짜로 죽었습니다 ㅡㅡ

헤이로스

2004.10.03 10:18:51

ㅋㅋㅋ네 알겠습니다....이제는 추리가...준호가 자기가 죽으면서 지훈이를 물귀신 작전으로 죽인 계획을 세워서 그 계획대로 지금 끌려가는 거 아닌가요??

리체

2004.10.03 17:01:17

으음..;;
어서 다음 편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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