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슬레이터! 그 박지훈의 별장에서 수집된 증거물 리스트 받아왔어!”

강력계의 동료인 데일이 헉헉거리며 그에게 파일을 내밀었고, 슬레이터는 얼른 폴더를 펼쳐보았다. 박준호가 사라진지 삼주일째, 어느 단서라도 찾고 싶어 하는 그들은 박준호의 친한 친구였던 박지훈이 휴가동안 가 있었던 별장까지 뒤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목재를 잘게 부수는 우드치퍼 기계를 발견했고, 그 기계에 핏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그 별장 주위를 이 잡듯이 뒤진 보람이 있었다.

“손가락 하나, 뼈 80 조각, 피 스무 방울 정도, 금니 두개, 그리고 약 600개의 머리카락?”
“아, 그리고 천 몇 조각도 있었어. 피가 묻은 천이야. 면으로 보이는데, 속옷이겠지?”
“DNA 매칭은, 벌써 했나?”
“아, 지금 하고 있을걸.”
“박지훈, 불러들일 수 있나?”
“휴우. 그 자식 배경이 빵빵한 건 알지? 난리를 칠 텐데.”
“우선 불러오고 보자고. 전에 봤던 걸로는 그런대로 협조 할 것 같던데.”
“그런 놈들,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슬레이터는 리스트를 뒤적이면서 박지훈의 인상이 어땠는가를 기억하려 애썼다. 친구였다던 두 남자는 이름까지 비슷했다. 박지훈. 한국 굴지의 기업 막내아들,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박준호. 어렵게 생활하는 유학생. 이지연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음.

박지훈의 별장에서 시체의 조각이 발견이 되었다면 사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박준호의 일기에서 대충 짐작한 바로는 박준호와 박지훈, 그리고 이지연간에 위태로운 삼각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박준호는 이지연과 연인사이였지만, 박준호의 일기에 따르면 박지훈은 이지연에게 집착하며 그에게 포기하라는 말을 몇 번 건네었다. 이지연은 박준호와 연인 사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지훈의 물량 공세에 넘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쉬운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 슬레이터는 눈썹을 찡그렸다. 돈 많은 재벌 막내아들이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자를 없애버리고, 시체는 조각조각 내어서 뿌려버린다. 쉽고도 간단한, 그리고 말이 되는 설명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본 박지훈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피해자 박준호가 그랬듯이, 그도 선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오히려 의심을 한다면 이지연을 의심할 만 했다. 지친 얼굴이었지만 어쩌면 지은 죄 때문에 그렇게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묻는 말에 별 대답이 없었던 이지연. 남자친구가 없어졌는데도 걱정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그럼 박지훈부터 불러오지. 이지연도 연락이 되나?”
“응. 곧 두 명 다 대기시킬게.”
.
.
“지훈오빠.”

지훈의 눈이 투명한 벽으로만 보였다. 살인담당 형사에게 붙들려 온 지훈의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눈물이 울컥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지연은 고개를 돌렸다.

“지연아.”

눈물이 이미 흘러내리는 것은 잊어버리고 지연은 다시 그의 쉰 목소리를 따라갔다.

“어떻게 된 거야?”

조그맣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훈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오빠, 오빠가...”
“아니야. 그건 아니야.”

널 가지고 싶어서, 그래서 준호를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어, 그렇게 말하던 지훈이었다. 모범생의 표본인 그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저 웃어넘겼던 지연은, 그녀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는 지훈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오빠가 그랬니? 정말 준호오빠를 죽였니?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맞다면, 오빠가 별장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우리 이제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은, 그건 준호 오빠를 죽였기 때문에 한 말이었니?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말을 해봐!”
“지연아...”
“왜 준호오빠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설명을 해보란 말이야!”

거의 발작에 가깝게 소리를 질러대는 지연을 슬레이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형사가 잡아끌었다. 그들 옆에는 한국인 통역담당이 있었고,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을 것도 분명했지만 지연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외국어 고등학교의 수재들 사이에서도 자신감 보다는 수줍음이, 그리고 재벌가의 도도함보다는 어설픔이 묻어났던 지훈. 일년 선배였던 그를 짝사랑했고, 그가 초콜릿을 받아 주지 않아 절망했으며, 그가 진학한 미국의 대학에 따라 진학하면서 가슴이 설레였었다. 그녀에게 자신있게 다가온 준호와 사귀게 되었지만, 지훈과 친구라는 말에 잠시 허둥지둥 하지 않았던가.

사랑해. 너를 사랑해서, 그래서 가끔씩은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해. 나 대신 널 안고 있는 준호를 보면서, 나 그 자식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사랑해. 날 떠나지마.

아, 떠나지 말라는 말은 준호였던가. 널 사랑해. 지연아. 나에겐 너 밖에 없어. 지훈 자식은 제가 가지고 싶은 거 뭐든지 가질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나에게서 제일 소중한 것을 뺏어가려고 하는 거야? 지연아.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 자식, 친구의 여자니까 건드리지 못해서, 그래서 그러는 거야. 지연아, 날 봐. 너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 날 좀 봐줘.

그런 그에게 뭐라고 했던가. 준호 오빠 미안해요. 날 용서하지 마세요.

나 사실은 그를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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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고. 우선 사람이 죽었어. 박준호. 그리고 그의 시체는 박지훈의 별장에서 발견되었어. 시체 조각이 말이지.”

데일이 커피 컵을 천천히 흔들며 인상을 찡그렸다. 슬레이터의 말이 틀린 것은 없다.

“그 때 박지훈은 제 별장에 있었고, 증거도 충분해. 모티브는 뭐 백퍼센트고. 이지연이 공모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그렇지?”
“아는데...”
“지금까지 한 DNA 검사는 다 박준호로 돌아왔어, 그지? 그러니까 어쨌던 간에 박준호가 가루가 난 건 박지훈이네란 말이야.”
“아씨, 두 명 이름은 왜 그렇게 비슷해서 난리야.”

데일은 지훈에게 달려들던 지연을 떠올렸다. 참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이다. 가는 몸매와 우아한 이목구비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바락 바락 지르는 것조차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으니까.

“흠. 그 여자가 죽였을까?”

슬레이터는 예쁜 여자에게 곧잘 적개심을 갖는다. LA, 베벌리 쪽에서 일을 하다 보니, 예쁜 여자 증인은 무조건 거짓말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편했다나? 예쁘고, 늘씬하고, 남자 관계가 복잡한 경우는 80% 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만큼 그는 편견이 심했다.

“그 여자가 왜 죽여?”
“싸이코 일지도 모르잖아. 박준호를 죽이고 그걸 박지훈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아니다. 박준호를 죽이긴 했는데, 혹시 들통 날까 싶어서 박지훈의 별장에서 죽인 건지도 모르지. 박지훈은 결백할 수도 있다는 거지!”
“자네, 그 여자 차별은 아무래도 심리 치료 좀 받아야겠소.”
“하 거 참, 여자는 믿을 게 못된다니까 그러네.”  

복잡하다. 완전범죄에 가까운 토막 살인과 삼각관계. 너무 간단하게 보이는 것이 찜찜하다. 그리고 박지훈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살인범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 왜 그럴까?

“하여튼 누가 죽이기는 죽였는데 말야.”
“그렇지.”
“박지훈이 안 죽였다면, 누군가 박지훈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일 텐데.”
“그렇기엔 너무 완전범죄에 가깝지 않나? 거의 안 들킬 뻔 했잖아?”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린단 말야.”
“박지훈은 그 날 별장에서 나가지 않았다고 하지?”
“응. 우드치퍼 기계는 별장에서 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 나가지 않았다는데....”
“아씨, 죽였으면 좀 곱게 두면 어디가 덧나나. 왜 잘게 잘라놓고 난리야?”

지연과 지훈의 대면은 녹취한 후 번역을 해 두었다. 지훈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죽인 거야? 그렇게 울면서 외치는 지연은 꽤 리얼하게 들렸다. 물론 외국어다 보니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훈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오기 전에 별 말 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럴만한 여유가 보이진 않았고, 체포 될 거라는 가능성보다 지연이 그를 몰아세우는 것에 더 당황한 것 같던 지훈이었다.

준호, 지훈, 지연. 이름이 왜 이리 다 비슷비슷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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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을 사랑한다던 지연의 마음이 변한 것 같다. 지훈놈에게 넘어간 것일까. 그녀에게 더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워진다.’

준호의 책장에서 찾아낸 작은 노트북은 준호의 깨알같은 일기로 가득했다. 지연에게 일기 노트를 밀었지만, 지연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연씨. 준호씨와 사귀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미국에 온지 몇 달 정도 지나고서입니다.”
“그게 언제죠?”
“약 일년 반 전입니다.”

준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해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지연은, 준호의 살인 소식을 듣고 나서는 볼이 핼쑥해져있었다.

“준호씨와 헤어진 것은?”
“그가 사라지기 전날입니다.”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으셨죠?”
“평소에도... 기분파였기 때문에,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행방불명이라도 말이죠.”
“...멀리 떠난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슬레이터가 그의 버릇대로 지연을 실험실 쥐 보듯 노려보았고, 데일은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준호씨와 헤어진 것은 지훈씨 때문이죠?”
“...네.”
“그에 대해서 준호씨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화를 많이 냈습니다.”
“지훈씨와의 관계는....”

지연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슬레이터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여자의 눈물공세에 알레르기 증세를 심하게 보이는 슬레이터이다.

“...고등학교 선배였습니다.”
“준호씨도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세 분 다 미국으로 오셨군요.”
“네. 그렇지만 준호오빠는 미국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목소리는 침착한 지연에 따르면, 준호와 지훈이 먼저 미국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고 한다. 성적은 참 좋았지만 돈이 없었던 준호에게 지훈의 아버지 회사가 학자금을 대어주기로 했단다. 그리고 그 다음해, 지연은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왜 그 대학으로 가셨죠?”
“...지훈오빠를 학창시절부터 좋아했습니다.”

그 고백과 함께 새로운 눈물이 흘러나온다. 슬레이터가 뭔가를 궁시렁 거리면서도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었다.

“그런데 준호씨와 사귀었군요.”
“...네.”
“왜 그랬죠?”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말에 데일과 슬레이터의 고개가 한꺼번에 갸우뚱해졌다. 뭘 몰라? 사람을 사귀는데 왜 몰라?

“혹시 지훈씨와 준호씨가 친구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몰랐습니다.”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라는 시선을 두 남자가 교환했다.

“여기 일기에...”

준호의 일기장을 뒤지자 지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흠. 삼개월 전이군요. 아무래도 그녀가 수상하다. 어저께 바쁘다며 집을 나갔지만, 그녀와 지훈이 같이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지연의 오른손이 그녀의 볼을 덮으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네.”
“이 날, 지훈씨와 같이 있었나요?”
“...네.”
“무슨 일이 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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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유난히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준호 때문에, 지연도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런데다 비까지 겹쳐, 지연은 캠퍼스 건물의 계단에 주저앉은 채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훈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선택한 준호는 이름까지 지훈과 비슷했다. 박준호. 박지훈. 그렇지만 성격은 천지차이로 틀렸다. 불같은 성격은 극도의 자만심이나 극도의 우울증으로 곧잘 치달았고, 그녀에게는 지극한 정성이나 신랄한 비판으로 해당되어졌다. 기분이 좋을 때에 그녀는 그의 구세주였고, 그의 삶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가 우울할 때에 그녀는 기회만 된다면 조금 더 돈이 많거나 조금 더 형편이 나은 남자를 찾아 나설 창녀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지연은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는 데에 절망했다.

지훈 오빠가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내가 그를 사랑한 것만큼의 아주 조금만이라도 나를 좋아해 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준호를 미련 없이 버린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이, 준호를 사랑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그의 말 대로 지훈이 낫기 때문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나는 속물일까. 나는 지훈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는 끌린 것일까.

아니라고 부인을 하다가도, ‘나보다 잘난 놈’에 꼭 지훈을 끼워 넣는 준호의 말버릇에 움찔 하게 된다.

그래, 지훈 오빠가 낫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가 부자여서가 아니야. 그건 내가 어릴 적부터 그를 오래 사랑했기 때문이야. 뭐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키지만, 결국 지훈을 더 원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들과 곧잘 어울리는 지훈의 곁에서, 가슴이 세게 뛰는 것까지는 통제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다가 둘만 있게 되는 짧은 시간에는 숨쉬기도 힘들어 지는 것을, 그리고 그와 닮긴 했지만 결국 지훈이 될 수 없는 준호에게 실망하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 비 오는 날, 결국 비를 맞으며 터덜 터덜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지훈과 마주쳤다. 그녀를 찾아오는 길이었는지, 그녀의 기숙사에서 꽤 가까운 곳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지훈...오빠?’

지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기 웬일이야?’

유전학적으로 프로그램이 된 것인지, 박지훈만 보면 가속을 감행하는 심장이 얄밉다.

‘...아, 그냥. 너 저녁 먹었나 해서.’

차분하고 유한 지훈. 그런 그의 수줍음과 여유를 한없이 좋아했었다.

‘아니.’
‘저녁...먹으러 갈까?’

망설이다 묻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준호를 빼놓고 갔다가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저조한 것 같던데.

‘...잠깐 시간 내 줄 수 없니?’
‘...무슨 일인데?’

그답지 않게 그와 같이 갈 것을 고집하는 지훈에게 물었지만, 그는 바닥을 노려볼 뿐이었다.

‘잠깐이면 되는데.’
‘...그럼 그냥 여기서 얘기 해.’

그가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럴 때에는 뭔가를 포기해야 하나 결정중이라는 표시이다.

‘...좀 갑작스러운 것 같아서.’
‘뭐가?’

그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목 근처에서 더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네가...어릴 적부터 준호를 좋아했던 거 아니까.’

뜬금없는 말에 지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제야 지훈이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준호 오빠는 여기 와서 만났어.’

그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준호 따라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니?’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바보. 널 따라 온 것인데, 그것도 아직 모르니. 내가 그렇게 편지 했었잖아. 오빠 잘 계세요? 저도 내년에 그리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오빠 보고싶어요까지 했는데.

‘...네가 여기 왔을 때, 준호에게서 그렇게 들었어. 걔 따라 온 거라고. 그래서...’
‘나 지훈오빠 따라 왔어. 그리 말 했었잖아.’

차가운 비 때문인지, 서러운 투정이 삐죽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다.

‘...나 네가 오기 기다렸었거든. 준호하고 더 친한 것 같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그의 말투에 지연의 심장이 속도를 더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지연 그녀가 꿈속에서도 그리던 말일까.

‘...오빠 나 싫다고 했었잖아요.’

준호가 그리 전했었다. 아, 지훈이 그 자식? 여자친구 있어. 걔한테서 안 그래도 네 얘기 들었다. 귀찮게 따라붙는 후배가 미국까지 날아오려는 모양이라고 농담하던데, 그게 너지? 그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던가.

‘나, 준호에게 너 기다린다는 말은 했었어. 네가 오기 전에. 그런데...’

준호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 일년간, 준호가 그녀에게 해주는 말을 다 믿지 않았던가. 지훈이 그녀를 속물로 생각한다는 것, 지훈이 그녀를 지겨워했다던 것, 그리고 지훈이 은근히 준호 자신을 많이 깔본다는 것, 그 모든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다.

‘지훈 오빠.’
‘나 나쁜 놈 되는 건 아는데, 그래도 너에게 말은 해 보고 싶었어.’

빗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의 손가락이 쓸어 넘겼다. 우산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 지연은 당황해서 우산 손잡이를 잡아채려 했고, 그런 그녀의 턱을 감싸 안으며 지훈이 입술을 포개어왔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에게 붙잡힌 지연은, 그가 잠시 입술을 떼며 숨을 내쉴 때에야 떨리는 다리를 어느 정도 펼 수가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키스 때문인지, 어느새 덜덜 떨리기 시작한 몸을 진정하려 애쓰며, 불안함이 가득한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미안, 나...’

불안함에 휩싸인 눈을 감으며 사과를 중얼거리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이번에는 지연이 입술을 갖다대었다. 차가운 빗물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뜨거운 입술은, 빗물만큼이나 촉촉하게 그녀를 적셔 들어왔다. 주춤하던 그가 곧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지연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꿈꿔왔던 지훈의 입술을 마음껏 빨아들였다.

[나 오빠 많이 좋아했어요. 속상하기도 했지만, 오빠도 나 좋아해주기, 계속 바래왔어요.]

지훈에게 수많은 편지를 쓰면서도 차마 쓰지 못했던 그 한 줄, 이번에는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박지훈씨, 그러니까 그 날 내내 별장에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박지훈이라는 남자는 차분했다. 대학생이면 좀 가벼운 감이 있을 만도 한데, 두 손을 모아 무릎위에 두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대답하는 모습은 범죄자라기보다는 면접 온 사람 같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요.”
“네.”
“박준호씨와는 별로 좋지 않은 관계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지연씨 때문에 벌어졌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친한 친구가 되었지요?”

지훈은 그 특유의 성실한 톤으로 준호와의 관계를 설명해갔다. 악의를 품고 있었다 생각할까 일부러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데일의 판단은 그가 최대한 형평성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박지훈, 박준호.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어쩌다가 매점에서 같은 테이블에서 앉게 된 날, 준호가 지훈에게 같은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인사를 해 왔고, 둘은 곧 대학 정보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대학 진학금이 모자라다는 사정을 들은 지훈은 대학 합격시 아버지의 회사에서 장학금을 대어줄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리고 준호는 졸업 후에 지훈의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이 불만이었던 준호는, 생김새가 지훈과 꽤 비슷한데다 스타일까지 그리 틀리지 않아 박지훈으로 곧잘 오해를 받을 정도였다.

그 이듬해에 그들의 대학으로 유학 온 이지연. 곧 박준호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지훈이 지연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준호였지만, 어릴 적부터 지연이 그를 좋아했다며, 지연의 친필 편지를 보여준 후에 지훈은 포기했다.

그렇지만 지연이 건너 온 후, 지훈은 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지훈이 지연에 대한 감정을 깨끗이 정리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호는 그를 자주 초청했고, 지훈은 지연에게 점점 더 마음이 기울어져 가는 자신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준호의 여자친구인 것을 알면서도, 일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지훈에게서 꾸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연씨가 했던 말이 사실인가요? 너를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다는 말.”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하신 말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I'd kill for you, 그렇게 말했다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준호씨를 죽이고 싶다는 말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죽이겠다는 생각이셨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투심에서 나온 말이고요. 그렇지만 그냥 한 말이라고 우기지는 않겠습니다.”
“준호씨가 죽은 것, 유감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지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취조실의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고, 데일은 그가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생각했다. 그딴 질문을 했다가는 박살을 낼 변호사 열명을 데리고 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처음엔 친한 친구였지만, 약 삼 개월 전 지연이의 마음을 확인한 후부터는 상대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죽은 것은 유감이지만, 큰 슬픔에 잠겨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 준호씨가 살아있다면,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할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지연이의 선택에 달려있었으니까요.”

다들 지훈을 유한 성격이라 표현했다. 침착하고, 속이 깊은 남자라고, 그런 끔찍한 살인에 연루된 것 자체가 모욕적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의 표현과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데일에게, 지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지연이를 사랑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있었고, 제가 진학한 대학에 온다는 편지를 받고 들떠 있었습니다. 준호에게 몇 번 지연이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지만, 기다린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연이가 떠난다는 연락을 한 다음, 정말 좋아한다는 준호의 놀림에 그렇다고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러자 준호가 정색을 하면서 말해주더군요. 아, 그런 줄 몰랐어. 난 그냥 후배로만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그러면서 지연이가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지연이가 도착했고, 곧 둘이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포기했다 생각했지만, 지연이와 자주 부딪히다 보니 모른 척 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준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워낙 감정을 숨기는 데엔 익숙하지 않은 저니까요. 저를 위한 배려인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지연이와 함께 있을 때마다 저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셋이 같이 잘 다녔지요.

일년 정도 지나고, 지연이가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호감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준호와 자주 싸운다는 주위의 말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고요.

...그 말,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도 준호가 제 감정 가지고 장난하는 상태라면, 지연이를 못살게 굴면서, 죄책감으로 그의 곁에 묶어 두는 거라면, 이 상황에서도 같은 말 했을 겁니다. 정말 죽이고 싶었으니까요.

지연이, 괜찮나요?
.
.

‘지연아

많이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를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해. 혼란스러울 너에게 결백을 주장할 생각은 없어. 네 마음고생이 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끼니 다 챙겨먹고, 마음 부담 가지지 않도록 노력해.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될 거라고 믿고 있거든.’

거기까지 쓰던 지훈이 한참 종이를 노려보다 그냥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반으로 접어 슬레이터에게 내민다. 무슨 말을 쓰려고 했던 것인지 궁금한 데일은, 물어보지 않아야지 다짐을 하다가 결국 말을 뱉어버렸다.

“무슨 말 더 하려고 했어요?”
“아...”

멋쩍게 웃는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 살인 혐의자 1위인데도, 부잣집 막내아들이니 망나니 천방지축을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길게 말 하면 부담 될까봐요.”
“그런데, 왜 변호사는 부르지 않았어요?”
“...멍청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냥 있는 대로 말 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말이 중간에 길게 늘인다. 데일은 그를 독촉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런 생각 들었어요. 그 동안 준호 미워했던 것, 어느 정도는 벌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거.”
“왜 벌을 받아요?”
“준호 했던 말 중에, 넌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왜 지연이까지 뺏어가려고 하냐는 것이, 마음에 남았거든요.”
“그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훈이 벽을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가 준호의 시체를 우드치퍼 안에 집어넣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가 보기엔 불공평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배경이요?”
“네. 지연이 일은.... 그냥 제 생각이지만, 준호가 지연이를 사귀었던 건, 제가 좋아하는 아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준호가 변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비겁하게 느껴지지만요.”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
.

[미안해. 그 날, 나 실수했던 것 같아.]
“지연아...”
[나 그만 가 봐야 해.]

전화가 툭 끊어졌고, 지훈은 아찔함에 눈을 감아버렸다. 사랑한다는 그녀의 고백에 모든 자제력을 상실했던 것이 전날 저녁, 아침부터 그녀를 찾았으나 지연은 보이지 않았다. 증오에 가득찬 준호의 눈초리와 마주쳤지만 자리를 피해버렸고, 어떻게든 지연을 찾으려 했었다.

손은 가볍게 경련하는데다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박지훈. 나랑 얘기 좀 해.”

그가 지연을 찾으려는 것만큼이나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니는 준호를 어떻게든 떨어뜨리려 했었다. 주차장까지 재빠르게 찾아와 대기하고 있는 준호를 피하려 하다, 그의 펀치에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았다.

“이 개새끼. 네가 그러고도 친구니?”
“준호...”
“지연이한테 또 집적거렸다면서? 깨끗하게 포기한다고 했던 건, 그냥 시간 벌자는 수작이었나?”

그렇게 말했었다. 아니, 나 깨끗하게 포기해. 사실 그렇게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네 여자친구잖아. 그렇게 말 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것 같은 지연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무조건 피해 다니려는 지연을 찾아가서 고백을 해 버렸고, 그를 줄곧 사랑해 왔다는 지연의 답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러면 우리 같이 할 수 있는 것인지, 네가 준호를 떠나 나에게로 와 주겠다는 것인지.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 나에게는 지연이 밖에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넌 손만 내밀면 아무나 가질 수 있으면서, 왜 꼭 네 친구라는 놈, 나같이 별 볼일 없는 놈한테서 뺏어가야 하느냐고!”

그 자신에게도 수 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다. 다른 여자는 안 될까. 지연이보다 예쁜 아이들도 많은데. 동아리 장소에 들어서면서 얌전하게 인사를 하던 지연이, 그 아이가 그리 특별한 것만은 아닌데, 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없을까.

“대답 해 보라고! 왜 마음 약한 애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 말 해 보란 말이야!”
“...지연이를 불러서 얘기하자.”

그가 하는 말은 믿지 못하겠기에,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지연이를 보아야 했기에 그에게 그렇게 도전했고, 준호는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좋아. 셋이 모여서 해결 보자고.”


그의 전화는 끝까지 받지 않던 지연이, 채 십분도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었다. 창백한 모습으로 다가와 준호 옆에 나란히 서자, 준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연아, 네 선택이야.”

파랗게 질린 지연이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이라 하는 준호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서 팔을 내렸다.

“난...”

돌덩어리같이 굳어져갔다.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그리고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그의 육신은 움직이는 법을 잊었다.

“지훈오빠, 미안해요. 어제 내가 말실수 했어.”

갑자기 말라 들어간 듯한 입술이 따가웠다.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너머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지연이의 목소리가 스며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 이간질 할 생각은 아니었어. 준호오빠한테도 미안해. 지훈오빠가 오해하게 된 건, 내 잘못도 있을 테니까.”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때부터 내 안에 들어온 네 모습은 점점 커지기만 한 것을. 준호와 사귄다 했을 때의 우울함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커 버렸거든. 너를 언제나 훔쳐보고 있었어. 준호의 여자친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참 많이 원해왔어.  

“나 다시는 지훈오빠랑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할게. 준호 오빠 너무 화내지 말아요.”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준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다. 돌발적이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한 지훈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가.

“지연아, 어제...”

억지로 눈을 뜨고, 말라붙은 목구멍에서 그녀의 이름을 짜내었다. 그렇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어젠 나를 사랑한다 했었잖아. 나를 따라 온 것이라고, 나를 기다렸다고 했잖아.  

“나, 시험 있거든요. 먼저 가 볼게요.”
.
.

준호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그를 줄곧 피하는 지연과 절망감 사이에서 엉망이 되어버린 지훈을 그가 찾아왔다. 지훈만큼이나 핼쑥해 보이는 준호가 말없이 들어와 의자를 잡아끌어 앉았고, 지훈은 일어나 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인사도 안 하냐?”

지연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준호와 그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선택해 주지 않았다.

별로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그것만 되씹어댔다. 우정이고 뭐고 다 망치면서 말을 해 보았지만, 말 하지 않을 걸 그랬다. 최소한 이렇게 망쳐버리진 않았을 텐데.

“지연이, 보내줄게.”

그의 고개가 조금 들렸다. 처연한 표정의 준호가, 벽을 마주보고 앉아 중얼거렸다.

“네가 가진 것,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보내줄게.”
“...무슨 말이야.”
“이백만불, 현찰로 넘겨. 그 정도 능력 되잖아? 그러면 사라져주지.”

어지러운 상태에서 준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을 주면, 그러면 지연을 넘기겠다는 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거 아니었어? 심술로 뺏어가려는 게 아니었다면, 증명해 봐. 그 돈을 주고서라도 원하는 건지, 증명해 보라고.”
“...지연이는 물건이 아니야.”

백만불이든, 이백만불이든, 지연이에게 가격을 붙일 수는 없다. 만약 가격을 붙일 수만 있다면 그의 열배를 준호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소중한 것을 가져온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겠지만.

“흥. 결국 그냥 심술이었나?”
“...지연이 선택이잖아. 더 이상 말 하고 싶지 않아. 나가줘.”
“우리, 곧 결혼할 생각이다. 나 마음 바꾸기 전에 연락해. 그래도 그 간의 정이 있어서 와 본 거니까.”

눈을 감았는데도 현실에서의 분리는 쉽지 않다. 블랙메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고도 심리전의 껍데기를 씌울 수 있는 준호에게 거친 증오를 느낀다.

정말 그가 그녀를 보내준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지연이에게 가격을 붙였다는, 그래서 그에게서 사들였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괴롭힐 테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있고,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하나는 철저하게 배워오지 않았던가. 가격을 붙이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지연이에게 가격을 설정하는 것은, 그녀를 창녀로 취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지연이를 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고,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준호에게 넘길 수는 없다.

말라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연이 그에게 와 주기를 기다린다. 결혼한다는 말이 거짓이기만을 바란다. 한 번 그의 입술에 키스해 왔으니,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다고 믿어본다.

“...관심 없어.”

개새끼, 라고 준호가 중얼거렸다.

“나가줘.”

속삭인 말인데 들었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걸음을 옮기다, 반쯤 돌아섰다.

“지연이, 처녀였던 거 알아? 일주일 전에 처음으로 같이 잤거든. 놀랐어. 집적거렸으면 네가 한 번 정도는 벗겨볼 줄 알았는데.”

죽이고 싶다. 목을 졸라서,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다. 그런 반응을 바라고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주먹이 꼭 쥐인다.

“특히 정액 삼키는 걸 좋아해. 나중에 시간 되면 비디오테이프 보내줄게.”

죽인다. 죽여서 없애버린다. 사람을 사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잘게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거다. 다시는 지연의 곁에 가까이 올 수 없도록, 없애버린다.  

심성이 착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지훈은, 몇 달 만에 그렇게 변해 있었다.












웬 도배를 ㅡㅡ

여행 돌아와서 열심히 단편 써내려가고 있어요 -_- 글 쓰고 싶었었나봐요 ㅋㅋ

댓글 '7'

리체

2004.10.01 12:50:18

아악..;;이거 연재여요?ㅠㅠ 다, 다음 장면을 어서어서..ㅠㅠ
궁금해 죽음..ㅠㅠ

헤이로스

2004.10.01 12:51:59

범인이....지훈이는 아닌 듯하고.준호나 지연이 둘 중 하나 같아요.....정말정말 궁금하네요

Jewel

2004.10.01 21:43:26

준호가 아닐까요 ㅡㅡ;;

마리

2004.10.02 01:18:05

"태양이 가득히.."(알랭드롱이 주연한 제목맞나..?)라는 영화가 생각나요..
혹시 죽은사람이 지훈이 아닐까요.. 지연이랑 짜고서준호가..

리체

2004.10.02 01:29:28

저기저기..@@;; 지금 준호가 죽어서 지훈이랑 지연이가 심문받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요? 준호가 실종이 아니라 피살된 거 아녀요?+_+ 그래서 두 사람 중에 범인이 가려져야 하는 게 아니어요? 그나저나..토막;을 칠 정도의 원한이라면 간단한 사건은 아니겠네욤. 혹시 세 사람 이름이 비슷한 것도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나요? 잔머리가 마구마구 돌아간다는.;

페르스카인

2004.10.02 01:55:04

준호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마리

2004.10.02 11:49:47

준호가 확실히 죽었다면..왠지 지연이가 의심이가요.
지연이랑 준호가 짜구서 돈받아서 도망갈라구 했는데 .
계획이 틀어져서 지연이가 준호를..
아~정말 추리소설 쓰시는분들 존경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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