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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얼음과 협정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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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한 경마클럽의 마장(馬場).
더러브렛(throughbred)종의 밤색 말을 탄 남자는 날렵해 보였다. 브리티시의 말안장에 얹혀 있는 몸도 기분 좋은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다. 재래종과는 달리 어느 정도 승마실력을 갖춘 사람만 탈 수 있는 경주마인 더러브렛종 말은 늘씬한 기수와 혼연일체가 되어 품위 있게 구보하고 있었다. 정확한 삼박자의 리듬. 체중을 싣는 법에도 군더더기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더러브렛종 말, 펠샤가 45분 코스인 한바퀴를 막 돌았을 때, 다른 한대의 말이 그 옆에 미끄러지듯 합류했다. 경주마인 더러브렛종처럼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재래종처럼 아주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페인트 호스(painthorse)다. 그 위에는 날씬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 못잖게 몸에 익은 승마기술로 익숙하게 말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 그럴싸하다. 남자는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기도 하고, 좀 난감하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남자의 그런 표정을 알아차린 듯 했지만, 이내 모른 척 하고 앞으로 고개를 돌려 말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대로 한바퀴를 더 돌고나서, 남자는 말에서 내렸다. 휴식을 취하러 테라스로 올라간 그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벤치에 막 앉았을 때였다. 뒤에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어느 새 여자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늦게 온 만큼 당연히 한바퀴 더 타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이쪽에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건가? 남자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스토커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는 법은 어데서 배웠냐. 이성은.”
“허 참. 그게 간만에 본 사촌 여동생한테 할 소리지? 오빠랑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해 봤더니 핸드폰은 꺼져 있고, 그래, 집으로 전화해 봤지. 큰 어머니가 휴가랍시고 승마클럽 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와줬는데. 반갑지도 않아?”
“그래. 모처럼 낸 휴가다. 나 피곤하고 시간도 별로 없어. 용건 있음 얼렁 얘기해라? 괜히 뜸 들여서 피로를 가중시키지 말고.”
“피곤한 남자가 일부러 말까지 타러 와? 하! 체력이 남아도시면서 뭘.”
성은은 얄미운 톤으로 말을 던진 성원을 째려보았다. 평소에는 정말이지 상냥하고 지적이며 다정다감한 얼굴을 하고 계신 그녀 사촌오빠의 본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다섯 명 중 하나였다. 그녀는 새침한 태도로 벤치에 앉았다.
“그저께 민호 씨 집에 갔었어.”
“민호 만나러?”
“아니, 우리 아가씨 보러.”
“민하?”
성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고개를 들어 성은을 응시했다.
“응, 민호 씨한테 부탁 받았어. 민하가 남자를 집에 데려왔더라며, 요즘 뭐하고 다니는지 걱정이라고. 그래서 주말에 민호 씨한테 바람맞았다고 뻥치고 쳐들어 가봤지. 마침 집에 있었어. 얘기 들어보니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가 쫓아다니는 것 같더라고. 오빠도 벌써 9년 동안 그 집에 들락거리면서 봐 왔으니 알 거 아냐. 우리 아가씨 맘 약한 거. 나한테 남자 떨구는 방법을 묻던데?”
“그래서, 전수 해줬어?”
성원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성은은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전수고 뭐고 그건 자기 복이지 뭐. 찍은 남자 잘 붙고 찰 남자 쉬이 떨구는 거, 그건 팔자야. 휴, 그 얘기 하다가 그만 민호 씨랑 나랑 첨에 어떻게 만났는지 죄다 불 뻔했지 뭐야? 순간적으로 입이 머리보다 먼저 나가서 죽는 줄 알았네. 그거 일일이 다 까발리면 순진녀 아가씨가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냐고.”
“흐응, 화려한 과거는 묻어두고 조용히 살고 싶다 이거냐? 바람숙이.”
성원이 나직이 웃자, 성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세요, 카사노바 대마왕님. 당신한테만큼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요? 몰라, 몰라, 치우고.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더라고. 진짜 중요한 문제는…….”
“뭔데.”
“뭘 것 같애?”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 이성은.”
성원은 웃옷 주머니를 뒤져 담배 갑과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말이 너무 타고 싶어서 휴가를 받자마자 달려오긴 했지만, 근 한 달간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에만 매달려와선지 지금의 성원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특유의 부드러움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사촌여동생의 수다를 들을 시간이 있으면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 잠이라도 한숨 때리고픈 지금이다.
“오빠. 지연이랑 잘 되가? 결혼하기로 결심 굳힌 거야?”
성은이 나름대로 심각하게 물어왔다. 던힐과 디스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사온 타임을 빨아들이면서, 성원은 ‘젠장, 비리잖아.’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지난번에 그랬잖아, 나도 결혼이나 할까 보다고.”
“내가 그랬었나?”
성은이 눈을 크게 뜨고, 이어 뭐야, 하고 항의하듯 가늘게 고쳐 떴다.
“말했잖아. 결혼이나 할까? 하고.”
“음, 그랬던 것 같다.”
“근데. 그거 그냥 해본 말이었어?”
“아니, 진심. 지연 씨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다. 결혼해도 좋겠다 싶었어.”
성은이 “그런데?” 하고 반문하자, 성원은 의외란 듯 그녀를 고쳐봤다.
“너 요즘 지연 씨랑 연락 안 하냐? 아무 말도 없었어?”
“으응, 아니. 왜? 무슨 일 있었구나! 왜, 그쪽 문제는 뭐야.”
“후우…….”
성원은 맛없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문제는 내가 아냐. 지연 씨 쪽이지.”
“무슨 소리야?”
“만족할 수 없나 보더군, 나 정도에는.”
성원은 지난주의 일을 떠올렸다. 드물게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거겠지. 그게 아니면……, 모자랐던 건가?
-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정말 모르겠다구요! 만약 우리가 잘 풀려서 결혼한다고 쳐요. 나, 평생 이렇게 속을 읽으려고 애쓰며 살아야 해요?
파국으로 가는 패턴은 대개 비슷하다. 달라붙는 여자에 이쪽이 먼저 질리거나, 조금 뇌가 있는 여자일 경우는 깊이 들어오려다 제풀에 지쳐 버리는 것.
……피곤하군.
“지연인 그런 거 상관 안 할 줄 알았는데.”
성은이 대충 이해한 듯 심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끝냈수?”
“아직. 이번 일 끝나면 얘기할 작정이야. 미안하다, 일이 이렇게 돼서.”
“괜찮아. 애당초 나도 오빠한테 나 아는 사람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연이가 오빠를 먼저 보고 내 옆구리를 하도 찔러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을 한번 벌려봤는데, 혹시나가 역시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은이 성원을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성원 앞에 놓여 있는 담배 갑으로 손을 뻗다, 멈칫 손을 거뒀다. 이런, 손이 웬수다. 잠든 주인의 의지에는 아랑곳없이 기생집으로 돌아간 김유신의 말이 떠올랐다. 금연한지 6개월이 지났는데 방정맞게 이게 뭔 짓이란 말인가.
“사랑이 인간 만들었네. 이성은이 담배도 끊고.”
“알면 내 앞에선 삼가해 줘. 근데 이성원 씨. 당신,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거야?”
놀리는 사촌의 말은 무시하고 성은이 대뜸 물었다. 성원은 흐릿하게 미소했다.
“물론이지. 결혼해서 정착하고 싶어. 결혼은 원래 남자들을 위한 제도야. 불쌍한 여자들의 발목을 잡기 위한 장치. 그걸 이용하고픈 마음이 나라고 없겠냐?”
“그건 오빠 사견이고, 여자들 입장은 또 틀릴 지도 모르지? 흠. 어쨌거나,”
성은은 피식 웃었다. 성원은 은근슬쩍 여자 쪽을 편드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여자를 아낄 줄 아는 남자였다. 문제는 그런 여자들의 이중성을 완벽히 커버해 줄만큼의 정열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마음은 그러면서 왜 매번 상황이 안 따라주는 건데? 자신한테 심각한 버그가 있다고 생각지 않아? 응? 결혼지망남.”
“너무 다그치지 마라, 아줌마후보녀. 근데 지금 우리 뭐 하는 거냐? 선문답은 그만 하고 껍질 벗겨 내놔. 시간 없으니까.”
성원이 안경을 벗고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성은은 입술을 비죽이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다소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민하가 오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그건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야.”
두 개피째의 담배를 꺼내들고 있던 성원이 잠시의 텀을 두고 말했다.
“근거? 딱 눈에 보이던데 뭘. 오빠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달라진다구. 어떻게 이제야 알았는지 자신이 한심할 정도더라.”
“…….”
성원은 대답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떻게 할 거야.”
“뭘. 할 게 달리 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성원이 대꾸한다. 뭐, 뭐야. 성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랬던 거였어? 크게 뜬 눈 그대로, 거기에 개운치 않은 목소리까지 덧붙여 그녀는 물었다.
“오빠, 알고 있었던 거야? 민하가 오빠 맘에 뒀던 거……, 알고 있었어?”
의자에 기댄 채로 연기를 내뿜고 있던 인간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떴다. 그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게 성은의 눈에 들어온다. 시선은 성은을 엇나가 그 뒤쪽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원은 뭐라고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미묘한 표정 그대로 낮고 조용하게 반문했다.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48
“다시 뵙습니다.”
며칠 밤을 새운 탓에 어딘가 부스스한 느낌의 민호에 비해, 방금 인사한 청년은 얄미우리만큼 깔끔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다시 봐도 잘생긴 얼굴이다.
지난번에 봤을 땐 이상한 도기 귀걸이를 걸고 있더니, 오늘은 귀에 아무 것도 매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결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저편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떡대 위에 걸친 검은 양복의 촌스러움이 안쓰러울 정도다.
‘잡 새끼들.’
민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목 90도로 꺾어, 새끼들아. 심기 불편케 하지 말고. 어딜 감히 슬금슬금 엿보는 거야?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는 지하 카페는 민호 자신이 제안한 곳이었다. 어차피 차 한 잔만 할 작정이었고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귀찮은 것을 감안하고 좀 멀리 나온 것은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서다. 맞은편에 앉은 녀석의 정체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한 지금, 혹여 눈에 띄게 되면 골치 아플 지도.
설마 취조실이 아니라 이런 자리에서 이런 부류의 놈과 접선하게 되리라고는 민호 자신, 생각지도 못했다. 전화를 받고 이 자리에 나온 지금도 뭔가 찝찝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웨이트리스 아가씨가 물 컵을 내려놓으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호는 그 물을 일단 한 모금 마신 후, 앞에 내밀어진 메뉴판은 아예 열어 보지도 않고 도로 넘겨주며 물었다.
“코코아 있습니까?”
“네.”
“거기다 얼음 넣어서 주십시오.”
“네? 아이스 코코아를요?”
아가씨는 넥타이를 느슨히 하는 민호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지금 한겨울인데…….’ 하고 웅얼거렸다. 민호는 귀찮아져서 던지듯 말했다.
“안됩니까?”
“아뇨. 해드릴게요. 메뉴엔 없지만요…….”
아가씨는 ‘너네는 것도 못 하냐’는 뉘앙스를 민호의 반문에서 읽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메뉴판을 가져갔다. 민호는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 앞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물어왔다.
“속 타는 일 있으십니까?”
씹 새끼, 네가 그 원인제공자잖아. 민호는 속으로만 씨부렁거리면서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로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부드러운 중저음이 왜 이리 비위를 긁는 건지 모르겠다.
외모만 해도 그랬다.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미남이라서 만이 아니라, 상대는 민호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인상이었다. 단순히 이런 분위기……라고 콕 집어 말하기가 힘든, 독특한.
그저 여동생의 남자친구일 뿐이라고 해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게 오빠다. 게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금, 동생이기 이전에 딸자식을 보는 듯한 심정으로 민하를 보고 있는 민호였다.
한데, 확신에 가까운 짐작으로 저 놈은 ‘보통’의 남자친구가 아닌 골 아픈 상대다. 아니. 골 아프고 뭐고 간에 용납할 수 없는 상대다. 만약 짐작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동생 상대로 반대할 첫 번째 인간은 바로 눈앞의 저 녀석일 것이다. 물론 저기 앉아 있는 잡스런 놈들만 봐도 사실임에 분명하지만 말이다.
일단은 확인부터 해 보자.
“지강인……이라고 했나? 민하와 같은 과라고?”
“예.”
“아버님 이름이 지남……신?”
이름에 ‘자’도 붙이지 않고 물었다. 꽤나 건방진 태도지만, 별로 붙여주고 싶지 않다. 청현회 보스의 이름에 존대라니, 훗.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상대가 ‘호오’와 ‘그렇겠지’를 반반씩 섞은 뉘앙스의 표정을 지었다.
“저희 아버질 아시는군요. 그 외엔 어디까지 아십니까?”
“네 놈이 청현회 보스의 막내아들에 정명회 중간보스란 데까지.”
강인은 눈을 슬쩍 내리깔며 픽 하고 스치는 듯한 미소를 흘렸다.
“오, 거기까지 알고 오셨습니까. 그럼 얘기는 빨라지겠군요.”
“얘기?”
“설마 제가 용건도 없이 검사님을 뵈러 왔으리라곤 생각지 않으셨겠죠.”
“조폭 새끼한테 들어 줄 용건 따윈 없어. 내가 여기 나온 건 내 얘길 하기 위해서지 니 놈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냐.”
민호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럴 때 성원 같으면 담배를 피워 물었겠지만, 그는 담배도 술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담배는 아예 않고 술은 음주에 강한 것과는 별개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잘 마시지 않는 민호다. 무슨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에서가 아니라, 기호식품을 즐기려면 돈이 든다는 이유였다. 상대는 앞에 홍차 한 잔을 두고 있었지만, 별 당기지 않는 듯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쪽 얘기는 뭡니까.”
“내 동생한테서 손떼.”
“이러언, 손을 떼라니요. 남녀관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좀 심하십니다.”
“남녀관계? 훗, 내 동생은 어떻게 하면 널 떼어낼 수 있냐고 묻던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단 말 모르나? 한손만 허공에 들고 설치면 다 돼?”
“하하, 손뼉이 우리 마주쳤다고 일일이 고해바칩니까? 원래 여자의 내숭이란 무서운 겁니다. 그 말을 다 믿으심 안 되죠. 결혼을 목전에 두셨다던데, 배우자 되실 분 마음 못 읽고 삽질하느라 그간 고생 좀 하셨겠습니다.”
민호는 정곡을 찔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이 속을 갈고리로 긁고 앉았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걸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과 달리, 한껏 눌러 죽인 덕분에 나지막한 만큼이나 감정을 최대한도로 응축시킨 음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확실해졌군. 적어도 민하가 좋아서 접근한 건 아니었어. 갖고 놀 상대가 그렇게 없었나? 멀쩡한 애 인생에 풍파를 일으킬 참이야?”
똑바로 상대를 노려보며 씹어뱉었지만, 강인은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소문으론 꽤 냉정하다 들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오버하십니까. 풍파라뇨.”
“걔, 아무 것도 모르는 순딩이다. 건들려면 장단을 언간이 맞출만한 상대로 해. 아니면 돈 많고 잘사는 집안의, 이용가치 있는 여잘 고르던가.”
“검사님 본인과 여동생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가치? 나한테 얻어낼 게 있었던가? 그런 거였어?”
“아까 대체 뭘 들으셨습니까. ‘용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가 막히는군. 그쪽 집안을 보건대, 아니, 정명회 중간보스라며. 검사도 검사 나름이지 나정도 급수를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 차단하려면 아예 위쪽에 손을 대는 편이 나을 텐데. 안 그래? 그런 쪽에 연줄 댈 능력도 없는 건가?”
민호는 일부러 강인의 속을 긁기 위해 이죽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민호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태연담백한 표정에 목소리로 차근차근 대응해 온다.
“위쪽을 쑤셨다가 도리어 역효과를 낼 수도 있거든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건 상부상조하잔 겁니다. 너무 딱딱한 거 아닙니까? 남매가 어찌 그리 똑같습니까. 마냥 귀 막지 말고 일단 들어봐서 괜찮은 제안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민호가 혀를 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을 때, 마침 아가씨가 주문한 음료를 가져왔다. 차가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는 낮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말해 봐.”
상대는 진작 그럴 것이지 하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요즘 북한산 샤부가 돌아다니나 보던데. 물론 알고 계셨겠죠?”
민호는 코코아 잔에서 손을 떼며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그게 너희 쪽 짓이었단 건 아니겠지?”
“뭐, 아니라곤 할 수 없겠군요.”
강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듯 대꾸했다. 민호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까보다는 한결 커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명회는 약은 안 건든다고 들었는데. 근데 뭐야. 왜 나한테 그 얘길 순순히 부는 거지? 봐 달라는 건가?”
“금방 알아들으시는군요.”
강인이 입술 끝을 얄밉게 비틀어 올렸다.
“내가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거 같…….”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받아들이셔야 또 한 건 올리실 테니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번에야말로 소리가 크게 나왔지만, 상대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흥분하지 마시죠. 이건 쌍무계약 관계입니다. 오고가는 거래란 말입니다. 전 검사님이 무조건 이쪽을 봐달란 얘길 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죠.”
“흐응…….”
“그쪽에 저희가 아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약을 건든 게 너라며. 근데 무슨 정보를 주겠다는 거지?”
“‘너’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군요. 말씀대로 정명회는 ‘약’을 다루지 않습니다. 딴 건 몰라도 약만은 손대지 않는다. 그게 옛날부터 정명회의 룰이죠. 물론 저도 약은 건들지 않습니다. 룰이라서가 아니라 잘못 터지면 손해 보는 장사니까요.”
“그럼……, 그쪽 내부에 조직의 룰을 어긴 자가 있다는 뜻인가?”
“이제야 말을 알아들으시는군요.”
민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담한 짓을 하는 놈이군. 게다가 꽤 대량으로 풀린 것 같은데 어떻게 들여온 거지? 역시 중국 쪽 루트인가? 틈새가 안 보이는 걸 보면…….”
“일본입니다. 작년 여름에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온 걸 겁니다.”
“후쿠오카? 어떻게?”
“요트레이스죠.”
“확실한 정보야?”
“80%는 보장할 수 있습니다.”
강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민호는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흔들림 없는 태도에 가려서 보이질 않았는데, 이건 보아하니 상대로서도 일종의 도박일 지도 모른다. 가만, 그래도 섣불리 반응하면 안 된다. 어찌 됐건 튕길 만큼은 튕겨주자.
“정명회의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어?”
“증거가 확실치 않습니다. 그 증거를 잡는 게 검사님이 하실 일이죠.”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지? 내가 증거를 잡아서 그쪽에 득 될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저희 내부의 문젭니다. 것까지 아실 필욘 없을 텐데요.”
“흐응, 대충 짐작이 가는군. 이런 건가. 룰을 어긴 놈을 잡아넣되 정명회 본진에는 영향이 가지 않게 해 달라, 뭐 그런 뜻?”
“딱지만 떼어내면 될 일을 굳이 살을 파서 피 볼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 말에 저절로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왜 그렇게 떼 내고 싶어 하는 건데? 그쪽끼리 알아서 할 수 없어?”
“그러고 싶었는데, 뒤에 방패가 있는 듯해서요. 정명회는 이전에 약을 건드린 적이 없으니, 수입했단 자체도 그렇지만 이쪽 시장에도 거의 지식이 없습니다. 한데 약은 빠른 속도로 시장에 풀리고 있단 말이죠. 분명 받쳐주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게 조무래기라면 걱정 없겠지만, 이래저래 짐작해 볼 때 아무래도 어지간한 상대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해도 물론 상대 손에 놀아나는 걸 테지만 자칫 잘못 건들면 이쪽까지 영향이 올 우려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적정선에서 가지를 잘라 달라는 게 오늘 검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물론 이쪽이 어느 정도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가요? 마구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까?”
“싫다면.”
민호는 코코아 잔을 입에 가져가며 얄밉게 미소지어보였다. 아까만 해도 이쪽이 꿇리는 것 같아 영 기분이 찝찝했는데, 상대가 저렇게 길게 설명하는 걸 보니 역전된 것 같기도 하다. 강인이 그런 그의 말에 의외란 듯 마주 미소했다. 그는 카페에 들어와 처음으로 홍차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댔다 떼더니 말했다.
“확실히 남매는 남매군요.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다니. 검사님, 타협이란 것도 때론 필요한 겁니다.”
“그게 그쪽 좌우명?”
“아뇨, 제 좌우명은 이겁니다.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근데 나더러는 밑지라 이건가?”
“물론, 아니죠. 이 제안이 검사님께 손해를 끼치리란 생각은 절대 안 듭니다. 오히려 이득이면 이득이죠. 좀만 좋은 머릴 굴려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단 거, 아실 텐데요. 게다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거양득에 일석이조 아닙니까.”
“누가 매부야!”
기껏 챙겼던 여유가 사라지고 다시금 느물느물한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기분이었다.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속담 화법은 민호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앞으로 저 속담만은 절대 입에도 담기 싫을 것 같았다. 강인은 불이 나올 듯한 상대의 시선은 싹 무시한 채, 태연하다 못해 묘하기까지 한 웃음을 느긋하고 희미하게 흘려보냈다.
“부정하고 싶으시겠지만 분명히 여동생은 제 손에 있고, 제가 놔주기 전에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희 조직이야 그렇다 쳐도 저희 집안에 대해서 아신다면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게 어떨까요, 우리?”
“이 자식이!”
감히 이……, 나한테 지네 집안을 들먹여? 민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소리가 멎었을 때, 강인은 민호에게 멱살이 잡혀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앉아 있던 놈들이 자극받아 움직이려는 걸, 그는 손짓 하나로 만류했다. 얄밉다 못해 밟고 싶을 만큼 차분한 몸짓이었다. 민호는 그런 강인을 보며 노기서린 얼굴로 말했다.
“내 동생 건들면 쇠고랑 차는 한이 있어도 널 죽일 거다.”
“그런 일이 없게끔 친하게 지내자 이겁니다.”
강인은 그런 민호의 태도에는 물론, 카페 안의 얼마 되지 않은 손님들의 시선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로 민호의 귓가에 느긋하게 속삭였다.
“생각할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 주십시오. 이만 놔 주시죠? 저도 검사님 못잖게 바쁜 몸이라 이만 움직여야겠거든요.”
그는 민호의 팔목을 잡고 힘이라곤 전혀 주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떼어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민호가 팔목에 날카로운 아픔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강인은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민호 앞으로 밀어놓았다. 연락처를 알려줬으니 소식을 달라는 뜻이다.
옆 좌석에 놓여 있던 진회색 코트를 집어든 강인은 일어서는 동작과 동시에,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곧 결혼식이죠. 만약 이쪽과 손을 잡을 의향이 있다면 동생을 통해 청첩장을 받았으면 합니다. 매부 될 사람으로서 부조금 정돈 드리고 싶어서요.”
그는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아이스 코코아, 맛있습니까?”
계속.
늦어도 1월 말까지는 설원의 연인을 완결내버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발렌타인 단편도 있구요. 그래서 당분간 얼음에 전혀 집중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올해 목표에 얼음 완결도 있습니다. 목표를 워낙 안 세워서 그렇지 세우면 대개 지키니까요. 정말이지 게을러서 민망할 따름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