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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얼음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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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서운 것.
집으로 쳐들어 온 날 이후로, 강인의 연락이 뜸했다. 민하는 영어학원과 새로 구한 과외를 가르치러 다니느라 나름대로 분주했다.
물론 과외제자는 이번엔 당연히 여학생으로 구했고, 또한 상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감시를 하고 있을지도 절대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되도록 사람, 특히 남자는 일체 만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신은 스스로 강인에게 묶여 있겠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토요일. 학원도 과외도 없는 날이다. 컨디션이 영 아니라서 친구들과의 약속도 잡지 않은 주말의 오후. 거실에 앉아서 혼자 TV만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도 하지 않다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런……!’
민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갑자기 분한 생각이 든다. 그 인간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밥도 못 먹는 지경이 되었는데. 매일처럼 위장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지금, 원흉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다니 자신이 제정신인가 싶다. 정말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길들여진다는 것은, 뇌리에 누군가가 각인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 강인은 성공한 셈이다. 그녀의 머릿속엔 언제고 그의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으니 말이다.
모르겠다.
그 날 어째서 잠든 강인의 옆에 머물러 있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반 머물고 싶은 마음 반인 상태에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걸 선택한 이유는 뭣 때문일까. 강인에 대한 두려움 탓도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태아처럼 어린 동시에 한없이 여려보여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더랬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조금씩 벗겨져 가는 그 껍질 아래 어떤 것이 숨어 있을지 궁금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의 곁에 남아 있었고, 그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고, 그는 자신 옆에 누워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지만 잠들기 전에 걸친 옷은 고스란히 제대로 몸에 붙어 있었고, 강인 역시 흐트러진 흔적은 없었다. 어쨌거나 잠들어 버렸단 사실에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을 때, 불쑥 뻗어 나온 손이 자신의 팔목을 잡아, 두 배로 심장이 내려앉고 말았다.
「늦었어. 더 자고, 아침에 나가는 게 나을 거야.」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는 그답지 않은 배려를 담고 있었지만, 민하는 그가 깨어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저히 침대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순순히 그렇게 놓아줄 남자가 아니었다. 손목이 확 당겨지나 했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침대 위로 무너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채 허우적거리며 몸을 비틀자, 강인은 코가 눌릴 만큼 그녀의 머리를 힘껏 누른 다음 일상적이기 그지없는 말투, 그러나 특유의 싸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상황에서 이 정도로 봐주는 남자는 흔치 않아. 더 이상 자극하지 마.」
그래서 민하는 아침이 올 때까지 결국 남자의 품에 코를 박은 채 안겨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매우 거북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안도감마저 느낀 경험이었다.
그에게서 떨어져서 그의 눈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남자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장소리를 듣는 쪽이 훨씬 마음 편했던 지도 모른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는 밤.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며 긴 밤은 지나갔다.
그런 식으로 아침은 왔고, 항상 차로 데려다주는 금발의 부하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민하를 데리러 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민하에게 강인은 ‘오늘 아침에 여기서 일이 있어서.’ 라고 설명했다. 뭐야. 그래서 여기 왔던 거였어? 사정도 모르고 호텔 방에 끌려온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민하는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여전히 마음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한 채, 남자에 대한 미움과 그와 다른 무언가가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안은 채.
물건.
확실히 그는 자신을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얻기 힘든 물건에 대한 소유욕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 조각상처럼 떨어지는 얼굴에 얼음 같은 눈동자를 하고 싸늘한 인상을 주는 미소를 지으며, 시시때때로 그녀의 자존심을 헤집지만.
- 너한테는 손대지 않아. 누구나 자기 물건은 아끼는 법이니까.
강인은 그 말 또한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미려한 선을 지닌 얼굴에 슬쩍 냉소를 띤 채 조롱의 말을 읊고 있어도 자신이 언급한 선은 절대 넘지 않는다. 발목을 찜질해 준다던가, 가슴에 입을 맞출 때의 그의 동작은 굳이 ‘물건’이라 친다면 가장 아끼는 최상급 소유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상냥했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딩동.
갑자기 벨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민하는 몸이 움찔 떨리는 걸 느끼면서 현관으로 갔다. 미러로 미리 보는 것도 귀찮아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문을 열자,
“흑, 나 바람맞았어!”
그 자리에 성은이 서 있었다.
“엥?”
‘바람맞았다’는 표현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미모의 새 언니를 보며 민하가 할 말은 고작 어이없음의 감탄사뿐이었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 성은을 집안으로 들이면서 물었다.
“오빠가요?”
성은이 ‘응.’ 하고 끄덕였다.
“아니, 그 인간이 간땡이가 부었나? 감히 언니를 바람맞혀요? 내가 기냥, 콱!”
“괜찮아. 됐어. 일하고 연애하는 사람한테 뭘 더 바래? 아가씨, 놀아 주세요. 낼은 일요일인데, 이 좋은 저녁 집에 혼자 있기 싫다구요.”
성은은 답지 않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엡, 알겠습니다!”
민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언니, 어떡할까요? 나갈까요? 그러잖아도 지금 밥할까 말까 고민 중이었는데, 지금 나가서 밥 먹을까요? 음, 저녁시간으론 좀 이른가?”
“아, 아니. 나갈 필요는 없고, 짜잔!”
성은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회사 동료가 빌려준 비디오야. 중국 음식 시켜 먹으면서 보자. 어때?”
“그거 좋죠.”
주스를 냉장고에서 꺼내는 민하에게 성은이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봤다.
“근데 민하, 정말 얼굴이 안됐네?”
“뭐가요?”
머쓱해서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민하를 보며 성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이리 말랐니? 전에 우리 상견례 할 때 성원 오빠가 걱정하길래, ‘그런가?’ 했는데 정말이었구나. 그 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말랐다. 혈색도 허연 게……. 어디 아팠니?”
“아…….”
민하는 자신이 성원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언제나 머릿속에 가득했던 성원에 대한 생각이 한동안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대신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건, 줄곧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던 건…….
“서, 성원 오빠가 뭐래요?”
생각을 지우려는 것처럼 물었다. 말이 제대로 나와 주질 않는다.
“응, 걱정했었어. 너 밥이나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가슴이 훈훈해지듯, 그러나 한편으로 꾹꾹 누르듯 아파 온다. 단지 그 사람이 자신을 걱정해 줬다는 것뿐인데, 바보처럼 눈물이 날 만큼 기뻐서…….
‘바보.’
실은 속이 아직도 많이 좋지 않았다. 생약성분의 위장약을 먹고는 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야 그럴 테지. 마음이 편치 않아서 생긴 병인 걸.
그저, 만사가 피곤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다칠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민하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녀만 가만히 있으면, 강인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을 놔줄 때까지는 그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는 잠자코 있자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같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도 너 이렇게 얼굴이 안됐는데.”
성은이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아하하, 다이어트가 효과 있었나 보다!”
민하는 스스로도 좀 과장하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요 며칠 사과 다이어트 했거든요. 말라 보인다니 다행이에요.”
“그런 거 하지 마. 뺄 데가 어디 있다고. 있지, 우리 어차피 집도 가까우니까 아침 먹으러 오고 그래. 제 시간에 퇴근할 때는 저녁에도 부를 테니까. 알았지?”
“언니, 요리 잘해요?”
아무래도 아픈 데를 건드린 모양이다. 성은이 울상을 지었다.
“흑. 사실은, 못해. 못해도 너무 못해. 엉망이야. 나 어떡하죠, 아가씨?”
“에…….”
민하는 성은의 반응에 뭐라 말해야 할 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다 생긋 웃었다.
“오빠 시키세요! 울 오빠, 그렇게 안 보여도 요리 그럭저럭 한다구요. 게을러서 그렇지, 언니가 시키면 할 걸요? 언니가 전업주부도 아니고, 둘이 같이 일하는데 잘하는 사람이 요리하면 되지 뭐. 언니는 청소 같은 거 하면 되잖아요.”
“민호 씨, 요리 좀 하는 것 같긴 하더라.”
성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니까요? 하기 싫어하면 막 추켜 올려주면 되요. 이렇게 맛있는 닭도리탕은 먹어 본 일 없다, 당신의 볶음밥은 가히 신의 경지다, 이렇게요.”
“민하, 경험담이구나? 하지만, 바쁜 사람을 어떻게 시켜.”
성은은 피식 웃더니, 다시 허탈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 말대로 방배동에 배우러 다닐 걸 그랬나 봐. 여자애가 그렇게 일해 봐야 남는 게 있냔 말에 오기가 생겨서 반항했었는데……. 울 부모님은 내가 하는 일 그렇게 좋게 안 보시거든.”
“왜요?”
“디자이너, 보기에는 화려해 보여도 완전 도제사회잖아. 아빠는 차라리 공부나 더 하라 그러시지, 엄마는 결혼, 결혼! 하다못해 동료들까지 쟤는 부잣집 딸이라 금방 때려치우고 나갈 거라 수군대는데 발끈했거든.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부잣집 딸한테는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노력하면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외는 있나 봐. 사실 내가 한 요리, 내가 먹어 봐도 맛없어. 앞이 캄캄해.”
성은이 머리를 감싸 쥔다. 민하는 쿡쿡 웃었다.
“언니, 사람마다 못하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난 언니 얘기 듣고 나니까 왠지 안심이 되는 걸요? 언니도 못하는 게 있구나, 하고. 있죠, 고민하지 말아요. 고민한다고 도움 될 거 하나 없는 걸.”
성은이 고개를 들고 감탄하며 민하를 봤다.
“민하는 보기보다 참 어른스럽구나. 외모는 아직도 애기 같은데. 교복 입고 나가면 아무도 20살 넘었다고 생각 못할 걸? 너무 자연스러워서.”
“치잇, 언니. 나 애 같단 소리 듣기 싫어요.”
“아직은 애지 뭐. 솔직히 많이 힘들지? 뭐든 혼자 해야 하는 거.”
“이제 익숙해졌는걸요? 그야 자신한테 주문을 걸어야 할 때도 많지만요.”
“주문?”
“예, 주문. 그럴 때 있잖아요. 열심히 해봐도 일이 잘 안될 때, 자신은 잘못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험한 꼴을 당해야 할 때. 이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여기서 힘들다고 울어봐야 나중에 후회만 남는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그런 치졸한 짓을 아무리 해 봐야 나를 겁먹게 만들지는 못해. 그러니까 바로 코앞에 있어도 행동만큼은 당당하게. 몸이 떨려도 태도만큼은 태연하게. 아무리 치사한 짓거리에 놀아나고 있더라도, 그 자식 앞에선 흔들리지 말자. 그렇게라도 자신을 다잡지 않으면 안돼.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안돼.
실은 몇 번이나 흔들렸지만. 속이 다 망가져 버릴 정도로 흔들려 버렸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것도 이제 지겹다. 은근히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 사실은 가장 두렵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민하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말을 돌렸다.
“언니, 여쭤볼게 있는 데요…….”
“응?”
“싫은 남자 떨궈내는 방법 아세요?”
“민하, 쫓아다니는 남자 있어? 우와, 좋겠다! 아아, 청춘은 아름다워!”
속도 모르고 박수를 치며 눈을 빛내는 올케를 보고 민하는 한숨을 쉬었다.
“농담하지 말고요. 오빠가 언니한테 물어보면 알려줄 거라고 했단 말예요.”
성은은 ‘글쎄?’ 하며 조금 생각하다가 빙긋이 웃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비교적 효과적인 건 딴 남자를 데려가는 거지. 떨궈낼 남자랑 완전히 다른 타입으로 준비해서.”
“아, 안돼요! 그 방법은 안돼요!”
민하는 마구 손을 내저었다.
딴 남자를 데려가? 그 인간 앞에 딴 남자를 데려가라고? 그거야말로 결과가 훤히 뵈는 짓이다. 다음날 조간에 ‘그 다른 타입의 남자’가 변사체로 한강변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릴 지도 모를 일. 안돼, 그 방법만은!
“왜에, 효과만점인데. 그리고 덤으로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안돼요, 백만 가지 좋은 일이 생겨도 그 방법은 안돼요! 말고 딴 거, 딴 방법은 없어요?”
“글쎄……. 그럼 정 떨어지는 짓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 근데 이 방법의 문제는 체면이 구겨져야 한다는 건데, 그래도 상관없다면 나름대로 괜찮아.”
“어떻게요?”
“그 남자 앞에서 온갖 추한 꼴을 보여주면 되지 뭐. 옷도 넝마처럼 입고, 머리도 아줌마 헤어로 바꾸고, 다리 쩍쩍 벌리면서 걷고, 술에 곤드라져서 오바이트 막 해대고. 패턴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
“언니, 그거 경험담이에요?”
“내가 그런 방법을 왜 써.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안 그래?”
성은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난 주로 첫 번째 방법을 썼어. 당신을 좋아했지만 지금 이 남자와 나는 서로 필요로 해요, 당신은 나 아니어도 괜찮은 여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눈물도 조금씩 흘려가면서. 그러다 민호 씨도 만났……, 어머!”
성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하 앞에서 ‘내가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라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민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방금 들은 말을 분석한 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오빠가, 그 ‘다른 타입의 남자’였어요? 언니랑 오빠, 성원 오빠 주선으로 만난 거 아니었어요? 다른 남자를 떨궈내기 위한 대타로 불러낸 거였어요?”
“아, 저……. 결국은 성원 오빠 소개로 만난 거니까 마찬가지지 뭐. 너, 너무 캐묻지 말아줘요, 아가씨.”
민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당황해 하는 성은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봐요, 언니. 오빠 어디가 좋았는데요? 어디가 매력이었어요?”
“음, 글쎄? 좀 엉뚱한 점일까. 막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그게 매력이에요?”
어이가 없다.
“응. 멋있는 척 안 하는 거. 처음엔 정말 매너 황이다 생각했는데, 보다보니까 가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결정적으로 필이 팍 꽂힌 건, 코코아!”
성은이 손뼉을 딱, 쳤다.
“코코아요?”
“그래, 코코아! 커피를 못 마시더라고. 초콜릿 잔뜩 묻힌 도넛에 코코아 같은 애스런 음식만 시키는데, 으아, 너무너무 귀여운 거 있지?”
이건 완전히 콩깍지다……. 황당함에 입만 쩍 벌리고 있는 민하의 뇌리 속에, 갑자기 ‘애스런 음식’을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가 떠올랐다.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재수 없는 누군가가.
- 시험해 볼까?
……저, 저리 갓!
민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생각을 지우려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했다.
“언니, 언니가 가져온 비디오 틀어도 돼요?”
46
[ 서 검사, 나왔어! ]
취조실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사무원에게 전화를 넘겨받자마자 약간 긁히는 것 같은 걸쭉한 톤을 한 중년남자의 음성이 울려나왔다. 대검찰청 마약감식실을 책임지고 있는 유상진 실장의 전화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꼬박 열흘을 기다린 결과다. 민호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유 실장은 쩝, 하고 떨떠름한 감탄사를 냈다.
[ 잡아 들여야겠어. 엑스터시만도 아냐. 대마까지 나왔더라고. ]
“그렇습니까.”
민호는 전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유 실장이 직접 전화할 정도라면 결과는 물에 불 보듯 훤했다. 오죽 놀랐으면 저러겠는가.
[ 그래. 히야, 설마가 사람 잡네. 주예연까지 뒤통수를 때릴 줄은……. ]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유 실장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 청순가련미인의 대표주자인 탤런트 주예연이 엑스터시 복용혐의로 소환되었던 것은 2주 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던 주예연이다. 원래 마약복용 후 사나흘만 지나도 성분은 검출되지 않기 때문에, 소변검사를 했을 때는 음성이 나왔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는 건 아니고, 머리카락이나 체모를 채취해서 분석하는 모발검사로 넘어간다. 바로 이 최종단계에서 엑스터시와 대마초의 양성반응이 검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조만간 스포츠 신문이 떠들썩하겠군.
“지금 서명해서 보내줄 수 있으시죠?”
[ 물론이지. 근데 정말 실망이구만. 하아……. ]
“그러게 뭐 하러 힘들게 모발감식기법을 개발하셨습니까. 그거 아니었음, 청순녀 주예연에 대한 환상이 영원토록 깨지지 않았을 텐데요.”
[ 그러게 말이야. 하튼 결과 보낼게. 기다려. ]
민호의 말에 유 실장은 큰소리로 웃으며, 그러나 조금은 쓰게 대답했다.
“부탁드립니다.”
민호는 전화를 끊고 의자 등받이에 지친 몸을 기댔다.
지독하게 피곤하다. 목이 칼칼한 것이 아무래도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이 정도로까지 체력을 소모하면 면역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을 테지.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면서, 며칠 전에 온 팩스용지를 버릇처럼 들여다봤다.
북한산 샤부가 나돈다는 건 작년 말부터 이미 떠돌던 소문이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신고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편의점에서 보내져 온 익명의 팩스는 제보자의 오빠가 중독이란 사실과 더불어 마약을 산 회수와 구입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익명인 걸로 보아서 허위신고일 수도 있고 내용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거기 적혀 있는 구입 장소만 뒤져도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단은 조사부터 진행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조사는 잘 풀리지 않았다. 증거를 전혀랄 만치 잡을 수가 없다.
편의점 카메라를 통해 팩스 송신자라 추정되는 여성의 화상을 입수했다. 요즘 편의점에서 팩스를 쓰는 일도 많지 않은 데다 그 시간에 편의점에 들어온 사람이 몇 되지 않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흐릿한 영상에 비친 것은 소박한 인상의 처녀로 허위정보를 보낼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평범한 여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신고는 진짜다. 민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오빠란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팩스에서 거기까지 알아내기는 힘든 일 같았다. 일단은 팩스의 정보를 기초로 조사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가 약을 뿌리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함정수사밖에는 방법이 없군. 구입 장소로 추정되는 가게의 고객리스트를 조사하고 그 중 수상한 새끼들을 몇 찍어서 시도하는 수밖에. 민호는 생각했다. 이것은 법에 어긋날 우려가 있을뿐더러 상당히 위험한 방식이었다. 민호는 자신 밑에 소속된 마약 수사관의 목숨을 함부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경우에 증거를 잡아내는 비결은 판매업자나 중독자를 가장해 약의 거래를 제안하고 그 거래가 이루어져 증거를 확보한 시점에서 체포하는 방법 외엔 달리 없다. 하지만 접촉 시도할 후보가 이렇게나 많은 시점에서, 이것도 사실 골 아프기 짝이 없는 방법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앞이 막막하다.
민호는 일단 현재까지의 상황에 대한 중간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목의 아픔을 가시게 만들기 위한 허브 캔디를 입에 넣었다.
‘이럴 때 코코아 한잔 있으면 좀 좋아…….’
정말이지 여동생이 손수 탄 따끈한 코코아가 간절했다. 슬슬 잠이 몰려와 민호는 한쪽 손을 얼굴에 대고 잠을 쫓으려는 듯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곧 구정이다. 요즘처럼 바빠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집안행사를 떠맡고 있는 작은 집에 갈 수 있을 지조차도 의심스러웠다. 검사가 힘든 일인 건 연수원을 졸업할 때 각오했었지만, 겪어보기 전엔 이 정돈지는 몰랐다.
그 날, 그 얘기만 듣지 않았어도 자신은 지금 검찰이 아닌 로펌에 있었겠지. 아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성원이 놈도 꽤 바쁜 거 같던데, 요즘은 좀 한가해졌을까. 새로 사귄다는 여자와는 잘 돼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 놈은 워낙에 감정 결핍이라 영 의심스럽거든.
민호는 문득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바로 로펌에서 뛰겠다고? 니가?」
「그래. 야, 신호 바뀌었다. 출발해.」
민호는 성원의 어깨를 툭 치며 프런트 유리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파란 불을 가리켰다. 핸들을 아예 잡지 않고 있던 성원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차를 출발시켰다.
「넌 졸업하자마자 로펌 가도 되고 난 안 되냐? 너도 성적은 되잖아.」
「넌 차석이었잖아. 변호사보단 검사가 딱인 놈이고. 원래 잡는 놈은 잡히는 놈이랑 같은 부류여야 한다는데, 이 몸은 맘씨가 비단결이라 사람 잡아넣는 일은 못하지만 너 같은 놈이라면 휘파람까지 불며 일할 최적의 커리어 아니냐.」
민호는 귀찮은 듯 눈썹을 가늘게 찌푸렸다.
「지랄하고 있네. ……됐어, 변호사 할 거야.」
「많이……, 힘드냐.」
민호는 친구의 얼굴을 봤다. 성원은 자신을 보지 않은 상태로, 얼굴을 슬며시 찌푸리고 있었다. 어딘가 난감한 표정이었다.
「검사가 월급이 적어서 그런 거야? 민하 땜에?」
민호는 사이를 두지 않고 바로 대꾸했다.
「그런 거 아냐.」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성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무슨 말이야.」
민호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성원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너처럼 과보호인 오빠도 없을 거다. 어지간히 해둬. 민하도 이제 다 컸잖아. 좀 있음 대학 들어갈 앤데. 언젠가는 시집갈 거고. 그렇게 벌벌 떨어서야 어디 딴 놈이랑 식장에 나란히 선 꼴 보겠어?」
「그 꼴 볼 때까진 챙겨야지. 아니, 적어도 그 꼴 보여줄 놈 나타날 때까진.」
민호는 말하며 팔짱을 꼈다. 이상하게 성원이 운전하는 차에만 타면 졸리다. 친구의 운전 실력 덕분인지 아니면 아우디의 성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떠냐?」
갑자기 성원이 툭 말했다.
「……뭐?」
근 두 달 동안 내내 밤 7시부터 10시 반까지 뛰는 민법 코스를 강의하고 있던 탓에 수면부족이던 민호는 잠에 빠질락 말락 한 자신을 겨우 추스르며 되물었다. 성원이 농담 섞인 말투로, 그러나 나름대로는 진지한 척 덧붙인다.
「민하를 내가 접수하면 어떻겠냐고. 이래저래 인생이 힘드신 오라버니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의미에서 말이야.」
「이성원,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다.」
민호는 한숨을 섞어 답했다. 이 자식이 지금 사람을 갖고 노나. 어디서 그딴 식으로 농을 던지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는 한술 더 뜬다.
「그게 왜 농담이라 생각하는데. 난 나름대로 진지하다?」
「진지 좋아하네. 민할 접수해? 뻔뻔스런 새끼. 그 말이 진심이라면 이제부터 널 진짜 로리콤이라고 부를 거야. 10살이나 차이 나는 주제에, 농담도 그딴 식은 재미없다? 니 놈은 여동생 아니라 아는 여자라도 연결시켜 주기 싫어.」
「……너 친구 맞아? 하, 자식. 입심 한번 더럽네.」
성원은 잠시 말을 못하다가 픽 웃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탓일까, 녀석은 성격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아니, 성격 자체가 좋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성격 좋은 것처럼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 한 부분을 제외하곤.
「니 놈 본질을 아니까. 대체 너한테 진심이란 게 있는 거야?」
「너야말로 말이 좀 과한 거 아니냐?」
성원이 그제야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늘 싱긋 웃고 있는 인상 탓에 주변에서는 온통 천사표로 오인되고 있는 놈이지만, 한번 화나면 꽤 무섭다. 하지만 민하에 관해서나 녀석의 연애관에 관해서는 민호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언제 한번 꼭 짚어주고 싶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널 스쳐간, 응? 말 그대로 스쳐지나간 그 숱한 여자들에 대해 모른다면 얘기는 틀려지지. 근데 그 미녀들과의 화려 무쌍한 역사는 어쩌시고 파릇파릇한 고삐리한테 눈을 돌린다는 거냐. 솔직히 니 눈에 민하가 찰 것 같지도 않아. 내 동생이지만 약간 귀여운 거 빼곤 걔 평범 그 자첸 거 나도 부인 못한다.」
「서민호. 너 오빠 맞냐?」
성원이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거다. 솔직히 니 애인들 전부 남자라면 죄다 침 흘릴 미모에 일류대 출신들뿐이었잖아. 근데 난 니가 그 여자들 진심으로 대하는 거 한번도 못 본 거 같다. 솔직히 연애를 위한 연애란 생각만 들었어. 너 아무리 외로워도 사람 갖고 노는 거 아니다? 여기 연애 한번 못해본 외기러기 인생을 생각하면.」
「왜 나만 악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응?」
민호는 고개를 돌렸다. 성원의 표정은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도 잘해보고 싶었어. 항상 새 여자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 이번엔 정말 잘해주자, 후회 없을 연애를 하자. 근데 여자들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고. 이건이래서 맘에 안 든다, 저건 저래서 맘에 안 든다. 나도 내 생활이 있는 건데 마냥 여자한테만 신경 써야 해? 연애는 연애고 나는 나잖아. 안 그래? 왜 다들 그걸 인정 못해주고 지 품에 가두려는 건데. 내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잖아.」
「너한테도 문제가 있어, 임마.」
민호가 한숨을 쉬었다. 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만 할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일단 시작했으니 뽕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마음을 아예 다 주려는 생각도 안하잖아. 내 보기엔 너, 항상 마음 일부만 떼서 상대한테 보이는 거 같다고. 내 말 틀리냐? 그러니 뒤에 감춘 부분이 상대로선 신경 안 쓰일 수 없지. 넌 이기적인 연애만 해, 가만 보면 항상.」
「그게 잘못된 거야?」
어느 새 변호사 검사 얘기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얘기가 넘어가 있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자기가 우선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고. 성모 마리아건 테레사 수녀님이건 직접 만나보기 전엔 난 그런 말 안 믿는다.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사랑이래도 내가 우선이게 돼 있어, 인간은.」
「그래, 그래. 그러니까 나 모르는 여자하고만 연애해라. 카사노바.」
민호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성원은 그를 찌릿 일별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민호에게만큼은 이상하게 약한 성원이었다. 아무리 심한 소리를 해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는다. 원래 독설가인 걸 알기 때문일까.
「솔직히 말해. 너 여자 없어 심통 났구나? 소개 한번 안 시켜준다고.」
「알면 실천을 해야 할 거 아냐. 하튼 있는 새끼들이 더 무심하다니까. 제길, 부익부 빈익빈인 이 세상이 한스러워 죽겠다.」
「사실 시켜주기가 싫어. 허구한 날 독설만 퍼붓는 놈한테 무슨.」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 아, 저기다! 조 앞 건널목에 세워줘.」
「츠키(月)? 아버님 친구랑 만난단 데가 저기였어? 저기 음식 꽤 괜찮은데.」
미식가인 친구가 모르는 음식점이 있을 리 없다. 성원은 건너편에 보이는 일식집을 힐끗 보고 차를 세웠다. 민호도 그에 맞춰 좌석벨트를 풀었다.
「간다.」
「저, 민호야.」
막 차에서 내리려는 민호를 성원이 불러 세웠다. ‘응?’ 하고 돌아보자, 친구는 어, 하듯 아주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입을 닫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가라. 낼 봐.」
「자식, 싱겁긴. 그래, 낼 보자.」
친구 놈의 마지막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민호는 잠자코 차에서 내렸다. 저 녀석이 자란 과정에 대해 대충 들은 걸로 유추해 볼 때, 오늘날 성원의 연애방식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여동생이나 자신이 아는 여자는 사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민하에 대해 한 얘기야 당연히 농담이었겠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일식집에 도착하자, 아버지 친구인 강영일 은행장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아니야. 나도 지금 방금 왔어. 어서 앉게.」
라고는 말했지만, 이미 술잔이 앞에 놓여 있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품이 온지 어느 정도 지났음에 분명했다. 민호는 강 은행장이 손을 뻗기 전에 먼저 병을 들어 앞에 놓인 잔에 따라드렸다.
「이번에 연수원 졸업인가?」
「예.」
「그래, 뭘 할 생각이냐. 판검사? 변호사?」
「로펌에 지원할 생각입니다.」
「바로 변호사 할 결심이냐? 하긴 요즘은 판검사 안 거치고 바로 일하는 사람이 더 많다던데. 바늘구멍 시험에 차석으로 붙었다고 자네 아버지가 입이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는데 성적이 아깝잖아. 판검사엔 전혀 관심 없는 거냐?」
「……없습니다.」
민호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어쨌거나 장해. 해조 그 자식이 살아있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나. 어디 한군데 빠질 것 없는 아들놈이라고 우리한테 입이 닳도록 말하곤 했는데…….」
민호는 무표정하게 강 은행장을 바라보다 흠칫, 하고 놀랐다. 아버지 친구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드나 했더니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거다.
「민호야, 미안하다!」
「예?」
「정말, 미안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께서 저한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 그러십니까.」
「나, 니랑 니 아부지한테 죄진 게 많은 사람이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말이지……, 목숨이 두려우면 친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더라고. 그저 나 살아야겠단 생각, 파리 같은 목숨이라도 그저 부지해야겠단 생각만 들고 내 가족 건사해야 된단 그 맘 하나만 머릿속에 가득 차서…….」
민호는 이미 취할 만큼 취해 있던 강 은행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강 은행장은 손바닥을 대서 눈을 가로로 힘껏 비비면서 하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느이 아부지한테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 친구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민호는 로펌에 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사실 시험과 연수원 성적만으로 따졌을 때 가장 점수가 높은 축인 그라면 판사를 지원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민호는 과감히 검사를 선택했다. 이 길이 자신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몸이 지나치게 힘들 때면 뭐 하러 이 짓을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민하 말따나마 돈도 코딱지만큼 벌면서.
민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약 따위를 판 썩은 물에 뒹굴며 양분을 받아먹고 연명하는 쓰레기들을 치우는 게 자신이 할 일이다. 보람 있는 일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이다. 나, 그것만은 잘 알고 있다.
- 아까 오빠가 말한 조폭 말이야. 그거 문신 같은 거 새기고 칼부림 샥샥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 아냐? 겉보기에는 멀쩡해 뵈는 조폭도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음……, 말하자면 대학생 같은.
민호는 문득 여동생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녀석.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그런 점이 귀여워서 가끔 놀려주고 싶어지지만 말이다. 자신은 그녀의 순진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겉보기엔 전혀 폭력조직 같지 않은 조직,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업형 조직이 진짜 거물급인 거라고. 예를 들면……, 청현회 같은 조직 말이다.
그러고 보니 동료 검사인 고영헌이 청현회에 대해 언급한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사업을 양성화시킨 척, 소속 그물망에 들어 있는 산하조직을 부려 약을 자유자재로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동료는 짐작했었다.
민호는 좀처럼 물 밑에서 나오는 일이 없어 사진으로만 얼굴을 본 게 전부인 청현회 보스 지남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는 한 가닥 했을 선이 굵고도 날카로운 외모의 남자가 바로 한국의 정재계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대형조직의 보스였다. 요즘은 젊은 아들들을 조종하며 뒷전에 물러나 있는 듯 보이지만, 이 남자가 한번 움직이면 무슨 일이 터질지 그 파워만은 짐작 가능하다. 아들놈들도 하나 같이 그 외모를 이어받아 잘생겼다고 들었다. 제기랄, 조폭이라면 조폭답게 험상궂게 생겨야지 말이야, 어디서 계집애 같은 낯짝을 하고선…….
투덜거림과 더불어 떠오른 건, 동료가 보여줬던 한 장의 사진이었다.
- 막내는 군대 갔다 와서 다시 일을 시작한 지 고작 1년 됐다고 하더라구. ……이 새낀 어린 주제에 정명회 중간 보스란 말야.
지남신의 막내아들의 사진, 브라운관 밖에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 수준의 미모가 떠올랐다. 가만, 저렇게 미끈한 얼굴을 또 본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였지?
- 처음 뵙겠습니다. 지강인이라고 합니다.
지강인, 지강인이라.
지강인……?
- 지남신의 둘째 아들 지승인 아닐까?
지승인……, 지승인……, 지강인…….
지강인……이라고?
- 겉보기에는 멀쩡해 뵈는 조폭도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음……, 말하자면 대학생 같은.
- 우, 우리 학교 선배야.
민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제기랄! 서민하, 이 바보 자식!
일이고 뭐고 지금 당장이라도 집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섰을 때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멋대가리라곤 찾아보기 힘든 기본 벨소리를 내며 주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 언제 한번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 필요 없어.
- 그러고 싶어지실 겁니다.
벨소리와 함께 떠오른 말들. 며칠 전 집에 들렀을 때 나눴던 짧은 대화. 그것은 미처 핸드폰 폴더를 열기도 전, 지독히도 미묘한 직감을 통해 민호에게 전화를 걸어온 장본인을 짐작케 만들었다. 실로 정확한 짐작이었다.
계속.
푸하하핫 님께 바칩니다.
정크님~멋져요~~~ [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