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4. 얼음이 찾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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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맞구나.


남자를 본 순간, 민하는 강하게 느꼈다. 사고란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언제나 따뜻한 실내에만 있으면 추위 따윈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까부터 눈이 왔었지. 미처 녹지 않은 눈꽃이 남자의 어깨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꽤 오래 잔 모양이다. 벌써 오후 5시. 아파트가 전체 난방인 탓에 집안은 후끈거리는 편이었지만, 현관문을 연 순간, 그 온도는 급강하했다. 그것은 꼭 강인의 몸에 바깥 공기가 묻어 있는 탓만은 아닐 것이다.


머리에 얹힌 눈이 녹아 물기를 머금은 덕분에 푸르게 빛나는, 짧고 까만 머리카락. 너무나 또렷하게 살아 있고 매끄럽게 녹아 있는 얼굴 윤곽. 날카로운 눈, 우뚝한 코, 얇고 라인이 명료한 입술. 엷은 프러시안 블루의 머플러 위로 길게 뻗어 있는 목과 뾰족한 턱. 그리고 귓불의 담배 피어스.


검정 코트를 걸친 그는 꼭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았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이렇게 늘씬하고 핸섬할지는 의문스러웠지만.


“남의 집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도 돼요?”


문을 열자 남자는 마치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게 쳐들어온다. 민하는 방금까지 떨고 있던 사람치고는 꽤나 당당한 태도로 따지듯 물었다. 거의 반 오기다.


“너무 냉정한 거 아냐? 걱정 되서 공항에서 바로 달려온 건데.”


“걱정?”


뭐, 걱정? 당신이 누굴 걱정해? 하! 지나가는 개도 웃겠네. 남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는 놈이 그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딴 사람을 다치게 만드니?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말도 없이 펑크를 냈으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지. 병이라도 걸렸나 걱정 되서 와 봤어.”


강인은 머플러를 풀어 목덜미를 드러내며 나긋하게 말했다.


“말이라도 저엉말, 고마운데요?”


민하는 음절 하나하나에 빈정거림을 듬뿍 발라 말했다.


“그래도 전화 한 통은 예의이자 도리 아닌가요? 적어도 공동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말이죠. 이 집에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서 검사님 바쁘실 걸?”


민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저 인간이 어떤 집안사람인지 간과했다. 행여 나 때문에 오빠한테 피해가 가거나 걱정을 끼칠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숨을 조그맣게 토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앉아요. 커피 들래요?”


커피에 탈 설사약이 혹시 있나 두리번거리면서 묻자, 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됐어.”


“왜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없을 거 아냐.”


아이스크림이랑 커피가 무슨 상관? 민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인을 올려다봤다.


“커피에다 아이스크림 넣어요? 헤에, 아이스크림 안 넣음 커피 못 마셔요?”


순간적으로 강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친 걸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아하하! 초등학생도 아니면서! 진짜 웃긴다! 다 큰 남자가! 와하하하!”


“……시끄럽군.”


강인이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마치 박자를 맞추듯, 민하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온몸으로 오버하며 웃기 시작했다. 절호의 찬스다! 이럴 때 맘껏 비웃지 않으면 언제 저 인간의 약점을 웃어줄 수 있겠는가?


“계속 그렇게 웃어봐.”


민하는 뚝 하고 웃음을 멈췄다. 그런 그녀에게 강인이 고개를 슬쩍 들이밀더니 싱긋 웃으며 다시 한번 반복한다. 느릿느릿, 리듬을 타듯 상냥한 어투로.


“아주, 보기 좋아. 딱 1시간만 더 그렇게 웃어보시지.”


그 한마디로, 페이스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본의든 아니든 멍석을 깔아주면 더 하기 싫어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게다가 미소를 가장한 포커페이스의 이마에 커다랗게 ‘불본의(不本意)’라고 씌어 있는 걸 보고서도 계속할 여유? 위에 이어 간까지 망가뜨리고 싶진 않단 말이다. 이쯤에서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이…….


“모카 아이스크림 있어요. 바닐라 아니지만, 그걸로 참아요.”


민하는 입술을 물어뜯는 장면을 보이지 않을 각도까지 돌아서서 말했다.


“아.”


대답을 듣고 그녀는 커피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런 인간을 위해 내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버릇처럼 부지런히 움직인다. 원두를 막 다 갈아 메이커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 문득 강인이 거실에 있는 사진 액자를 들여다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민하는 발을 멈췄다.


“진짜 그림 같은 가족이죠?”


그는 네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에서 눈을 떼어 그녀에게 돌렸다.


“그런 건 보통 본인 아닌 딴 사람이 해 줘야 하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사실인 걸. 안 그래요?”


그 말에 강인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그저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울 엄마아빠는요, 둘이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떴음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정말 그 말대로 돼버렸어. 꼭 그렇게까지 할 건 없었잖아. 남은 사람 생각은 조금도 안 해 주고 두 분만 룰루랄라 가버리다니 진짜 이기적이야.”


그것은 정말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느닷없이 중앙선을 넘어와 그들 부모의 차를 정면으로 덮쳐온 트럭. 범인인 40대 남자는 그대로 뺑소니를 쳐버렸고 겨우 꼬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 땐 이미 범인이 자살한 뒤였다.


엄격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이며 언제나 곧게 살려고 애쓰던 아버지. 상냥하고 약간은 소녀처럼 천진난만했던, 세상을 순수한 눈으로 볼 줄 알던 엄마.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떠나가 버렸다.


넓은 세상에 둘만 남겨진 남매에게 돌아온 건 나름대로 상당한 액수의 보험금, 그 외에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라는 막막함과 허탈감, 그리고 절대 막을 수 없는 상실감. 그런 것뿐이었다. 죽을 만큼 슬펐지만,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수도 있다. 세월은 마냥 헛되이 지나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을 생각하면 조금씩 말이 떨려서 나와.


“교통사고, 였던가?”


강인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잘 알고 있네요? 다른 사람 사정까지 그렇게 일일이 캐고 다니려면 참 인생 살기 힘들겠어요. 피곤해서 대체 어떻게 살아요?”


“그건 불가항력이었잖아.”


민하는 커피메이커에 물을 붓다가 강인을 고쳐봤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기적인 선택이네요, 남겨질 사람 따윈 배려하지 않는 거.”


“글쎄.”


착각일까? 강인의 얼굴에 조금 씁쓸한 기운이 스친 것도 같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우면 그런 결말을 선택했을지, 제3자로선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법이야. 당사자가 되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어.”


“언제부터 그렇게 이타적이 됐어요?”


남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우습잖아. 민하는 강인을 노려보며 기가 막힌 소리를 뱉었다.


“이기적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지. 타인을 앞에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위선이지. 세상은 언제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저 인간이 저런 소리를 해 봤자, 자신의 독선적인 태도에 대한 변명 그 이상 그 이하로는 들리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누구처럼 남한테 피해를 입혀가면서 살아가는 건 또 안 되는 거잖아? 적어도 절대다수의 인간은 도덕관념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며 살아간다고. 민하가 반박할 말을 데굴데굴 머릿속으로만 굴리고 있을 때.


“꽃을 꽤나 좋아하나 본데?”


미처 못 버린 꽃바구니가 거실 구석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꽃바구니를 보는  강인의 모습을 보자, 울컥하고 안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눌러 참고 대꾸했다.


“누구 덕분에 아아주 좋아하게 됐지요.”


“보기보다 낭만적인 취향인데? 의외야.”


말하면서 소파에 앉는 강인은 꼬집어 비틀고 싶을 만큼 천진한 표정이었다.


“커피에 아이스크림 넣어 먹는 취향보다야 덜 의외겠죠?”


민하는 커피 잔과 편의점에서 가끔 사다놓는 스몰 사이즈 아이스크림을 탁자에 놓으면서 가시가 잔뜩 돋친 음성으로 말했다.


“뭘 몰라서 그러는데, 커피랑 아이스크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야.”


강인은 흡족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흐응, 그야 그렇겠죠.”


민하도 질 수 없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면서 코웃음을 쳤다.


“시험해 볼까?”


또 방심했다! 몇 번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니, 서민하?


불쑥 뱉은 말에 놀라 머그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미처 방어전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강인의 입술은 초식동물을 덮치는 육식동물처럼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민하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시원하고 달콤한 감촉,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는 커피의 열과 쓴 맛을 단숨에 덮어 내리는.


방금 마신 커피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입술과, 방금 입안에 넣은 아이스크림의 단물을 머금고 있는 그의 입술. 촉촉한 입술의 말랑한 부분을 가볍게 겹치고, 이어 끼워 물고, 차가운 기운이 배인 혀끝으로 입술 가장자리부터 할짝이면서 온기를 식혀주고 열기를 부추긴다.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그리고 다시 가장자리로, 다시 중심으로. 벌려진 입술 틈새로 치아를 더듬고, 입안을 잠식해 들어온다.


저항해 봐야 소용없어. 이미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잖아. 차라리 잠자코 있는 게 나아. 그게 상대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인 걸. 괜히 힘 빼지 말고 빨리 끝나길 기다리자. 빨리 끝나기를. 빨리 끝내주기를.


하지만…….


실은,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지도.


인정하기 싫지만, 줄곧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씁쓸함과 달콤함.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


……합쳐지면?


주변의 공기가 자전을 시작한다. 씁쓸하고 달콤하고, 뜨겁고 시원하고.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냐.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다루기 쉬운 것이 될까?


그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진다면 이런 불한당한테 걸려서 몸과 마음을 농락당하는 일 없이 스스로 선택한 다른 누군가의 옆에서 내키는 대로, 계획한 대로, 즐겁게 웃어 보일 수 있을 텐데. 이 남자하고 함께 있을 때처럼 머리와 심장과 가슴과 손발과 혀가 각자 제멋대로 놀거나 하진 않을 텐데. 어쩌자고 손이 남자의 옷자락을 붙들게 되는 건지, 어쩌자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건지.


아, 모르겠다.


누가 좀 말려줬으면…….


시간을 돌려놓아 줬으면…….


.


.


.


.


.


하느님!


타액이 합쳐져, 커피 향과 아이스크림 향이 혼합되어 제3의 묘한 맛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새로운 향기. 그 자체로도 좋지만, 다음 단계로 스스로를 부추기는 야릇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 중독 같은, 마비상태 같은 어떤 것.


그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빠져나와야 하는데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자신을 욕하면서, 그런데도 계속 휘말려 들어갈 따름인 민하였다. 이대로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옴짝달싹 못한 채 그저 나른한 감각 한복판에서 늘어져 있던, 바로 그 때.


움찔.


저도 모르게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강인이 그녀의 혀끝을 살짝 깨물었던 것이다.


부드럽게, 지나치리만큼 부드럽게 입안을 더듬던 동작 한가운데, 그것은 놀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정수리를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에 몸을 움츠렸을 때.


그가, 입술을 뗐다.


서두르는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자신을 잃고서 어느 순간인가부터 저항을 포기한 채 몸을 맡기고 있던 민하로서는 갑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마치 신나게 내려오던 미끄럼틀 한중간에서 뚝 하고 멎어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미묘하게 갈증이 나는.


아직도 하늘하늘 떨리는, 꼭지 끝에 싸하게 남아 있는.


극소량의 최상급 애피타이저만 맛보고 물러 나온 것처럼 아쉽고 안타까운.


이런 거……. 이런 거…….


“서 검사님 오셨나 본데.”


강인이 웃으며 속삭였다. 거의 동물적인 감지능력.


그리고 그 속삭임이 끝나는 것과 동시,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하, 집에 있니? 이게 뭐야, 또 꽃바구니 온 거냐?”


목소리에 이어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현관 쪽에서 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 사흘간 밤샘을 한 탓에 수염이 부스스한 얼굴의 그는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낯선 침입자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누구야, 이 자식?’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은 아니지만, 희미하게 주름 진 미간 아래 한번 깜박이는 눈꺼풀이 그렇게 묻고 있다. 민하가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 했을 때.


“처음 뵙겠습니다. 지강인이라고 합니다.”


어느 새 일어선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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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 숙인 강인과 민호를 번갈아 보며, 민하는 심장이 조마조마하게 뛰는 걸 느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진퇴양난의 위기라고 하는 걸까?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이를 어쩌지?


“서민호.”


민호는 조사도 생략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더니 여동생을 찌릿하고 본다. 평소 푼수 끼가 다분한 오빠의 드물게 냉랭한 분위기에 민하는 괜스레 쫄아갖고는 시선을 스윽 저편으로 피했다. 기본적으로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민호가 싸늘해지면, 그 효과는 예상외로 증폭되는 것이다. 극히 사소한 변화일 뿐인데, 보통 때라면 위압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오빠는 한 순간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뭘 그리 꼴아 봐? 나 잘못한 거 없단 말이야!’


라고 말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사실 저 냉혈한 혀의 미끈덩하고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지금 시점에서 그럴 수까지는 없었다. 민하는 말라오는 입술에 침을 축이면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웅얼거렸다.


“우, 우리 학교 선배야.”


“키가 몇이지?”


민호도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는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장신인데, 강인 앞에 서 있으니 퍽 차이가 난다. 그 사실을 인식한 건지, 여동생의 말에 대꾸도 생략한 상태에서 민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185 정돕니다.”


강인은 또 다시 정중하게, 이른바 대외용 영업용 미소와 더불어 대답했다.


“4cm 차이인가? 흐응, 한 키 하는군.”


민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강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데?’하고  탐구하는 눈빛이다. 그 눈빛을 부드럽게 받는 강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국제 표준 키죠.”


“185가 표준이라.”


민호는 기가 찬 듯이 말하더니 강인 옆에 서 있는 민하를 쳐다봤다. 말은 국제 표준이었지만 대한민국 성인 남자의 평균을 월등히 초월하는 강인 옆에서, 대한민국 성인 여자의 평균보다도 작은 민하는 고목에 달라붙은 한 마리 매미였다.


“밖에 있던 포르셰가, 그쪽 차?”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는 별로 보기 힘든 차다. 주차장에서 눈 여겨 봐둔 모양. 민하는 강인을 올려다봤다. 차를 가져왔었어? 근데 처음 들어왔을 때 왜 그리 눈을 많이 맞은 몰골을 하고 있었지? 주차장이 코앞인데?


강인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민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덩치에 안 맞게 작은 차 취향이군. 혹시 뉴 비틀(폭스바겐에서 나온 소형차로 딱정벌레를 연상시키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디자인) 좋아해?”


민호는 여동생을 힐끗 내려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예, 굉장히.”


강인 역시 저 아래 머리가 위치한 민하를 내려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진짜 안 어울린다!”


옆에서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린 민하는, 이번에야말로 어이없단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남자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크고 라인이 잘 빠진 차가 훨씬 어울릴 텐데. 취향이 참 특이하시군.”


민호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별로, 취향 따윈 없습니다.”


강인은 진연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했다.


“보기 좋은 떡보다는 먹기 좋은 떡을 선호할 뿐입니다. 속담과 실제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죠.”


보기에 좋은 떡이 반드시 먹기도 좋은 떡은 아니니까요.


뒷말은 생략한 채 미소 짓는 강인을 보며 민호는 슬쩍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 자식, 건방지군. 한마디도 안 지잖아. 뭐라고라고라? 먹기 좋은 떡?


“어이, 국제 표준 키 씨.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도 있어. 옛 어른들 말씀은 실제와 차이가 있다고 마냥 무시할 건 아닌 법이라고. 아무리 이쪽에서 유도심문을 했더라도 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강인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순수의 극치를 달리는구나, 라고 느껴질 만큼 새하얀 미소를 해맑게 날리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악마 같은 본성을 잘 알고 있는 민하는 미소를 보자마자 두통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투덜거렸다.


“뭔 얘기래? 헛소리 좀 그만들 해요. 듣는 사람 속 터지게 만들지 말고.”


그러나 그 자리에서 맹한 독백을 읊고 있는 사람은 오직 민하 한 명뿐이었다. 물론 그 독백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흠,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나?”


민호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자, 강인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없습니다.”


“흔한 얼굴은 아닌데?”


민호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했지만,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는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오빠를 민하도 쪼르르 쫓아갔다.


“오, 오빠. 아아, 저어, 으응, 퇴근한 거야? 일 끝났어?”


“끝난 거 좋아하네. 옷 가지러 왔어. 바로 나갈 거다. 근데, 너…….”


양복장을 뒤지던 민호가 찌릿, 고개를 돌렸다.


“저 놈이 요즘 사귀는 놈이냐? 허구한 날 장미꽃 보내던 그 새끼?”


말투가 유난히 험악하다. 민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으응…….’ 하고 어정쩡하게 답했다. 그런 동생을 보며 민호가 한층 불쾌한 낯빛을 가중시켰다.


“나 결혼하면, 저 자식을 수시로 들일 생각으로 독립하겠다고 한 건 아니지?”


“오빠! 날 뭘로 보는 거야! 저 인간은 그냥 지 혼자 쳐…….”


‘쳐들어 온 거란 말이야!’


민하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을 시작하면 이래저래 곤란해진다. 다행히도 민호는 더 캐묻지 않고 옷장으로 다시 손을 뻗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흐음, 맘에 안 들어.”


“응? 뭐가?”


“전부.”


속옷이 담겨 있는 서랍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우선 건방지게 나보다 큰 것부터.”


“성원 오빠도 오빠보다 크잖아. 그런 성원 오빠랑은 왜 친한데?”


“그 자식은…….”


돌아본 민호는 갑자기 그 얘긴 왜 나와? 하는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들켰나 ‘쿵!’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이내 민호의 얼굴은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 자식도 마냥 좋은 놈은 아니지. 성원이 놈이 나 친한 여자한테 손 뻗치면 솔직히 걱정될 거 같다. 그래도 그 자식은 봐줄 만은 해. 하지만 저 녀석은 아냐. 너 정도가 쉬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진짜 의뭉스런 놈일 거야, 분명.”


의외로 오빠는 통찰력이 있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너무 잘 알잖아. 혹시 미리 뒷조사라도 해본 거 아닐까? 민하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을 때. 귀찮은 듯 민호가 가방에 옷가지를 쑤셔 박으며 덧붙였다.


“나 빨리 씻고 가야 해. 좀 나가줄래? 웬만하면 남자는 밖에서 만나라. 아니, 저 자식은 빨리 떨구는 게 좋아. 저런 놈보다는……, 유준이던가? 니 친구 중에 약간 띨한 놈 있잖냐, 그 바보가 차라리 나을 거다.”


오빠는 더 나은 줄 알아? 멍하니 있다가 화장실에 신문 놔두고 갈 때나, 계란 프라이하고 가스 불 안 끄고 들어갈 때 보면 한심의 극치를 달린다고. 누가 누구더러 띨하다는 거야, 대체? 민하는 입을 비죽이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방법은 알려주고 나가라고 해. 어떻게 떨구면 되는데? 어떡하면 떨궈지는데?”


“정말로 네 쪽에서 떨궈야 하는 거냐? 하, 세상일은 미지수요, 인생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저런 킹카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너 같은 애한테…….”



“으음, 대답이나 하. 시. 지.”


민하의 이마에 힘줄이 파릇파릇 선다. 윽, 성질 발동 시작인가. 민호는 그제야 자신의 현 위치를 인식한 것처럼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그럼 누구한테 물어?”


민호는 잠깐 생각하다 퉁기듯 대꾸했다.


“내 약혼녀한테 물어봐라. 그런데는 비교적 정통하거든.”


“성은 언니한테?”


성은 언니가 과연 알려줄까? 민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이번에야말로 나가려다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근데 오빠, 어떻게 알아? 나쁜 놈이란 거.”


“직감이다.”


민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직감?”


“보이니까. 어떤 부분에선 나랑……,”


마지막 말은 낮고, 하지만 명료한 음성이었다.


“동류 같아서.”


“동류?”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 이상 방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민하는 일단 방을 나왔다. 방을 나와 보니, 강인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의 아이스크림은 깨끗이 비워져 있고, 그는 소파 등받이 위에 팔을 얹은 채로 열린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눈 내리는 풍경을 응시하는 표정은 차분하고, 한편으로 투명해 보였다.


부엌에 서서 오빠에게 줄 코코아를 만들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강인이 고개를 돌린 상태인 그녀 쪽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아니, 나가지. 차도 가져왔는데.”


눈 오는 날 차를?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다 문득 생각나서 덧붙였다.


“이번엔 그쪽 집엔 안 가요. 알았죠?”


“어째서?”


상대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봐요, 몰라서 물어? 보나마나 이상한 짓 할 거잖아. 당신 알게 된지도 벌써 꽤 됐어. 그 패턴 모를 줄 알아? 민하가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있는데, 남자가 갑자기 훗,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하긴. 장소가 매번 똑같으면 지겹겠지?”


민하의 눈이 커졌다. 강인이 일어서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빠가 방에 있는 걸 떠올린 민하가 도리어 굳어져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데,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천하의 ‘뻔뻔 남’은 거리낌 없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인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어디라도 상관없어.”


두근!


위로 올려 핀으로 고정시켰던 머리카락 몇 가닥과 함께 입술이 미끄러지더니 목덜미로 떨어졌다. 공기와 함께 숨결이 미끄러지는 듯한 연한 감각…….


“장소는 색다를수록 좋아. 알아둬, 타협안을 받아들인 건 내 쪽이란 걸. 그건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지 덮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쪽에 선택권은 없다, 머리 써서 도망쳐 봤자 힘만 빠진단 걸 아직도 모르겠어? 그게 아니면, 그 동안 아무 짓도 안 해줘서 섭섭했던 건가?”


나직한 속삭임에 전신이 떨려온다. 어째서 이 남자가 이런 짓을 할 때마다 그대로 몸이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바보가 돼버린 기분이다. 아니, 말 그대로 바보인 걸. 그러고 보니 저 방 안에 오빠가…….


“알았어요. 어, 어디든지 가줄 테니까…….”


민하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그의 입술로부터 빠져나왔다.


“지금 여기서 이러는 건 그만 둬요.”


뒤로 물러서서 겨우 안전거리를 확보했을 때, 마침 민호가 방에서 나왔다.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옷가지를 잔뜩 담은 가방을 손에 든 그는, 부엌 입구에 선 강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물어왔다. 탐탁지 않다는 기색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말투였다. 강인은 그런 민호의 태도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하다못해 여유를 보이려는 기색조차 없이 그저 상냥하고 정중할 뿐인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는 민하를 보고 싱긋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나갈까.”


소름이 돋을 정도다. 본성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인간이 정말 예의바른 녀석이라 착각하기 십상일 터. 민하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저토록 부드러운 음성을 내보내고 있는 입술 위 눈동자가 얼마나 무감정한지.


“옷 갈아입고 올게요.”


민하는 힘이 빠져서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탄 코코아를 오빠에게 건넨 뒤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두 남자의 시선이 미묘하게 부딪치고 있단 사실은 미처 모른 채. 자기 방에 들어간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에 맞춰 눈꺼풀을 느긋하게 들었다 내리며, 강인이 말했다.


“언제 한번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필요 없어.”


가차 없는 딱딱한 반응에, 강인은 훗, 하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싶어지실 겁니다.”


“……하.”


민호는 어이없다는 듯 ‘놀지 마라’의 표정으로 강인을 봤다. 강인은 그런 그를 향해 입 끝만 씨익, 하는 모양으로 들어보였다. 민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대신 컵을 들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아까부터 생각하던 의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자식, 언제 분명히 본 기억이 있는데?


젠장, 언제더라?



계속.


 


댓글 '13'

푸하하

2005.10.06 19:31:54

이런...정크님!
최고예요..ㅠ.ㅠ   [01][01][01]

야광우비

2005.10.06 19:57:41

오~~ 정크님
잃어버린 황녀을 위하여 뒷부분의 비밀글을 뿌셨다고해서
읽고 왔더니... 얼음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완전 땡잡은 날입니다요~~
근대 야들은 언제쯤 강인이가 민하한테 끌려다니는 날이
올까요?????? 아니! 안올수도 있다고요...
그럼 강인은 영원한 카리스마 짱....(혼자 잘 놀고 있음)ㅋㅋ   [01][01][01]

귀여운이

2005.10.06 21:30:49

강인의 칼이쓰마(?)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들의 러브러브모드는 언제쯤일까...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01][01][01]

까망사자

2005.10.06 21:53:13

저두 뉴비틀 좋아해요*^^*
뉴비틀 좋아~좋아~   [09][01][03]

김영숙

2005.10.07 02:56:02

근데 폭스바겐이 차를 그렇게 잘 만들진 않아요. ㅎㅎ
그래도 연비는 좋더라구요. 하하
여튼 뭔가 좀 강인이게도 감정의 변화가 온 것인가요???   [01][01][01]

재아

2005.10.07 09:37:40

정말 확실한 적수를 만났네요.ㅎㅎ
정크님 얼음의 완결까지 화이팅 하세요.^^   [01][01][01]

문은희

2005.10.07 12:05:36

오랫만의 글 넘 반갑습니다.
담글은 좀 더 빨리 오기를..^^   [01][01][01]

푸하하핫

2005.10.07 13:40:02

저의 불면증을 치료해주시려고 올리셨군요,ㅋㅋ
근데 멋진 강인이의 모습을 보니
잠이 또 안오려 해요♡
다음 편도 기대기대>.<;;   [01][01][01]   [01][01][01]

나여

2005.10.07 19:30:36

강인이의 카리스마는 언제봐도 멋지구리하구만요,,,,,   [11][11][12]

so

2005.10.07 20:03:50

후후후
맨정신에 플레이오프 진출 축하 힘겨워
진탕 놀았더니 아직도 머리가 멍~합니다;;;
혹시나도 아니고 그냥 버릇처럼 잠깐 들렸는데 이런 기쁨이~~
쌀쌀한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08][08][07]

김유화

2005.10.08 00:26:39

웅~~` 동류라~~~ㅋㅋㅋ

둘다 한 카리스마 하긴 하죠~~>,<   [12][06][09]

꿀물보스

2005.10.10 19:22:34

정크님, 눈물 나도록 고마워요~~~ >.,<
너무너무 오래 기다렸거든요..
쌀쌀한 날 뜨끈한 어묵 국물 한그릇에 나오던 콧물이 쏘옥 들어간 기분이네욤. 여튼, 감기 조심하세요~~~   [01][01][01]

핑키

2005.10.17 12:19:32

짱입니다. 동류같다~ 정말 멋지게 들리는거 있죠! 다음이 너무 기다려집니다   [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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