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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얼음이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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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이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오후 1시를 지나 있었다. 연초의 로비는 다른 때보다 조금 혼잡했고, 슈트케이스나 면세점 봉투를 손에 든 여행객들이 그의 옆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지나갔다. 후쿠오카에 막 다녀온 참이었다. 부하들을 동반하고 그가 세관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물결 속에 치윤의 침착한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운전수인 박진수 외 세 명의 청년들이 대기하고 있다.
강인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 포켓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 ……예. ]
귀에 익은 아가씨의 뚱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학교에서 볼 일이 있다더니, 끝났어?”
[ 네. ]
“정문으로 나와. 차를 보냈으니까.”
[ 네. ]
수화기 너머의 음성은 어딘가 부루퉁해 있는 것 같았지만, 강인은 개의치 않고 용건만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런 그의 바로 앞에 치윤이 서 있다가 공손한 태도로 짐을 받아들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부하는 간단한 인사말을 끝으로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요전번 죽련방과 거래한 대금의 자금세정이 끝났습니다. 구역별 상납금도 앞으로 세정할 예정입니다.”
치윤은 언제나 필요한 것만 정확하게 책을 읽듯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보고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화법이지만, 평소에도 이러다보니 사람이 딱딱해 뵈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강인이 자리를 비운 며칠 동안의 정명회의 상황과 거래내용, 그리고 다른 조직의 동향을 정리한 보고서를 건넸다.
서류에 눈을 떨어뜨리면서 강인은 공항 출구로 향했다. 옆에 붙어 걸어가면서 치윤이 보고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축약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롱 코트를 긴 몸에 걸친 강인은 대학생이나 젊은 사회초년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검은 정장이 잘 어울리는 치윤도 극히 보통의 회사원으로 비쳤다. 다만 뒤로 산더미처럼 짐이 쌓인 카트를 밀며 걸어오는 진수 등 젊은 남자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폭력조직 양아치들의 그것이어서, 주위사람들은 지나가며 힐끔거리고 있었다.
공항입구에는 이미 세 대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강인이 벤츠에 올라타고, 똘마니들이 짐을 싣고 있는 동안에도 치윤은 보고서의 설명을 계속했다. 강인은 간간히 질문을 던지면서 주의 깊게 설명을 들었다.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은 어느 정도지? 장부에 없는, 클리닝된 걸로.”
“주말에 있을 러시아와의 거래를 대비해야 하니까, 약 15억 정도일 겁니다.”
“유신파와 만날 걸 대비해서 5억은 언제든 운용 가능하도록 준비해 둬.”
“알겠습니다.”
특별히 조직을 키우려는 게 아니다. 그 이전에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타 조직과의 연계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총 보스의 건강이 악화된 현재의 정명회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다.
정명회는 국내 2대 대형조직인 청현회와 경인회의 조직원들 일부가 빠져나와 만들어진 조직으로 양 조직 간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정명회 총 보스인 김근현은 양 조직을 건드리지 않고 쌍방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만의 독자적인 사업에서 두각을 드러내 보이며 규모를 키워왔다. 그런 정명회가 규모는 크지만 상대적으로 그 위세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남은 건, 2대 조직 간의 힘의 균형문제와 그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잘 해온 보스의 운영기술 덕분이다.
하지만 불경기인 지금, 어느 조직이든 자기세력을 확대하고자 아우성들이었다. 게다가 강인과 여천우의 세력으로 양분된 조직전체의 결속도도 그 어느 때보다 느슨하고 위태로운 상태다. 견고한 방패가 유난히도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서, 강인은 되도록 무력을 이용한 전투는 하고 싶지 않았다. 희생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먼저 덤벼오면 모를까, 이쪽이 먼저 나서고 싶지는 않다.
“후쿠오카 건은 잘 처리되셨습니까?”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에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사업을 센다이와 후쿠오카로 확장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표면적인 대표이사는 강인이 아니라 지금은 은퇴한 정명회의 조직원이 될 터이다. 여하튼 그 일로 후쿠오카에 간 김에 다른 것도 알아보고 온 참이었다. 겨우 1주일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보고서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예상대로였어.”
“그렇습니까.”
치윤은 예상이 들어맞은데 오히려 동요하는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 바보자식, 무덤을 파는 짓을 하고 있어. 다만 그 거래상대가 확실치 않아. 정보망을 잘 방어하는 걸로 봐서 규모가 큰 무리임이 분명한데 아마 그쪽이 뒤를 받쳐줄 거라고 착각하는 거겠지. 이용만 당하고 휘둘릴게 뻔해.”
그것은 최근 들어 풀리기 시작한 북한산 샤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업문제로 후쿠오카에 들른 김에 강인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내려 애썼다. 후쿠오카는 일본의 대(對)아시아무역 중심지 중 하나이며, 특히 그 동부를 하카타(博多)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 하카타를 장악하고 있는 야쿠자 중, 쿠수모토구미(久須本組)라는 조직이 있었다. 이 쿠수모토구미의 와카가시라(중간보스)인 쿠수모토 타쿠미(久須本巧)는 강인과 제법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로, 그의 정보망은 일본 조직들 중에서도 알아주는 위력을 자랑했다. 은밀한 접선과 물밑거래를 통하여 강인은 쿠수모토 타쿠미에게 북한산 샤부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고, 자신도 일본에 들러 쿠수모토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재조사와 확인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누가’에 해당하는 답은 명료해졌다. 역시 여천우였고, 부산-후쿠오카 간의 해상 레이스를 이용했음도 거의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만 ‘누구에게’ 혹은 ‘어떤 이유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가설이야 여러 가지를 세울 수 있겠지만, 심증은 물증이 아닌 것이다.
치윤은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보스의 수려한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합법적인 양성사업이든 조직만이 손댈 수 있는 음성사업이든 탁월한 자질을 발휘하는 젊은 보스가 유일하게 손대지 않는 사업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마약밀매였다. 치윤이 이유를 물었을 때 강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 약은 사람을 부패시키고 조직을 부패시키니까. 그런 게 아니어도 돈을 만들 방법은 널려 있지. 굳이 팔다리를 썩게 만들면서 사업을 할 필요는 없어. 뭣보다 수지가 안 맞는다. 그러니 ‘약’은 하지 않아.
그래서 일명 ‘지강인계’ 혹은 ‘강인파’로 불리는 정명회 제3지부에선 마약밀매는 물론, 마약복용도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가끔 유혹을 참지 못한 똘마니들이 마약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강인은 그것만은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런 이유로 다른 조직이 마약으로 인해 이런저런 꼬리를 밟히는 일을 종종 겪는데 반해, 제3지부는 경찰과 얽히는 일이 전무하다 싶을 만치 없었다. 또한 마약복용이나 그로 인한 폭력사건으로 체포되는 조직원들도 없었기 때문에, 팔팔한 젊은 구성원들이 항상 버티고 있는 건강함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강인이 ‘약을 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 그뿐일까?
때마침 전화가 울려, 치윤은 신경을 핸드폰으로 돌렸다. 보스의 여자를 데리러 출발했던 현홍이었다. 치윤은 폴더를 열고 물었다.
“오고 있는 중?”
[ 그게 저어……. ]
난감한 기색이 목소리에 느껴졌다. 치윤은 눈썹을 가늘게 찌푸렸다. 이를 악문 듯한 투로 말하는 듯한 청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좀 늦어질 것 같은데요. ]
“무슨 일이야?”
[ 말없이 후문으로 토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아가씨 집에 들러야……. ]
“줘 봐.”
가벼운 울림을 실은 저음에 치윤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그리고 보스의 말에 따랐다. 강인은 조용히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 저, 듣고 계시는 겁니까? ]
이쪽의 대화를 미처 듣지 못했는지,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직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 그래서 좀 늦어질 것 같다는 건데요. 함구 좀 해 주시면……. ]
“그냥 와.”
강인은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강인은 입 끝만 슬쩍 들어올린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돌아오는 길에, 내 포르셰를 그 아가씨 집 앞 주차장에 세워둘 것. 그 일이 끝나면 오늘은 쉬어도 좋아.”
[ 예……? ]
“한국말도 못 알아듣나? 돌아가서 ‘짐승’의 언어로 말해줘야 해?”
[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안 봐도 화색이 돌았을 현홍과의 전화를 끊고, 강인은 단말기를 치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운전수인 박진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고교시절 현홍 밑에 있던 놈으로 주먹은 현홍보다 약했지만, 머리가 영민하고 운전 실력이 뛰어났다.
“아무 지하철 역 앞에나 세워.”
“예?”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진수가 아까의 현홍과 비슷한 얼 띤 소리를 냄과 동시에, 치윤이 한숨을 담은 음성으로 조용히 물어왔다. 강인은 말했다.
“그쪽이 피한다면 이쪽에서 가야겠지.”
“지하철을 타고 말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치윤의 낯빛이 불안하게 흐려진 걸 강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부하에게 마음 써 줄 여력이 없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를 눈으로 쫓으면서, 문득 또 다른 상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날도, 눈이 내렸다는 사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뇌리에 또렷이 새겨질 만큼 지독한 눈이었으니까. 그 눈이 어느 정도 멎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던 그 날의 자신.
차가 멈췄다. 강인은 그의 등을 그저 보고 있을 따름인 부하들을 뒤로 한 채 차에서 내려 지하철로 향했다. 단순히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경우도 숱하게 많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미행당해도 상관없다. 일단 지강인이 학교 후배인 어떤 여자를 건드리는 이유는 그녀가 서울지검 검사의 여동생이고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란 소문을 알게 모르게 퍼뜨려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
강인은 지하철 문에 머리를 기대고, 가볍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런 그를 지하철 안에 있던 여자들이 힐끗거리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데는 관심 없다. 그는 지하철 창문 너머로 비치는 검은 공간을 응시했다.
암흑.
자신이 존재하는 자리, 눈(雪)으로도 정화될 수 없는 영역.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소리를 듣고 싶다. 강인은 코트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37
또, 도망치고 말았다.
그래봐야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단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강인이 보낸 차를 피해서 예주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민하는 엘리베이터를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강인에게 또 붙들릴까 두려웠지만 어찌됐든 그나마 집이 제일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조여드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돌아보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막 1층에 내려왔다. 문이 열렸고,
“누나!”
“악!”
재한이 불쑥 몸을 내민 것과 민하가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아아…….”
숨을 몰아쉬는 민하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너, 너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포기하고 가려 했었는데 마침 돌아왔네요? 다행이다, 에헷.”
여전히 곰 같은 재한은 판다(panda)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웃었다. 동물원에 박혀서 대나무나 씹고 있으면 딱 어울릴 얼굴로.
남자제자는 안 된다는, 거의 막무가내에 가까운 강인의 독점욕 때문에 재한의 과외선생자리를 그만 둔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붙잡는 어머니한테 어정쩡한 설명을 드리고 그만두긴 했지만, 민하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화르륵 불타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다. 망할 자식 같으니!
“너 여기 왜 온 거야?”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튼을 누른 민하는 짜증 섞인 투로 재한에게 소리쳤다.
“으응, 그냥요. 핸드폰 했었는데 전화도 안 받더라고요. 누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제자가 찾아왔는데 이렇게 귀찮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시기냐고요.”
그렇지만 재한은 정말은 그리 섭섭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녀의 팔을 친근하게 잡는다. 민하는 화들짝 놀라며 팔을 뿌리쳤다. 이거 누가 보기라도 하면,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나 있는 거니? 어어, 이러지 마!
“누나, 왜 그만둔 거예요?”
민하의 과잉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재한이 물었다.
“어? 어. 이제 3학년 올라가니까 공부도 해야 하고…….”
“저 바보 아니에요.”
제자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민하는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던 층 표시 불에서 눈을 떼어 재한에게로 돌렸다. 재한이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날, 누나랑 스파게티 먹은 날 말이에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 의심도 안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요, 저.”
“…….”
“누구예요? 누나 괴롭히는 사람.”
엘리베이터가 땡, 하고 도착했다는 신호음을 울린다. 그와 동시에 민하는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열린다. 나오기 전에 1층 버튼을 미리 누른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자신을 따라 나오려는 재한을 손으로 막았다.
“돌아가.”
“예?”
재한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 너한테 할 얘기 없어.”
“에……?”
“그런 사람 없어. 그건 우연이었을 뿐이야.”
“누나, 저 바보…….”
“지금 안 내려가면 너 바보 맞아.”
민하는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끼며 눌러 죽인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거 불편하거든? 나 지금 컨디션도 영 아니고, 니가 넘겨짚은 데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자. 말했지만,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였어.”
“누나.”
“잘 가라.”
문이 닫혔다. 민하는 줄곧 긴장한 탓에 힘이 풀린 다리를 움직여 돌아봤다. 속이 쓰리다. 한번 망가진 위장은 돌이킬 수 없다더니.
“아!”
돌아서서 무작정 움직이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별로 눈에 띄는 인상이 아닌 상대는 아마도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언뜻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남자에게 민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별로 사과를 받아들일 기분이 아닌 건지, 아니면 사과를 듣지도 못한 건지,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잽싼 걸음으로 계단 쪽으로 가 버렸다.
민하는 혀를 차며 바싹 마른 입술에 손을 갖다댔다. 생각해 보니 아침에 로션도 안 바르고 나갔었다. 입사시험 같은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면접인데 이렇게 꾀죄죄한 꼴로 다녀오다니. 요즘 정신이 없긴 없는 모양이다.
일상이 죄다 흐트러져 버렸다. 난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하필이면 왜 내가 걸린 걸까. 재수가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는 끊겼고, 과외제자한테는 못할 짓을 했다. 죄 없는 주변 사람들까지 다치게 만들고, 착한 친구 놈에게는 상처를 입혀버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이기심.
결국 자신은 무섭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기보다 자신한테 앞으로 닥칠 일을 먼저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냈다.
당연히 지금 오빠는 없을 것이다. 실은 오늘 들어올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혼자 있는 거 무서운데……, 생각하면서도 민하는 ‘배 째!’ 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강인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집에 와 버렸지만, 그녀는 한가지만은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다.
강인은 절대 자기 쪽에서 먼저 그녀를 건드리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약속을 지킬 것이다. 물론 그 냉혈한이 흥분하는 따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설사 어쩌다 화가 난다고 해도 그는 결코 그녀를 ‘먼저’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그래, 분명……. 대관절 이 대책 없는 믿음은 뭘까? 응?
그래도 역시 무서웠다.
매순간 도망치고픈 충동이 일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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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따고 들어온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흠칫.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살금살금 발끝으로만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엿보는 구멍으로 보니, 강인은 아니었다. 모자 쓴 남자의 모습을 봐서, 뭔가 배달하러 온 것 같았다.
“누구세요?”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꽃 배달 왔습니다!”
뭐, 뭐야? 또.
숨을 죽이고, 문을 열었다.
“이거, 뭐예요?”
“선물이요. 여기 사인해 주십쇼.”
배달원은 당연한 듯 말하고는 그녀에게 펜과 배달확인서를 내밀었다. 거기에 대충 펜을 달리면서 민하는 다시 물었다.
“이거 누가 배달시킨 거예요?”
“글쎄요? 전 배달만 하는 사람이라. 선물 받는 본인이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개운치 못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민하는 아랑곳 않고 배달원이 사인 받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더니 같은 주머니에서 명함 같은 것을 꺼내서 내밀었다. 꽃가게 전화번호와 홈페이지 주소 등이 적혀 있는 종이다.
“정 궁금하면 이리로 전화해 보시던지요. 아가씨 앞으로 온 거죠? 쫓아다니는 남자 아니에요?”
배달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민하는 현관 바로 앞에 놓인 꽃바구니를 들여다봤다. 역시 언제나의 꽃바구니다. 한동안 좀 뜸했던 탓에, 그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던 것, 전혀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꽃바구니.
- 항상 널 보고 있다. 내 마음 느껴지니?
언제나 꽂혀 있는 카드에 씌어 있는 언제나의 두 문장. 민하는 전화기 앞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손에 든 종이를 보면서 번호를 눌렀다.
[ OO화원입니다. ]
“저기, 오늘 꽃 배달 받은 사람인데요.”
민하는 왠지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용건을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 꽃바구니를 보낸 장본인을 알아낼 순 없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며,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길 거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한가지였다. 실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지. 강. 인.
그 외에 달리 해답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돈이 남아도는 걸까, 그 인간은?
민하는 아직도 현관 앞에 놓여진 꽃바구니를 힐끗 건너다보고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을 더듬는 사이, 잠이 들어버렸다.
*
소리가 들린다.
음……이 소린……지금 내가……뭐……으……목말라…….
머릿속으로 헤어나기 힘든 미로를 더듬고 있는 사이, 민하는 자신이 소파 위에 기대 있으며 그 자리에서 깜박 잠들었단 사실까지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막을 자극한 건 다름 아닌 전화벨 소리란 사실도.
아, 싫어. 싫지만……, 받아야겠지?
“으음.”
무심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문 좀 열어주시지. ]
“……!”
잠이 확 깬다. 목이 타던 것조차 잊어버렸다.
민하는 허둥거리는 동작으로 후다닥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멍하니 손에 들린 수화기를 바라본다. 핸드폰은 꺼뒀었다. 으, 망할 인간. 이젠 핸드폰이 안 되니까 집 전화까지? 꿈에라도 들릴까 두려운 중저음은 언제나 그렇듯이 느긋한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아직 잠이 덜 깼나? 문 열어. ]
문……열어? 설마?
[ 어지간히 정신 못 차리는군. 훗, 알았어. ]
“잠깐만요!”
강인이 전화를 막 끊으려는 찰나, 민하는 다급히 소리쳤다. 여기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폭탄 같은 인간이 다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거다. 마……, 막아야 해! 민하는 ‘스피드’에서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달리는 버스에 탄 키에누 리브즈가 그랬듯 절대절명의 위기를 느끼며, 그러나 키에누 리브즈 같은 침착함이라곤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
[ 못 알아들었어? 문 앞. ]
탁! 민하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듯 내려놓자마자,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엿보는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남자는 확실히 강인이었다. 꿈에라도 들릴까 두려운 중저음의 주인공이, 꿈에라도 보일까 두려운 형상 그대로 느긋하고 싸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다.
“하아…….”
민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방금 마친 사람처럼 가쁘디 가쁜 숨을 토하면서, 그녀는 부들거리는 손을 자물쇠로 가져갔다.
철컥.
문이 경쾌하고, 그렇지만 불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계속.
두근두근...어서 액션을 취해줘, 지강인씨! [09][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