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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얼음을 회피하다
33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한때 날리던 인간일지언정 시간에는, 그리고 병마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아이야.”
중키의 중년 남자는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보다 훨씬 마른 몸, 움푹 팬 뺨이 언뜻 봐도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단 걸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아이야, 라고 부를 나이가 절대 아닌데도, 남자는 여전히 강인을 그렇게 불렀다.
“니도 참말,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인간이제. 안 그랐나. 생김이랑 똑같다. 회칼로 쑤셔봐야 요맨큼도 들어가지 않을 기라. 병자 문안 한번 오는 게 그라케 힘이 드나. 맨날 전화만 하는 거, 지겹지도 않는 기가.”
남자는 강인이 아니라, 강인 옆에 앉은 치윤을 보며 웃어 보였다. 치윤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 옆에 앉은 강인을 슬며시 쳐다봤다. 젊은 보스 후보는 언제나의 포커페이스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은 채, 담담히 중년 남자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
한 달 만이었다. 중년 남자, 정명회의 총 보스인 김근현이 수술 후 병원에서 퇴원한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강인이 근현을 마주하는 것도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일단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고 지금도 계속 회복해 가는 참이었지만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도 있어서, 근현은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 푹 쉬는 것이 좋다고 담당의사는 입이 닳도록 그에게 권고했었다.
“아빠, 아빠!”
“어이고야, 우리 공주님 오신나!”
늦둥이로 얻은 유일한 자식인 딸 혜연이 응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근현에게 안겼다.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이 마냥 좋은 듯 초등학생인 소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치윤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치윤은 아이를 좋아했다. 평생 자기 아이를 가질 일은 없을 것이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아빠, 얘기 언제 끝나? 응?”
“쫌만 기다리라. 저 아저씨들이랑 얘기 좀 카고.”
어둠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내 온 인간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약한 모양이었다. 근현은 거의 슬라이딩하듯 자기 무릎 위에 탈싹 앉은 딸내미가 마냥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흐응.”
혜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는 강인과 치윤을 응시하더니, 쓱 손을 치켜들어 강인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무써운 아저씨!”
강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이 어이없는 것으로 변했다. 근현이 이내 표정을 풀고 싱글벙글 웃으며 질문을 던진다.
“니 이 아저씨가 무섭나.”
“응! 잘 안 웃어.”
혜연은 고개를 까닥까닥 움직이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 앞으로 강인이 고개를 쓱 내밀며 얼굴을 싱긋 누그러뜨렸다.
“어이, 꼬마 아가씨. 나 웃을 줄 안다. 봐.”
꼬마 아가씨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웃는 거 아니야!”
“이게 웃는 게 아니면, 우는 건가?”
“암튼 아니야! 그건 웃는 게 아냐. 웃는 척 하는 거지.”
“…….”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강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근현이 말했다.
“잠깐 나가 있그라. 아빠도 곧 나갈 기니까. ……아, 치윤이, 니도 잠깐 나가줄 수 있겠나. 혜연아, 저 아저씨랑 잠깐 놀구 있어라. 알갔제?”
치윤은 근현의 말에 따라 순순히 혜연을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근현이 탁자 위에 얹힌 녹차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녹차밖에 없다. 커피도 안된다카더라. 사는 낙이 없다, 요즘은. 혜연이 뿐이다. 아이야. 니 녹차로 괘안나? 커피 아니면 죽어도 안 되는 거 아니제?”
강인은 “괜찮습니다.” 라고 짧게 대답했다.
“참, 니는 커피 있어도 아이스크림 없으면 안 먹제. 다 큰놈의 시끼가 참말 별나게도 논다. 스물여섯이나 먹어 가지고는 아이스크림이 뭐꼬? 아이스크림이.”
중년 남자는 혀를 찼다. 어릴 때는 커피를 마신다고 야단치더니, 이젠 아이스크림을 넣어 먹는다고 야단친다. 강인도 그를 따라 녹차 잔을 들었다.
“니랑 내가 알게 된지도 벌써 10년도 더 지났구마. 참말 질긴 인연이제. 느이 아부지가 어린 니를 우리 집에 데꼬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가는 기라. 그 쪼꼬마난 아가 일케 큰 걸 보니 감개무량하다. 이라케 될 때까지 니랑 내 인연이 지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가.”
강인이 근현의 집에 온 것은 9살 때의 일이었다. 이 집에서 강인은 1년 가까이 살았다. 그 기간은 그나마 강인이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을 곁에 둔 유일한 시기였다. 그러나 10살의 여름, 그는 왔던 때처럼 맨몸으로 집을 나가야 했다.
“니, 니네 아부지 원망하고 있제.”
강인은 녹차 잔을 입에서 뗐다. 근현은 그를 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랄 만하다. 자기 핏덩어리가 10살 가까이 되도록 내버려두다 기껏 데려와서 남의 집에 던져놓고는 얼굴도 제대로 비지 않질 않나. 겨우 새 집이 몸에 익었다 싶었더니 이번엔 외국으로 휭 보내버리지를 않나. 미움을 사 마땅한 아버지제. 아무리 니한테 정이 없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어서 내도 좀 그랬다. 아들이 셋이라도 그렇제, 요 어린 아가 불쌍치도 않나 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 강인의 얼굴은 일말의 미동조차 없다. 눈동자는 아무 것도 담지 않은 것처럼 투명하고, 일체의 물기를 걷어낸 것처럼 건조했다.
“마, 내야 아들새끼가 어릴 때 죽어뿌라서 더 그란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지만 말이제. 하기사 근심도 몇 년 만에 돌아온 니를 보곤 싹 사라졌다케도. 이노마는 발가벳겨서 북극에 보내도 질갱이처럼 살아남을 놈인 기라, 그란 생각을 했다.”
근현은 한 호흡 끊었다가 계속했다.
“그랐다. 그란데 지금 내가 생각해 보니 니네 아부지가 니가 미워서 그란 짓을 한 거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인간은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 넘어도 여전히 속을 모를 종자래서, 마 장담은 못하지만 말이제.”
“저더러 청현회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근현은 강인을 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차다. 근현은 혀를 찼다. 쓴맛이 파도처럼 혀끝에 밀려든다. 9살 때 눈 그대로다. 어린놈이 저토록 서늘하다 못해 잔혹해 보이는 눈을 할 수 있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렸던 기억.
강인이 돌아온 이후로 수년을 함께 있었지만, 저 눈은 여전히 낯설다. 여전히 생소하다. 녀석의 웃는 표정, 낮은 톤을 지닌 목소리. 전부가 스스로 철저히 계산하고 내보내는 것임을 근현은 알고 있었다. 가엾은 노무시키 같으니라고.
“무슨 소리가. 니는 정명회 사람이다. 니가 지발로 나가기 전까지는 니는 누가 뭐래도 정명회 사람인기라. 그라니까…….”
근현은 쩝, 하고 목이 타는 걸 느끼고 따끈한 녹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적을 두지 마라. 니 따르는 사람들도 억수로 많은 거, 내 알고는 있지만 어린놈이라고 대놓고 싫어하는 놈들도 제법 있을 기다. 칼만 들고 살면 인간은 언젠가 찔려죽기 마련이제. 방패도 묵직하니 하나 있으면 그리 나쁘지 않다. 내 건강이 이 모냥이라 언제까지 이렇게 앉아서 너랑 얘기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고, 그라니까 니가 알아서 니 걸 만들란 말이다. 알갔나? 워낙에 가진 게 없는 놈이니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죄다 허상인 놈이니까, 아예 첨부터 니가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지 않겠나 이 말이제.”
근현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똑똑 하고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꼬? 궁뎅이에 불붙은 게 아니면 좀 기다리라케라.”
“천우 형님이십니다.”
밖에서 치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현이 쯧, 하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오고, 저노마는 매일 같이 들르는구마. 강인아 이놈 시끼야. 니도 좀 본받아봐라. 니 내를 이을 생각이 있는 기가 없는 기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주 잠깐, 1초의 짧은 여백 후 대답이 나온다. 근현은 강인을 노려봤다. 태연히 말을 받은 청년의 얼굴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감정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휴우. 같이 산적도 없는데, 저 놈은 어찌 저리 지 애비를 판박이처럼 닮았단 말인가. 그것도 정나미 떨어지는 부분만 딱딱 골라서.
“시기상조제. 그라, 저얼대 시기상조다. 이제 그만 가 봐라. 너무 오래 얘기하면 천우 놈이 뭔 대가리를 굴릴지 알 수 없다.”
강인은 근현의 말대로 몸을 일으켰다.
“몸조리 잘 하십시오.”
“니나 잘 해라.”
지남신의 날카롭고 빈틈하나 찾아보기 힘든 카리스마와는 성격이 판이한 특유의 쾌활함으로 정명회를 이끌어온 보스는 그렇게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강인은 그런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이다.”
응접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강인과 거의 비슷한……, 아니, 좀 더 클지도 모르는 키에 체구까지 건장한 그는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오른 눈썹을 치켜들며 강인을 봤다.
“오랜만입니다.”
“아버님은 건강이 어떠시냐.”
정명회의 다른 보스 후보, 35세의 여천우가 물었다. 강인은 투명하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굴절된 시선을 상대에게 쏘아 보냈다.
‘청현회 놈 주제에 감히 여기 버티고 있는 거냐.’
뼈가 그대로 비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뒤에 서 있던 치윤의 눈에도 날카로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몸이 움찔 움직이려다 멎는다.
강인은 대답했다.
“만사 제쳐놓고 매일 같이 들러야 할 만큼 나쁘진 않습니다.”
순간, 적대감을 담은 전류가 공기를 가르며 부딪쳤다. 옅은 색조를 띠고 슬쩍 입 꼬리에 매달린 강인의 미소는 결코 불손한 건 아니었지만, 상대의 자격지심에는 충분히 모욕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천우는 순간적으로 강한 충동을 느꼈다. 눈앞에 느슨한 자세로 서 있는 애송이의 목을 잡아 조이고픈 충동을.
절로 나가려는 손을 간신히 거둬들이면서 그는 상대보다 연륜이 많은 경쟁자로서의 여유를 갖추려고 애썼다. 누가 뭐래도 정명회는 그의 것이다. 청현회에서 굴러들어온 어린놈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저런 놈 따위한테……!
“건강하시다니 다행이군. 안부 전해 드려.”
억지로 짜낸 웃음. 속으로 어금니를 한껏 사려 물며 여천우는 있는 힘을 다해 여유를 부렸다.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빚어낸 결과였다.
“그러죠. ……그럼.”
강인은 부드럽게, 거만하진 않지만 어디까지나 위에 선 사람이 흔히 갖는 여유를 담아 짧게 대답하고, 그 자리를 비켜났다. 걷는 방향을 따라 적개심을 머금은 눈빛이 찌를 듯이 조여 온다. 봄볕을 쪼이는 것처럼 그 감각을 은근히 즐기면서, 강인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치윤도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34
격주 월요일은 「Chilly」가 쉬는 날이다.
그 월요일 아침, 명진연은 택시를 타고 강인의 사무실로 향했다. 강인은 그가 소유한 15층 건물 중에 13, 14층을 조직 본부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소유한 프런트 기업이자 정명 그룹의 자회사인 정명 코퍼레이션의 본사 빌딩은 따로 있다. 손님 외엔 조직원만 출입 가능한 이 건물과는 달리 정명 코퍼레이션의 본사빌딩에는 당연히 조직과 전혀 관련 없는 일반사원도 근무하고 있었다.
강인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정명회 제3지부 사무실에 도착한 진연은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현관에서 들어서자 전동개폐식인 문이 세 개가 보였는데, 하나는 통로로, 다른 두 개는 응접실 등으로 연결된 형태였다.
입구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그녀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클럽 「Chilly」의 마담은 어쨌거나 유명인사였다. 강인하고만 접촉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경호원을 따로 두고 있으면서도, 굳이 경호원을 쓸 사태가 나지 않도록 여러 조직들과 우호적인 사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표면상 드러난 커미션은 지불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큰 조직인 청현회와 친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속마음이야 어찌됐건 간에 다른 조직들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조직의 사무실이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어찌됐든 회사이기 때문에 회의실, 대기실 등 갖출 건 다 갖춰져 있는 한편, 최상층인 15층과 13층은 일반생활공간처럼 키친, 식당, 욕실, 거실, 서재, 그리고 침실까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다. 강인은 따로 자기 맨션을 갖고 있긴 했지만, 때로는 이 중 15층에서 그의 심복인 한치윤과 머무르며 밤을 새워 일할 때도 있었다.
진연이 알고 있는 강인의 주거지는 이 두 장소가 전부였지만, 아들인 강인이 집을 나가면서 청현회 보스 지남신이 준 맨션과 사무실 건물 최상층의 생활공간 외에도 강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택은 더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걸 어떤 소재로 어떻게 샀는지, 아니, 그런 걸 따지기 전에 강인이 어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강인의 전용사무실 밖 응접실에 앉아 있는 진연의 눈에 막 문을 닫고 강인의 사무실을 나오는 금발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진연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현홍 씨. 요즘 말랐네? 보스가 속 많이 썩이나보지?”
“언제나 그렇죠 뭐. 누님도 마찬가지요. 몸 관리 좀 잘 하시구려. 말라서 명태 꼬다리가 되기 일보직전이네.”
금발 청년이 특유의 건방진 투로 대꾸했다. 현홍은 정명회의 정식 멤버가 되기 전까지는 「Chilly」의 경호원으로 일했다. 그 때 이미 강인의 심복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연유로 진연과도 잘 알고 지내며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어디 가?”
“보스 심부름 갑니다. 샤발, 이 나이에 이론 짓거릴 해야 하냐고요. 따로 사람 붙이는 거 다 아는데 꼭 이 몸이 가야하나? 쯧. 아, 누님 불러요. 들어가 보슈.”
투덜대며 나가는 그를 웃으며 보던 진연은 현홍의 말대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인물은 강인을 항상 따라다니는 심복이자 비서 같은 존재, 한치윤이었다. 진연이 알기로 그는 정명회 제3지부의 자금 흐름을 총괄하고 있는 남자로, 비서라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한 ‘이사’란 직함을 갖고 있기도 했다. 언제 봐도 된 인물로 보이는 남자였다. 안경을 쓴 얼굴도 썩 괜찮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무게가 제대로 잡힌 데다 입이 아주 무겁다. 저 따위 보스 밑에서 일하기엔 아까워. 진연은 속으로만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 따위’ 보스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치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려한 얼굴은 범접하기 어려운 생소함과 아직 20대 중반인 젊음의 순수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저 남자가 ‘지강인’이 아니라면 나이 차이건 뭐건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유혹해 보겠는데. 하지만 녀석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아는 자신으로선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왜 비슷한 남자인 그의 형에게는 끌리는 걸까. 연령이 비슷해서?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사랑 같은 건 그저 한순간의 낭만이나 사치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잠시 슬픔이 어렸다.
진연은 그런 자신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방에 들어섰다. 그녀를 알아차린 강인이 손을 들어 잠깐 기다려 달라는 제스츄어를 취해 보인다.
“대흥상사가 어음을 할인해 달라고 하는데, 역시 안 될 것 같습니다. 배서해 줄 상대도 없는데다 할인하면 어떻게든 회수는 가능할 듯 보이긴 하지만, 그쪽 뒤로 하도 걸림돌이 많아서요. 제가 보기엔 한계입니다만 어쩔까요?”
“회수해.”
강인은 가차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인사를 한 치윤은, 이어 진연에게 다시 한번 묵묵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진연이 말했다.
“대흥상사 조 사장님 몇 번 뵀지만 참 좋은 분인데.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자업자득이야. 주젤 모르고 문어발로 확장하려 했어. 요즘 같은 경기침체에는 당연히 적자로 돌아설 수밖에.”
강인은 차갑게 말하면서 커피 메이커 앞으로 향했다.
“얼만데.”
“1억. 그 정도의 돈을 우리한테 애걸할 만큼 자금융통이 안된다는 거다. 우리한테 받는 융자는 금리만으로도 뼈가 휘어. 변제 기대가 없다면 당연히 당좌의 자금융통은 택도 없지. 은행에 저당 잡힌 자택까지, 그것도 헐값으로 처분했다. 이번엔 어음 할인이라. 그것도 고작 2천이야. 그걸 할인받아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인데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볼 때 꽤나 뒤가 구려. 곧 쓰러질 거다. 우리가 도와줘 봐야 데쓰타임을 불과 며칠 뒤로 미룰 뿐이지. 설명하는 것도 웃기는군. 명진연이 누구를 동정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잖아?”
강인은 드물게 길게 말하고는 훗, 하고 웃었다. 실크 와이셔츠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 솟아 있는 힘줄이 보였다. 진연은 그런 그에게 시선을 떼고 원두커피물이 또로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에 내가 말해 준 약……, 샤부 말이야. 어떻게 됐어? 일본에서 들여온 거 맞니? 상당히 대량으로 풀린 것 같던데 어떻게 들여온 거지, 그거?”
강인은 머그 컵에 커피를 따르고서 바로 옆에 있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쟁반 위에 얹은 다음, 손수 진연이 앉아 있는 자리로 들고 왔다.
“5월에 한일 친선 요트 레이스가 있었어. 그 때 들어왔겠지.”
강인이 말하는 요트 레이스란, 부산의 해운대에서 출발해 대한해협을 가로질러 후쿠오카(福岡)의 하카타 항에 이르는 이른바 아리랑 레이스를 가리킨다.
후쿠오카는 합법이건 불법이건 간에 일본에서는 한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거래의 창구 같은 곳이다. 또한 인천이 중국 쪽과의 연결고리인 것처럼, 부산 역시 일본과의 거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같은 항구도시라도 강인의 관할구역인 인천에 반하여 부산은 그가 직접적으로 맡고 있지 않은 지점이었지만, 그럼에도 짐작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부산과 후쿠오카간의 레이스에 참가하는 배에 대한 검열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다. 간단한 이치였다. 배를 레이스에 참가하는 선박과 비슷하게 장식해 여타의 선박들에 섞여 부산에서 나온다. 대마도로 들어가 물건을 받아서 나온 뒤 다시 부산 부근에서 다른 어선으로 옮겨 제3의 항구로 보낸다. 그런 뒤 물건을 전부 넘겨 준 홀가분한 상태로 배가 부산으로 돌아가면 모든 작업은 끝나는 것이다.
개인이 운반하는 것보다 대량입수가 가능할뿐더러 레이더망에 포착될 가능성도, 혹 포착되더라도 다른 선박에 뒤섞여 발각될 가능성도 희박한 방식. 이것은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치윤이 그물망을 통해 얻어낸 믿을만한 정보였다.
문제는 그 약을 ‘어떤 루트를 통해’ 들여왔는가가 아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들여왔는가다. 북한산 샤부가 시장에 대량으로 풀리고 있다는 소식은 그로서는 그냥 지나칠 정보가 아니었다.
더구나 강인의 라이벌인 여천우의 수입이 갑자기 늘어났단 정보를 얻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말이다. 여천우는 분명히 지난 5월, 부산에서 움직였다.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어. 강인은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연은 충분히 그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너도 약에 손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왜, 안돼?”
진연의 말에 버릇처럼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있던 강인은 고개를 들었다.
“안돼! 딴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안 되는 거 알잖아? 넌……!”
진연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아픈 데를 찌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누군가가 죽었었다……. 약에 중독 된 상태로.
그 처참한 광경을 진연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또 한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 처참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강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녹인 커피를 마시더니, 자세를 느슨히 한 채 진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 뭔가 알아보러 온 거 아니셨던가, 명진연 씨?”
자기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진연은 일부러 더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클럽 말고 다른 사업을 슬슬 알아보고 싶어. 이왕이면 새로 건설할 주택 단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싶은데, 기획하고 있는 거 없니?”
“예를 들면?”
강인이 물었다. 진연은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포기하고 대답했다.
“서점……, 같은 거.”
35
“Last question. Why do you want to be an exchange student(마지막 질문. 왜 교환학생이 되고 싶습니까)?”
민하는 놀라서 인터뷰어의 얼굴을 고쳐봤다. 이런 질문을 받았단 것에 놀란 게 아니고, 이번 질문이 마지막이었단 사실에 놀란 것이다. 당연히 인터뷰의 첫머리에 나와야 할 질문이었는데, 지금까지 묻지 않아서 좀 불안하긴 했다. 인터뷰어가 자신의 멍한 표정을 봤는지, 약간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민하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이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냉큼, ‘도망치고 싶은 놈이 있어서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First of all, the reason I wa……."
진짜 진부하다. 미리 외워둔 모범답안을 줄줄 말하고 나니 인터뷰가 끝났다. 그녀는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에 한숨을 몰아쉬면서 방을 나왔다.
교환학생을 위한 영어면접이 끝났다. 제대로 대답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난학기 내내 영어공부를 하긴 했지만 역시 모자라는 기분이다. 운명에 맡겨야겠지.
인터뷰 내내 꺼 놓은 휴대폰 전원을 넣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휴대폰이 달달거리며 진동을 시작했다. 민하는 액정화면에 찍힌 번호를 보고, 이제는 포기한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폴더를 펼쳤다.
“……예.”
[ 오늘은 학교에서 볼 일이 있다더니, 끝났어? ]
기분 탓일까, 예상외로 부드러운 중저음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다. 그녀는 “네.” 하고 결코 부드럽지 않은, 하지만 그리 딱딱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다 포기한 사람의 담담함이다. 초월자 다 됐다, 서민하.
[ 정문으로 나와. 차를 보냈으니까. ]
“네.”
크리스마스이브 이후로, 민하는 강인의 말에 절대 거역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나오라면 나오고, 들여보내주면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 동안 단 한번도 강인이 육체적인 접촉을 제안한 적은 없었지만, 자유를 빼앗겼단 점에 있어서는 역시 한심하기 그지없는 상황. 나, 이조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서커스라도?
한심하지만 네,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단 사실을 강인이 알아차린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요 일주일동안 연락이 없더니, 자유의 시간은 고작 그것뿐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의 생각을 들키지 않도록,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주의하자. 말을 아끼도록 하자. 교환학생에 합격한다면, 일단은 한 학기만 버텨내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였다. 무엇이 어떻게 싫은 건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것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오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강인을 경멸하면서도 호기심을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방패 막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다. 아, 겨울치고는 날이 좋구나. 따뜻한 날씨……. 근데 난 왜 이렇게 기분이 꿀꿀한 거지? 응? 왜 이렇게 심란한 거야?
민하가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걸음을 멈췄을 때, 뒤에서 누가 툭 하고 어깨를 건드렸다.
“응? 아, 예주언니!”
민하는 반갑게 자신을 보고 있는 얼굴을 보며 자신도 마찬가지로 웃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그래. 참, 너 오늘 영어 인터뷰랬지? 잘했어?”
“그냥 그랬어요. 언니는 방학인데 웬일로 나왔어요?”
예주가 가방을 펼쳐 안에 든 파일을 보여줬다.
“유상규 교수님이 인턴사원 관련 일로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내내 방에서 데이터 정리하다가 왔지. 올해도 지원자가 엄청나게 많은가 봐.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더라.”
“언니도 할 거죠? 인턴사원.”
“응. 그러니까 데이터 정리 돕겠다고 나선 거지. 어머, 근데 너!”
“예?”
민하는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변한 예주의 말투에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깜박였다. 예주가 손을 턱 잡더니 얄미운 듯이 그녀를 흘겨본다.
“이거 뭐야? 기집애, 얄미워라. 남자친구 생긴 거 티내는 거니?”
민하는 예주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감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색이 파란 듯 노란 듯 붉은 듯 이상한 색으로 변해갔다.
“어머, 내숭! 야, 근데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울 언니 결혼반지도 이거보다 훨 못했던 것 같은데. 끝내준다 얘. 누구한테 받은 거니, 이거? 앗! 그러고 보니 너 귀에도 비슷한 거 했네? 세트니?”
“아……, 네.”
민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예주가 그녀를 쿡쿡 찌르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진한 호기심이 어린 표정이다.
“누구야? 응? 엄청 부잣집 남잔가 보다.”
부자는 부자인데, 그게 썩 좋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부자 같지 않네요. 민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예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래? 그 남자, 내가 아는 사람이니?”
민하는 차마 말을 못하고 예주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주는 그런 그녀를 의심스런 낯빛으로 보다가, 이윽고 눈치 챈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혹시……, 지강인 선배?”
민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박였다. 예주는 자신의 예감이 맞은 걸 깨닫고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결국 그렇게 된 거였어?
“너, 결국 사귀기로 한 거야?”
“네.” 라고밖에 답할 도리가 없었다.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지강인 선배 잘생기긴 했지만, 괜찮은 거니?”
예주의 걱정 어린 말에 민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려 대답하고, 이내 생각하기 싫은 화제에서 말을 돌렸다.
“인제 가시는 거예요?”
“응. 넌?”
“저도 가려구요.”
귀 뒤로 넘겼던 머리를 내려 귀걸이를 가리면서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나 오늘 차 갖고 왔거든? 후문 주차장에 세워뒀는데.”
예주는 마침 잘됐단 듯 손뼉을 딱 치더니, 민하의 팔짱을 끼었다. 민하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전 됐어요.”
“혼자 가려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참. 너, 오늘 그 선배 만나니?”
민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가 선행을 베풀지 못해선지, 아니면 그런 그녀가 딱해선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 수 없지. 담에 보자. 넌 정문 쪽이지? 나중에 봐.”
“나중에 봐요, 언니.”
민하는 다시 조그맣게 한숨을 쉬면서 예주가 손을 흔들고 자신이 갈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니잖아. 내가 왜 이렇게 끌려 다녀야만 하는 거지?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 끌려 다니고 싶은 것은 아닌데……. 호기심과는 별개로 이렇게 막무가내로 잡혀 있는 건 싫단 말이야!
움켜쥔 주먹이 꿈틀, 하고 떨렸다.
“언니, 잠깐만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계속.
댓글 '18'
달에 한번 정도 이벤트성으로 올라오는 얼음 읽는 재미 쏠쏠합니다~!^^;
이번회 보고 드는 생각인데
민하는 남은 한 학기 동안 강인씨에게 완전히 넘어가겠더군요.
도망치듯 유학 가봤자 도로 잡혀 오겠지만 그나마 떠나지도 못할 공산이 크겠어요.
풍운의 꿈을 안고 떠나는 유학은 아니라 나중에라도 땅 치고 후회하진 않겠지만 반년만에 넘어가주려니 속상하겠군요.ㅋㅋ
여행 다녀와 모든걸 털어낸듯 싶더니 다시 우울모드에 돌입한 요즘입니다.
오랜만에 파워 온 한 컴터인데 얼음하고 딱 마주치니 왠지 기운이 나네요.^^
제게 up할 처방약이 되어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약발도 오래가기를...;;; [0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