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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헉……!”
막 집에 돌아와 부엌 불을 켠 민호는 심장 떨어지는 쇼크를 받았다. 부엌의 2인용 식탁 의자에 여동생이 기척도 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무릎을 껴안고 있는 모습은 흡사 처녀귀신의 형상이다.
“깜짝 놀랐잖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늦었네.”
민하가 식탁 위에 얹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감추며 말했다.
“성은 언니 만났어?”
“지금 염장 지르는 거냐? 며칠동안 얼굴도 못 봤다.”
“에? 크리스마스이브에 뭐했어, 데이트도 안하고.”
“일했다, 쳇.”
민호는 대꾸와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서류가방을 식탁 위에 집어던졌다. 민하가 허걱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서류가방이 그녀 쪽으로 날라 와서 그런지, 신경질적인 오빠의 표정에 놀라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라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일했다는 말에 놀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마무리지어야하는 일이야? 내일도 나가야 하는 거야?”
“음. 의도했던 건 아닌데 그렇게 됐다.”
코트를 벗으면서 민호가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뭐야, 갑자기.”
민호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여동생을 내려다봤다. 민하가 눈을 어설피 깜박이며 민망한 듯 대꾸했다.
“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기밀사항이야? 내가 물어보면 안돼?”
민호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아냐. 내일 뉴스에도 나겠지만, 남영파라는 조직 전 보스가 은행에서 부당대출을 받아서, 거한……, 그러니까 한 천억 원대? 사업을 벌이다 특경가법 위반으로 잡혔거든. 근데 그 사업이란 게 원래 소유주를 협박해서 강탈하다시피 한 것인데다 신성파란 타 조직과도 복잡하게 연관돼 있더라고. 하튼 그래, 이래저래 가지를 길게 뻗다보니 제법 잡아들였고. 그 와중에 마약도 오고가는 바람에 이쪽저쪽이 다 물고 늘어져야 만큼 큰 사건이 돼버린 거지. 어쨌거나, 간만에 제대로 한 건 건진 거라서 물고 늘어진 보람은 있어.”
‘물고 늘어진 보람’ 정도로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민호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근 석 달 동안 끈기 있게 따라붙었던 신성파의 꼬리를 미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잡아낸 것이다. 힘들었지만, 그 승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인과의 데이트도 반납하고 일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메리 크리스마스다.
말을 끝내고 여동생을 보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고 있다. 민호는 한 텀 쉬고 뚱하게 덧붙였다.
“그딴 건 왜 묻는데?”
“오빠, 검사 일 재밌어? 관두고 변호사 하면 안돼?”
“뭐?”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있던 민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린다. 오빠가 묻기도 전에 민하는 서둘러 먼저 대답했다.
“응. 아니, 그냥. 조직이니 협박이니 그런 말이 나오니까 어쩐지 좀 겁이 나서 그래. 위험할 것 같아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민하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돈도 코딱지만큼 벌잖아.”
민호가 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언. 누가 경영학도 아니랄까 봐. 이 와중에도 머니 타령이냐? 걱정 마라. 검사는 변호사보다 돈은 못 벌지만 딴 이점이 있으니까.”
“명예?”
“그런 것도 있지만 글쎄. 말하자면 기소유예권 같은, 변호사에게는 없는 중요한 권한이 있거든. 일종의 파워지.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권한이나 파워란 거 진짜 중요한 거다, 너?”
“그럼 검사일 그만 둘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당분간은.”
“그래…….”
민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왜 그래?”
민호가 눈썹을 찌푸렸다.
“응,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신경 쓰지 마.”
“자식. 실없기는.”
“오빠,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코코아 한잔 타 주면 답해 주우지!”
민호는 벗어든 코트와 재킷을 들고 방으로 걸어가며 히죽이 웃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의 투다. 정말이지 나이 값도 못한다. 유치하기는.
민하는 툴툴대며 땅에 발을 내리고 일어섰다. 주전자에 우유를 담고 가스렌지에 불을 켰다. 우유가 막 끓기 시작했을 때, 언제나 집에서 입는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은 민호가 돌아왔다.
“이게 뭐냐? 교환학생?”
코코아 분말을 컵에 담고 있던 민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식탁 옆에 기대선 자세로, 젊은 검사님은 교환학생 지원요강이 씌어진 브로슈어를 집어 들었다. 팔락팔락 소리 내며 책장이 넘어간다.
“너 교환학생 갈 생각이냐? 그래서 지난 학기 중에도 그렇게 토플을 뻔질나게 쳤던 거야?”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성적표가 집에 오는데. 그래, 점수는 잘 나온 거냐? 교환학생 가는데 모자라진 않아? 그거 지원가능 점수 꽤 높지 않나?”
민하는 컵에 우유를 부으며 대답했다.
“으응, 270은 넘었어. 작문도 그럭저럭 점수가 괜찮은 것 같고. 일단 지원은 할 수 있을 거야.”
“오, 잘됐네.”
“근데 나, 가도 될까? 돈이 많이 들 텐데…….”
“바보.”
민호가 안내책자를 내려놓더니 척, 팔짱을 꼈다.
“니 하고 싶은 거면 해야지. 얌마, 내가 그 정도로 한심해 보이냐? 검사 봉급이 아무리 적어도 여동생이 하고 싶단 거 지원해 줄 기력은 있어. 하고 싶으면 해. 가고 싶으면 가. 남 눈치 보지 말고.”
민하는 말없이 스푼을 저었다. 분말이 젖어서 덩어리가 되고 퍼져서 묘한 색을 만들어간다. 그 광경이 왠지 요즘의 자신처럼 보였다. 아무 걱정도 없던 흰색의 공간에 갑자기 침범해 들어온 이물질이 녹아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빠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선뜻 결정할 수가 없다. 사실 토플을 치긴 쳤어도 교환학생을 꼭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하루라도 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슨 일이 터질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요즘이 두렵다. 겁이 난다.
“언제 뽑냐?”
“1월 초에 면접이 있어. 스피킹 테스트. 그리고 1월말 쯤 발표가 날 거야.”
“그래서 언제, 얼마동안 가는 건데?”
“내년 가을학기부터 1년.”
“일단 지원해 봐. 뭘 벌써부터 고민하고 그러냐. 어차피 떨어질 지도 모르잖아. 너 토플 점수는 그렇다 치고, 꼬부랑말은 잘 할 수 있겠냐?”
“뭐야? 내가 붙음 어쩔 건데!”
또, 또 시작이다. 저 무시발언. 지금 내가 저 인간을 위해 코코아를 타고 있는 거란 말이야?
“푸핫, 그 때는 장하다고 볼에 뽀뽀해 줄게. 어때?”
“사양하겠어요.”
민하는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민호 앞에 힘차게 내려놓았다. 물이 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민호는 자기 취향에는 좀 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바로 맞는다.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근데, 아까 물을 거 있다며.”
“아, 맞다.”
민하가 생각난 듯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민호를 봤다.
“아까 오빠가 말한 조폭 말이야. 그거 문신 같은 거 새기고 칼부림 샥샥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 아냐? 겉보기에는 멀쩡해 뵈는 조폭도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음……, 말하자면 대학생 같은.”
“세상에 개가 한 종류냐?”
민호가 쌈박하게 말했다.
“불독도 있고, 허스키도 있고, 푸들도 있고, 진돗개도 있지. 같은 진돗개라도 흰 놈도 있고 누런 놈도 있잖아. 잡견도 있고. 조폭도 그런 거야. 네가 말한 것처럼 문신 파고 칼부림하는 조폭도 물론 있지. 근데 그런 자식들은 사실 잡것들이야. 이제 막 고뿔 딱지 뗀, 머리에 물도 안 마른 것들도 대여섯 명만 모이면 조직을 만든답시고 칼 들고 설쳐대는 세상이거든. 그런 놈들이야 가끔 기회 봐 가지고 감방에 넣어주면 되는 거고. 개과천선하라고 보냈더니 지들끼리 뭉쳐 가지곤 2차로 설칠 수가 있으니까 자주 보내도 골 아프지만 말이야. 그래봐야 그런 놈들은 사실 큰 문제가 안돼. 진짜 문제는…….”
민호는 한꺼번에 너무 길게 말했는지, 한 박자 짧게 쉬고 계속했다.
“문신도 없고 칼부림도 안 하는 놈들이야. 겉보기엔 전혀 폭력조직 같지 않은 것,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아 뵈는 게 진짜 거물급이라고. 그러니까, 기업형 조직 말이다. 외국 조직들과도 연관되어 있고, 정경분야 높은 분들하고도 이어진 매듭이 워낙에 단단해서 알아도 손대기 힘든.”
민하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너 아는 누가 조폭 됐냐? 갑자기……웃, 뜨거!”
생각 없이 코코아에 입을 댔다 혀를 데고 쩔쩔매는 오빠에는 아랑곳없이, 민하는 다시금 어떤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 뭣보다 우리 집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단 말이지. ……뭐, 문제가 생겨도 나대신 처리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집안 ‘빽’이 좋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목부터 가슴, 팔까지 선명하게 남은 키스마크와 악마처럼 입 끝을 올리며 웃고 있는 남자의 미소가 떠오르자,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백이 있으면 그 따위로 놀아도 되는 거야? 사악한 놈! 재수 없는 놈! 그런데.
- 난 이런 방식 외엔 알지 못해. 쉽고 빠른 방식. 그 외엔 몰라.
- 11살 이후론 누구랑 함께 살아본 적이 별로 없어.
민하는 오빠에게 들키지 않도록 시선을 내려 왼손에 곱게 끼워져 있는 반지를 들여다봤다.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키친에 켜진 희미한 불빛을 반사하며 존재를 과시한다. 오른손을 들어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귀걸이를 만졌다. 손가락 끝에 미묘한 감촉을 가하며 걸리는 보석의 각이 어쩐지 버겁게,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은 상냥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궁금해진다. 두려움이나 혐오감만큼이나 호기심도 점점 강렬하게 피어오른다. 그 인간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과거를 감추고 있는지, 어쩌다 저런 성격이 됐는지, 자꾸만 궁금해진다. 사실은 그런 자신이 가장 싫었다.
왜 하필 그 따위 인간한테!
푹푹, 한숨만 흘러나온다.
민하는 당장 교환학생 신청서를 접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실은 다 쓰고 연재하려 했었답니다.
그런데 도무지 손에 잡을 시간 자체가 없더라구요.
얼음은 대체 언제 완결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하도 소식이 뜸해서 그냥 하나 올려봅니다.
다들 얼음을 찾으시겠지만 우선은 그냥 잊어주시고,
다음에는 코믹물 중단편 정도로 잠시 숨을 돌리겠습니다.
부디 저 자신과의 건투를 빌어주세요.
항상 고맙습니다(횡설수설).
마음 전환하시고 돌아오셔도 저는 마냥 기쁩니다. 단 돌아와만 주신다면요.ㅋㅋ [07][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