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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강인의 손에 의해 침대로 옮겨졌을 때.
민하는 침대바닥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중력감이 자신의 몸을 아래,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음을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기묘하고도 절망적인 감각.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의로, 라고 했잖아요?”
다만 그녀는 조금은 애원 섞인 질문, 아니 항의를 건넸을 뿐이었다.
일부러 일어나서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란 사실을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누운 상태로, 위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강인의 눈을 응시했다. 이때까지 이 남자의 눈을 제대로……, 제대로 마주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던 것 같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얼음 끝에 베일 것 같은 두려움에, 언제나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내리깔곤 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투명한 눈이다. 너무나 투명해서 감정을 읽기가 힘든, 그런 눈.
또렷한 선을 지닌 채 길게 찢어진 눈 꼬리 밑으로 청명한 흰자위. 그리고 대조적으로 칠흑의 눈동자는 광택이 너무 선명해서 그 진한 흑색에도 불구하고 색소가 엷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느끼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누워 있는 지금 이 자리가, 이세계(異世界)로 변화한 것 같았다. 넓은 침실의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매트리스 위가 아니라, 몸 아래와 바닥 사이를 메우고 있는 공기판 위에 가볍게 얹혀 있는 감각.
그 정도로 다른 전부에 대한 느낌을 잃었다.
이 남자…….
이 남자가 그렇게 만든다.
그런 몽롱함에 휩싸여 있던 민하는, 강인이 그녀가 입고 있던 카디건형 스웨터를 벗기기 시작한 때에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뭐……, 뭐, 하는…….”
“말했을 텐데?”
강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낙인을 새기려는 거야.”
그 말투도, 행동도, 오싹함에 냉기를 더한다.
“움직이지 마.”
라고.
방심했어!
아니……?
방심했던 건 아니다. 그런 건 아냐. 분명히 빠져나가야 한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돌아간다, 경박한 자신에게.
이런 걸 호기심이라고 하는 걸까? ‘나’를 최하로 떨어뜨리면서, 결국 자신의 몸은 언제나 이 자리에 남아 있다. 지강인이란 남자에게 붙들려 있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이런 건 싫은데……. 정말 싫은데…….
성원 오빠……!
민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자신을 억누르며, 이 순간 무리해서라도 도망쳐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이미 남자에 의해 반쯤 움직임을 봉쇄당한 상태였다. 몸을 비틀어 보려고 몇 번 시도해 봤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무위로 돌아간다.
카디건이 제거되고, 안에 받쳐 입었던 티셔츠가 위로 끌어올려지고, 브래지어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선명하게 튀어나온 쇄골부위도, 좁고 살이 거의 없는 어깨도, 그 아래 창피할 만치 애티 나는 젖가슴도, 모두모두 드러나 버렸다.
“……싫…….”
이게 내가 아니었으면…….
여기 이렇게 한심하게 누워 있는 게 내가 아니었으면…….
민하는 기도했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 지금 순간이 제발 꿈이길 기도했다.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언제나 냉소를 담고 비틀려 있는 입 끝은 지금만큼은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그저 시선을 내리꽂아 자신을 잡아 누르고 있을 뿐. 굳어서……,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다!
“……!”
남자의 얼굴이 자신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체 위로 떨어졌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죽인 비명을 올렸다. 싫어! 이러지 마! 싫어! 싫단 말이야!
무의식중, 당연히 그가 유두에 입술을 가져가리라 생각했다. 고개가 떨어지는 방향도 그랬고. 아니, 무엇보다 그저 그럴 것 같았기에.
그런데 예상을 깨고 남자가 입을 맞춘 자리는,
유방 사이.
“살아 있군.”
심장에 입술이 떨어졌다.
장작불에 달군 인두가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너무나 뜨겁다. 가볍게 건드렸을 뿐인데, 너무나 자극적이다.
“살아 있어…….”
강인은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의식을 치르는 듯, 주문을 외는 듯. 몽환적인 동작으로, 어딘가 억누르는 듯한 말투로.
쿵, 쿵, 쿵, 쿵.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쿵쿵쿵쿵…….
민하는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심장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 자신은 살아 있어. 그 사실을 이렇게 극명하게 느낀 적이 일찍이 있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
‘물건’이라고 한 주제에, 꼭 신상에 경배를 바치는 것처럼 입을 맞춘다. 음란한 것과는 거리가 먼 동작으로.
왜……?
그 때.
강인이 고개를 들어 귓가로 입술을 가져왔다. 그리고 들리는 농후한 속삭임.
“그렇게 얼굴을 붉힐 건 없잖아? 볼품없는 가슴인 건 사실이지만. 뭐…… 자꾸 만져주면 조금은 커질지도 모르지.”
“이……!”
이, 망할 자식! 이번에야말로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벌떡 일어나려던 민하는 큰 손에 의해 어깨가 눌려버리고 말았다. 버둥거리는 몸을 간단하게 제압당하자, 설상가상으로 숨까지 컥, 하고 막혀 와 겨우겨우 노려보는 것이 전부.
“아직 안 끝났어.”
남자의 목소리가 비열하게 울린다. 그리고…….
“아……!”
입에서 짧게 비명소리가 샜다. 강인이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깨물었던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슬쩍’ 깨문 것으로 민하가 비명을 지른 것은 아파서라기보다는 놀라서였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먹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심어주는 데는 충분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제발……. 그만…….”
목덜미를 빨리고 있을 뿐인데, 전신을 잠식당하고 농락당하는 기분이 든다. 뱀파이어에게 먹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추릅, 소리를 내며 입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실감했다. 혀는 절대 사용하지 않은 채, 그저 깨물고 빨아 당길 뿐.
목덜미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팔 위쪽으로…….
마치 자신의 영역이란 표시를 하듯 천천히 움직여간다.
뭐?
영역?
……이런!
정말로, 단순한 농락이 아니라 낙인이었어!
민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 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옆에 떨어져 있는 옷으로 몸을 가리는데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언뜻 시야에 들어온 팔, 강인의 입술이 닿은 바로 그 자리에 새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낙인.
말로만 듣던 키스마크. 진하디 진한 주홍빛으로 새겨진 자국은 최소 일주일간은 지워지지 않을 듯싶었다. 민하는 그걸 본 순간, 토할 것 같아지고 말았다.
“정말 싫어!”
머릿속의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자신이 창녀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창녀랑 다를 게 뭐지? 지금 내가 하는 짓은 조건을 걸고 내 몸을 저 자식한테 맡기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더 싫은 건 자신이 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
젠장! 최악이다!
이게 타협이야? 타협? 웃기지 말라 그래! 이건 장사야! 넌 최악으로 저질스런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서민하!
민하는 이를 악물고, 악마처럼 미소 짓고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자신에게인지 상대에게인지 모를 분노와 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게 낙인이란 말이죠. 하, 이 정도는 금방 지워질 걸요? 내가 여기 신경이나 쓸 것 같아요?”
그것은 당연히, 반 오기였다. 상대를 도발해 봐야 자신에게 이득 될 게 없건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다시금 스스로 입을 열게끔 부추기고 있었다.
“더한 걸 바라는 건가?”
다시 말문이 막힌다. 부릅뜬 두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민하를 거리낌 없는 시선으로 마주보며, 강인은 마치 노래하는 것 같은 투로 덧붙였다.
“지워져도 상관없어. 다시 새기면 되니까.”
“…….”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인내심이 꽤 강하다고. 반복 작업도 별로 싫어하진 않는단 소리야. 그리고 또, 이 작업은 할 때마다 약간의 변형도 가능하거든?”
“…….”
“뭐, 이걸로 만족할 수 없다면야…….”
강인은 웃으면서 그녀가 몸을 가리고 있던 옷가지를 지극히 간단한 동작으로 제거했다. 그리고 다급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드러난 젖가슴을 가볍게 입으로 빨더니, 막 진동하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아.”
민하가 급한 동작으로 티셔츠가 뒤집어져 있는 것도 모른 채 옷을 입고 있는 동안, 강인은 수화기에 대고 짧은 대답을 토해냈다. 온통 흐트러진 상태인 민하와는 달리 그는 상의와 하의를 제대로 갖춰 입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얄미우리만큼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기 몸을 가리는데 정신이 팔려서, 민하는 어느 새인가 강인의 얼굴에서 늘 희미하게 번져 있는 웃음기가 싹 걷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음성도 태도도 어디까지나 침착했지만.
“……아. 잊지 않았어.”
핸드폰을 대고 있는 귓불에는 여전히 담배 모양의 피어스가 매달려 있다. 이제 민하는 그것이 진짜가 아닌 도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절반쯤에서 잘려 두 개를 이어 다는 형태라는 것도. 조금만 멀리서 봐도 진짜 담배라고 착각할 만큼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그것 외에는 특이할 것도 없고,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일 리도 없는 장식. 어째서 강인이 집착하듯 한쪽 귀에 매달고 다니는지 볼 때마다 궁금했다. 어쨌든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그 자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장식이 지강인이라는 남자에게 지독하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강인이 담배 피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응?’
의외였다. 온갖 좋지 않은 짓은 혼자 다하고 다닐 것 같은 남자가…….
윽,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민하는 슬쩍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헉!’
“흐음……,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현홍이 놈, 있어?”
막 움직이려던 그녀의 팔을 휙 붙든 강인은 이어, 허둥대는 몸까지 잡아채고는 상대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감아 강하게 힘을 실어 끌어당겼다. 물론 그런 동작을 하면서도 변화 없이, 외려 느릿한 톤으로 목소리를 내보낸다.
“데려다 줘야 할 ‘아기 새’가 있거든. 놈하곤 안면도 있으니까……. 아아.”
잠시의 여백을 두고, 그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오, 알겠습니다. 잔소리꾼 아저씨. 그 물건도 지금 부탁하죠.”
폴더가 접혔다. 전화를 끊은 강인은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고는 급하지 않은 동작으로, 하지만 두 손을 다 써서 민하의 몸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손……! 움직일 수 없게끔 여자의 턱을 잡아 쥔 남자의 수려한 얼굴에 잠시 지워졌던 미소가 다시금 번져나간다.
오직, 입술만. 입술 끄트머리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가 진짜로 웃는 얼굴을 본 적……, 단 한번도 없다.
단 한번도.
“또 낙인을 새겨줄까? 다른 사람 앞에서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담배 피어스가 조롱하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얌전히 있는 게 좋아.”
낙인 말 그대로 낙인이네요....... [01][01][01] [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