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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얼음에 제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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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속으로만 한숨쉬었다.
지독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지독한 크리스마스이브다.
눈 따윈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바깥은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춥고, 바람은 쌩쌩 휘몰아쳤다. 저도 모르게 옷깃에 두더지처럼 머리를 파묻게 되는 날씨. 낭만 같은 건 약에 쓸려고 찾아봐도 없다.
그런 반면, 실내는 또 성가실 정도로 더웠다. 배는 더부룩하고 속은 메슥메슥. 실내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메슥거림이 섞이자, 그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져간다.
트리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언제 봐도 횡 한 집안이었다. 단 한사람을 위해서 이런 큰 집을 마련했다는 건 아무래도 낭비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썰렁하고, 한편으로 덥다. 아마 바깥 기온과의 차이에 의해 느껴지는 체감 탓일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 한 겹 차단해서 들어오는 바깥 정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20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렇게 바보인 걸 몰랐다니 정말 바보는 바보인가보다. 어쩌자고 또 다시 이 공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일까. 여기 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 또.
그럼에도 정신이 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다. 휩쓸려서 이 자리에 멈춰 있다. 마치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아. 어지럽다. 사실은 핑계대서는 안되는데.
먼저 전화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강인이 보인다. 남자가 가볍지만 따뜻해 보이는 캐시미어 코트를 벗었다. 이내 얇은 니트로만 싸인 상체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의 시선에도 하나 흔들림 없이 자연스레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면서 그가 물어왔다.
“밥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대꾸한다.
“먹었어요.”
천만의 말씀. 뭐가 들어가야 먹지. 입덧하는 여자처럼 음식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하는 판에 먹기는 뭘 먹는단 말인가. 그냥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누구 때문에 요즘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전혀 먹을 수가 없어, 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기까지 말없이 끌고 온 주제에, 지금서야 묻다니. 그런 건 보통 밖에서 먼저 묻고 들어와야 하는 거 아냐?
“자, 그럼 들어볼까.”
강인이 소파에 느긋이 앉아서 턱을 괸 채 민하를 응시했다.
“불러낸 이유는?”
그녀는 여전히 서 있는 상태였다.
발목이 조금 아리지만……. 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전화할 때 말했잖아요. 유준이랑 만나는 거, 더 연락하지 않겠단 말 하려는 거니까, 넘겨짚어서 미리 사이코 짓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리고?”
민하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타협하자고요. 협정을 맺죠, 우리.”
“안을 제시해 봐.”
남자의 눈이 흥미로운 듯 반짝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말을 잇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안기란 얘기, 말인데…….”
에잇, 이판사판 삼세판이다!
“섹스, 말인가요?”
껍질에 싸인 호도를 빙빙 돌리면서 만져봐야 닳기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알맹이. 돌려 말해봐야 상대에게 당할 빌미를 제공할 뿐인 걸. 껍질은 부숴버려! 민하는 모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시선을 도전적인 투로 아래 방향으로 돌렸다. 턱은 외려 빳빳이 세우고 남자를 내려다본다.
- 어떤 이유로든 여자한테 손을 대는 남자는 정신적 고자나 다름없어.
강인은 최초로 직접 마주대했던 때의 그녀가 떠올라 나직이 웃었다. 그래, 저 상태가 딱 좋아. 저 여자는 아무리 숨을 조여도, 끝까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항의를 해올 것이다. 제풀에 흔들리고 무너져 자포자기 하는 일은 없겠지.
직감으로 느꼈다. 스스로 자유를 버리는 간접적이고 역설적인 방향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스트레이트하게 부딪쳐 올 것이다. 그 점이 즐겁다.
그렇다고 일부러 상처 입힐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손에 들어 있으면 된다. 지금 이 순간 새의 몸이 내 손바닥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벗어나려고 한다면 또 다시 ‘간접적이고 역설적인’ 방법으로 갈굴 수밖에 없겠지만.
“말해두지만, 지금 당장은 싫어요.”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요.”
여기서 물러서면 진다. 정말로 지게 되는 것이다. 민하는 턱에 더욱 힘을 주며 바닥에 굳건히 발을 댄 채 버텼다. 어설프게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빳빳하게 굳은 여자를 안는 게 좋겠어요? 최소한 내가 선배한테 익숙해질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선배 말대로 다른 남자 안 만나겠어요. 용건이 있어서 만날 때는 미리 얘길 할게요.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요? 그리고 공부나 알바 등을 뺀 여유시간에는 선배랑 있겠어. 공식적으로 선배랑 커플선언 하겠단 얘기에요. 어쨌거나 표면상 나는 ‘선배의 여자’니까.”
강인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눈을 떼지는 않고, 그저 침묵할 뿐.
“자. 의. 로, 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죠? 자유의지 운운한 사람은?”
강인은 민하를 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묻어 있는 얼굴을 꼿꼿이 든 채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여자는 놀랍게도 미소 짓고 있다.
그렇다.
이 꼬마 아가씨는 정식으로 자신에게 협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만일 원만한 타협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때는 정말로 자신에게 정면도전해 올지도 모를 그런 의지를 온 몸에서 발산하고 있었다.
강인은 천천히 턱을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턱에서 뗐다. 그리고 그 손을 바닥을 위로 한 채 올린 다음, 손을 약간 오므린 상태에서 검지를 슬쩍 까닥였다.
“……?”
민하는 당혹해서 그를 고쳐봤다. 그러자 낮고 느긋한 음성이 울린다.
“증거.”
“증, 거?”
남자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 달이 뜨듯 희미하게 빛이 서린 것이 보였다.
“내가 신뢰할 수 있도록, 증거를 줘봐. 이리 와서,”
그리고 가볍게, 당연한 듯 이어진다.
“……키스해.”
휴우…….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이다. 기대도 안했지만 역시나……, 당혹스러웠다.
민하는 선뜻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두 발짝. 거리가 좁아질 때마다 심장의 템포가 빨라지고 격해진다.
키스가 두려운 게 아니라, 저 남자에게 가까이 간단 사실이 두려웠다.
어지럽다.
파도에 흔들리는 뱃전을 걷는 기분이다.
겁이 나.
두렵다.
두려워…….
그의 앞에 섰다.
나무인형이 된 기분이다. 뻑뻑하니 잘 움직이지 않는 관절을 겨우 움직여서, 휘청거리는 몸을 굽혀, 미동도 않는 남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
입술을 댔다.
입술끼리 맞닿은 자리에서 파르르, 불꽃이 튄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감각에, 화들짝 놀란 민하는 입술을 뗐다. 버드 키스(bird kiss) 이상 할 리가 없다.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자, 이제 됐죠? 하듯 얼굴을 들려고 했을 때.
“흡……!”
갑자기 어깨를 붙들려 끌어당겨졌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빼려는 몸을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잡아끌어, 반쯤 무너져 내린 자신을 받치듯이 그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입술이 포개지고, 이어 뜨거운 것이 불쑥 입안으로 들어왔다. 입술 안쪽 치열을 헤집고, 입안 부드러운 살을 가볍게 쓸다가, 드디어 찾았단 듯 혀를 강인하게 휘감아 당긴다.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남자는 집요한 힘으로 자신의 것을 농락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폭력에 가까울 만큼 그녀의 입술과 그에 포함된 부속물 전체를 먹어치우려는 것처럼 거침없는 동작으로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단단히 힘이 실린 팔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숨이 템포를 잃고 한심하리만치 적나라하게 새어나온다. 타액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괴롭다.
괴로운데…….
단지, 단지, 그것만은 아닌…….
모든 소리를 입안에 가둔 채 정신없이 상대를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인 자신의 등을 받치고 있던 강인의 손이 상의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싫어……!’
바로 그 때.
“하아…….”
마치 마음속 외침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이 떠나갔다.
아슬하니 숨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떠나간 건 입술 뿐, 거침없는 손길에 의해 그녀가 입고 있던 스웨터는 이미 절반쯤 걷어 올라가 있었다. 너무 놀라서 몸을 빼려 힘을 주자 마치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몸을 더듬고 있던 손에 더욱 단단히 힘이 들어가며, 도리어 상대의 몸에 자신의 몸을 찰싹 붙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신장 차이 때문에 약간 몸을 구부린 상태인 남자의 손은 여전히 자신의 피부 위를 오르내리고 있는 중. 그것이 등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스러웠지만…….
“읏…….”
귓불을 깨물렸을 땐 그 안도감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떨린다. 두렵다. 이 남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공격해 올지, 두렵다.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언제나 말려들고 마는 자신. 분하다. 분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었다면 이토록 비참한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반응을 감추려, 민하는 미간에 금이 새겨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닌지 강인은 깨문 귓불에 혀로 달콤한 자극을 딱 감질날 정도로만 가하더니, 그 자세로 태연하게 속삭였다.
“이쪽에서 일일이 계발시켜 줘야 한다니, 좀 귀찮군 그래. 뭐, 가르치는 자체를 싫어하진 않지만 말이야. 가끔은 혼자 노력 좀 해 보라고. 키스 따윈 벌써 옛날에 졸업했어야 하는 거 아냐?”
“…….”
수치스러움에 민하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이 경우에는 하지 않았다기보다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테지. 아마 이렇게 안고 있으니, 자신이 동요했다는 사실, 그리고 분할 만큼 반응했다는 사실은 상대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이제……, 됐, 어요?”
안긴 채 뿌리치지도 못하고 더듬거림을 제대로 교정하지도 못한 채 목소리를 겨우 내보냈을 따름이었다. 마음의 동요가 그대로 묻어나는 질문.
“훗, 그럴 리가.”
남자가 그녀에게 몸을 뗐다. 그러더니 아직도 흐트러진 몸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그를 노려보는 민하를 여유롭게, 하지만 느물느물 웃음기를 머금은 만큼이나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덧붙인다.
“그건 네가 제시한 증거고, 나는 아직 타협안에 동조하지 않았어.”
“그럼…….”
민하는 불안에 흔들리는 눈길을 올려 보냈다.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
웃고 있어도 상냥함이라고는 전혀 배어 있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그는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강자의 미소를 내려 보냈다.
“동조하기 전에, 간단한 낙인 정돈 새겨둬야겠지?”
그것은 마치 당연한 절차를 설명하는 듯한 말투였다.
계속.
바뀐 게시판으로는 다량(?)의 글이 올려지지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