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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천사님은 로망에서 리뷰란에 가끔 좋은 리뷰를 해주시는 분입니다.
비차에 대한 리뷰가 있길래 복사해왔어요.
복사가 될까 했는데 의외로 되네요.
책은 못읽었지만 리뷰만으로도 배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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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차”가 비상(飛翔)하여 저에게 까지 날아 왔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무정부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를 지양(止揚)합니다. 이들은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합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족주의가 주어진 지역내의 행동 양식과 문화, 생명만을 장려할만한 것이라 주장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민족주의는 독단적인 사회적 “규범”과 생물학적인 요소들만을 둘러싸고 있는 쇼비니즘(chauvinism)과 이기주의의 연장일 뿐이라고 말합니다(http://flag.blackened.net/antinat). 즉,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배척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타난 아나키즘은 그 형태가 민족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아나키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한국의 무정부주의에 고개를 가웃뚱 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한국내에서 아나키즘이 민족주의와 연대를 맺을 수 밖에 없었던 초기 1900년대 시대상을 보면, 독특한 국내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일제시대에 나타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독립 운동의 열망에 의한 것이기에 그 색채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 채호선생님입니다. 그는 아나키스트이지만 민족주의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자였던 분들이 아나키즘을 신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이유가 있으며, 지금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뼈아픈 독립 투쟁의 과정이, 또 그 와중의 실망과 절망이 그들을 새로운 공동체 형성으로의 이상에 불붙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일제시대의 한국내 무정부주의는 시대적 배경에 맞게 독특하며 특이할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짧은 생각을 해 봅니다.  

한국에 무정부주의가 소개된 것이 기록상으로는 1906년이후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속의 무정부주의자 기준은 그보다 조금 앞서(1903-4년이죠 아마..) 아나키즘을 국내에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호와 함께 유학을 했던 이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역사적 기록연도보다 조금 빠른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영화 "Shakespeare in love"의 등장인물 중에서 존재감이 아주 강한 인물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Judi Dench분)입니다. 그녀가 영화에 나오는 시간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모습들이 "주변 인물"로 전락해버리고, 그녀가 군주임을 몸전체를 통해 뿜어냅니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좌중을 제압하는 분위기가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존재감 같은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영화속의 여왕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지만, 기준은 그가 나오지 않는 대목에서까지 그 존재감이 뚜렷합니다. 해인과 주호, 단 두사람이 나오는 장면에서 조차도 독자로부터 기준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인을 이용하는 기준이지만, 그런 그의 계산적인 행동을 읽는 내내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롭고 아픈 그만의 이야기가 대의속에 녹아들어갈때, 자신의 슬픔이 잊혀지지는 않겠지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기준은 사실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에 그런 용감한 행동들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호와 기준과 해인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주권을 빼앗긴 치욕스러운 조국의 현실과, 신분제도에 억매여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한 상황속에 눌려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속으로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기운들이 현실을 도피하고픈 욕구를 가져오는 듯 보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져 있고, 땅으로 꺼질 수 없으며,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있는 장소 하나 없는 시대에, 그들이 비차를 통해 하늘로 솟아오름은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하는 시원함을 선사해 줍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유가 부여됩니다. 그렇기에 조국의 현실과 민족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서 잠시라도 하늘로 솟구쳐 아래를 내려다 보며 자유를 누리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실지 역사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비상한 통쾌함을 느끼게 합니다.  

종장에 이르러 주호를 칭하여 오라버니라 부르는 해인의 모습을 보고 함께 자유를 쟁취한 주호를 봅니다. 결국 비차로 인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지만, 비차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두 사람에게 부여해 준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인생의 법칙을 느끼게 합니다. 비차라는 자유가 사라지면서 사랑을 통한 삶의 자유를 그들에게 남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희생이라는 것이 단순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라,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아픔을 가져다 주지만, 그렇기에 댓가로 얻게 되는 것이 더 고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 주호'는 그렇기에 경직되었고 슬픔 많았던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기쁨을 선사해 준 해인이 더 소중하리라 여겨집니다.

"비차"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두권중 제 2권은 제게 더 큰 인상과 감명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2권으로 가기전까지 1권에서는 소설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는 면면들을 발견하여 책을 몇번이나 손에서 놓았다 다시 들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좋은 작품에 대한 아쉬운 점을 얘기합니다.

해인은 태어난 기질이 조선의 평범한 여인네의 그것이 아닌, 좀더 진보적인 천성을 가진 여인입니다. 그녀의 출신성분이 어떠하던 간에, 그녀의 당당함은 타고난 자연스러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 할지라도, 혹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갈등과 불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을때는, 한낱 현실 만족이 부족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그런 불만족스런 모습에 대해 스스로 죄책감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이겠지요. 주어진 상황의 흐름에 맞추어 가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소설속의 해인은 마치 그 모든 불만의 요소를, 그 시절 십대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수십년 후, 현대화된 사화속에서의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생각으로 자신의 처지를 보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말하자면, 해인이라는 인물은 처한 시대속의 순진한 어린 처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적 생각을 가진 해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현대적 해인과 시대적 해인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있기에, 1권을 읽으면서 해인이라는 인물로의 동화가 어려웠습니다. 그녀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보입니다.  

역사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가 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로 완전히 돌아가서 그 시절속의 가상의 인물처럼 완벽하게 사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상 인물의 머리속에 현시대 작가의 생각을 심어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현대에 살지만, 소설속의 인물은 현존했던 역사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가상 인물과 작가의 생각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가의 현대적 생각이 가상 인물의 심리속에 들어있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관점의 차이를 확연하게 두지 못하고, 작가의 생각을 삽입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면, 전체 소설의 흐름에 뚜렷한 일관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작가는 가상 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해야 합니다. 이때, 역사소설의 경우, 조금 급진적인 인물을 내놓는것이 목표라 하더라도, 인물의 급진적 변화 발전의 과정이 시대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시대를 거스리는 듯, 혹은 날개돋친듯 뛰어 오르는 사상을 가진 인물을 그리지만, 그 인물의 급진성에 대조되는 배경이나 정황 또한 반드시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밀한 설득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해인은 1900년대 초의 여성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시대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고 느껴야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해인은, 그러나, 교육을 받기도 전부터 너무나 시대를 앞선 ‘현대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역관이었고, 그 밑에서 언문과 천자문을 떼고, 일본말을 읽고 쓸줄 안다고 하지만, 그러한 재능들이 서양화된 주인공의 모습으로 "도약"하게 하기에는 비약이 큽니다. 오히려 그런 교육을 아버지로 부터 받았다면 그녀는 좀 더 교양있는 조선여인의 모습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입니다. 그런데, 유독 해인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어투와 ‘캐쥬얼한 예의 범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로, 주호와 해인은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대화속에 관계의 명확함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해인은, 그러나, 상전인 주호를 대하는 어투에서 그 관계가 명확하지 않게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인은 비격식체이며 두루높임인 "해요체"를 자신의 말속에 지속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굳이 격식이 필요치 않는 실생활에서 쓰여져야 하는 비격식체를 주인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요체"가 일본 강점이후 사용되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주장의 신빙성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일본 강점이후의 해인이 그러한 어체를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종이 주인에게 써야하는 어투는 아닌 것이지요. 아무리 주호가 해인을 종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인은 그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고, 이런 경우라면 해인은 그를 향해 더 없는 예의를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후편에 나타나는 해인을 그리기 위해 전편의 해인이 있지만, 후편에서의 해인이 안정적이고 훨씬 설득력이 있다면, 그렇게 성장시키기 위한 전편의 해인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작가께서는 그 당시 해인의 세계관을 표명하고 있다기 보다는 그녀를 통해 시대보다 더 빠르게 발전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속에서 1900년 초 일제 치정하의 해인이 가졌음직한 세계관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해인의 모습은 현시대 작가의 생각을 필요이상으로 많이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소설의 치명적인 흠으로 다가옵니다.    

역사소설은 그 시대의 재현입니다. 특히 배경 시대의 세계관을 분명히 연구하고 알아야 합니다. 역사소설을 읽을때는 배경 시대속 민중들이 가졌던 세계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독자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해, 작가는 배경 시대의 세계관에 대한 몇배의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뛰어난 작품이며 시대상을 잘 표현한 소설임에는 틀림없지만, 한 인물에 대한 불안전한 설정이 큰 아쉬움을 남깁니다.

새로운 출간물에 대한 평가들을 볼 수 있는 뉴로맨스 란에 보면, 가끔 '로맨스가 부족하다', '로맨스 소설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평가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평가를 받는 소설들을 한번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남녀간 사랑의 표현 정도가 점점 더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시점에서, 묘사의 강도가 약하거나 익숙해져 있는 정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로맨스가 부족하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표현 수위를 높여야만 하는 소설이 있다면, 손끝 하나만 스쳐도 전기가 통하는 애틋함을 그리는 소설 또한 있는 것입니다. 잦은 행위를 통한 사랑 표현법이 있다면, 속으로 삼키면서 절제하는 사랑 또한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친 묘사를 통한 표현보다 감춘듯 아련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훨씬 더 감성을 자극하고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윤 심덕과 김 우진의 현해탄으로 뛰어들며 죽음까지 불사한 열정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었다면, 주호와 해인의 시대속에서 갈등하고 억누르기만 하고 절제하여 마침내 이루어낸 사랑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 전반에 걸친 절제된 사랑의 감정들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들어맞는 것이기에, 안타까움을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로맨스를 축소시키고 있지는 않다 봅니다. 설정에 맞는 로맨스이기에 그 끝이 더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생각합니다.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서누님의 처녀작이 "비차"라는 작품임이 놀랍습니다. 의식있는 작가 한분이 로맨스계에 발을 디뎌 놓으신 듯 합니다. 역사와 허구의 적절한 조화가 참으로 산뜻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등장 인물들을 통해 나타나는 의식있는 말들은 작가가 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렇기에 서누님의 다른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맨스계에 이러한 의식있는 작가님들의 발길이 더 잦아지길 기대해 봅니다.  


소리천사님의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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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5.03.29 11:58:23

뭔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것을 일목요연하게 처리하신
소리천사님은 경력자이군요.... 감탄합니다.   [01][01][01]   [01][01][01]

노리코

2005.03.29 13:31:21

오홋! 좋은 리뷰입니다.
전 이런 글을 볼때마다 절망하고는 한다지요...;ㅁ;   [01][01][01]

서누

2005.03.29 19:32:35

오오..정성이 담긴 리뷰로군요 +_+
그런데 퍼와도 되는 걸까요? 살짝 걱정되네요.   [11][07][07]

쟈넷

2005.03.30 02:18:14

오 안되는건줄 몰랐습니다. 리뷰끝에 꼬리로 허락을 청했는데, 만일 안된다고 하면 제가 올린 글은 삭제해야 할거 같습니다. 서누님께서 혹시 못보셨을까봐 퍼온것이니, 이미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ㅎㅎㅎ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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