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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키가 무척 작았다. 별로 아름다운 분도 아니었다. 아래위로 납작 눌린 개구리틱한 얼굴에 눈만 댕글댕글하게,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그냥 그런 아줌마셨다. 아주머니는 그 얼굴에 연신 웃음을 띠고는 길거리의 손님들을 끌어들였다. 아주머니는 우리동네의 반찬장사였다.
아주머니와 우리엄마의 인연은 동네아줌마들의 연이 늘 그러하듯 손님과 가게 주인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불교신자에, 남편복이 없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두 갱년기 여성은 빠른 시간내에 속내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장사가 안되는 저녁 시간대, 아줌마는 장을 보러온 우리 엄마와 반찬을 나누어 먹으며 이런 저런 당신의 얘기를 하신 모양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잃고 절에서 자랐다는 얘기나, 시부모 자리에게 점찍혀 얼떨결에 시집을 갔다거나, 남편은 무능하고 폭력적이며 자식 농사도 성공적이 않다는 푸념이나, 그래도 반찬 장사가 잘되서 굶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거나.
아주머니는 그 작은 몸뚱이로 몸이 부서져라 밤낮없이 일을 하셨다. 그런 보람이 있어 아주머니의 반찬가게는 나름대로 동네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감칠맛과 손맛이 일품인 반찬들이었다. 봄이면 냉이, 여름이면 생야채, 가을 겨울에는 김장김치와 젓갈. 제철에 어울리는 반찬들이 아주머니의 두어평 남짓한 반찬가게에 놓였고, 동네 아줌마들은 반찬 가게의 마니아가 되었다. 사먹는게 탐탁지 않다던 울 엄마도 그 아주머니 반찬만은 개의없이 상에 올렸다. 아주머니는 이내 돈을 좀 모아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셨다.
그게 그 아주머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었던 순간이라고
우리 엄마는 말한다.
그러나 반찬가게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주머니의 사고뭉치 남편이 어김없이 저지레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가게의 벌이가 좀 시원해지자 욕심이 난겐지, 아주머니의 남편은 우이동 계곡에 있는 목 안좋은 개고기 집을 하나 덜컥 계약해서 들어왔단다.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고민을 한 후 그 가게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파트는 그렇게 몇달 안되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개고기집은 잘 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사채까지 끌어들이며 바둥바둥 해보셨지만 기가막힐 정도로 가게는 장사가 되지 않았다. 자식들마저 속을 썩였다. 아들은 이혼을 하고 애들을 끌고 엄마의 작은 집으로 들어왔고, 빚에 눌려 살던 딸도 제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온 살림을 끌어 들여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사채의 이자는 나날이 늘어갔다. 변변한 은행 거래조차 틀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아줌마는 그 이자를 막기위해 또다시 사채를 끌어 오는 수 밖에 없었다. 빚은 빚을 낳는다. 아주머니는 불어난 빚에 눌리다가 결국은 가게를 접어 대충 빚을 가리고 다시 반찬가게를 시작했다.
우리엄마가 반찬가게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주머니는 벅찼던 모양이다. 무능한 남편에게는 아무것도 기댈수 없었었고, 작은 반찬가게는 아들과 그 새끼들마저 먹여살리며 빚을 갚아 대기는 벅차기도 벅찼겠다. 생각다 못한 아줌마는 울 엄마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반찬 가게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건은 자기가 댈테니 장사만 하라고. 마침 할머니때문에 고생중이던 우리 엄마는 아줌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울 엄마는 삼선교에 작은 반찬가게를 오픈했다. 아줌마에게는 재료값이며 공전값으로 몇백만원 선금을 주었고 그렇게 너댓달 아줌마는 성실하게 우리엄마 가게 반찬을 대주었다. 당신의 가게 뿐 아니라 우리 엄마 가게 반찬까지 하느라 아줌마의 일은 곱절로 늘어났다. 잘 시간 조차 없었으리라.
그렇게 몇달이 흐른 후
아줌마는 지방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아주머니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한달여가 지나서였다. 대구의 폐공장터에서 남편과 둘이 솥단지 걸고 살고 있다고 했단다. 식당일을 하며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단다. 사채업자들이 끝없이 가게로 찾아오는 것을 견딜 수 없던 이유였다고 했단다. 돈은 형편 되는 대로 꼭 갚겠다고.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 그동안만 용서해 달라고. 아줌마는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단다. 졸지에 돈 물리고 일 떠멘 우리 엄마지만 그래도 미워할수 없더란다. 오히려 너무 서글퍼만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그렇게 밖에 안되는 인생도 있냐면서.
그리고 또 몇달이 흘렀다.
우리엄마는 맨날 등이 아퍼 팔이 아퍼 눈이 감겨 난리를 치면서도 아줌마가 떠넘긴 애물단지 반찬가게를 그럭저럭 꾸려나갔고, 동네 사람들은 아줌마를 잊어갔다. 그동안 작고 안된 소식 하나가 동네에 돌긴 했다. 아줌마의 아들이 술을 마시다가 결국 죽었다는 것. 며칠동안 나오지 않아 친구들이 찾아가보니 죽어있더란다. 이혼하고 매일매일 술만 마셨다고 한다. 아이들은 벌써 어디 시설에 갖다준지 오래라고 한다. 엄마는 안됐다며 가슴아파 했고 동생과 나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며 무책임하고 동정없는 멘트를 내뱉었다.
그리고 지지난주였던 것 같다. 아마도 일요일이었을 거다. 여동생과 함께 있었으니까. 동생과 개그콘서트 재방송을 보고 놀다가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밥이 반그릇쯤 비었을때 엄마는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결국은 죽었대."
누가?라고 묻자 엄마는 무표정하지만 슬프게 대답했다.
반찬 가게 아줌마라고.
왜?라고 묻자 엄마는 약간 목메인듯 대답했다.
농약을 들이켰다고.
폐공장터에 두 부부가 나란히 누워있는 것을 누군가 발견했다고.
사채업자들이 결국 대구까지 쫒아왔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 소식이 좀 늦게 도착했단다. 작은 몸으로 버틸 데 까지 버텼던 건지, 아줌마는 한순간에 팽팽했던 실이 끊어지듯 그렇게 세상을 버리셨단다. 장례는 누구 손으로 치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장 친했다는 우리엄마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 돌아가시고 일주일이 넘어서 였으니, 누가 그 마지막 길을 볼 수 있었을까.
........
안된일이지만, 나도 아줌마를 기억하는 사람이지만, 미안하지만, 며칠전까지는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잊지만 않고 있었다는게 정확하니까. 아줌마의 까무잡잡한 얼굴과 퉁퉁한 볼과 바가지 머리를 잊은건 아니지만,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과 사연을 접하며 사니까. 어쩌면 난 계속 이렇게 가끔씩만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다. 만 스물 아홉해 남짓하며 만나온 다른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중 '가장 마음 아픈 죽음'정도로 랭크만 먹인 채로 그냥 별 느낌 없이 살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은주가 죽었다.
이은주는 좋아하는 배우였다. 변변한 출연작도 본게 없지만, 그녀의 단아하고 분위기 있는 인상을 좋아했다. 좀 더 나이 먹으면 멋지게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메릴 스트립이니 아네트 베닝이니 그런 우아한 중늙은이 여배우가 우리나라에도 생길거라고 이은주를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도 어린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척 아쉽고 슬프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근데 난 그녀의 죽음과 그 과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며 자꾸만 아줌마 생각이 난다. 자꾸 심사가 뒤틀린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짓눌렀던 삶의 무게야 이은주나 아줌마나 다를 바가 없지 않았을까.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추도의 물결을 보며 나는 아줌마의 작고 쓸쓸한 죽음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녀의 화려했지만 고달팠다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없이 신산하고 가련하기만 했던 한 늙은 여인의 삶의 이야기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영정속에서 환히 웃고있는 젊은 여배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나는 퉁퉁한 얼굴로 오징어젓을 내 입에 넣어주던 아줌마의 얼굴이 새삼 자꾸만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난다.
일요일에는 오랫만에 절에나 가봐야 겠다. 오천원짜리 기도라도 하나 붙이러. 아무리 신산했던 죽음이었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줘야 할거 아닌가.
우리집 근처에도 반찬가게를 하시던 아줌마가 있어. 네가 잊지 않은 그 분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신.
다행이도 그 분은 살림을 조금씩 넓혀 지금은 야채와 과일 가게를 하고 계시지.
판박이 동생분도 그 근처에서 호떡을 팔다가 떡볶이 가게를 열더니 꽤 호황이었고.
그 분들 얼굴에 고생이 쓰여 있어.
엄마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엄마가 전해준 그 분들 사연은 사람이 어찌 저렇게 꿋꿋이 살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 지경이었고.
그래도 그 분들은 산다.
최근 그 분들 주변에 참 안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살아.
네 말대로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상대 평가는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꼭 죽어야만 했을까? [01][01][01]
다행이도 그 분은 살림을 조금씩 넓혀 지금은 야채와 과일 가게를 하고 계시지.
판박이 동생분도 그 근처에서 호떡을 팔다가 떡볶이 가게를 열더니 꽤 호황이었고.
그 분들 얼굴에 고생이 쓰여 있어.
엄마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엄마가 전해준 그 분들 사연은 사람이 어찌 저렇게 꿋꿋이 살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 지경이었고.
그래도 그 분들은 산다.
최근 그 분들 주변에 참 안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살아.
네 말대로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상대 평가는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꼭 죽어야만 했을까?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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