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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얼음에 굴복하다
25
민호와 성은의 상견례는 크리스마스 사흘 전에 이루어졌다.
물론 민호가 성은의 집에 가서 성은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따님을 주십사 말씀드리긴 했었다. 하지만 결혼 준비는 착착 진행되면서도 좀처럼 ‘상견례’할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결국 이 날까지 미루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앞뒤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모두가 숨 돌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검사란 직업 때문이었다.
상견례 자리엔 민호와 민하, 성은과 그 부모님, 그리고 뜬금없긴 하지만 여타 참석자들의 어색함을 달래 줄 다크호스(?)로 성원이 참석했다. 그 사실을 일할 때 외에는 둔중한 사고의 소유자인 민호가 미처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민하는 호텔 레스토랑에 먼저 와 있는 성원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쇼크를 받았다.
‘여, 민하! 오랜만!’ 하고 혼자 앉아 있던 성원이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오빠, 왜 성원 오빠 온단 얘기 안했어?”
민하가 민호를 쳐다보며 항의하듯 말했다. ‘어, 내가 말 안했어?’ 라고 민호가 얼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옆에서 성원이 서글프게 말했다.
“민하, 너무하다. 내가 반갑지도 않냐?”
“그런 거 아니에요…….”
민하는 말끝을 흐트러뜨렸다.
얼마만큼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내가 반가운 감정을 여기서 말로 표현하면, 오빠 무지 당황할 텐데……. 그래서 더 반갑다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건데……. 실은 오빠가 먼저 알아차려 주길 바랐는데, 지금은 그런 말, 할 수가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어머, 민호 씨.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어요?”
성은이 부모님들과 같이 들어왔다.
“아냐, 지금 막 왔어. ……오셨습니까.”
민호는 옆에 있던 민하가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 아니, 실은 그렇다기보다는 속으로 비웃고 있었지만 - 근 미래의 장인장모에게 믿음직스런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민하는 ‘웃겨?’ 하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엄마, 아버지. 우리 아가씨예요. 이쁘죠?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성은이 애교 있게 시누이를 소개했다. 보기에도 점잖은 분들처럼 보이는, 성은의 부모님이 민하를 보며 호감어린 웃음을 보였다.
“오. 이제야 얼굴을 보네. Y대 경영학과 다닌다고?”
“예.”
“앉아, 앉아요. 공부도 잘했네. 부모님이 두 사람 다 아주 잘 키워 주셨구먼.”
오빠의 장인 될 사람의 말에, 민하는 조용히,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엄마아버지가 가 버리신 지도 벌써 4년이 다 되가는구나.
민하의 아버지는 큰 은행 지점장으로, 서씨 집안의 기둥 같은 존재였다. 민하 남매에겐 작은 아버지, 그리고 고모님들도 두 분이나 계셨지만,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민하 아버지에게 빌붙어서 먹고 사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민하 민호 남매는 생활고라든가 절약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꽤나 빵빵한 보험금을 탔기는 했지만, 역시 그들 자신이 살림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민호는 그 때 이미 사시를 패스해서 연수원에 다니는 상태였고, 그들 남매에게 남겨진 보험금이나 유산까지 어떻게든 나눠먹어 보려는 친척들을 간단히 한마디로 물리칠 만큼의 법률지식도 당연히 갖고 있었다.
부모님 상을 치룬 후 민호가 한 일은 그 때까지 살던 방배동의 큰 집에 세를 주고, 여동생과 둘이 살 좁은 집 전세를 구하는 일이었다. 당황해서 큰 집을 무작정 판다던가 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보험금과 부모님이 물려준 통장이나부동산만으로도 당장은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동생 밥값과 학원 비는 자기가 벌어야겠다며, 민호는 신림동과 노량진에서 민법 강사를 뛰었다.
민하는 기억한다.
자신이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호통을 치던 오빠의 얼굴을. 그 마음을 알았기에 눈물이 났다. 첫 번째 이유는 감사해서,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무시하는 오빠가 ‘얄미로와서’.
- 니 머리로 학원도 안 다니면서 대학에 붙을 수 있을 것 같냐?
같은 말을 해도 꼭 때려 주고 싶게 한다. 쳇.
그래도 오빠가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민하는 잘 알고 있다. 좀 멍청한 구석도 있고 답답한 점도 많지만. 그런 오빠가 의외로 노총각으로 늙지 않고 30대 초반(!)에 장가를 가게 되다니, 상견례 장에 와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민하야, 뭐 시킬래?”
메뉴판을 내미는 성은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자상하다. 이제 하나뿐인 오빠를 뺏어갈 텐데도 하나도 밉지 않은 그녀. 착하고 예쁘고 상냥한 나의 새언니.
오빠, 그리고 새언니. 같이 살지 않아도, 나의 유일한 가족인 그들.
아아, 나는 정말 이 두 사람이 너무 좋다.
“그래. 민하, 요즘 좀 너무 마른 거 아니냐?”
그리고 또 한 사람.
무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장난기 어린 시선이 귀여운, 하지만 단지 매력이 그것하나만은 아닌, 볼 때마다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
나는 정말, 이 사람이…….
“그래요? 좀 빠졌어요? 효과가 있었네?”
“어. 민하, 다이어트? 야, 니가 뺄 데가 어디 있다고.”
“아니에요. 저, 하체가 너무 튼실해서 상체가 빈약해 보인단 말이에요.”
성원의 말에 항변했지만, 그 항변이 어색하단 사실은 말한 민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꼬챙이처럼 말라야 좋아하는데, 원래 사람은 적당히 살이 있어야 여유 있어 보이고 좋은 법이야. 보니까, 좀 쪄야겠네.”
성은의 어머니가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 민하는 그 말에 조용히 웃기만 했다. 살이 빠진 게 당연하다. 먹으면 갑갑하고 토할 것 같다. 당연, 식사량이 엄청 줄어버렸다.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문제다.
세상에 그 따위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따위…….
「알겠어? 타협이란 것도 때론 필요하다구, 꼬마 아가씨.」
달콤한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다.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민하는 그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걸 깨닫고서야 휙, 하고고개를 돌렸다. 불안정해. 이대로라면 그냥 휩쓸려버릴 거야. 어정쩡하게 있으면 또 당할 거라고. 그러기 전에 이쪽이 먼저…….
입술을 한번 깨물고, 되도록 차분하게 소리 내려 애쓰면서 물었다.
「좋아요, 타협해요. 내가 어떻게 해야 이런 짓을 그만 둘 거죠?」
「네가 제 발로 내게 온다면. 그리고 증거를 보여 준다면.」
「증……거?」
무슨……, 증거……?
「내게 안기는 거지. 물론, 자. 의. 로.」
자. 의. 로.
세 음절을 또박또박 끊어 발음하는 강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비죽비죽 서려 있었다. 절대 동작이 큰 미소는 아니다. 이 남자는 기본적인 분위기가 서늘함 그 자체였다. 환한 웃음? 그런 식의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입술 끄트머리만을 가볍게 틀어 올리는 미소는 언제고 예외 없이 냉소의 기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굉장히 피곤해졌다.
「말해두지만, 내 쪽에서 덮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네가 제 발로 걸어와서 안아달라고 할 때까진 오늘을 기점으로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슬슬 뻗어 올라온 손가락이 피부의 솜털만 건드리듯 연한 동작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린다. 형광등이 켜 있기는 했지만, 이미 어둑해진 바깥의 기운이 스며든 방안. 형광등 불빛만으로도 음영을 선명히 이룰 만큼 뚜렷한 윤곽을 지닌 남자의 얼굴은, 슬며시 웃고 있었다.
동요하면 안돼. 민하는 매섭게 상대를 노려봤다. 머리가 흐느적거리고, 꼭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싫다면요?」
「뭐, 할 수 없지. 강정웅이던가? 그 자식부터 시작해 볼까.」
「……!」
강인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표범처럼 날렵한 인상의 몸은 어떤 동작을 하든 각을 이룬다. 곡선이 거의 없이 각으로만 이루어진 몸. 그러나 전체가 무리 없이 연결되어, 별 생각 없이 보는 사람에게조차 육감적인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신을 따라 일어서는 민하를 차갑게 보고 있었다.
「지난 학기 교양으로 서양철학을 들었던 모양이던데. 비결정론 학자들이 주장하듯 네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겠어.」
자유의지라고?
자, 유, 의, 지? 어디가?
「건 그렇고 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자면 새 언니가 될 사람 말인데. 아직은 건드리지 않았어. 알지?」
강인은 말하면서 손바닥을 펼쳐 가볍게 쥐어 보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부처님 손바닥’의 동작이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다친 쪽 발을 헛디딜 뻔했다.
「성은 언니한테 무슨 짓 했단 봐! 내가 바로 당신 죽일 테니까! 알았어?」
「훗, 착한 시누이로군. 계속 그렇게 올케를 생각해.」
「갈게요.」
더 이상 여기 있다간, 그대로 토할 것만 같다. 위경련이 일어날 듯 말 듯한 배를 부여잡고, 민하는 절룩거리며 한발을 디뎠다.
「그 발로 혼자 가려고?」
「문제없어요.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면 그냥 내버려둬요.」
바닥을 디딜 때마다 몰려올 아픔 따위는 거북한 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더 이상 저 냉혈한의 얼굴을 봤다간 위염이 위암으로 변신할 거다.
「음, 그 자유의지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지. 단, 그 이전에 딴 놈들이 걸리적거리면……, 내빼는 걸로 간주하겠어.」
내빼는 걸로 간주하겠어.
“민하야?”
“어? 네?”
성원이 그녀의 얼굴을 의아한 듯 들여다보고 있다. 식사가 끝나서 헤어지려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장인 장모랑 뭔가 얘기를 하면서 걸어가는 민호 커플을 저쪽에 둔 채, 성원이 민하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식사 내내 해. 아까 우리가 한 얘기 듣긴 들은 거냐?”
“예? 무슨 얘기요?”
성원이 턱을 으쓱하며 민호를 가리켰다.
“민호가 오늘 너 좀 데려다 주라고. 지금 또 들어가 봐야 된댄다. 뭐, 늘 있는 일이잖아. 괜찮지?”
“오빠랑……, 둘이서요?”
“응.”
“안돼요!”
민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의 과잉반응에 놀란 성원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왜, 싫으니?”
“아, 아뇨. 그냥 저 혼자 가면 되는데요. 오빠 괜히 힘들게…….”
“차로 데려다주는 건데 뭐가 힘들어. 그리고 너 다리 삔 거 아직도 안 나았다며. 그 다리 끌고 어떻게 혼자…….”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택시 타면 되요. 괜찮아요.”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네?”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성원을 마주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꿰뚫리듯 아파왔다. 서글서글하면서도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안경너머의 눈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아까부터 표정이 영 안 좋아서 그래. 몸이 마른 건 그렇다 쳐도, 혈색이 너무 아니잖아, 이건.”
민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더니 성원이 사과한다.
“넘겨짚었다면 미안하다.”
다정한 눈빛. 온기어린 배려. 하지만……, 저 눈 안에 자신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제, 스스로의 마음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성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행이야. 마음을 눈치 채이지 않아서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몰라.
“죄송해요, 오빠.”
이건 제 자유의지에요. 절대로 오빠한테 위험한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어요. 성은 언니도, 민호 오빠도, 그리고 그 누구보다 성원 오빠가 위험한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저, 어린애가 아니니까 혼자 돌아갈게요.”
민하는 희미하게, 흐느끼듯 웃었다.
26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하는 사람은 다 일하는 시기. 현홍이 들어갔을 때, 보스의 전용 사무실에는 언제나 그렇듯 상급간부인 치윤도 있었다.
아무래도 때가 때인 만큼, 방안을 떠돌고 있는 공기는 그리 개운치 않았다.
스나이퍼가 현홍이 몸담고 있는 정명회의 중간보스 중 한명인 손병호를 습격한 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다고 해도 보통은 물밑에서 치밀하게 준비해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스나이퍼의 기습은 지나치리만큼 드러나게 덮쳐왔기 때문에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반응이었다. 그리고 분노.
확실치는 않지만, 현장에 남겨진 탄환이며 저격방식이 풍진파란 약소조직의 짓이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그것은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다른 점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약소조직인 풍진파는, 그러나 전투력에 있어서는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타 조직 간의 세력다툼에서 발생하는 전투에도 간간히 힘을 빌려주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역사, 인원수, 그리고 조직력, 어느 모로 보나 정명회보다 떨어지는 조무래기들인 그들이 감히 정명회를 건드렸단 사실에 현홍은 격분했다. 아니, 그보다 놀란 것은 정명회에서 바로 보복하러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한쪽이 치고 들어오면 다른 한쪽도 치고 들어간다. 저쪽이 셋을 죽이면 이쪽은 넷을 죽인다. 그것은 이 세계의 룰 같은 것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위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젊은 보스 후보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정명회의 상급 간부이자 두뇌인 치윤 형님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 배후가 있겠지. ……약간만 꼬인 걸 풀어도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을 이렇게 드러나게 처리한 걸 보면, 짐작이 너무 쉽게 가니까. 훗, 경고성인가.
뭔가가 있다!
현홍은 깨달았다. 고교시절부터 ‘다이아몬드(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초 결정체형 머리. 바보란 뜻)’로 명성이 드높던 그로서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데가 있었다.
소규모로 벌어지는 싸움은 늘 있는 일이고, 누군가 다쳐서 중상을 입는 일도 흔한 일이다. 그 일로 인해 똘마니들이 콩밥을 먹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단순한 간부도 아닌 중간보스가 당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도 상황이 험악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 밑에선 보다 심각한 성격을 지닌 또 다른 움직임이 있을 터였다.
강인은 현홍이 보기에는 경이로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아직 대학생이면서도 결코 작지 않은 조직의 중간보스 역할을 수월하게 해내는 이 남자의 정보망은 현홍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 전에, 정명회의 행동대장인 자신이 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전투력을 갖췄단 건 고교시절부터 안 사실이다.
강인을 처음 만났던 때, 현홍은 그 때 고3이었고, 당연히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초 불량학생이었다. 학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학교를 통틀어 그를 누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으로부터도 몇 군데 손이 들어왔지만 뿌리쳤다. 「제가 그 정도로 맛이 간 줄 아십니까?」라는 대꾸와 함께.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매일은 그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1학기 중간에 들어온 1학년 후배를 만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 돌아왔다는 소문과는 영 어울리지 않게 통째로 민 헤어스타일 때문에 처음부터 눈에 띈 그 후배는 유난스레 거슬렸다. 그러잖아도 한 번 손을 봐줄 생각이었는데, 예상 외로 후배는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떨어지는 반말로 현홍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밑에 들어오지?」
만일 후배의 가문이 어떤 집안인지 알았다면, 현홍이 먼저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그 후배, 지강인이 전국 조직 상당수를 엮어 놓은 그물의 정점에 있는 청현회 보스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말이다. 그런 인간은, 교문 앞에 검은 차라도 몇 대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현홍은 훗날, 열 받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자신의 성격을 두고두고 후회해야만 했다.
우측에서 뻗은 주먹을 상대가 오른팔로 막았다고 느꼈을 때에는, 이미 왼쪽 팔꿈치가 명치에 들어가 있었다. 현홍의 부짱인 진수가 덤벼들었지만, 그 면상엔 정통으로 깨끗한 정권이 박혔고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 보라가 일었다. 춤추는 듯한 움직임으로 반 바퀴 돈 강인은 뒤에서 덮친 삼짱 영훈과 정면으로 대치한 후, 가슴에 찌르기를 넣었다. 늑골이 부러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10초. 그 때까지 불과 10초였다. 다른 둘은 그대로 무너졌지만, 현홍은 간신히 몸을 추슬러 또 한번 돌진했다. 그 때 나이프를 꺼낸 게 자신의 최대 실수였다. 차라리 나머지 둘처럼 바로 무너졌으면 더 이상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으련만.
눈에 핏발이 선 걸 느끼고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현홍은 강인에게 돌진했다. 강인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나 했더니, 나이프를 쥐고 있던 팔목에 예리한 돌려차기로 인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이프는 다른 놈들이 무너져 있는 지점과는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날아가 ‘챙강’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졌다. 현홍은 당황한 탓에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젠장, 자신이 휘두르는 주먹은 죄다 삽질이 되었다! 분명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상식으로는 분명 피했어야 하는데, 영락없는 급소부위만 골라 주먹이 들어오는 건 웬일일까? 상대의 무릎이 언제 배에 들어왔는지, 언제 상대의 팔꿈치가 가슴을 찍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구토. 자신은 어느 사이 바닥에 뒹군 채 침을 흘리며 뒹굴고 있었다. 그 다음? 다음은 차라리 도살장에 끌려온 소에 가까웠다.
공포가 어떤 건지 처음 알았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에게 1대 1로 당하는 치욕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깨닫는 순간. 그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렇다, 분명히 그 순간 그는 웃고 있었더랬다. 그 미소는 어딘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마력이 있어서, 고통 속에서도 현홍의 뇌리에는 그의 미소가 강렬하게, 고통이나 공포만큼이나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공포는 병원에 입원했던 다섯 달 동안 참으로 악랄하게 그를 짓눌렀다.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현홍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지만 병원에 찾아온 동기 놈으로부터 그 후배, 지강인이 어떤 인물인지 전부 듣고 나서는 몽글몽글 호기심도 피어올랐다.
호기심은 결국, 공포를 눌렀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부짱인 진수와 함께 강인을 찾아갔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때 자신의 부짱이었던 진수도 현재는 강인의 직속 운전수로 일하고 있으니 인연은 참 묘한 것이다. 어쨌든 다섯 달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료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 시작되었다. 관찰대상이 있다는 것은 현홍에게 묘한 즐거움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의문도 점점 커져갔다.
이상하지? 정말 이상해. 왠지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잖아?
청현회 보스의 막내아들은 가문과는 어딘가 격리되어 있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고교생으로서의 시간동안 강인에게 철저히 복종하면서, 현홍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
현홍이 보고를 끝내자, 강인이 말했다. 그 옆에는 언제나 잡담이라곤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 치윤이 여전히 침묵한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에 비치는 건 주식시세인 것 같았다. 무투파와는 언뜻 봐도 거리가 먼 이 남자는 머리를 쓰고 돈을 굴리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물론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서도 돈을 버는 작업은 필수로, 양성화된 사업 외에도 해외에서 총기를 반입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수입이 필요했다. 현홍은 모르고 있었고 설명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모를 터지만, 치윤은 강인이 소유한 기업 매상을 조종해서 일부를 해외은행의 계좌에 반입하고 거기서 제3의 계좌에 송금하는, 복잡하고도 교묘한 자금세정수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금은 총기류 구입, 무투파의 무장에 투자된다. 그러나 그 최종라인은 치윤조차도 알지 못했다. 항상 모든 것의 마지막은 강인이 쥐고 있었으므로.
전부를 파악하고 전부를 손에 쥐고 휘두를 만큼의 두뇌와, 그럼에도 그 두뇌에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전투력. 그것이 이 새파란 나이의 젊은 보스를 현홍을 비롯한 하급 조직원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현홍은 강인을 ‘좋아’했다. 왜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정이라는 걸까?
“좀 여쭤봅시다.”
현홍은 조금씩 염색기가 빠지기 시작한 금발을 흔들며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의 보스를 봤다. 나가기 전 꼭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다.
“그 서민한가 하는 아가씨, 어디가 좋으신 겁니까?”
강인이 자기 여자에게 감시역을 붙인 것도 몇 달째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뭐 그리 대단하기에 하나하나 행동거지까지 감시하며 손에 넣어야 하는지.
“김현홍.”
옆에서 강인과 이야기하고 있던 치윤이 너무 기어오르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현홍은 개의치 않고 다소 건방지다 싶을 정도의 건들건들 자세로 강인을 바라봤다. 저 인간과 알게 된 것도 벌써 8년째. 언제 기어올라도 되는지, 또 언제 몸을 사려야 되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궁금하잖습니까. 안 그래요? 바늘이 아니라 송곳으로 후벼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 그 아가씨한테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이렇게 사람까지 붙이는 걸 보면 좀 같잖다 이거쥐요.”
아니,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사실 현홍의 불만은 그게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왜 하필 나냔 말이다. 이래 뵈도 무투파로 벌써 6년째, 정명회 행동대장으로 잔뼈가 굵은 현홍이었다. 여자하나에 매달릴 군번이냐 이거다. 뭣보다 현홍으로서는 그 서민하인가 하는 여자가 처음부터 영 맘에 들지 않았었다.
- 썅! 시끄러! 지금 전화 넣음 되잖아!
이게 여자가 할 소리냔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얼굴도 그저 그렇더만?
“좀 들어보자고요. 뭘 그리 아끼십니까, 예에?”
책상 앞에 앉아서 치윤이 준 리포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강인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차분한 동작으로 팔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얹는다. 탁, 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김현홍.”
“예.”
“집어.”
“예?”
“집으라고.”
스위스제일 것이 분명한 고급시계다. 현홍은 이 인간이 왜 그래? 하고 불안한 낯빛으로 젊은 보스의 얼굴을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현홍은 그래도 주춤거리면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 시계를 집어 들었다. 우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거 진짜 비싼 거다.
눈동자에 별이 초롱초롱 뜬 현홍의 귓가에 상냥한 목소리가 울렸다.
“맘에 드나?”
“예?”
현홍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보스는 눈앞에 있었다. 이런! 방금까지 책상 앞에 있던 인간이 언제 여기에? 으윽, 피해……!
“허윽!”
복부로 들어온 주먹. 너무 강한 일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자신의 명치를 쳐올린 무릎치기. 이어지는 가격들, 정확히 한 지점만을 노린 연속타는 강인을 처음 대면했던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당하고 병원 문 앞에 시체처럼 던져졌던 일이, 눈앞의 불꽃과 더불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우욱……. 이게……, 무슨…….”
현홍의 몸은 옆에 놓여 있던 소파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 자신의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젊은 보스를 실눈을 뜬 채 올려다봤다. 이씨, 젠장맞을 인간 같으니라고! 커흑, 너무 아프잖아!
지금은 그 때처럼 두렵지는 않다.
아니? 여전히 무서운 인간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은 그렇게 많이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기에 옆에 있을 수 있는 거지만, 그렇다 해도 아픈 건 아픈 거야!
이 사무실에 아랫놈들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자신이 보스의 주먹 몇 방에 맛이 간 광경을 놈들이 본다면, 행동대장의 위신이 지하로 솟구쳐 내려갈 건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대체, 왜 이러……시냔 말입니다…….”
현홍의 원망스런 한마디에 강인은 심술궂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나른해 보이면서도 그 안에 번뜩임 같은 것을 담고 있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내 물건을 건드렸으니까.”
당신이 집으라고 했잖아! 우욱! 씨발!
물론 강인은 현홍을 귀엽게 봐주고 있는 것이다. 현홍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인은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즐기는 수준도 안 되는, 어디까지나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내 물건을 딴 놈이 건드는 건 안 되지.”
현홍이 속으로 욕을 씨부리는 동안, 강인은 약간 귀찮은 듯한 투로 그렇게 말을 뱉어내더니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소파에 무너져 있는 현홍의 팔목에 그 시계를 채워주는 것이다.
현홍은 영문을 몰라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의 보스를 올려다봤다. 그런 현홍에게 강인은 슬쩍 허리를 굽히더니, 여전히 상냥하고 나긋하다 못해 코피가 날 것 같은 속삭임을 상대의 귓가에 내려 보냈다. 별거 아닌 듯한 말에 오싹했던 것은, 아마 흑수정처럼 견고하고 차가운 눈동자 때문이었을 터.
“물건에 흠집나지 않도록 잘해. 제대로만 하면, 기어오르는 것도 어여삐 봐 줄 테니까.”
물건? 뭐야. 물건……, 인겁니까?
“언제까지……, 입니까?”
현홍은 숨쉬기조차 버거운 걸 간신히 버티면서 그렇게만 물었다.
“필요 없어지면. 그 땐 누구한테 넘겨도 상관없어.”
그 시계처럼 말이야, 하고 남자의 눈은 날카롭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진……,”
훗, 하고 얇은 입술이 가볍게 웃었다.
“손만 대는 것도 용납 못 해.”
그리고 마치 그 말에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듯 강인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불이 들어왔다. 넘어져 있는 현홍의 눈에 액정화면을 보고 있는 보스의 눈이 희미하게 누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웃음기 어린,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아기 새인가.”
27
커피는 정말로 맛이 없었다. 그러잖아도 속이 안 좋은 요즘 이런 걸 시키다니 바보 아냐?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나왔을 때서야 민하는 후회했다. 마셔보니 그 후회가 심도를 더한다. 언젠가 책에서 본 ‘땀이 밴 헌 양말을 넣어서 끓인’ 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녀는 원래라면 절대 넣지 않는 밀크와 각설탕을 넣으면서 앞에 앉은 유준을 흘깃 보았다. 괜히 만나자고 했나?
아니, 줄곧 만나자고 했던 건 유준으로, 민하는 줄곧 피해온 쪽이었다. 하지만, 역시 얘기하는 게 좋다. 아니, 얘기해야 한다. 유준이 팔의 깁스를 겨우 뗀 지금에 있어서는.
“……유준아.”
“응?”
유준이 기대에 찬 낯빛으로 민하를 바라봤다.
성탄절 이브다. 사랑스런 날. 예수님 어머니는 수세기전 오늘, 진통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계셨겠지만, 그런 건 관심 없다. 오늘은 연인들을 위한 날이다. 민하가 자신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다니, 이리도 좋을 수가!
“내가 언젠가 우리 사귀자고 했지?”
“어? ……어.”
유준의 얼굴이 벌게졌다. ‘엄머나? 부끄러워요?’의 분위기다.
“그거,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유준의 얼굴이 붉은 색에서 새하얗게 변하고, 표정이 정지모션처럼 굳어진다. 휴우, 잔인하구나. 서민하. 나도 참, 잔인해. 돌려 말할 줄 몰라.
“그거, 농담한 거였어.”
민하는 말하면서도 자신이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하는 건데?”
“응?”
예상 밖의 반응이다. 침착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유준의, 그럼에도 허옇게 뜬 얼굴을 응시했다. 얼굴색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나, 너가 나 좋아하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농담으로 넘기려고 하는 이유가 뭔데?”
민하는 한숨을 쉬었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구나, 민유준. 그래, 맞아. 못을 벽에 댔으니 망치를 들어야지. 못을 그냥 벽에 쑤셔봤자 금세 떨어져버릴 걸. 그녀는 입술 안쪽을 깨물고 침을 한번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너, 양다리 걸치는 여자 좋니?”
탕탕!
“뭐?”
“양다리 걸치는 여자가 좋냐고. 나, 사귀는 남자 생겼거든.”
탕탕! 탕탕!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쐐기를 박아주자.
“니가 양다리가 좋대도, 사실 내가 싫어. 사귀는 건 물론이고, 너랑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워. 물론 미안하기도 하고. 전에 내가 한 제안 지워주라.”
미안해. 미안해, 유준아. 나 때문에 너 몸도 다치고 마음도 다치는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민하.”
유준이 약간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좀 이상해.”
“무슨 말이야?”
민하는 처음으로 유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꼭 총 들고 뱉어내는 듯한 말투야. 뭔가 피하려는 것 같고……. 나한테 그 말하는 게 무서웠어?”
잠자코 있었다. 그게 도리어 유준을 열 받게 만든 모양이다.
“나 정말은 좀, 아니 무진장 쇼크 받았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누구야? 상대는.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놈이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좋은 남자야. 정말로. 내 친구한테 소개팅 시켜주는 것도 아까울 만큼 좋은 남자. 그렇지만 내 타입이 아닌 걸 어쩌겠니. 미안해.”
민하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참 이상하다. 나이가 드니 느는 것은 눈물뿐인가 보다. 바보처럼.
안되겠다. 지금 일어서야겠다.
“친구로라도 만날 수 없는 거냐? 그건 괜찮지?”
답답할 정도로 매달리는 유준이 미웠다. 하지만 가장 미운 것은 추악한 협박에 굴복한 자신이다. 그래도,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주변사람들만은 보호해야한다. 그 사이코 같은 놈이 또 무슨 사건을 터뜨리기 전에.
“아니, 그것도 부담스러워. 너한테도 별로 좋지 않을 거야.”
민하는 일어섰다. 그러면서 연결동작처럼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낼게. 미안. 나 지금 가봐야 해. 그 남자랑 만나기로 했어.”
“서민하!”
뒤에서 유준이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발목 보호대를 하고 가장 편한 단화를 신었는데도 삔 자리가 시큰시큰하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겨우 세 걸음인가 디뎠을 그 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뒤로부터 들려왔다.
“너……, 정말 잔인하구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교정하려 애쓰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찻값을 지불하고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서 카드를 지갑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카페 문을 열자마자 정면. 길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정 포르셰가 그대로 눈에 와 박혔다.
강인이 차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계속.
자신을 희생하여 주위를 지키려는 강한의지..3월의 시작과 함께 정크님의 글을 만날 수 있어서 넘 좋습니다. 좀 더 자주 뵐수는 없을지요?? [08][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