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잠깐만 기다려, 카레 만들어 줄게.”

가영은 자신의 언니가 부엌으로 향하자 나를 향해 속삭였다.

언니는 카레가 특기야.”

그녀는 왠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 하나뿐인 가족이다. 정말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난 마음이 따뜻해졌다.

절교 같은 건 절대 못 할 것 같은 표정인데.”

가영은 몸을 살짝 움찔하더니, 혀를 내밀며 쑥스러워했다.

그건 정말 걱정하고 있어라는 신호야.”

그리고 그녀는 다시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의 언니를 바라본다. 그녀의 언니는 자신이 사온 듯 비닐봉지에 담겨져 있는 재료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한다. 상상하건데 그녀의 언니는 분명 멀고 험한 곳에서 자신의 동생이 있는 곳까지 돌아온 것일 것이다. 하지만, 가영은 그녀를 도와 주방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요리를 준비하는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 이게 이 가족의 패턴이겠지. 요리를 준비하는 그녀의 언니의 마음과 그런 자신의 언니를 지켜보는 가영의 마음. 서로만이 알 수 있는 신호와 같이 서로만이 알 수 있는 정해져있는 패턴.

내게도 분명 소중한 가족이 있겠지.’

나는 다시 가영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어. 널 보니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 그리고…….’

허상인 내게 심장 따윈 없을 텐데, 두근거린다.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왜 여기 있어?”

가영은 점심시간 옥상에 올라왔다.

생각 중.”

그녀는 위험하게 난간에 가슴을 얹은 채 운동장 쪽으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꼭 그렇게 위험한 자세로 생각해야 돼?”

…….”

무시한다. 유령인 나의 충고는 충분히 주의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라고 나 혼자 투덜거린다. 그녀는 몸을 돌려 이번엔 등 뒤로 난간에 기대고 있다. 저 난간 진짜 낡아 보이는데!

넌 뭐가 제일 무서워?”

……지금은 네가 떨어질까 봐 무섭다!”

나는 한껏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가영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그 아이는 뭘 무서워하는 걸까?”

나는 고민하고 있는 가영이를 지그시 바라보다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네가 그 녀석과 연관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가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네가 계속 다치는 걸 보고 좋아할 리 없잖아.”

아니, 그래도 그건 아마도 무리일 걸…….”

가영은 내 반응에 꽤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니었나보다.

“2, 아니 이제 일주일이구나. 다음 주 수요일에 수학여행을 가면 불러내는 역할은 당연히 나고.”

그런 말 못 들었어!”

당연한 일이니까,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 그럼 누가 걔를 불러내겠어.”

위험하잖아! 그런 위험한 역할을 왜 고등학생에 불과한 네가 해야 해?”

그야, 상대가 동급생이니까 그렇지.”

그런 건 어른들이 해야 하는 거잖아.”

…….”

가영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 기울었다. 그녀는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다짜고짜 낯선 사람이 부르는 데 그렇습니까하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른이든 애든 상관없는 거야. 해야 할 사람이 하는 거니까.”

…….”

대화가 서로 어긋나서 맞지 않는다. 그녀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어긋나서 맞지 않았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가영이 말을 돌린다.

유령일 때 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일주일이 마지막이야. 하고 싶은 거 없어? 여탕 엿보기라든가.”

사람을 뭐로 보고.”

신체 건강한 남자애?”

요즘은 인터넷이면 다 해결 돼.”

안 본다고는 안 하는 구나.”

여탕 엿보기는 뭐냐?”

투명인간의 정석? 같은 느낌?”

여탕에 그런 게 우글거리니?”

, …….”

없다고는 안 하는 구나.”

……우글우글하진 않아.”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까, 나 다른 유령은 못 봤어. 있긴 있는 거야?”

그러자 가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 그게 이제 와서 궁금해?”

유령 생활이 이제 끝나잖아. 갑자기 궁금해지네.”

가영은 살며시 미소 짓더니 갑자기 뒤돌아 땅바닥으로 고개를 향한다.

우왓! 위험해!”

내 비명에도 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를 바라본다.

저기에도 있어.”

그 목소리는 씁쓸함과 슬픔이 묻어났다. 나는 가영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바라본다. 하지만 학교 건물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 옥상에 올라올 수 있는 지 알아?”

?”

그리고 보니 보통 학교 옥상은 출입금지로 잠가놓는다.

그 여자애는 오후 4시 반만 되면 저 캐비넷 안에 숨겨놓은 열쇠로 문 열고 들어와서 매일 매일 자살을 해. 다시 다음날 오후 4시 반까지 학교 건물 현관 앞에 피를 흘리고 죽어있어. 그리고 오후 4시 반만 되면 다시 옥상에 올라오지.”

나는 조금 충격을 먹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소녀가 지금 가영이 눈에는 죽어서 쓰러져 있는 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오후 4시 반마다 그 아이가 떨어지는 걸, 가영이는 보고 있었던 걸까? 학교를 등교하면 매일 아침마다 피를 흘려 죽어 있는 소녀를 본 걸까?

너처럼 도와달라고 구조를 요청하면 그건 차라리 나아. 하지만, 매일매일 자살하는 쟤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아. 그저 매일 같이 절망하고 슬퍼하며 죽어갈 뿐이지. 그 아이의 눈에는 살아있는 인간조차 비추지 않아. ……유령도 정말 다양한 존재들이 있어.”

가영이는 울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이미 소녀를 만나고 이미 슬퍼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저 조용히 슬퍼하고 있을 뿐, 눈물 같은 건 이미 다 울어버리고 만 게 아닐까. 이 아이는 하루 이틀 유령을 보고 산 건 아닐 테니까.

데이트를 하자!”

…….”

바닥을 향해 바라보던 가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조금 우쭐해졌다. , 이런 방향에서 내 예상이 맞은 건 약간 비참하지만, 어쨌든 가영에게서 다른 생각을 떼어놓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

내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넌 죽는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되살아나는 거 거든?”

그럼 생환 기념이라고 생각해. 되살아나면 이렇게 24시간 같이 못 있잖아.”

……그야 당연하지.”

그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좋아, 하자.”

? 정말?”

나는 빈말이었다. 짐짓 뭔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 내가 오히려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였다.

적극적인 넌 불길하다니까.”

…….”

명치 부근에서 살짝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는데 착각이겠지…….

 

가영은 무릎까지 오는 검은 색 플레어스커트에 흰색 바탕의 하늘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흐트러놓는 단발머리를 정리해 하나로 모아 묶고 살짝 뜬 앞머리를 다듬었다. 9월 초입 아직은 더운 날씨라 남방은 롤업해서 제법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뭐가 불만이야?”

원피스 같은 건 없어?”

나는 나의 희망사항을 말해본다. 그러나 찌릿 전류가 흐르는 사나운 눈초리만 돌아온다.

나한텐 치마만으로도 최선이야.”

맨날 입는 치마가 무슨 최선이야.”

교복이 무슨 치마야. 그냥 교복이지.”

…….”

나는 살짝 가영의 눈치를 살피며 내 몸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영이 잠깐 움찔했지만 곧바로 기세가 돌아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본다.

불쌍한 척 하지 마, 이번에 안속아. 고작 옷가지고 뭐.”

나는 갈아입지도 못하는 데 너라도 예쁘면 좋잖아.”

……, 어쨌든 불쌍한 척 해도 소용없다니까.”

순간 움찔한 주제에 강한 척 하긴. 사실 옷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런 투닥거림이 즐거워, 나는 좀 더 그녀를 놀리고 싶었다. 물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예쁜 옷을 입은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평소엔 교복 아니면 운동복이니 이것도 감지덕지긴 하다. 그렇다고 나의 욕... 아니 희망을 버릴 순 없지. 다음엔 꼭 원피스를 입히고 말리라.

그에 비해 옷은 꽤 괜찮은데, 옷에 관심이 없진 않나봐?”

순간 가영의 눈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

……언니의 인형놀이 같은 거야.”

…….”

나는 일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 표정이 풍부한 누님은 아주 동생을 물고 빨고 장난이 아니었다. 누가 보면 자기 딸인 줄 알겠다 싶을 정도였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자매이니 아주 틀리진 않으리라. 반은 그 누님이 기른 것 같다.

하지만, 네가 유령을 보는 건 말 안 했지?”

나는 가영의 옆을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그런 말 하면 언니는 아무것도 못해. 내 곁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겠지. 그런 건 싫으니까.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건 당연하고.”

하긴.’

내가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가영을 미친사람 취급했을 게 분명하다. 누군들 믿겠나.

그래서……, 어디 가는 거야?”

……, 일단 일반적인 데이트 순서를 따라보기로 했어.”

그거 설마…….”

가영은 대형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는 영화관 앞에 섰다.

, .”

걱정 마, 표는 두 장 살게. 근데 좋아하는 장르 있어?”

그녀는 진지하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유령과의 데이트를 정말로 진행 중이었다.

적극적인 너는…….”

너 몸으로 돌아가면 먼지 나게 패주기 전에 입 다물어. 나 싸움 기술 꽤 배웠거든?”

나 히어로물…….”

나는 얌전히 좋아하는 장르를 불기로 했다. 가영은 표를 끊고 나를 위해 끊은 자리에 크로스백을 올려놓아 의자가 내려오도록 고정했다.

가끔 궁금했는데, 왜 유령은 벽이고 문이고 다 통과하는데 일상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거나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거야?”

그건 무의식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뭐 그 외에도 이유는 있지만 1차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거.”

다른 이유는 뭔데?”

내가 묻자 가영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나 그 설명은 나도 이해 잘 못하고 설명 할 자신 없는데.”

그럼 됐어. 뭔가 세계의 비밀을 물어본 기분이네.”

……딱히 틀리지도 않네.”

가영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 물어봐도 설명하기 어려워 할테니.

 

, 맛있겠다.”

영화를 보고나서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에 들려 커피 두 잔과 치즈케이크와 티라미스를 앞에 두고 외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못 먹잖아.”

아냐, 앞에 앉아봐.”

종업원이 모두 가영 앞에 놓아둔 메뉴를 그녀는 맞은 편 자리에 옮겨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작은 크로스백 가방에서 문고본을 꺼냈다. 문고본에는 그녀가 자주 가는 도서관 라벨이 붙어있다.

자 집어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어이없어하며 아이스커피에 꽂혀있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우왓! 뭐야 이거?”

세계의 비밀?”

가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제사랑 같은 원리야. 지정된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건 가능해. 나는 너를 인식하고 있으니 너한테 음식을 주는 게 가능한 거지. 물론,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생각해야 하지만.”

나는 포크를 들어올렸다.

.”

나는 감탄사를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없는데 커피 두 잔에 케이크 두 개를 앞에 두고 마치 다른 사람과 있는 것처럼 있는 가영이 신기한 듯 힐끗거리고 있었다.

포크가 들리는 데.”

제사상에도 수저는 올리잖아.”

아무도 모르는 데?”

그게 룰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다른 사람 눈에는 포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진짜 세계의 비밀쯤?”

이거 응용하면 다른 것도 가능한 거 아냐?”

, 그건 응용 안 돼. 의식주에 관련된 건 모르겠지만, 이래뵈도 이건 우리나라 관습이니까 가능한 거야. 그 나라, 그 민족, 그 지역의 문화와 형식에 따라 유령에 대하는 방식도 다른 거야.”

뭐야, 그럼 종교에 따라 달라?”

, 그렇겠지. 본질적으로는 죽은 사람 본인과 그 주변사람 혹은 무의식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에 따라 달라. 종교적으로는 크리스찬이라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무의식에 있는 방식에 따라 사후세계가 결정되니까.”

종교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얘기야?”

글세, 난 무교라서 잘 모르지. 실제 크리스찬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 하지만 우리나라랑 달리 미국이나 유럽은 크리스찬 방식으로 사후세계가 결정되지 않을까?”

으흥, 그럴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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