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왜 그래?”

그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서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현은 아이들을 향해 걷다가 귀를 만진다. 나는 그녀의 바로 뒤를 걸으며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댔다.

?”

그는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내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내 시선을 따라 서현을 향했다. 나는 그녀가 안 보는 틈을 타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내 낌새가 이상했는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건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경우도 있나?’

왜 그래?”

다경이 서현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나를 툭 치며 묻는다.

진짜 예쁘게 생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에 없는 소릴 한다.(사실이니까) 다경은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쟤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여자들도 반할 정도로 예쁘게 생긴 건 아닌데?”

그건 그런데, 뭔가 좀 다른 분위기가 있지 않아?”

, 애가 좀 멍한 구석이 있지.”

, 되게 깨끗한 검은 구슬을 보고 있는 것 같아.”

, 그래. 그건 이해간다.”

다른 애들과 달리 칠흑 같은 까만색이라는 게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멍 때리는 모습은 깨끗한 유리구슬의 빈틈 같아서 남녀 둘 다 적당히 호감을 얻는 타입이다. 물론, 비호감이 없진 않다. 특히 여자애들 사이에서.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남자친구가 있어서 대대적인 왕따를 당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리고 보니까, 쟤 남자친구 있지?”

, 중학교 때부터 쭉 사귀던 사이라서 유명할 걸?”

, 그래…….”

내가 그 남자친구는 누군가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옆에서 다경이 나를 팔꿈치로 치면서 웃는다.

너 모르는구나? 쟤 남자친구가 누군지?”

그야 내가 우리학교 여자애들 남자친구를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당연한 소릴 묻나 싶어서 다경을 바라보니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게, 아마도 난 알아야 하는 입장이었나 보다.

우리 반 애잖아! 민수영!”

민수영, 나는 깜짝 놀랐다.

혹시 저번에 나랑 양호실 갔던 애?”

그래, !”

, 그렇구나.’

그러나 별 감흥은 안 든다. 걔는 100퍼센트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애니까. 근데 쟤는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 공 날아온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우리반이 먼저 공격당한다. 나는 적당히 공을 피하면서 언제쯤 맞아서 나갈까 고민했다. 운동을 시작한 건 2년쯤 되었다.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할 때는 적당히 운동신경이 있는 애로 분류되었다.

가영이 너! 적당히 맞아서 나갈 생각이지? 너 그럼 죽는다?!”

반장이 전의에 불타오르며 나에게 외쳤다. 그 순간, 내게 날아오는 공! 나는 반사적으로 공을 받았다. 서서히 예열되기 시작된 분위기에 나로 인해 다들 잠시 숨을 돌린다.

워워, 진정해.”

난 공을 한 손으로 들고 던지는 자세를 취하면서 반장을 봤다.

영주야, 우리 너무 열 내지 말자.”

박영주, 저래 뵈도 배구부다. 반장은 내켜서 한 건 아니지만, 일단 맡았으니까 성실한 편이다. 다만……, 본성이 운동부라 승부욕이 장난 아니다. 아니, 어느 의미 승부욕이 장난 아니니까, 성적도 좋았던 거다.

그럼, 성실히 경기에 임해.”

난 정말 운동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다. 그리고 그건 될 수 있으면 숨기고 싶다. 원래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알았어.”

이런 체질이다. 동시에 튀지 말자가 내 신조다. 흑흑……. 그리고 적을 향해 눈을 빛냈다.

가영아, 우리 너무 열 내지 말자.”

내 빛나는 눈을 본 것일까, 1반 여자애들이 손바닥을 들어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역시 궤도는 바닥이지, 나는 맞아져 튕겨나 외곽에 있는 우리반애들이 받기 좋아 보이는 궤도를 계산한다. 그리고 힘껏 던지는 척 맞은편에 있는 우리반 애에게 던진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밖으로 나간 애가 한명이다. 궤도고 뭐고 없다. 내 눈빛에 속아 움찔하던 애들 뒤로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진 내 공을 받은 애가 바로 쾌속으로 던진다. 스트라이크! 볼링 핀이 다 쓰러지는 쾌감이 바로 이것이겠지. 적군 3명이 아웃되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영주에게 던진다. 그러나 바로 적의에 불타는 애들의 집중포화에 난 곧 아웃되었다.

난 임무를 마쳤다.”

마치긴 뭘 마쳐! 네가 되도록 오래 살아야지, 우리가 이길 확률이 높지!”

시작하자마자 머리 맞고 나간 너에게 듣고 싶지 않다.”

그렇다. 영주는 내가 딴 생각하는 동안 아웃되어서 내가 포물선을 그리며 던진 공을 받아 3명의 적군이 아니라, 1반 애들을 아웃시킨 그녀다.

너한테 집중포화 되는 중에 눈먼 공에 맞은 얘네들을 어쩔 거야?”

영주는 나에 앞서 밖으로 나간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공을 튕겨서 적군에게 도로 넘겨준 너에게 듣고 싶지 않다.”

영주의 이상할 정도의 열의는 바로 아무것도 못하고 아웃된 분풀이다. 최소한 난 아웃시킨 애들이 있지 않느냐.

킥킥.”

그가 팔짱을 끼며 경기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살짝 노려보았지만, 곧 아무것도 못들은 척 경기에 임했다. 다행히, 경기는 영주의 열의에 힘입어 우리반이 이겼다. 졌다간 한동안 영주의 잔소리 폭풍에 당했을지 모르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밥은 안 먹어?”

그가 묻는다.

남들 다 먹을 때 같이 먹으면 출석부는 언제 훔쳐보겠니.”

나는 힐끔힐끔 남의 눈을 신경 쓰면서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저번에도 옥상에서 먹더니.”

그건…….”

오늘도 혼자 먹겠네?”

너 혹시 나한테 싸움 거는 거니?”

왜 얘기가 이리로 굴러가는 거냐. 이건 다 너 때문이잖아.

미안해서 그러지.”

급식비도 냈는데, 급식 챙겨먹지 못하는 내 신세……. 그게 아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혼잣말하는 장면을 보여줄 순 없어 이렇게 숨어 다니고 있건만.

, ! 교무실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나는 교무실 앞 선생님전용 화장실에 숨어서 그를 보냈다. 1층 화장실에는 칸막이가 가려져 있어 다른 화장실과는 좀 다르다. 나는 칸막이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이 자리가 선생님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하게 좋은 위치다.

과연, 아무도 없어.”

그에게서 OK사인이 나자, 나는 재빠르게 교무실에 들어섰다. 시험 기간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라서 그런지 다행히 교무실이 잠겨있지 않다. 어지간히 당직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출석부가 꽂혀있는 책장 앞에 섰다. 출석부는 좁게 만들어진 특별한 책장에 꽂혀있다. 나는 1학년 1반부터 순서대로 빼고 줄이 그어져있거나, 지속해서 결석중인 학생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 우리 반 게 없네. 담임이 갖고 있거나……, 우리 반에 누가 놓고 갔나? 체육시간이었는데?’

, 우리 반 건 됐다. 결석자도 사망자도 제적자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2반 김미영, 학기 시작하자마자 결석. 2반 강우진, 전학. 4반 나지혜, 제적당했네. 5반 장민호, 최근 일주일 결석.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일단 체크. 6반 정유미, 얘는 오다말다 하는데 일단 체크.’

다 됐다. 가자.”

뭐가?”

기대하던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다른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깜짝 놀라 출석부 책장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뭐해?”

같은 반의 수영이다.

, .”

그도 내가 출석부를 들여다보는데 함께 집중하고 있었는지, 수영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넌 망을 봐야지!

넌 진서현 남자친구!”

!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와?”

수영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래, 상대방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예를 들어 부끄러워할 만한 화제를 던지는 게 회피하기 좋은 방법이다.

오늘 체육시간에 들었어. , 너 능력 좋다. 걔 우리학년에서 제일 예쁜 애잖아.”

수영은 잠시 부끄러워하다가 내가 서현이 예쁘다는 말을 하니 살짝 인상을 쓴다.

난 그런 말 별로…….”

? 예쁘다는 말? 의외네.”

남자애들은 자기 여자 친구가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나?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

수영은 내 탄식소리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비명은.”

아니, 그렇게 좋아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다니……. 닭살 돋아서 죽을 뻔했다.”

!”

! 난 이만 간다!”

나는 화를 내는 수영을 피하는 모양으로 교무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마침 그 때 당직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척 천천히 걸었다. 교무실에 들어선 당직 선생님이 수영을 발견하고 화를 낸다.

? 왜 여기 있니?”

체육선생님이 출석부 돌려놔 달라고 하셔서.”

아하, 그래서 우리반 출석부가 없었구나. 체육선생님은 그대로 밥 먹으러 학교 밖으로 나갔나보다.

그래? 그럼 빨리 놓고 가.”

살짝 날카로웠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럼 난 매점이나 갈까.”

사소한 의문도 해소되었고, 난 매점을 향해 발의 방향을 바꾸자, 그가 만류했다.

아직 안 늦었으니까, 식당으로 가.”

어차피 사람도 없을걸.”

그래도 빵보다 밥이 나아.”

…….”

난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내게 미안해하는 것이겠지. 나도 굳이 말로 옮기지 않고, 식당을 향했다. 아무말없이 그렇게 수긍하는 게 서로에게 더 나으리라.

 

사망자는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까 출석부를 훔쳐보며 수첩에 옮겨 적은 아이들의 이름에는 사망자가 없다.

 

1-2 김미영 학기 시작부터 오늘까지 결석

1-2 강우진 전학

1-4 나지혜 제적

1-5 장민호 최근 일주일 결석

1-6 정유미 띄엄띄엄 결석

 

4반의 얘는 제적당한 것 같고, 2반의 얘도 곧 제적당할 것 같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퇴쯤 될 것 같고…….

어차피 여자애들 다 제외하면 둘 뿐인데, 일주일 결석한 얘도 아닌 것 같고. 전학 간 얘가 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그를 힐끔 본다. 그는 내 옆에 앉아서 내가 들고 있는 수첩을 훔쳐보고 있다.

너 여자애는 아니지?”

보면 알잖아!”

성별을 의심받으니 펄쩍 뛴다.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학 간 애가 왜 우리학교 교복을 입고 죽겠어? 교복 맞추기 전에 죽었나? 아닌데, 얘 학기 시작하기 전에 전학 갔으니까, 교복쯤은 맞췄겠지.”

, 머리 아파.

나중에 2반 가서 물어보자. 친구들 있을 테니까, 소식 알겠지.”

나는 수첩을 덮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고 있으니,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았다.

이제 밥 먹어?”

민수영이다. 오늘 많이 부딪치네? 그는 기분이 나쁜 듯 민수영을 노려본다.

, 근데 넌 왜?”

난 체육선생님 심부름하느라 늦었지. 뒷정리하고 출석부 돌려놓고, 뭐 기타등등.”

수고 많았다.”

여자애들은 피구했지? 이겼다며?”

, …….”

우린 달리기 했는데, 그 다음엔 방치.”

, 축구를 할 수는 없었겠지. 우리랑 양분해서 썼으니까.”

우리학교 운동장은 달리기 트랙과 축구를 할 수 있는 구조는 되었지만 그 넓은 운동장을 다 쓰는 축구를 하려면 여자애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피구를 하는 동안 남자애들은 달리기가 최선. 불쌍해라.

근데 넌 뭐했어?”

?”

방금 피구했다고 니가 말했잖아. 뭘 물어보는 거지? 난 잠시 밥 먹으면서 고민하느라 아까의 일을 잊고 있었다.

교무실에서.”

…….”

잠깐 한기가 등줄기를 따라 달렸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경계의 태세를 취한다. 순식간의 일이라서 힘이 들어갔는지 그가 일어서는 기세에 의자가 밀렸다.

끼이익!

나와 수영의 눈빛이 밀려난 의자를 향한다.

요새는 참 우리 학교 이상하다.”

수영은 웃으면서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화제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일어서서 수영을 노려봤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겨우 겨우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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