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졌다. 해가 질 무렵 나는 연우아저씨에게 얻어맞은 체 뒷마당에 주저앉아있었다.

, 7시 반이네. 저녁 먹고 가.”

연우아저씨와의 호신술 훈련 직후에는 언제나 이곳에서 저녁을 먹는 게 습관이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을뿐더러 혼자 먹는 것보다 모두와 먹는 게 당연히 즐겁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오늘은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래?”

연우아저씨는 의외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하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분명히 내 몫의 밥도 준비했을 텐데, 나는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몇 시간 째 기다리고 있을 그가 신경 쓰여 밥이 안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2층에서 세수를 하고 가볍게 땀을 닦아낸 다음, 가방을 메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카페 밖으로 나오니 지루한 표정을 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숨으라니까.”

숨어있었어, 너 나온다는 소리 들렸으니까.”

진짜 기다렸나보다.

그렇게 입고 가게?”

그는 교복에서 진에 흰T셔츠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가리키며 물었다.

땀에 젖었으니까, 이대로 입고 가서 빨아야지.”

교복은 가방 안에 들어있다. 구겨져서 집에 가면 다시 다림질해야 하는 게 귀찮지만, 옷을 따로 들고 다니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은 일이 생긴다. 교칙위반이다.

……,”

그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아냐.”

그는 내 머리를 힐끔 보고 있었다.

, 머리 묶은 거?”

나는 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머리를 풀었다. 땀과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저녁바람에 시원해졌다.

여자애는 머리모양이 바뀌면 느낌이 확 다르구나.”

뭐라고?”

그는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 시부렁거리는 거야?

 

네 이름을 찾으려면 일단 출석부를 입수해야 돼.”

나는 집에 와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교복을 다림질하려고 다리미와 다리미대를 펼쳐놓고 말을 꺼냈다.

네가 죽었다면 아마 네 이름에 줄이 그어져 있을 거야. 그 출석부를 찾으면 네 이름도 찾을 수 있겠지.”

전학생이나 나 외에 죽은 사람이나 제적당한 애도 있을 텐데?”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후보군을 줄일 수 있다는 건 중요해.”

나는 분무기를 뿌리고 다시 흰 상의를 다린다.

다행히 학년은 알았으니까.”

? 몇 학년인데?”

상식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었다. 이름이나 가족이나 이런 개인적인 부분은 경험의 문제긴 하지만, 자신이 속해있는 체계에 대한 기억은 별개의 문제다.

네가 1학년 교실에 자주 출현 것도 그렇지만, 너 목에 건 줄 넥타이 색깔, 녹색이잖아.”

우리학교는 학교문장과 이름이 새겨진 배지는 가느다란 줄 넥타이를 고정하는 핀이다. 배지는 남색배경에 은색으로 연꽃상징 안에 연라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그 줄 넥타이의 색깔은 학년별로 다른데, 올해 1학년은 녹색, 2학년은 파란색, 3학년은 붉은 색이다. 다음 해 1학년은 붉은 색이 되겠지.

이게 그런 의미였구나.”

애들 다 하고 있었는데, 눈치 못 챘어?”

신경 안 썼으니까. 게다가…….”

……?”

그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뭔가 아리송한 지 말을 찾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게다가?”

……뭔가 낮 설어.”

뭐가?”

우리 학교 아닌 거 같아.”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확신해?”

네가 입은 옷은 확실히 우리학교 교복이니까. 네가 남의 옷을 입고 죽을 리 없잖아? 그리고 만약…….”

?”

그리고 만약 네가 우리학교 학생도 아닌데 우리 반에 나타나 땡깡부리고 나까지 휘말리게 만든 거면, 나 무지 억울할 거 같으니까. 나는 불길한 예감에 입가 맴도는 속마음을 누르고 다시 손을 놀렸다.

일단 출석부를 확인하자. 네가 우리학교 학생이 아닌지 긴지도 확인 할 수 있어.”

그 후보군들 중에서 죽은 애라도 얼굴은 알아 볼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애들한테 물어보거나 학생기록부를 훔쳐보던지 해야겠지. 그 다음 일은 일단 출석부 접수부터 하고나서 생각하자.”

띠리리링! 띠리리링!

물론, 구체적인 사항은 실행 직전에 얘기하려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으니 얘기할 것도 없었겠지만. 타이밍 좋게 집 전화벨이 울려 나는 대화 강제종료 상태가 되었다.

, 여보세요.”

전화를 걸 상대는 한정되어 있다.

[! 가영아, 건강해?]

밝은 목소리의 전화상대는 내 하나뿐인 가족 7살 차이 나는 언니다.

물론이지, 난 건강해. 그보다 언니는?”

[당연히 건강하지!]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뭔가 총소리 같은 게 들린 거 같은데.”

[영화야, 영화! 옆 방 TV가 참 소리가 크네.]

부스럭 부스럭, 뭔가 챙기는 소리가 들린다.

바쁜 거 아냐?”

[바쁘긴, 이때 아니면 못 걸 것……. 아니, 갑자기 내 귀여운 여동생이 생각나서!]

……언니야 말로 팔다리 다 붙어서 돌아와 줘.”

[그럼!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게! 그럼 다시 걸게, 학교 잘 갔다 와!]

지금 밤이야.”

[! , 그랬다! 그럼 잘 자, 내 꿈 꿔?]

띠릭! 대답할 틈도 없었다. 원래도 뜬금없이 전화를 걸긴 하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상황에서 거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실, 난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잘 모른다. 언니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떤 인연으로 지금의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고수입에 해외출장이 잦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그리고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일이라는 것도. 내가 가끔 언니 주변에서 원한 서린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는 유령을 보는 건……, 비밀이다. 그래서 더욱 언니에게 내 체질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전화 올 때마다, 꼭 유언하러 건거 같아서 조마조마하다고.”

나는 한숨을 쉬며 불만을 터뜨렸다.

언니? ……너 언니랑 둘이서 사는 것 같다.”

그는 좀 망설이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 부모님은 나 10살 때 사고로 돌아가셨어.”

거실에는 16살의 언니와 9살의 나,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의 엄마와 아빠가 함께 찍혀있는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내 책상에는 지금의 언니와 둘이 찍은 사진도 늘어놔 있긴 하지만, 가족사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부터 한 번도 움직인 적 없이 그 자리에 있다. 그도 나를 따라 시선을 가족사진으로 향했다.

언니 중학교 졸업 때 찍은 거야.”

가족사에 해당해서 그런지 시선으로 물어도 되는 지 의사를 타진해 오는 게 느껴져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너 혹시…….”

부모님 유령을 본 적은 없어. 원래 그런 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머뭇머뭇 말끝을 흐렸지만, 당연한 의문이다. 나도 궁금했었으니까. 선생님이 말했다. 원래 지나치게 깊은 인연 또한 보기 힘들다고.

나한테도 가족이 있겠지?”

……내 생각에 너무 빠져있었나 보다. 이런 전개가 될 것을 예상 못했다니.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우등생이었을 것 같아.”

?”

수학문제 푸는 거 보니까, 공부 잘 했을 거 같으니까.”

그럼 너도 우등생이냐?”

……난 시험점수 나빠. 수학도 좋아하는 문제 유형이 따로 있고.”

소설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시험문제 암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과목의 절반은 못하고 절반은 특기다. 불균형한 점수는 담임 면담 때 늘 혼나는 문제다.

그럼 난 말 잘 듣고 착한 우등생?”

그런 느낌 좀 있어.”

분노 조절 장애는 아니고?”

, ? 아 혹시 학교에서 다 뒤집고 돌아다닌 거, 신경 쓰여?”

……, 좀 창피해.”

너만 그러는 거 아냐. 물론, 물리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재능이긴 하지만, 죽은 직후에 화내는 유령은 흔해.”

우등생이라고 해도 좀 그런데.”

우등생이면 좋은 거 아냐?”

좋은 건가? 그게?”

말투가 교내 1등 해놓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얘는 분명히 그런 성격일 거야. 나는 다리미대 위에 있는 상의를 옷걸이에 걸어 옆에 두고 H라인의 회색 스커트를 다렸다. 우리학교는 옅은 회색을 기본으로 한 교복이다. 여학생 스커트가 H라인이라는 점을 빼면 특별할 것도 없다.(그것도 그리 특별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기니 그는 그제서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 듯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새삼스럽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전신거울 앞에 섰다가 실망하는 그를 보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교복을 다 다리고 스커트와 상의를 함께 옷걸이에 걸어 내방 옷장 앞에 걸어두었다.

교무실에는 어떻게 잠입하지?’

!”

그래, 나한테는 물리적인 힘을 구사하는 유령이 있다.

좋은 생각이 났어!”

신이 나서 방에서 달려 나온 나를 보고 그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적극적인 너는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구나.”

무례한 놈 같으니…….

 

오늘은 4교시가 체육수업이다. 나는 녹색 체육복을 입고 스트레칭을 한다. 오늘은 1,3반 합동수업이라 반 대항 피구로 결정이다.

오늘은 유난히 시끄럽구나.”

누군가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어느 집 규수인가 싶을 정도로 길고 가느다란 몸을 자랑하는 소녀가 있다. 1학년 1반의 1학년 중 가장 예쁘다고 소문난 여자애다.

그러니까, 진서현? 맞지?”

, 그래, 반가워. 이번 학기 들어서 같이 수업 받는데 별로 얘기한 적 없지?”

, 반이 다르니까.”

같이 수업 받아봤자, 반 대항 운동경기라 얘기할 일은 당연히 없다.

오늘따라 여기저기 여러 군데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서현은 1층 과학실을 바라본다. 창문 너머 뭔가 불꽃이 일어난다.

아차~, 과학실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그는 열심히 순차적으로 여러 교실을 돌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내가 요구한 거다. 선생님들을 좀 바쁘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되도록 방과 후에도 일찍 퇴근하도록 공포심도 들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점심시간도 이용해봐야지.’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달리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하신다. 괴담이 만연한 것도 모자라 오늘따라 소란한 학교에 있기 싫겠지. 물론, 당직이 있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후후후……. 나는 과학실을 보며 좀 아픈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음흉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

아니지, 아니지. 이건 오로지 선()을 위한 희생이야! 희생! 결코 재미를 위해 장난치려던 게 아니라…….’

나는 내 뺨을 손바닥으로 치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 왜 그래?”

서현이 이상한 애처럼 날 바라본다.

아냐, 좀 딴 생각을…….”

얘들아, 모여! 경기 시작한다!”

각 반 반장들이 부른다. 선공이 결정된 모양이다.

가자!”

난 내 이상한 행동을 얼버무리듯 반장의 호령에 반응하며 외쳤다. 서현은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앞서 걸어가다가 느리게 뒤쫓아 오는 그녀가 신경 쓰여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뭔가 무표정하게 과학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 가?”

사람 안 불러도 될까?”

과학실에서 연기가 난다. , 그러니까 과학실은…….

지쳤어, 나 좀 쉴게.”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던 그가 지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린다.

과학실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나는 서현이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힘들어서 그래, 점심시간은 좀 쉬자. 그러려고 살짝 크게 벌리느라 그런 거야. 큰 사고 안 났어.”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힘들기야 하겠지.”

힘들어?”

옆에 있던 서현이 이상하게 날 바라보며 묻는다.

아냐, 선생님들이 수습중이네.”

난 과학실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 그러네. 다행이다.”

그러나 서현의 시선은 과학실이 아니라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 이상하네.”

?”

나는 모른 척 서현의 중얼거림에 반응했다. 그러자 서현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혼잣말.”

얜 뭐지?’

내 의문스러운 시선을 느꼈는지, 서현은 그 단정한 얼굴과 다르게 얼버무리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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