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보통 학생은 학교의 지박령이 되는 건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때문에…….

난 학교에서 죽은 게 아니니까, 아마도.”

여전히 안 들리는 척하고 있긴 하지만, 보이는 건 이미 들켜버렸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내 혼잣말에 그는 아주 즐겁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백지상태인 듯 하다. 드물지도 않다. 죽었을 때 충격이 너무 크거나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세상을 떠돌면 유령은 기억 못할 수 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죽었을 당시에 충격이 컸을 경우겠지. 그 소년이 죽은 건 겨우 1주일 혹은 10일 정도 지났을 뿐이다. 세상에 너무 오래 남아서 기억이 사라져버린 유령은 아니다, 아마도. 결국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은, 그가 내 뒤를 졸졸 따라서 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쩜 저렇게 제한도 없이 슬렁슬렁 교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지, 난 지금 기가 막히고 있다.

…….”

난 소년의 대답을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처음에는 카페에 들어갈까 고민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까지는 아니고 늘 들리는 카페가 있다. 카페 붉은 꽃의 영문이름 CAFE Red Flower라는 커피전문점은 오랜 시간 이 지역에 있는 명물이다. 예전에는 다방 붉은 꽃이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록 오래 동안 이 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동네사람들에게는 길 찾기 지정장소라든가, 약속장소로 많이 쓰인다. 오래된 2층 양옥집을 가게로 개조해서 1층은 커피전문점, 2층은 사무실 겸 가정집이다. 내가 이렇게 이 집 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은 이 가게가 이쪽 세계에 걸쳐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가게 앞에 이르고서야 생각과 달리 가게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1층 카페의 바리스타 연하 언니와 눈이 마주치고 손을 흔들고는 다시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아마도 매일매일 출석 도장을 찍듯 왔던 내가 오늘은 그냥 지나치는 것에 언니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먼저 내 스스로 해결해보고 싶었다. 이럴 때마다 매번 선생님들에게 매달리는 건 싫었다.

고등학생이 무슨 카페야?”

요즘 고등학생이 커피전문점에 안가면 어딜 가냐? 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스쳤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이 자식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 거다. 상업 지구에서 멀어져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아파트가 늘어선 단지가 나온다. 난 익숙하게 패드에 암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집까지는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성급하게 문을 닫았지만, 내 바람도 허무하게 소년은 간단하게 문을 통과해 집에 따라 들어왔다. 새삼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난 한숨을 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드디어 부딪쳤구나. 나는 내심 고소하면서 짐짓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무시했다. 그랬다. 우리 집 자체는 방어주술을 걸어놓지 않았지만(그러면 오히려 시선을 끄니까), 내 방에는 걸어놓았다. 방문과 창문, 그리고 천장과 바닥.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수호부적이 붙어있다. 잠 정도는 마음 편히 자고 싶었던 내가 바라던 가장 강력한 안전장소.

! 이거 뭐야!”

소년은 내 방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난 무시한 채, 교복을 갈아입었다. 편안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내 중학생 시절부터 언니는 출장이 잦았다. 때문에 집안일도 대체로 내 일이다. 나는 아침에 바빠서 마무리 하지 못한 설거지에 손댔다.

너는 이 상황에서 설거지가 하고 싶냐?”

소년은 방금 부딪친 이미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거의 무의식상태에서 부딪친 거라 무척 아픈지 소년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혼상태인 그가 상처를 입거나 하지는 않지만, 영혼을 울리는 고통은 겪는다……라고 들었다. 유령이 되 본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쏴아아~, 끼릭.

나는 그릇을 모두 씻고 수도를 잠갔다.

, 그럼 할 일은 다 끝난거지? 그럼 못듣는 척은 그만하고 나 좀 보지?”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나는 움찔하고 몸이 굳었다.

니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반사적인 행동까지는 못 막아. 물론 나처럼 똑똑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잘 난 척 하기는!”

나는 고무장갑을 싱크대 위에 걸쳐놓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아까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챙겨놓은 부적을 꺼냈다.

당장 이 집에서 쫓아낼 수도 있거든?”

부적을 손에 든 채 그의 얼굴에 들이댔다. 그는 자못 겁먹은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아까 부딪친 이마를 다시 만지며 말했다.

뭐야, 그런 것도 있어?”

이런 체질이야, 그럼 없을 줄 알았어?”

그딴 거 안 믿으니까.”

웃기고 있네.”

지금은 죽어서 유령까지 된 인간이 부적을 안 믿는 댄다. 실소가 새어나온다.

그럼 왜 처음부터 그런 거 안 갖고 다녀? 학교에서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

시끄러워, 내 맘이야.”

아무튼, 이제 내 얘기를 들어!”

,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꺼내 이어폰과 연결했다. TV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 유령이 시끄럽게 떠들어댈게 분명하니 스마트폰으로 참기로 했다. 그는 내가 말을 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했다. 그는 화가 나서 내 귀에 연결되어 있던 이어폰 선을 잡아챘다.

……, 그랬지.’

나는 허무하게 이어폰 선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억해냈다. 이 유령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 바로 영체인 주제에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 반대로 말하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힘이기도 하다. 이건 인간이었을 때 무의식적으로도 유령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다. 볼 수만 있고, 무력했던 나와는 반대다. 게다가 느낌상으로는 실제 인간이었을 때는 유령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 이런 무슨 편리한 체질이야.’

내심 실망과 분노로 한숨을 쉬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이어폰 선을 내 귀에 끼었다.

! !”

그는 다시한번 이어폰 선을 잡아챘지만, 이번엔 그냥 통과했다. 그럴 줄 알았다.

유령이 지속적으로 실물에 힘을 행사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야.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없지. 계속 그렇게 난리를 쳐봐라, 내가 꿈쩍이라도 할 거 같니.”

난 고요한 목소리로 그에게 절망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보면 내가 그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렇다) 내가 그동안 유령들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난 제법 예의를 차리는 중이다. 그러게 누가 따라오래?

,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 집 물건은 대부분 고정되어 있어서 살림살이 못 뒤집어엎을 거야.”

…….”

그는 한순간 아연실색하더니 문득 턱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

소년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TV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뜬금없이 그는 조용해졌지만, 무슨 변덕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조는 듯 마는 듯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음뉴스입니다. 한강변에 밀려온 사체의 신분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교복을 단서로 탐문수사 중입니다만, 재학 중인 학생 중에는 없었다고…….

살짝 졸음이 몰려와서 실수로 뉴스를 터치한 모양이다. 나는 뉴스를 화면에서 치우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띄어놓았다. 이쯤 되면, 할 일은 학교공부와 독서뿐이다. 빌려 온 책은 다 읽어서 주말에 갖다 줄 예정이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수학책을 들고 이번에는 식탁에 앉았다.

…….”

그는 내가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때로 뭔가 말하고 싶은 느낌도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수학책을 펴고 예습을 시작했다.

수학은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집 안에 샤프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나는 음악을 BGM으로 문제풀이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잘하네, 근데 거기 틀렸어.”

……!”

거기 1 올라가고 다시 1 또 올라가잖아. 의외로 덜렁이? 사소한 실수가 많은 타입이구나?”

고개를 드니 뺨 바로 옆에 그가 얼굴을 들이밀고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물러섰다.

뭐하는 거야?”

거기 틀렸다고.”

난 외간 남자가 내 얼굴 가까이 들이민 사실에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그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내 노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리고 틀렸다. 순간,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기가 밀려왔다.

방해하지 마!”

나는 노트를 내 쪽으로 끌어안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좀 삐진 얼굴로 허리를 펴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야, 친절하게 가르쳐줬더니.”

유령 따위에게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어.”

, 그거 인종차별, 아니 종족차별? 암튼, 차별이야!”

……유령에게 인권 따윈 없어.”

.”

그는 내 차가운 말투에 겁을 먹은 듯, 한 걸음 물러섰다.

…….”

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안 건드릴테니까, 털 좀 그만 세워.”

누굴 고양이 취급이야?!”

고양이? 살쾡이겠지.”

뭐야?!”

머리에 열이 올라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몸에 통과는커녕 슬슬 피해버려서 맞추지도 못했다.

다혈질에, 덜렁이에, 경계심은 들고양이 저리가라네.”

유령 따위에게 듣고 싶지 않거든?”

나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무시했다. 그가 한숨을 쉬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전해졌다. 나는 기척이 멀어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그가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 TV 좀 틀어봐.”

여기가 니 집 안방이냐!”

 

나는 터덜터덜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퀭하니 생기가 빠진 나와 달리, 그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 내 뒤에서…….

좋냐?”

, 오랜만에 밤새도록 케이블 보고 놀았는데, 좋지.”

아아, 왜 수호부적에는 방음효과가 없는 것인가. 원하는 채널에 돌리지 않으면 잠 못 자게 소리 지르겠다며 협박하는 통에……. 실제로 한 시간 동안 고성방가를 들려주었다. 젠장, 몸이 없으니 목도 안 쉰다.

! 가영아!”

완전 습관처럼 카페 레드 플라워 앞을 지나다가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 연우 아저씨.”

박연우, 레드 플라워 2층 흥신소 직원이다. 서른이 확 넘은 아저씨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동안이라 대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 연하언니랑 같이 커플이 반칙이다. 부부는 닮는다더니…….(부부는 아니지만)

여기서 뭐하세요? 아직 일러서 사무실도, 카페도 열 시간 아닌데.”

연하가 어제 네가 안 들리고 그냥 갔다고 걱정했어.”

……, 어제는 그게.”

오늘은 올 거지? 수업도 있고.”

수업! 그랬다. 오늘은 얼버무릴 수가 없다. 나는 연우 아저씨에게 호신술을 배운다. 사무실에서 가장 한가한 건 아니고, 가장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 내게 개인적으로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딱히 유령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일은 드물지만, 반사 신경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많다. 그래서 레드 플라워 일행들은 나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줄 것을 결정했다. 나한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러니 더욱 마음대로 약속을 어길 수가 없다.

, 갈게요.”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너 과외 하니?”

나는 연우아저씨 눈에 안 보이게 손을 뒤로 휘휘 저었다.

닥쳐! 들키면 넌 죽어!’

……?”

연우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태도에 의문을 표했지만,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럼 오후에 봐요!”

난 급하게 손을 흔들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서둘렀다.

뭐야? 어차피 안 보이는 데 뭘 휙휙 손을 흔들고 난리야?”

저 사람은 안 보이지.”

? 꼭 다른 사람은 보인다는 말투다?”

그럼 세상에 유령이 보이는 체질이 나 하나뿐이겠니?”

정말? 잘됐네! 다른 사람하고 대화…….”

닥치고 잘 들어!”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대화하는 모습을 연우아저씨에게 들키면 안 된다.

아니지, 왜 들키면 안 돼?’

나는 문득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사실, 상황을 알려주면 모두 도와주려고 할 텐데, 왜 내가 그걸 피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저 사람들은 전문가야. 널 없앨 수는 없지만 유리병에 봉인정도는 할 수 있어. 수백년동안 갇혀 살고 싶지 않으면 없는 척 해! 실제로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고, 사실 선생님은 학교 때문에 자주 안 오니까…….”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그래도 하려던 말은 마저 했다.

……설마 진짜 고스트 헌터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

……대부분 똑똑한 척 하는 이 유령은 가끔씩 자신이 유령이라는 사실을 잊는 듯하다. 아니면,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든지.

유령이 있는데 그게 없겠니?”

살짝 동정심이 든다. 내용은 차갑지만 말투는 그렇지 못했다.

, 정말 나 사냥당하냐?”

진짜 겁먹은 것 같다.

……본업은 아냐. 나 때문에, 혹은 경찰일 때문에 협조하는 일은 있지만…….”

그럼 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관심 갖지 않아.”

……알았어.”

그는 전날의 일이 생각났는지,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한다. 왜 시늉이냐면 유령이 땀을 흘릴 리가 없는데 그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 너에게 닿기를 : 1.애상(2) 과객연가 2015-04-22
374 너에게 닿기를 : 1.애상(1) 과객연가 2015-03-30
373 뒤돌아보지 마라 : 종장 과객연가 2015-03-26
372 뒤돌아보지 마라 : 6장 아흔아홉 번째 인연(2) 과객연가 2015-03-26
371 뒤돌아보지 마라 : 6장 아흔아홉 번째 인연(1) [4] 과객연가 2015-03-19
370 뒤돌아보지 마라 : 5장 사랑하기 때문에(4) 과객연가 2015-03-14
369 뒤돌아보지 마라 : 5장 사랑하기 때문에(3) 과객연가 2015-03-12
368 뒤돌아보지 마라 : 5장 사랑하기 때문에(2) 과객연가 2015-03-10
367 추억은 사랑을 싣고 <08> [2] Lian 2015-01-25
366 추억은 사랑을 싣고 <07> [5] Lian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