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운영은 무심한 눈길로 그 수수께끼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용왕.”

운영은 파란 옷을 입은 소년을 향해 그리 불렀다.

무녀, 계약을 나눈 직후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선 곤란하지.”

소년은 긴 봉으로 김진사의 칼을 날려버리고 다시 휘둘러 자신의 등 뒤로 놓으며 말했다.

잘도…….”

운영은 소년의 모습을 한 용왕을 보며 잘도 찾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순간 입 밖으로 나올 뻔한 감탄사를 삼키며 다시 쓸쓸하게 김진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용왕이 휘두른 봉의 일격으로 칼과 함께 널브러졌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비틀거리면서 몸을 잘 가누지 못했다.

더 이상 영이를 찾으려 하진 않겠지.’

운영은 확신이 필요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의 동생의 안전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폐가가 되어버린 자신의 집을 찾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인과관계 확인을 위해 운영은 자신이 위험해질 가능성을 알면서도 자란과 김진사를 찾았다.

죽여 버릴 테다! 죽일 거야!”

김진사는 더듬더듬 손으로 다시 칼을 찾으면서 운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으로써의 삶은 이미 끝났습니다. 찾아도 소용없어요. 난 이미 더 이상 단순한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

김진사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한탄하며 괴로운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절망하며 살아가세요. 나 역시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니까.”

나 역시, 언니를 지키지 못한 당신을 용서할 마음은 없어.’

운영은 방문을 열고 집안을 나왔다. 그 뒤를 용왕이 걸어 나왔다.

이번엔 걸어가는 건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감정적이 되어서 툭툭 이동한 거지. 이젠 주변은 다 정리 했으니까.”

아무튼, 용왕의 입장으로는 당신이 오래 살아줬으면 하니까, 계약 다음 순간에 자살돌입 같은 건 안 해줬으면 좋겠군.”

…….”

흰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여인과 중국 한족 복식의 파란 옷을 입은 소년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둘은 마치 인간의 눈에는 띠지 않는 주술이라도 걸린 듯 자연스럽게 걸어서 대문을 넘어 밤의 거리로 나선다.

세오는요?”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필요 없다. 계약만 잘 이루어준다면.”

…….”

그 후로 8, 인간에게도 신수에게도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둘이 신뢰관계를 쌓아가는 데는 충분했다. 인간을 경멸하고 믿지 않는 용왕도 운영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신수 사이에서도 신수의 수호자 운영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날이 오기 전까지…….

 

긴 시간을 절망 속에 있었다.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희미했다. 1년에 단 하루 뿐 인 사자(死者)와의 만남.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죽은 에우리디케를 붙들고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조차 신의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그 만남의 횟수도 그 땅의 주인의 수명과 함께 끝났다. 그때였다. 그 악마가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던 것은. 악마는 말했다. 신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그 땅의 주인 때문이라고. 이번 대의 주인은 그 소명이 신의 시대를 끝내는 것이라고. 그것은 곧 질서에 반하는 영혼과 만나는 것도 할 수 없게 했던 거라고. 그래도 그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악마는 그 땅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시 에우리디케를 만날 수 있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그것은 신의 시대를 끝내는 무녀를 죽이고 그 땅의 지배권을 다른 이에게 옮기는 것. 경계의 땅이 열렸을 때, 그 땅에 갈 수 있는 통행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그 땅의 주인을 죽이면 경계의 땅은 열린 채 타인이 드나들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어떻게…….”

운영은 김서진의 모습을 한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뒤를 이어 방 안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다.

이 모습을 하면 당신이 감정적이 될 거라고 그가 말했지.”

방 안은 이미 풍경이 바뀌어 오색으로 물들은 천이 늘어져 있는 신목과 찻잔이 놓여있는 찻상이 있는 정자, 장승대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감정적이 되면 빈틈도 만들어지니 당황한 틈에 경계의 땅에 들어서라고. 당신을 따라가면 반드시 갈 수 있다고 했어.”

어떻게……, 말도 안돼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타인은 반드시 길을 잃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운영은 김서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미 완전히 자신의 영역에 들어선 운영은 그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으로 벗겨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오르페우스군요!”

오르페우스는 운영이 놀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야. 아니 기억도 아득할 정도로 수천년이 걸렸어. 여길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니.”

죽은 자를 안내하는 사신과 옥황황제, 염라대왕을 제외하고 이곳의 통행인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당신뿐이죠. 그것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내게 이 모습을 가르쳐준 여자는 흑룡 이하라는 자만 돌려주면 그 이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운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는 이겠죠.”

오르페우스는 풍경을 둘러보다 몸을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운영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맞아, 악마도 나도 그것으로는 끝낼 수 없어.”

악마는 누구를 말하는 건가, 운영은 순간 스치듯 의문을 가졌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는 나의 영역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조용히 당신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오르페우스는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운영에게 달려들었다. 운영은 손을 들어 외쳤다.

멈춰요!”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오르페우스의 몸은 속박 당했다.

!”

오르페우스는 몸을 움직이려고 뒤틀어보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과연, 땅의 주인인가.”

그래요. 이 세계에서 만큼은 난 신에 필적한 힘을 가지고 있죠.”

그래, 그런 건 여러 번 봤어.”

여러 번?”

내가 올 때마다. 당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만들어냈지. 자신의 본질과 닮은 힘만을 가진 신들과 달리 당신은 자유자재로 어느 힘이든 사용했지. 그게 늘 신기했어.”

……어쨌든 이제 당신을 세상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죠.”

운영은 가까운 곳에 문을 만들고 길을 열었다. 그 순간!

 

너는 죽게 될 거다

 

너는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 죽게 될 거다

 

운영의 몸이 속박 당했다. 그와 동시에 오르페우스를 속박하고 있던 힘이 풀렸다.

이 말과 함께 당신에게 전해주라고 그 여자가 말했지.”

“‘역시 당신은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다.”

운영이 경계의 무녀가 되기 이전에 자신을 속박했던 힘이자 그 자신의 깊은 상처였다. 운영은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앞에 있는 남자가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운영은 그것을 하나하나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단검이 자신의 심장부근을 파고들 때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서늘한 얼음이 자신의 마음을 얼게 하는 느낌이었다. 찬바람을 맞은 듯 눈가에 눈물이 짓물렀다.

그 놈의 빌어먹을 사랑. 그게 도대체 뭘까.’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한 남자를 폐인으로 만들며, 죽음조차 뛰어넘으면서도 그조차 만족할 수 없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감정.

주인님!”

세오가 뒤늦게 오르페우스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는 세오를 한손으로 패대기쳤다. 까마귀 한 마리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세오, 미안.’

운영은 자신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최소한 세오만이라도 경계의 땅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언령은 강력하게 자신의 몸을 속박했다. 아니, 자신의 영혼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제 끝이군.”

오르페우스가 운영이 만들어낸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방이 돌로 만들어진 문에서는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속처럼 이지러진 그림자가 비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음의 신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거군.”

운영은 뜻밖의 말에 시선을 오르페우스를 향했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죽자고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그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바로 당신을 지키자고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던 거더군.”

시선이 흐려진다. 심장에서 새어나오는 피 때문인지, 짓무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탓인지 이젠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만이 이 세계로 갈 수 있는 인장이 있었으니, 당신이 살해당했다면 나 뿐 인거지. 신들은 무녀 자신의 인생에는 관여할 수 없으니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킬 순 없지. 그저 가능성이 있는 나를 죽자고 쫓아다녔던 거야.”

생과 사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그제서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지요?-

-그 아인 당신을 죽게 만들 것이오.-

-그 애 때문에 당신이 죽소!-

그 필사적인 목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소. 그 애에게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오?”

생명은 살아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요.”

그녀가 그것을 후회하게 된다 해도?”

이 아이는, 무언가를 후회할 만큼 살지도 못했어요. 그 기회를 빼앗아가지 말아요, 죽음이시여.”

아아, 그 대화조차 이제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든다. 차갑게 짓무른 눈물이 이제는 뜨겁게 차오른다.

하하,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허사……!”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운영이 손가락부터 움직이더니 모든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그들을 중심으로 떨어져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세계의 붕괴였다. 운영은 여전히 피가 흘러넘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시선을 세오에게 향했다. 바닥에 부딪쳐 몸을 떨고 있는 작은 새는 의식이 반쯤 날아가 있었다.

세오, 그 동안 고마웠어요. 당신이 있었기에, 난 외롭지 않았어. 부디,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기를. 안녕.”

운영은 세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그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오르페우스는 운영을 멈추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 당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조차 이제 사라질 겁니다. 나는 아직 당신을 한번 밖에 그녀와 만나게 하지 않았으니까! 경계의 땅은 나의 죽음과 함께 소멸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녀라 일컬어지는 것, 신의 시대의 끝내는 무녀라 일컬어지는 것은 내가 내 대에 경계의 땅을 소멸시키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과 함께 이 땅은 소멸합니다. 그리고 신들의 왕은 약속을 지켜야하지요. 경계의 땅 소재의 생명의 물은 사라지고 신의 힘도 소멸의 길을 걷겠다, 두 번째 신의 시대를 연 무녀 레아와 약속했던 대로.”

그리고 오르페우스는 경계의 땅에서 내쳐졌다. 운영의 생명의 빛과 함께 경계의 땅의 문은 완전히 봉인된다. 그 땅에 들어서려했던 인물들도 봉인과 함께 바깥세상으로 내쫓겼다. 그렇게 마지막 경계의 무녀 운영은 소명과 함께 삶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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