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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시작은 그녀가 불온함을 느끼기 이전이었다. 아니, 아마도 운영의 예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재채기와 사랑의 눈빛은 숨길 수 없다고 했다. 운영과 자란은 자신들이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눈치와 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인 만큼이나 애매모호하지만 정확하다. 또한, 전조가 있었다. 자란의 징계, 특의 존재, 그리고 모두를 둘러싼 인간관계.
“증거를 잡았습니다.”
으슥한 퇴성간에서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머지 한 년은 어찌할까요.”
“맘 같으면 공개적으로 둘 다 혼내주고 싶지만, 시기도 나쁘고 ‘저쪽’의 부탁도 있으니……. 한꺼번에 둘이 사라지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는다. 본보기 삼아 지켜보게 하지.”
“그럼…….”
“오늘 밤이다.”
“알겠습니다.”
삐걱하고 퇴성간의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 아직 스무 살이 넘지 않은 두 소녀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퇴성간의 어둠 속에서 문을 열고 나섰다.
“어이, 거기 너희 둘!”
소녀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지목하는 것이라 눈치 채지 못한 채 막 자신의 거처의 디딤돌에 발을 옮기고 있었다.
“자란! 그리고……, 운영이었던가?”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소녀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급히 자세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마마님, 부르셨사옵니까.”
운영과 자란은 낮선 상궁마마를 보고 긴장했다.
“너희 둘은 내 사가(私家)에 갔다 와야겠다. 주소를 알려 줄 테니, 둘이서 함께 물건을 받아오너라.”
“예, 근데 저희 상궁마마님께는…….”
“그건 걱정마라라. 내 이미 양해를 구해놓았느니라.”
운영과 자란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서로를 쳐보았다. 왜 굳이 침방상궁이 아닌 다른 상궁이 자신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어서 채비를 마치고 나서거라.”
상궁은 두 소녀가 의아한 눈치를 보이자 서두르며 둘에게 외출증을 주며 궁 밖으로 내보냈다. 둘은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이 겉옷을 챙겨 떠밀리듯 궁 밖으로 내쫓겼다. 처음에는 갸웃거리던 자란은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들떠서 금세 바깥 풍경에 근심이 녹아버렸다. 그러나 운영은 기분이 무거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보시오, 사람 없소?”
그러나 자란도 왠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에 도착하고 보니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자란이 대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불러보니, 대문이 힘없이 밀려 열렸다.
“언니, 뭔가 이상……!”
대문이 힘없이 열리자 운영이 이상함에 경계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곧 쑥하고 대문 안에서 튀어나온 팔에 두 사람은 붙들려 바로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곧 포박당하고 눈가리개를 당한 둘은 비명을 질렀다.
“닥치거라! 못된 년들!”
“윽…….”
대답할 틈도 없이 옆에서 익숙한 숨소리가 들린다. 운영은 자신들을 맡고 있는 침방상궁임을 눈치 챘다. 침방상궁이 두려움에 숨을 멈췄다. 그녀들에게 말하고 있는 여인은 분명 자신들에게 심부름을 시킨 상궁이었다.
“한 년은 정절을 깨고 외간 남자와 정분을 통하고, 한 년은 그걸 방조했겠다.”
“읏!”
자란이 숨을 삼켰다.
“…….”
여인은 입을 다문 운영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년이 제법 똑똑한 듯 의연한 척 하는 모양이다만, 증거가 있는 이상 발뺌은 못한다!”
“…….”
운영은 섣불리 반응할 수 없어 계속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그것이 제법 마음이 들어 안타까웠다.
‘차라리 저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년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여인은 둘의 앞에 무언가를 내던지더니 말했다.
“둘의 가리개를 풀어라!”
아까 둘을 포박하던 여자들이 눈가리개를 풀었다. 그들은 곧 물러나서 운영은 자신들을 포박한 사람들이 여인임만 느꼈을 뿐 정확히 궁녀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증거가 있다면 뭐 하러 이런 식으로…….’
때문에 운영은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란과 운영은 자신의 앞에 던져진 증거를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자란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운영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 이게 당신이 하려던 일이었군.’
그 둘 앞에 있는 증거는 속살이 펼쳐진 서신의 봉투였다. 서신은 모두 태워 남아있지 않다. 그 전에 서신의 글자가 묻어난 책도 처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전에 운영에게 따로 보낸 서신의 봉투의 글자가 안쪽에 묻어나 자란의 봉투 안쪽에 ‘운영’이라고 희미하게 묻어나 있었다.
“…….”
“변명할 말도 없나보구나.”
“아니에요, 이건!”
자란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 것입니다.”
자란은 망설이다 결국 진실을 내뱉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자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 네 년이 나이를 더 먹었으니 책임이 없다 할 순 없겠지. 하지만, 거짓으로 덮으려도 소용없다. 특이란 놈이 다 말했으니.”
“도대체 뭘! 아니에요! 정말 이건 제 것입니다.”
“……운이 좋은 줄이나 알거라. 지금 내명부의 불미스러운 일은 시기가 좋지 않을뿐더러, 둘이나 사라지면 일이 커지니 네 목숨은 살려두는 것이다.”
“언니, 살아남으면 제 가족을 부탁해요.”
지금 여기서 아니라 해도 소용없음을 운영은 깨달았다. 오히려 자신의 죄임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영아!”
“저 년은 재갈을 물리고 고방에 처넣어라! 며칠 갇히면 정신 차리겠지!”
“영아!”
자란은 비명처럼 운영의 이름을 부르다가 재갈이 물린 채 고방으로 끌려갔다. 여인은 가만히 운영을 쳐다보다가 긴 천을 그녀 앞에 내던졌다. 그러자 처음에 자신을 포박했던 여인들이 운영의 포박을 풀고 밖으로 물러났다.
“죽거라.”
“…….”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분노가 치솟고 뒷일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그럴 의리도 없었고, 자란은…… 아마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걸거라. 최소한 네 손으로 죽게 해주마.”
이 여인의 최소한의 배려는 다른 이들에 의해 강제로 목을 매달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운영은 죽음의 두려움보다 남겨둔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운영은 머뭇머뭇 천을 천장 나무에 걸었다. 그렇게 16살의 나이로 운영의 생은 끝나는 것 같았다.
“그래, 꼬마야. 정신이 들었으면 그만 내 침대에서 내려갈래? 내가 몸을 일으킬 수 없구나. 보기보다 무겁구나? 기껏해야 열 살 좀 넘은 거 같은데.”
크고 낮선 목소리가 운영의 귓가를 흔들었다. 정신이 든 운영은 기겁을 해 그녀가 침대라고 부르는 푹신푹신한 천들의 무덤에서 튀어 내려왔다. 운영을 겁에 질리게 한 그녀는 큰 얼굴에 커다란 코를 가지고 있었고, 하얀 밀가루를 바른 듯 한 피부에 엷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색목인이었다.
“당신은……?”
색목인을 처음 본 운영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딱 한 가지 은실과 금실을 섞어놓은 듯이 물결치는 금발만큼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낮선 모습에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는 자신을 아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내 후계자겠구나.”
그것이 마리 메리안 백작부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또 다른 경계의 주인 마리 메리안이 부드러운 풀밭 위에 만들어놓은 자신만의 경계의 땅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가면 안 되나요?”
“가도 되긴 한데…….”
가벼운 슬립차림으로 메리안 백작부인은 톡톡 자신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네가 이미 내 후계자라는 점은 둘째 치고, 넌 이미 이 세계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냥 돌아갈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왜요?”
“죽었으니까.”
“…….”
“넌 반은 사람이지만, 반은 이 세계에 속해있어. 아니면 살아있을 수가 없지. 반쯤 이 세계의 속성으로 살아있다고 봐야 돼.”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요.’
백작부인은 살짝 질려하는 운영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일단 가봐. 사람은 다 겪어봐야, 현실을 직시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백작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바닥을 한 바퀴 회전시켜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 자리에 조선식 미닫이문이 생겨났다.
“진짜 갑니다?”
“가라니까?”
운영은 재확인하듯 백작부인을 쳐다보다가 미닫이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 곳은 운영이 가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다. 새빨간 불길이 사방을 뒤덮은 지옥이었다.
수일 후, 자란은 자결했다.
-헤에, 영이구나.-
그 자리에 자란은 정신을 놓은 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왜 그녀는 여기서 떠돌고 있었던 것일까. 자란이 죽어 혼이 되어 떠나지 못하는 곳은 운영의 사가였던 곳이었다. 운영은 자란의 혼을 지나 폐가가 되어버린 집안으로 들어갔다. 살림살이는 모두 패대기쳐져있고, 아무도 없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영아.-
자란의 혼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어머니는……?”
-헤에, 우리 놀자.-
정신을 놓은 듯 다시 딴소리를 하는 자란, 그러나 그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운영은 떨리는 몸을 감싸고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거야! 도대체 왜 여기서 그러고 있는 거야? 언니!”
‘도대체, 도대체 왜 죽었어, 언니.’
“그래, 그 대답을 언니에게 물어선 안 되겠지.”
그 순간, 장면이 바뀐다. 생각만으로 시공간은 운영이 생각하는 곳으로 장면이 바뀌듯 장소가 바뀐다. 낮과 밤도 구분 없이 이동해, 아까는 낮이었는데, 이번엔 밤의 어느 방이었다. 흐트러진 이불 위에 술병이 굴러다니고, 단아하고 총명했던 그의 눈동자는 고통과 슬픔으로 흐려져 있었다. 그는 운영을 발견하고 슬쩍 한번 쳐다보다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 왜 너냐. 하긴, 네가 나를 원망하겠지. 그네는 미련도 없이 날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갔으니 꿈에도 찾아오지 않더니. 죽어서도 찾아오는 건 원령인 너로구나.”
“어째서입니까.”
김진사는 운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빈 술병 속에서 술을 찾아 병나발을 분다.
“왜 자란 언니를 지키지 못한 겁니까. 나를 함정에 빠뜨리면서까지 지키려했으면서!”
운영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끝까지 자신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도 반쯤은 김진사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서신의 봉투에 묻어나도록 자신의 이름을 남겼던 증거, 그리고 특의 오해를 내버려두고 자신을 죽음으로 끌고 간 김진사. 비록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변명하나 하지 못했던 이유 중 절반은 그의 사랑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내 아버지가 입단속을 하겠다고 그녀를 불러 이야기를 해 버렸기 때문이지.”
운영이 풀지 못했던 단 하나의 의문. 아무리 특이 알아버렸다고는 하나 굳이 특이 알자마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김진사의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눈치를 채고 앞날을 위해 ‘그 궁녀’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김서진은 그에 앞서 운영이라는 희생양을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고. 그게 시기적으로 특이라는 존재를 통해 ‘운영’의 이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병사(病死)다.”
죽은 영혼이 자신의 죽은 어머니의 생사를 묻는다. 김진사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본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푸른 목줄 자국이 목에 남아있다. 곱게 땋았던 댕기는 흐트러진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다.
“유영이는?”
“이상한 걸 묻는 구나. 죽은 자가 그런 것도 몰라?”
더 이상 물어도 소용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입막음하려는 움직임은 없으리라. 이미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데굴데굴데굴.
술병이 굴러 운영의 발에 닿아 멈춘다.
“너……, 안 죽었구나.”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 술독에 빠져있으면서도 실낱같은 총기가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실 완전히 정신을 놓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김진사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일어서 방바닥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칼을 쥔다.
“내 여인은 죽었는데, 어찌 네가 살아있어?”
운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김진사를 보며 후회로 가슴이 아팠다.
“그럼 지켰어야지. 목숨 하나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다면, 지켰어야지.”
“흐흐, 아픈 척 하지 마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가 나를 보는 눈이 어땠는지 모를 줄 아느냐!”
긴 칼이 운영을 향한다.
“아니, 당신은 몰라. 내가 몰랐는데, 당신이 어찌 알겠어?”
“언니는 이런 당신까지도 사랑했겠지. 근데 난 아니야.”
“그래,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 당신을 사랑하는 언니의 모습을 동경한 거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았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을 위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거든. 당신이 안전하기를 바라지 않았거든. 내가 바란 건 가족과 언니의 안전뿐이었어.”
“닥쳐!”
김진사는 비틀거리는 기세로 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 그 검은 다른 사람에 의해 튕겨져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