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5.

 

오영희는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 한다. 심지어 단 둘이 대면하는 자리에서조차,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미심쩍은 눈빛 한 번 보내는 일이 없었다. 과거라는 심연의 동굴에 매몰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그녀에게 신우철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지 까짓게 감히.

불쾌하고 괘씸한 감정을 씹어 삼키며 우철은 거울 앞에 섰다. 지금의 그는 영희가 알던 과거 속의 그와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한 이유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였지만 그 덕분에 균형 잡힌 근육을 보너스로 얻었다. 태양빛을 받지 못 해 창백하던 피부는 적당히 그을었고, 젖살이 빠진 덕분에 턱 윤곽이 날카로워졌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두고 계집애 같다고 쑥떡거리지 않는다. 그러니 오영희가 그를 몰라보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였다면 오영희가 어떻게 변했다고 해도 한 눈에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형의 분위기가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반드시 있다. 십여 년 동안의 세월의 흐름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각인돼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영희에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를 불쾌하게 자극하였다.

괜찮아. 상관없어.”

그대로 갚아주면 되니까. 앞으로 오영희는 죽을 때까지 신우철을 잊지 못 할 것이다. 증오하고 미워하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버릴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지.

거울 속의 그가 서늘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좌회전해서 들어갈까요?”

운전을 하는 김 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해서 허름한 주택가로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이 영 미심쩍은 눈치다.

입력한 주소대로 가면 돼요.”

우철이 김 차장의 의구심을 한 마디로 일축시켰다.

, 알겠습니다.”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돼지 국밥 집을 끼고 골목 안으로 들어와 바로 우측에 보이는 2층 건물에 다다르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네비게이션의 알림 멘트가 떴다. 1층은 미숙이네, 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구멍가게고, 2층이 아마도 영희가 살고 있는 살림집인 모양이다.

여기가 맞습니까?”

, 아마도.”

애매한 대답을 내놓고 우철은 차창을 내다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의심이 드는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란 게 본디 경험한 만큼만 상상을 할 수가 있다고, 주소지를 봤을 때 우철이 생각한 동네는 적어도 이런 추레한 풍경은 아니었다. 주택을 지을 때 애당초 미적 감각은 전혀 배제한 채 그저 싸게 싸게 지었다가 별다른 관리 없이 방치한 채 수십 년을 살면 이런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전체적인 동네 분위기가 가내 수공업을 하는 공장 지역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시멘트 담벼락 일색이다. 80년대 달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단골 배경으로 나올 법한 구멍가게를 쳐다보며 우철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낡은 주택에 살고 있을까. 설마, 아파트 들어갈 돈이 없어서 이 후진 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단 말인가.

김 차장.”

, 상무님.”

대구 시내에 소형 아파트 시세가 얼마나 합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 차장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지만,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수성구에 스물네 평 오피스텔 매매가가 23천이라고 합니다. 대구 쪽이 최근에 부동산 시세가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한 십년 동안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 하니까 건설 업체들이 아예 아파트 분양 자체를 안 하게 되면서 최근 들어 오히려 공급이 딸리게 됐다는 거죠. 그래서 부산보다도 오히려 대구 아파트 시세가 더 가파르게 올랐답니다.”

사업적인 구상 때문에 물어본 것으로 착각하고 김 차장이 자기가 알고 있는 대구의 부동산 지식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아니, 그럼 2억이 없어서 이 후진 주택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의아한 것은 당시 영희네 집은 그 동네에서 잘 산다고 손꼽히는 지방 유지였고, 매장 매니저는 매출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기 때문에 수입이 제법 괜찮은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궁상떨고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우철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어두침침한 동네를 한 바퀴 스캔하고 있을 때 콩하고 차에 뭔가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약하게 들더니, 우아앙, 하고 어린 아이의 울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딪힌 소리보다 울음소리가 열 배는 더 크다.

훈탁아!”
아이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보다도 열 배 더 컸다. 기차 화통 같은 성량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오영희라는 사실이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머리끝으로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영희한테 아들이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의 돌발 상황에 우철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차 창 너머 영희가 아이의 몸을 이리 저리 살피는 것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책임감 없는 인간을 만났기에 돈도 없이 아들만 달랑 떠넘겼단 말인가.

훈탁아, 니 다친 데 없거든. 울음 뚝 그쳐라. 조심하라 캤지. 네가 지금 뭘 잘 했다고 우노?”

쓸데없는 엄살은 절대 받아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뿜는 단호한 어투에 기차 화통소리 같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전광석화처럼 잦아들었다. 아이가 탄 자전거가 자동차를 들이받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달래기까지 그야말로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죄송해요. 밤에는 자전거를 타게 하면 안 되는데. 차는 괜찮아요?”
영희가 차창을 두드리자 김 차장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침착한 김 차장도 순식간에 상황을 종료시키는 오영희의 속도에는 미처 따라가지 못 한 것이다.

범퍼에 살짝 흠집은 났을 것도 같은데, 제가 나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잠깐만.”

우철이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 김 차장을 멈춰 세웠다. 지금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제법 괜찮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예기치 못 한 우연한 만남이야말로 운명적인 러브 스토리에 감초처럼 나오는 설정이 아니던가.

내가 나갈게요.”

? 상무님이요?”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김 차장을 차에 두고 문을 열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영희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저 인간이 우리 백화점 점장님이 맞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영희 쪽으로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점장님! 엄마야, 이거 점장님 차였어요? 전 누군지 점장님하고 되게 닮았다 하고,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어요.”

놀라서 펄쩍 뛰는 영희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당하게 드러내기 뭐한 아들에, 그 아들이 저지른 사고 수습까지 해야 하니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자코 있어주는 게 매너고 예의다.

얘는 괜찮아요. 점장님 차가 문제죠. 엄청 좋은 차 같은데, 상처 많이 난 거 아니에요? 한 번 봐 보세요.”

차 앞에 쪼그리고 앉으려는 영희를 부드럽게 제지하고, 마음 쓰지 말라고 여유로운 멘트를 날리려는 찰나에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차 안 다쳤는데.”

일곱 살이나 먹었을까. 곱슬머리 남자 아이가 우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 아이가 영희가 낳은 아들이라니, 공연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책임감 없는 제 아버지를 닮았는지 영희하고는 전혀 딴 판으로 생겼다. 귀여워하는 척 인사라도 건네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영희가 아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가만 안 있나. 네가 차에 대해서 뭘 안 다고 토를 다노?”

차가 아이고 바퀴에 부딪혔거든요.”

평소 아이하고 격 없이 지내는지 훈탁이 영희의 날 선 목소리에도 기죽지 않고 토를 달았다.

얘 봐라. 이상하게 얘기를 하네. 바퀴는 차 아이가? 여기 바퀴 안에 동그란 쇠 안 있나? 이거 엄청 비싼 거거든. 백만 원도 훨씬 넘는다. 맞죠, 점장님?”

이건 또 뭐하자는 건가. 어린 애와 주고받는 유치한 설전에 나더러 함께 끼어들라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자니 점입가경이다.

봐라. 맞는다고 하시잖아.”

아저씨가? 언제?”

아이가 묻는 말이 바로 우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언제?

고개 끄덕이시는 거 못 봤나?”

얼씨구. 어린 아이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다.

니는 이제 큰일 났다. 어제 산 네 책가방 백 개도 넘게 살 수 있는 돈인데 어떻게 물어줄래?”

심지어 겁박까지, 안 그래도 움츠러들어 있던 아이가 입술을 실룩실룩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저는요, 여기에 차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내는 이제 우야노.”

도대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뭐란 말인가. 애초에 차 수리비 같은 건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왜 느닷없이 일곱 살 꼬마아이의 통곡을 들으며 악덕 사채업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훈탁아. 앞으로 밤에 자전거 절대 타지 마라. 알았지?”

영희가 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정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순간 묘한 패배감, 어쩌면 상실감 같은 것이 우철의 가슴을 싸하게 만들었다. 저 아이가 있는 한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영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는 없으리라.

.”

아이고, 엄청 공손해졌네. 백만 원은 이모야가 해결해줄 테니까, 너는 얼른 집에 그만 들어가. 알았지? 엄마가 물어보면 이모야 금방 들어간다 해. 알았지?”

이모야?

.”

영희가 뒤돌아가는 아이를 다급하게 불렀다.

훈탁아. 점장님한테 인사 안 하나?”
안녕히 계세요.”

맞는 인사법인지도 모를 말을 번개처럼 내뱉고 아이가 구멍가게 옆 철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모? 아들이 아니었어?

묘한 안도감에 가슴이 뛰었다.

조카예요?”

듣고도 안 믿겨서, 다시 한 번 확인 차 물었다.

조카죠, 그럼. 혹시 아들로 보신 건 아니죠? 쟤 데리고 어디 가면 엄마로 알아봐서 미치겠어요. 그나저나 정말 죄송해요. 컴컴할 때는 자전거 못 타게 하는데, 애가 하도 졸라대서 데리고 나왔다가 그만 참사를 냈네요. 수리비는 견적 내보시고, 연락 주세요.”

그 놈이 수리비. 당분간 수리비 소리만 들으면 아이의 울음소리가 자동 재생될 것 같다.

내 번호 알아요?”

. 아까 사무실에서 명함 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연락 안 했어요?”

?”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영희를 향해 다소 의도적인 미소를 근사하게 지어 보였다.

아까 사무실에서 인력으로 참을 수 없는 일만 해결하고 연락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잊은 거예요?”

, 밥집이요! 지금 리스트 작성하고 있어요.”

영희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드리워졌다.

조만간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근데 점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우리 동네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게 말이다. 뭔가 변명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시선을 움직이다가 국밥집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국밥이나 한 그릇 먹을까 하고.”

그러자 영희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장터 국밥이요? , 저길 어떻게 아셨어요? 저긴 우리 동네 사람들 아니고선 잘 모를 텐데.”

아니, 내가 아니라 운전하는 김 차장이.”

김 차장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영희가 십년은 본 듯한 친숙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 너머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십니까.”

차 창 너머로 꾸뻑 인사를 건네는 김 차장의 목소리에서 어색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둘러댄 거짓말을 그가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다.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다만, 여자 보는 취향이 고작 이거였나, 폄하 당할 걸 생각하니 그건 좀 분하다.  


댓글 '4'

핑키

2014.11.28 17:08:42

ㅋㅋㅋ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우철이때문에 웃겨요~

리앙님 얼른 오세요~ 영희를 기다리고 있는 제가 있잖아요~

Lian

2014.11.30 23:53:24

핑키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반갑습니다! ㅎㅎㅎ 자주 봬요. 

핑키

2014.12.20 00:29:12

여러일들이 많았지만 수습할 것은 하고 안 된것은 되어 가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리앙님 연재글 보고 어찌나 힘이 되던지^^ 늘 응원합니다~

하늘지기

2014.12.04 23:18:34

혼자서 벼르고 있는 우철..

혼자서 삽질하는 우철..

완전 귀여운 남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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