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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집에서 먹는 간장은 할머님께서 돌아가시기 넉 달 전에 담근 것입니다. 할머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찔끔찔끔 시중 간장과 함께 먹었고, 이사오면서도 버리지 못해서 이럭저럭 4년...
1년에 한 번씩 생각날 때 마다 끓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생각보다 오래 가는 듯 싶은데요.
사실, 이 간장을 먹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 보다도 아버님 때문입니다.
제가 할머님의 증명사진을 몰래 챙겨놓고 있는 것 처럼 (생전에는 그리 옹골지고 고집 센 성격이 자주 부딪혀 싸웠건만.) 혹은 고모님이 할머님의 비녀를 간직하고 계신 것 처럼.
할머님이 담그신 간장은 (맛은 없지만) 아버님의 추억인 셈이죠.
할머님 기일 전에 항상 어머님이 알아서 달이셨기 때문에,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었습니다만, 엊그제 시골집에 내려가신 어머님께서 조용히 전화를 하시어.
간장 좀 달이라고 부드럽게 협박하셔서...;;;
졸지에 간장을 달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아동바동 했는데, (게다가 달여준다고 했던 김군은 실수해서 간장이 넘쳤더군요. 포기하고 제가 매달렸습니다.) 끓는 간장의 거품을 걷어내다 보니 그럭저럭 익숙해져서.
가스불의 따스함에 의지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구수한 간장냄새를 즐겼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넋을 놓으며 몇 시간 동안 간장을 달이고 집안 온 창문을 다 열어놓고 출근했는데.
... 퇴근해도 간장냄새가 가시질 않네요... ㅡㅜ
게다가, 평소 얼굴 뵙기 힘든 윗층 아주머님께서 퇴근하는 저에게 은근슬쩍 한 마디.
아주머니 : 저기. 학생.
나 : 예? (그러고 보니 학생 소리 듣는 것이 거의 15년 만이네...;;;;)
아주머니 : 오늘 간장 달였어?
나 : 예.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 몇 년짜린가? 냄새가 상당해서 말이지...
나 :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 아니. 그런 소리 듣자는 것이 아니라...
... 듣자는 것이 아니면 도대체... OTL
왜 30분 동안 간장냄새 이야기를 하시는 건데요...;;;;
아무래도 이웃에 끼친 피해를 사과드릴 겸, 얼마전에 마트 경품으로 받은 배라도 들고 찾아 뵈어야 할까 봅니다.
근데 여전히 맛은 없는 거로군요..( '')a [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