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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검정색 세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명섭 차장이 청색 남방에 면바지, 발등이 드러나는 로퍼를 신은 신우철 상무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휴일 날 점검 차 백화점에 들를 때에도 각 잡힌 슈트 차림을 고수하는 신 상무가 아니던가. 아무리 정식 출근이 아니라고 해도 새로 발령된 근무처에 들르는 건데, 지나치게 캐주얼한 복장이다.
“어디 다른 스케줄 있으십니까?”
“아니요.”
신 상무는 원래 정해진 스케줄이 틀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부득이하게 스케줄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잘 벼려진 칼처럼 신경이 바싹 곤두선다. 그런 날은 차에 앉아 있는 내내 양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신 상무 때문에 바싹 긴장을 해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양 어깨가 뻐근하다. 단순히 스케줄이 변경된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신경 곤두세우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는 명섭도 모른다. 그저 성격이려니, 할 뿐이다.
명섭은 차 문을 열고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가 신 상무가 착석하고 난 다음에 다시 한 발 자국 앞으로 다가와 문을 닫았다. 명섭의 직함은 미래 그룹 비서실 소속 차장이고, 미래 백화점 신우철 상무의 차를 운전하고 있다. 출근 첫날 신 상무가 차 문을 열고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는 그에게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설 것을 요구한 이후부터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매뉴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차에 탈 때 시야가 가리는 것이 싫은 건가 보다, 하고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다 석 달쯤 지났을 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받쳐주느라 부득이하게 매뉴얼을 어기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신 상무의 손등이 명섭의 팔뚝을 건드리게 되었다. 신 상무가 얼마나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는지 명섭은 잘못한 것도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했다. 괜찮다는 말도 없이 불쾌한 기색으로 차에 올라탄 신 상무가 물티슈로 손등을 꼼꼼하게 닦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 한다.
손 좀 스쳤다고 물티슈로 닦아내다니. 그래서 차에 탈 때 뒤로 물러서라고 했던 거였나.
전염병 환자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머리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무너진 자존심 때문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살면서 그런 인간적인 모멸감은 처음이었다. 신 상무의 이런 기이한 행동이 운전기사인 명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취업하기가 바늘구멍에 낙타 들어가기 같은 세상이라지만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신 상무의 접촉 기피증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총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섭이 지켜본 바로 신 상무가 애정 어린 스킨십을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은 본가에서 키우는 개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한다는 점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고, 개한테 허용한다는 점에서 결벽증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냐.
명섭이 판단컨대 신 상무는 그냥 인간이라는 종족을 혐오하는 것이다. 5년이 넘도록 수족처럼 쫓아다니면서도 명섭은 신 상무가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에게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신 상무에게는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 태생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데다 근사한 이목구비를 장착하고 거기에 더해 명석한 두뇌까지 겸비하고 있으면, 관심이 너무 지나치게 쏠려서 오히려 사람이 싫어질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호의로 똘똘 뭉쳐 어떻게 잘해줄까 고민하는 사람들을 혐오할 만한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인간 혐오증을 신 상무의 개성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으니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고 주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그 흔한 안부 인사 한 번 건네는 일 한 번 없지만 대신 일정 거리를 두고 사무적으로만 대하니까 상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덜했다.
가끔 궁금하긴 하다.
신 상무도 사랑이라는 걸 할까. 타인과 몸이 닿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여자와 잠자리는 가능한 걸까. 5년이 넘도록 신 상무가 여자에게 야릇한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힘든 것이 가까이 곁에 두는 동성 친구조차 신 상무에게는 없었다. 손만 뻗으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왜 굳이 자처해서 청렴한 수도승처럼 사는 걸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 주제 넘는다고 비웃겠지만, 명섭은 가끔씩 신 상무가 불쌍하다.
“나오셨습니까?”
주차장까지 한 걸음에 달려 내려온 보안 팀장의 얼굴이 긴장으로 바싹 얼어 있었다. 새로 부임한 지점장이 출근 전날 아무 언질도 없이 백화점을 방문 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암행어사 출두를 당한 심정일 것이다.
“쇼핑 하러 왔으니까 따로 보고 할 필요 없어요.”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매장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게다가 보안 팀장을 달고 다니면서 직원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조용히 오영희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아니, 혼자 갑니다.”
더는 말을 꺼낼 수 없도록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어차피 결론이 난 일을 갖고 길게 얘기를 끄는 것은 우철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저 인간이 무슨 의도를 갖고 정식 출근 전날 백화점으로 급습해 쇼핑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보안 팀장을 뒤에 세워두고 우철은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아닌 중앙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에스컬레이터의 측면 유리벽에 비친 얼굴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 한 탓인지 눈 밑이 퀭해 보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좀 더 컨디션 좋은 날을 택했겠지만 저쪽을 보기만 할 거니 상관은 없었다.
중앙 에스컬레이터에서 정면으로 가로 질러가면 트래디셔널 여성복 햄튼 매장이 있다. 등에 힘을 주며 뚜벅뚜벅 다가가는데 햄튼 매장 2m 전방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각 잡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지점장님. 3층 여성복 담당 최국현 대리입니다.”
판매 직원 누군가가 새로 발령된 지점장을 못 알아보고 실수라도 할까 봐 보안 팀장이 각 층 담당에게 긴급연락이라도 취한 모양이다. 우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 대리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찾으시는 매장 있으십니까?”
직접 보좌하고 다니면서 판매 직원에게 실수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가하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쇼핑 잠깐 하고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볼 일 보세요.”
우철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성가시게 굴지 말고 꺼지라는 뜻을 온화하게 전달하였다.
“매장 점검 중이었습니다. 점장님 혹시 찾으시는 매장 있으시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침 잘 됐다는 의중을 내비치며 예의 바르게 미소 짓고 있는 최 대리의 입매가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바로 앞이에요. 마저 점검 하세요.”
말 귀를 못 알아듣고 최 대리가 햄튼 매장으로 걸어가는 우철의 뒤를 호위무사라도 되는 양 뒤 따랐다. 접객업이란 자고로 내가 아닌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최우선인 직업이다. 상사가 말한 행간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 하는 작자가 판매직원들을 관리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마저 점검하라고 했는데, 못 들었습니까?”
우철이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하자 최 대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덤덤하게 돌아선 우철의 등 뒤에서 최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편하게 쇼핑 하십시오.”
성가시게 따라오는 강아지 한 마리를 떼어놓고 햄튼 매장을 향해 거침없이 향하던 발걸음이 입구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여간해서는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쩐지 심호흡을 한 번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오영희가 과연 그를 알아볼까?
돈을 베팅하라고 한다면 못 알아본다는 쪽에 걸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오영희라면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입구 앞에 서 있는 우철에게 스무 살쯤 돼 보이는 판매 직원이 말을 건넸다.
“카드 지갑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우철이 미리 준비해둔 말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그럼요. 저기 안쪽에 있으세요.”
지갑이 있으시다니 이게 무슨 되도 않는 존댓말인가 싶겠지만, 이 비상식적인 어법이 판매 직원들 사이에서는 손님을 응대하는 올바른 어법으로 자리가 굳어졌다. 어디다 대고 반말이냐고 따지는 손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도 못 깨우쳐준 올바른 존대 사용법을 일개 판매 직원이 이해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냥 지갑이건 옷걸이건 닥치는 대로 높이는 수밖에.
판매직원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면서 우철은 빠르게 매장 안을 스캔했다. 좌측의 행거 앞에서 20대 여자 손님이 걸려 있는 옷을 차례차례 들춰 보고 있고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염색한 판매 직원이 한 발 자국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반대편 탈의실 앞 쇼파 쪽에서 모녀로 보이는 손님 둘이 딸이 시착하고 있는 원피스의 사이즈를 갖고 크다, 맞다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고객님, 이게 맞는 사이즈 맞거든요? 예뻐요!”
중립적인 태도로 사태를 적당히 관망하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면 될 터인데 굳이 딸의 편을 들고 있는 판매 직원을 보고 우철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오영희다.
고객님이라는 호칭만 아니었어도 저 손님들하고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결론 내릴 정도로 격 없는 말투다. 유쾌하고 쾌활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에 순간 기억속의 오영희가, 눈부시게 찬란하던 어린 시절의 그녀가 스쳐지나갔다. 세월이 지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시한 몰골로 전락해 버린 여자를 보니, 공연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주 통쾌하다. 탈의실 앞에서 손님 비위를 맞추느라 연신 터뜨리는 오영희의 웃음소리만큼이나.
“특별히 찾으시는 색상 있으세요?”
“밝은 색이 좋겠네요.”카운터를 겸하고 있는 4면이 유리로 된 디스플레이 박스 앞에서 판매 직원과 쓸데없는 질답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영희의 걸쭉한 사투리가 끊임없이 귀에 꽂혔다.
“와, 진짜. 고객님 나이 든 티 자꾸 낼 거예요? 요즘 아들은 옷 크게 안 입어요. 딱 맡게 입는다니까. 일단 이거 갖고 가세요. 입다가 영 아이다 싶음 그때 갖고 와요. 사이즈 교환해 줄게요.”
“오야, 알았다. 암말 말고 사이즈 바꿔 주는 거다. 지연 씨 들었지? 영희 야가 지금 입다 갖고 와도 교환해 준다 카는 거. 지연 씨가 증인이다.”
어머니 고객이 우철과 얘기하고 있던 직원을 증인으로 지목했다.
“네, 알겠어요.”
난감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 지연의 맞은편에서 우철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손님과 직원 사이에 저런 허물없는 대화가 가능한가?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겠지.
우철이 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영희가 불쑥 카운터로 다가왔다.
“고객님, 야한테 다짐 받아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본의 아니게 영희와 얼굴을 마주 보며 서 있는 상황이 돼버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우철의 눈빛이 일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게 뭔 소리고?”
몸집이 넉넉한 오십대 아주머니가 우철의 옆에 바싹 다가와 섰다. 옷깃이 닿기 전에 우철이 슬쩍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섰다.
“야가 저래 순진해 보여도 장사꾼이거든요. 지금 네, 해 놓고 난중에 언제 그랬냐고 잡아떼면 고객님 뭐라 카실 건데요? 할 말 없을 걸.”
영희가 밉지 않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맞네. 아이고, 이 일을 우얄꼬.”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던 아주머니가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 우철에게 굳이 말을 걸었다.
“방금 우리가 나눈 얘기 들으셨죠? 나중에 여기 매니저가 환불 안 된다고 발뺌하면 꼭 증인 좀 서 주셔야 돼요.”
얘기만 했으면 괜찮았다. 말 같잖은 소리지만, 공감하는 척 미소를 지어줄 요량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불쑥 우철의 팔에 손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터치를 해오는 아주머니의 손을 우철이 바퀴벌레처럼 확 떼어낸 것이다. 그 순간 뜨거울 정도로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싸한 침묵으로 냉랭하게 얼어붙었고, 아주머니의 딸이 깜짝 놀라 굳어 있는 아주머니를 “엄마!” 하고 부르며 질책했다.
“아니, 나도 모르게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주머니가 억울함 반, 무안함 반으로 딸을 쳐다보며 변명을 하였다.
“와 모르는 사람을 치노. 내가 진짜 못 살겠다.”
“아이고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노. 내가 치긴 언제 칬다꼬. 그냥 살짝 건드린 게 다다.”
“그니까 건드리긴 와 건드리냐고.”
사이즈 논쟁 이후에 다시 시작된 모녀간의 논쟁을 가만 듣고 있던 영희가 매장의 책임자로서 책임감을 통감하고 우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객님 놀라셨어요? 저희끼리 농담처럼 말이 오가다가 본의 아니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영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한심할 정도로 비굴해서 더는 봐 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우철은 빠르게 매장을 빠져 나왔다.
오영희 성질 많이 죽었다. 죄송하단 말을 두 번씩이나. 예전 같았으면 호되게 야단을 쳤을 거다. 사내자식이 뭐 하는 짓이냐고, 얼른 사과 하라고. 잔뜩 골이 나 있으면 가만 다가와 뜨거운 꿀 차를 내주었다.
-아깐 애들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 낸 거다. 이거 마시고 맘 풀으래이.
영희네 아버지 친구가 직접 양봉을 했다는 꿀을 듬뿍 넣은 차는 많이 달았다.
-근데 내까지 가만있으면 니, 진짜 왕따 된다.
영희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달았다.
리앙님 오랫만이에요. 이제 글 안 쓰시는 줄 알았음요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