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0.

 

미래 백화점의 대구 지점에 입점해 있는 매장 매니저들의 이력서를 빠르게 훑던 우철의 시선이 누군가의 이름 위에서 우뚝 멈추었다.

오영희.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각인 돼 있는 이름 석 자에 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이력서 왼쪽의 증명사진으로 향했다.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흔하지 않은 이름에 대한 기계적인 반사작용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 기대도, 어떤 예감도 없이 사진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 어디선가, 쿵 소리를 내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리가 번개를 얻어맞은 것처럼 뜨겁고 얼얼했다.

설마.

혼이 빠진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화면 속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안 전신의 근육이 바짝 조여져 손등 위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틀림없다. 진짜, 오영희다......!

마침내 결론을 내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우철은 자세를 고쳐 앉아 어딘지 촌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증명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전 그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광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사진 속에 있는 여자는 오영희라는 최소한의 사실만을 전달하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증명사진 한 장 찍겠다고 동네 미장원에 들러 과하게 힘을 주었을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어디에 그렇게 눈이 부셨을까.

우영은 스스로에게 조소를 날리며,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오영희.

완전무결한 우철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 평생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 마음속으로 수 십 번, 수 백 번도 넘게 난도질 했던 여자. 타임워프가 가능한 타임머신을 실제 존재한다면 17년 전 여름으로 돌아가 그 후 3년 동안의 일을 바싹 마른 낙엽처럼 단숨에 태워 없어버리고 싶다. 검게 남은 재를 대형 진공청소기로 싹 흡입해버리는 상상을 하는 도중 문득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계시처럼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13, 정확하게는 128개월 17일 만의 재회. 그것도 반쯤 등 떠밀려 내려온 대구 지점에서 지점장과 판매 직원의 관계라니, 이건 너무 극적인 전개가 아닌가 말이다.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다. 단언하건대 이건 운명이다.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허락한 복수의 기회임에 분명하다. 철이 든 이후, 운명의 여신은 대부분 그의 편이었다. 모처럼 신경을 써줬는데 무시하고 넘어가면 그건 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어떻게 갚아줄까?

그는 이제 더 이상 오영희에게로 초점이 맞춰진 안경을 쓰고 있는 순진하고 유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말 한 마디면 그녀를 직장에서 내쫓을 수 있는 권력과 묶여 있는 개를 짖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매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지금 그에게 쥐어져 있다. 천천히,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되갚아줄 것이다.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를 때까지, 무자비하게.

먹잇감을 목전에 둔 굶주린 맹수처럼 우철의 눈매가 사납게 번뜩였다.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

요즘 정파가 조용하네요.

일주일에 한 편씩, 주말에 올리려고 해요.

읽으면서 느끼신 생각들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즐겁게 얘기 나눠요~!


댓글 '2'

핑키

2014.11.28 16:43:52

lian님때문에 대구가면 여태 태어난 아이들 다 만날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도 대구가 배경이라 그런지 기대가 큽니다~

하늘지기

2014.12.04 21:34:52

도대체 뭔일이 있었기에 이리 날을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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