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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지. 기대 따윈 안 했는데.

첫 번째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는 회계사였어요. 연봉 육천에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남들이 들으면 땡잡았다고 할 만큼 조건이 좋은 남자였지요.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고 밝힐게요. 그런데 만나자마자 기자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에요?” “어디 가서 기자라고 하면 대접이 좋지 않아요?” 정도. 그 외 기자라는 직업에 어찌나 관심이 많든지. 소개팅이 아니라 직업의 세계-기자편프로그램을 찍고 온 것 같았어요. 내 직업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직업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기자를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기준이 생겼죠.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자고.

두 번째 소개팅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그것도 내가 학창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수학 선생님이요. 그렇다고 절대 편견을 가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나에 대해...하물며 내 직업조차도 그다지 흥미가 없더라고요. 오히려 수학 이론서 이야기와 고3 수험생들의 대학 진학 고충에 대해 줄줄 읊었어요. , 내가 변덕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내 직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자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별로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고작 두 번이었지만 소개팅에 대한 불신은 이미 엄청나게 커져버린 상황이었어요. 송혜에게 하소연을 했죠. “아무래도 나는 연애에 인연이 없는 모양이야. 어쩌면 정말 내 짝은 없을 수도 있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일만 좋아했던 거야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 때 송혜가 재미없고 조용한 남자가 있는데...만나볼래?”라고 했어요.

. 이제야 고백하는데요. 송혜는 당신을 재미없고 조용한 남자라고 묘사했어요. 그렇다고 송혜를 너무 나무라진 말아요. 설명을 붙이자면 그만큼 당신이 묵묵히 일만 하고 뒷말 없이 팀을 돕는 그런 마당쇠 같은 남자라는 뜻이었어요.

가위바위보도 삼세번이잖아요. 밑져야 본전 이라는 심정으로 하기로 했어요. 송혜의 팀 동료라는 게 조금 걸리긴 했어요. 잘 안 되면 송혜가 혹시나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송혜가 얼마나 당찬지 알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여?”라고 했어요.

104일 저녁. 당신의 회사 앞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우린 만났어요. 기훈씨의 첫인상은 음...‘모범생이라고 표현이 가능할 것 같아요.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 키,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단정한 머리, 뿔테 안경, 단정한 양복. 어느 것 하나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중간에 서 있는 남자였어요. 송혜가 말한 재미없고 조용한 남자라는 이미지가 이런 거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일 만했죠.

그런데 정말 신기하죠. 당신이 한 마디를 하는 순간 재미없고 조용한 남자라는 이미지는 날아갔어요. 그리고 당신 머리 뒤로 광채가 보였다고나 할까요.

기자를 하신다고...” 말문을 여는 당신을 보고 역시나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훈씨. 당신은 기자에 대한 궁금증 100가지를 물어보지 않았어요.

이렇게 물었죠. “그 일은 재밌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별로 재미없어요. 힘들어요라고 했어요. 언제나 특종이 어디서 나오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사건이 터지면 달려 나가는 하는 상황이 쉬운 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내가 원해서 됐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게 재미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어요.

그 때 기훈씨가 진지하게 말했죠. “그래도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그것도 대학 때 전공을 살려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훨씬 많으니까요.”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를 해줬죠. “나도 내가 원하는 전공을 살려서 지금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워요. 컴퓨터 보안 업무라는 게 사실 따분해 보일 수 있죠. 하루하루 반복된 일상에 비슷한 업무들. 하지만 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이전에 보안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은 벤처 업체에 다녔거든요. 그 때 뭔가 만드는 일이 정말 재미있기는 했어요. 이 회사로 옮기면서 이제 그런 창조적인 재미는 못 느끼지만 어쨌든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좋아요. 내 대학동기 중에 보험회사에서 보험 파는 친구가 있는데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정말 축복받은 거죠.”

이제야 고백합니다. 그 때 권기훈, 당신에게 반했어요. 헤어지기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 때 나는 당신에게 반했던 거예요.

정말 기대 따윈 안했는데,..송혜 얼굴에 먹칠이나 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나갔는데...나가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죠? 솔직하게 당신과 헤어지고 그 때 나가지 말 걸...하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때 당신과 만난 건 다행이에요. 이 직업을 선택하고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거든요. 비록 헤어졌지만 그 때 그 말,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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