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 …….”

석죽은 놀라서 그 자리에 나자빠졌다.

석죽, 네 왼손으로 돌을 들어 네 오른팔을 부러질 때까지 짓이겨라.”

석죽은 백두가 방금 느낀 공포를 그대로 느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왼손이 자갈밭에서 커다란 자갈 하나는 들어 자신의 오른팔을 찍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휘련. 장이시여! 제발!”

…….”

자양은 차가운 눈으로 석죽이 자신의 팔을 부러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발!”

석죽의 바람과 다르게 석죽의 손은 자신의 다른 쪽 팔을 부러뜨리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두 번 다시 그 손으로 날 손가락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석죽은 깜짝 놀라 오른팔을 감싼 채 자양 앞에 엎드렸다.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넙죽 엎드린 채 몇 번이고 바닥에 이마를 부딪쳤다.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 절을 하는 석죽을 자양은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너는 앞으로 도움이 될 거야.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신수를 바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백두는 그렇지 못하지.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딱해, . 그냥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석죽은 그제서야 자양이 일어나지도 않은, 또한 이젠 일어나지 않을 앞일을 보고 혀를 찬다는 것을 깨달았다.

휘련!”

석죽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고 월하연의 장을 불렀다. 그런 원로원 석죽을 보고 무녀들 역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했다. 자양은 그들의 모습을 잠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시 세상 위에 선 느낌, 그 감각을 그녀는 만끽했다. 그리고 아무말없이 일어서 월하연의 거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어…….”

그 중 한명이 망설이듯 입을 떼었다. 다시 공기가 긴장했다. 좌중은 소리를 낸 소녀를 향해 비난의 눈짓을 보냈다.

뭐지?”

그러나 자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를 향해 반문했다.

달래언니, 아니 진달래는 어찌할까요?”

자양은 마치 잊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달래의 주검이 있는 장소에 시선을 향했다. 좌중은 그녀의 그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우르르 갈라졌다. 자양이 향하는 곳에 죽어있는 달래는 잠든 듯이 평온하게 쓰러져있었다.

놔둬라.”

?”

소녀는 바로 아까 비난을 받고서도 그저 본능적으로 소리 내 반문하고 말았다. 하지만 곧 후회하고 만다. 달래의 주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오뉴월의 눈처럼 시리고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내 의지를 짓밟은 자다. 짐승들에게 뜯겨 사라지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벌이겠지.”

자양은 그 한마디만을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무녀들은 신녀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이 두려워 슬금슬금 달래의 주검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리고 스르륵 앞서가는 자신들의 주인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운영은 아무것도 몰랐다. 달라지지 않은 과거는 신녀의 몸에 독기를 두르고 나타났고, 그 동안 희생된 신수와 흑룡이 몇이나 되는 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새삼 죄책감이 운영을 짓눌렀다.

미안해요. 당신의 이하는 죽었어요.”

…….”

신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운영은 신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

거짓말.”

신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운영 앞에서 자신을 무장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말해주세요. 정말, 모든지 다 할 수 있으니까.”

신녀, 자양은 이어도에 경계의 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수들에게 그 곳은 성지나 다름없었지만, 고문, 협박, 회유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했던 월하연은 이어도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까지 터득하고 이어도의 문으로 향했던 신녀였지만…….

당신 말대로였어요. 경계의 땅을 향한 문은 열려있었을 텐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마치 그곳은 그냥 산호섬인 것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

운영은 지그시 신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있었다.

다른 사람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내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엔 인지를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이 신녀 휘련조차도 탐색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그랬다. 다른 자들은 허구의 존재라며 경계의 땅의 존재조차 부정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상상해내는 건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답답했다. 경계의 땅은 분명히 존재했다. 신수의 보호자이자, 경계의 주인이 존재하니 경계의 땅도 존재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없는 것과 같았다. 무를 향해 저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한번은 죽음의 영역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었겠죠.”

운영은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경계의 땅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인가요.”

아니, 당신이 인지할 수 있는 경계는 생과 사의 경계였던 것뿐이죠. 경계의 땅은 틈새의 세계.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죠. 그리고 그 실체는 당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아무도 오갈 수 없으니까.”

경계의 주인을 빼고.”

그래요.”

신녀는 포기하듯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을 예지할 수 없는 것도 역시 관계가 있는 건가요?”

당신이 인지할 수 있는 예지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인지를 초월한 영역은 가늠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죠. 당신의 예지는 직관력이 초인에 가깝게 발달한 거니까요.”

거기에 신수의 여의주를 갖고 있으니 신선의 영역에 이르렀긴 하지만…….’

그래요,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면 이하는 날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죠. 그리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겠지요. 들었습니다. 당신은 추격자가 살아있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의 미래에 흑룡을 보내준다는 것을.”

신녀, 휘련.”

운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 운영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털썩.

신녀가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평생 사과하겠어요. 진심이에요. 내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지…….”

신녀…….”

운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흑룡은 죽었어요.”

신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직도, 아직도 부족한가요? 당신의 종이라도 돼서 당신의 발을 핥을까요? 그럼 이하를 만나게 해주겠어요?”

신녀는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운영은 그런 신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요!”

신녀는 엎드린 채 두 주먹을 쥐었다. 다시 고개를 든 신녀는 눈물범벅이었고, 흙투성이었다.

한때 궁녀였던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갔었기에 이러는 건가요?”

운영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부디 용서해줘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야! 왜 만날 수 없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독기는 모두 정화하겠다잖아! 모든 걸 포기하고 속죄하며 살아가겠다잖아! 왜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당신은 약속했잖아! 조건을 받아들이면 이하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운영은 신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노에 찬 신녀는 운영의 시선에서 도망치지 않았지만,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운영이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듯 한 기묘한 시선.

인지를 초월한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나도 당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흑룡 이하는 죽었고, 당신에게 전언을 남겼습니다.”

운영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독기에 감춰져있으면서도 푸르게 빛나는 여의주, 그의 생명이자 지금은 신녀 휘련의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아무도 해치지 말기를 약속해 달라했습니다.”

거짓말!”

신녀는 운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를 탐색했다. 자신에게 무슨 술수를 쓰려나하고 미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운영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

돌이 날아와 운영의 이마에 부딪쳤다. 그러나 그 직전에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있는 듯이 돌은 운영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파다닥!

까마귀 한 마리가 운영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평소에는 촐싹대며 주인인 운영에게 접근하는 모든 존재에 대들던 세오지만, 무려 운영을 상처 입히려한 저주받을 신녀이긴 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주고 영원한 잠에 빠진 이하를 생각해 세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하기를 빌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신녀는 발끈하며 일어섰다.

날 포기시킬 셈이군. 죽어도 이하와는 만나지 못하게 할 셈이야.”

그렇지 않아요. 마음을 돌려요, 신녀. 당신에게 남긴 흑룡 이하의 뜻을…….”

그를 경계의 땅에 가두었나? 아니면 수백년 후로 보냈나?”

운영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신녀를 설득하려 애썼다.

당신의 생은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했어요. 그러니,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당신의 인생을 미움으로 보내선 안돼요. 이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랬어요.”

거짓말 하지 말라고! 이하 없이 내가 어떻게 행복해져? 이하가 없으면 너희들의 삶도 행복해질 수 없어. 이하를 볼 때까지 괴롭히고, 괴롭히다 죽여 버릴 거야.”

운영은 당황해서 버선발로 마당에 서 있는 신녀에게 달려갔다.

그만둬요. 이건 진짜에요. 수백년후에도 당신은 이하를 만날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신녀는 운영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은 신수를 잡아먹지 않아도 이미 수백년, 수천년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어.’

신수를 괴롭히는 건 하지 말아요.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어요. 당신은 신수를 먹지 않아도 신기를 잃지 않을 거예요.”

그만해! 그만하라고!”

신녀는 화가 나서 운영의 말을 흘려듣고 말았다. 그녀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면 이후에 벌어질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너무나 화가 난 신녀는 운영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무릎을 꿇고 사과도 하고, 모든 걸 받아들였는데!”

신녀는 이하를 만날 수 없는 슬픔과 더불어 살면서 단 한 번도 꺾은 적 없었던 자존심을 꺾으며 빌었는데도 자신을 짓밟은 운영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후회할 거다!”

신녀!”

운영은 뒤돌아 나가려는 신녀의 팔을 잡았다.

주인님! 너무 접근하면 위험……!”

신녀는 운영에게 팔을 잡히는 동시에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때렸다.

!

운영은 아팠지만, 당황하지 않고 한 걸음 더 그녀에게 접근했다.

흑룡은 당신이 더 이상 아무도 해치지 않기를 바랬어요! 잊지 말아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랬어요!”

끝까지……, 끝까지 날 기만하는군.”

신녀는 당장이라도 운영을 죽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경계의 땅은 경계의 주인만 통과할 수 있다. 최소한 경계의 땅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경계의 주인이 필요했다. 그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거 놔라.”

월하연의 무녀들이라면 소스라치게 놀랄 기백으로 신녀는 운영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러나 운영은 그 기백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약속해요. 독기를 정화하고,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지?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당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왜 내가 지켜야 하지?”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요.”

신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가 막혀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후회? 그런 건 방금 했어. 너 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내 책임입니다. 내가 흑룡과 약속했으니, 당신의 모든 행동은 이제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신녀는 운영을 떼어내려고 팔을 흔들었지만, 운영은 강하게 그녀의 팔을 쥐고 말했다.

지금 당신은 너무 슬퍼서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젠가 제 진심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진짜 흑룡이 당신에게 바란 바람을. 사실은 당신도 느끼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흑룡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가 가장 바란 게 무엇인지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제발, 부디 그걸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신녀는 그 말에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그 잠시의 흔들림에 더한 분노가 찾아왔다.

이거 놔!”

운영은 그녀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내 눈 앞에서 이하가 말하기 전까지, 난 당신을 믿을 수 없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신녀는 그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담 밖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운영은 기운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인님!”

운영과 신녀의 밀고 당기기에 그들 머리위에서 걱정스레 날고 있었던 세오는 운영의 앞에 내려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그런 세오의 부리에 눈물이 떨어졌다. 운영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세오는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걸을 수 없었다.

나는 막을 수가 없었어요. 어떡하죠, 세오.”

주인님…….”

운영은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더욱 슬프게 울음을 터뜨렸다.

난 미래를 읽을 수 없지만, 그런 나라도 알겠어요. 그녀가, 그녀 때문에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을.”

…….”

세오는 자신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없는 반푼이 신수인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 죄책감과 앞으로의 비극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운영의 어깨를 꽉 껴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한 마리의 까마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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