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7.

 

진은 오피스텔 건물 1층에 입점해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생활 잡화 진열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장 급하게 써야 할 물건으로는 생리대가 적역이었다.

, 그거 사는 거였어?”

뒤따라오던 현준이 멋쩍은 표정으로 음료수 냉장고를 보는 척하며 자리를 피했다.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집어 들고 나니까 그제야 상황 판단이 좀 되었다. 사람을 바로 옆에 두고 인사 한 마디 없이 쌩하니 피해버렸으니, 강선우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눈짓이라도 하고 갔으면 좀 더 자연스러워 보였을 텐데, 뜨악한 얼굴로 도망쳐버렸으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맥주 한 잔 하자.”

현준이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캔을 들여 보이며 물었다.

오빠 운전해야 되잖아.”

한 캔인데 뭐. 정 불안하면 택시 타고 가면 되지.”

맥주 두 캔과 집에 충분히 쟁여두고 있는 생리대를 비싸게 사고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아까 백화점에서 마주쳤을 때 가볍게 눈인사라도 해둘 걸 그랬다. 선우도 동행이 있었으니 일부러 찾아와 길게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지레 겁먹고 식당을 나가버린 것부터가 문제였다.

강선우를 여기서 또 보네. 여자 친구가 여기 사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현준이 문득 들뜬 표정으로 선우의 얘기를 꺼냈다. 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숫자 화면만 쳐다보았다. 아까 백화점에서 현준이 강선우에 대해서 궁금해 했을 때 트로피칼 스포츠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어야 했다. 센터에서 오가다 안면이 익은 사이라고 대충 둘러대면 될 것을, 그에 관한 얘기를 한 마디라도 하면 개인 강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할 것처럼 미련하게 굴었던 게 일을 키웠다. 그렇지만, 어떻게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바로 그날 밤에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필이면 현준과 함께 있을 때 강선우와 다시 마주치게 될 거란 생각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한 마디로 운이 없었다. 늘 그런 식이니 새삼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다.

 

대구 좋냐?”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준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뜬금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의중이 궁금해 얼굴을 쳐다보자 그가 싱겁게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 , 그럭저럭 괜찮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은 편하다. 낯설었던 풍경도 완전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오히려 서울이 흑백사진처럼 흐릿하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쇼핑백을 소파 옆에 내려놓고 현준이 맥주캔을 하나 따서 진에게 건넸다. 서울 집에만 갔다 오면 그는 돈 많은 애인처럼 굴며 뭐든 사주고 싶어 한다. 오늘도 커다란 쇼핑 백 세 개가 모두 그녀의 물건으로 꽉 찼다.

네가 대구 내려온 지 몇 년이지? 5년 됐나?”

왜 새삼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일까. 옛일을 들추지 않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다.

.”

겨울,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고속버스가 대구로 달리는 내내 그녀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따뜻한 히터 바람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오리털 파카의 지퍼를 목까지 잠그고 있었는데도 가슴이 계속 추웠다.

뜨뜻한 차 안에서 와 이리 추워하지? 학생, 니 감기 걸렸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건넨 말 한 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던 그때 그녀를 떨게 했던 게 추위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서울 가고 싶지 않아?”

과거를 헤매던 그녀의 시선이 현준에게로 향했다.

아니.”

서울은 이미 그녀에게 해저 깊숙이 매몰된 폐선일 뿐이다. 굳이 그곳을 다시 찾아가 괴로운 과거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왜 물어?”

진이 현준에게 물었다.

그냥.”

아무래도 어머니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말은 안 해도 현준이 중간에서 힘들 것이라는 건 안다. 어머니에게 현준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고 버팀목이었다. 금쪽같은 아들이 서울에 좋은 자리 다 제치고 대구까지 내려와 혼자 살고 있으니, 아깝고 안타까워 미칠 지경일 것이다. 분명히 이 모든 게 전부 너 때문이라고, 그녀를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서울 올라가, 오빠. 어머니 신경 쓰게 하지 말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냐? 얘가 직장 옮기는 게 쉬운지 알아요.”

출신학교도 아닌 대구의 대학 병원에 자리를 잡은 것을 보면 현준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디든 옮길 자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은 든든한 방패막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도 살 수는 있겠지만 훨씬 더 힘들고 외로울 것이다.

현준이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 내뱉는 소리에 그녀도 한 모금 따라 마셨다. 쓰다. 순한 맥주라고 했는데도 콧잔등이 절로 찌푸려졌다. 진이 술을 즐길 줄 알았다면 지금쯤 아마도 알코올 중독에 걸려 있을 것이다.

 

요가실로 들어가는 순간 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꾸벅, 기계적인 목례가 오가고, 선우는 미리 깔아둔 매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 일에 대해서 뭔가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진은 두 손을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며, 수업 시작을 알렸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놓고 해명 한 마디 없이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면전에 대고 모르는 척 등 돌리던 어제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면 사정을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게 당연한 순서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앞으로도 요가실 밖에서는 아는 척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시지에 다름없다. 남 얘기 같았으면 그냥 신경 끄면 되는 일이라고 넘겨버리고 말겠지만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상당히 열이 받았다. 세상 남자가 다 저한테 열을 올리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상당히 웃긴 여자네.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하세요. 숨은 천천히 고르면서.”

수업 중간 진이 말을 할 때마다 괜한 반감이 불쑥 솟았다. 아는 척하기도 싫은 사람을 마주보고 가르치려니 어지간히도 곤욕이겠군. 팀장의 강권으로 억지로 하는 수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한 달만 채우자. 그렇게 하고도 차도가 없으면 차라리 이번 시즌은 접는다고 생각하고 미국에 나가서 제대로 진단을 받아 보자.

집중하세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보였는지 바로 지적이 들어왔다. 감정이 좋지 않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소리인데도 고깝게 들렸다. 아무 반응 없이 무뚝뚝하게 자세를 잡고 있자 유심한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단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이제야.

일어나세요.”

선우는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앉았다가 일어설 때면 매번 느껴지던 허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만 해도 통증이 있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합장하세요. 바닥으로,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하늘에 대고 기도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꼭 붙이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한 뼘, 한 뼘, 조심스레 상체를 숙이며 곧이어 나타날 격통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45도를 무사히 지나고 몸을 절반을 접었는데도 통증 없이 무사하다. 어어, 하며 놀라는 사이 손가락이 바닥에 닿았다.

성공이다!

선우는 거의 환호성을 지를 뻔하였다. 요가 수업을 시작하고 태양 예배 자세를 제대로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이사이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수준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벌써 허리가 나아지는 건가, 싶으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천천히 일어나세요.”

선우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상체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아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격통이 다시 찾아오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했지만 이번에도 미세한 통증이 전부였다. 하늘을 향해 합장한 자세 그대로 진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느님처럼 느껴졌다. 통증이 누그러졌다는 기적 앞에서 어제의 무례한 행동은 백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통증이 많이 누그러졌는데요.”

선우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 움직임이 좋아졌어요.”

격앙되어 있는 그와는 달리 진은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담담해 보였다.

어제 아침부터 자고 일어났는데 허리가 안 아프더라고요. 원래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부터 통증이 느껴져서 한 두 시간 정도 구부정하게 다니거든요. 그래서 이불 깔고 자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허리 통증이 괜찮아진 거였어요.”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선우는 묻지도 않은 말을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다시 재발할 수도 있어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선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명을 하였다.

제가 허리 통증에는 이력이 나 있는 편이거든요. 이번에도 회복 기간이 좀 많이 길었다는 점만 빼면 고질적인 허리 통증하고 증상은 똑같아요. 여태까지 통증이 가라앉은 다음 곧바로 자세 균형 잡고 공 던져 왔지만 재발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선우가 재차 물었다.

일단 몸만들기부터 시작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저한테 묻지 마세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냉정한 어조였다.

저도 몰라요. 선우 씨 본인 몸이니 저보단 훨씬 더 잘 알겠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게 다예요.”

모르니까 묻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유난떨며 귀찮게 걸지 말라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매트에 누우세요.”

듣기 지루한 얘기의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진이 곧바로 마무리 운동을 지시했다.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들떠 호들갑 떠는 푼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구사일생의 감격에 젖어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 무슨 무참한 말 자르기란 말인가. 모르는 사람이 웃어도 덩달아 웃게 되는 게 사람인데, 자기 덕분에 구사일생 했다는데 기쁘지도 않은가.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이 여자가 언제는 상식대로 행동했다고.

 

요가실을 나와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선우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고 나니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 희소식이야.”

선우는 헬스장으로 들어가 전기 기사를 닦달하고 있는 상철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뭔데?”

여기서 이렇게 시시하게 털어놓을 얘기가 아니야.”

콧잔등에 땀방울을 매단 채 스피커와 씨름을 하고 있던 기사가 안 보는 체하며 선우의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까다로운 본부장 눈치 보느라 아는 체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본부장님이 요구가 좀 많죠?”

선우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친근하게 묻자 순진해 보이는 기사가 손까지 내저으며 과한 부정을 하였다.

아이고, 아닙니다.”

기가 차는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상철이 비웃듯이 물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 내일 당장 시합에 복귀라도 하냐?”

아무 대답 없이 빙글거리며 웃고만 있자 상철이 돌연 팔을 붙잡고 선우를 화장실 앞 구석진 곳으로 급하게 끌고 갔다.

뭐야. 너 설마 진짜야? 허리 안 아파?”

빙고.”

상철이 예리한 눈초리로 선우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아마 허리 얘기만 아니었다면 농담 하지 말라며, 팔뚝에 펀치라도 한 방 먹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선우의 허리 부상은 농담의 소재가 될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상철이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 봐봐.”

선우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상철 앞에서 직접 아까 요가 시간에 했던 태양 예배 자세를 천천히 재연해 보였다.

항상 이 지점에서 통증이 와서 끝까지 못 했는데, 이제 마지막까지 연결이 돼. 그리고 이것도 봐봐. 이렇게 좌우로 비틀어도 괜찮아.”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냐.”

그러니까 말이야. 금요일만 해도 힘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는데 희한하지? 그런데 이 허리 통증이 서서히 낫는 게 아니라 한 방에 괜찮아지더라고. 작년 여름에도, 기억나? 찜질해도 안 낫는다고 큰일 났다, 그랬는데 사우나 냉탕에서 물 폭탄 한 방 맞고 바로 없어졌잖아.”

오늘 아침에 허리 안 아팠던 게 이불 때문이 아니었네.”

상철의 말에 선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우 코치 걔가 그래도 능력은 있구나.”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상철을 향해 선우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별로 맞장구쳐 주고 싶은 기분이 안 들었다.

그나저나 형, 이제 몸 만들어야 돼.”

일단 팀 트레이너한테 먼저 연락해서 재활군에 이름부터 올려달라고 해. 몸 만드는 대로 2군 합류하겠다고 하고.”

, 진짜. 그래야 되겠다.”

두 남자의 얼굴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선우가 재활을 받고 있다는 뉴스만 전해져도 바닥을 치고 있는 팀 사기가 한결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찾아올 무더위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대부분 고개를 가로젓는 여름이 선우한테만큼은 항상 최고의 계절이었다. 덕아웃에서 풍기는 땀 냄새와 태양보다 더 뜨거운 관중들의 함성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뜨거워졌다.




댓글 '2'

핑키

2013.01.16 18:11:08

정말 너무 빨리 나아진 것 같아 걱정되요. 찜찜한 표정을 지었을 우코치의 모습이~

줌마

2013.01.17 23:36:17

ㅜㅜ. 너무너무 안오셔서.....연중하신줄 알았지 뭡니까요~~~ 진은..저래서 과연 언제 선우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런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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