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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얼음에 저항하다
7
“안녕하세요!”
과방에 들어가던 민하는 머쓱해서 걸음을 멈췄다. 과방 안에 있던 십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라고 상우가 손을 내저었지만, 영 표정이 이상하다. 정석은 아예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가장 착해 보이고 동기라 만만한 상대인 강호를 붙들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 너……. 괜찮냐?”
“뭐가요?”
“그저께 우연히 중도 앞에서 봤는데…….”
“네?”
민하의 안색이 노래졌다. 하긴 그렇게 구경꾼이 많았는데, 그 구경꾼 중 같은 과 사람이 끼어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신촌에서 엎어지는 사람 오십 명 중 하나는 꼭 끼어 있다는 Y대 경영학부에서 말이다.
“저, 지강인 선배……. 실은 우리 고등학교 나왔거든……. 그 때부터 소문이 좀 안 좋아서, 그렇게 질질 끌려 나갔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해서……. 으음……, 괜찮아?”
“…….”
민하는 얼굴이 벌개졌다. 자신을 힐끗힐끗, 또는 똑바로 응시하는 남녀 선배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말은 안하지만 중도 앞에서라면 키스 장면까지 보았을 것은 명명백백한 일.
“설마 너……, 지강인하고 사귀는 거냐……?”
상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석이 옆에서 그 자식이 잘생기긴 했지……, 하고 서글픈 투로 중얼거린다.
“누, 누가요!”
민하는 열이 오르다 못해 푸르스름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건 일방적으로 당한 거란 말이야! 이런 오해를 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 이 인간을 찾아가 한대 걷어차 줘야만 직성이 풀리리라. 제기랄!
방금 내려놨던 배낭을 집어, 그녀는 과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맑고 상큼해야 할 금요일 오후의 기분이 참말이지 꾸리하다고 생각하면서.
“어? 민하야, 어디 가니?”
막 과방에 들어서던 예주가 으응? 하며 이미 쌩 하고 뒷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그만해라. 술도 잘 못하는 게 뭘 이리 퍼 마셔?”
“한 병 더.”
“그런 말을 하려거든 콧소리라도 좀 넣고 해라. 빳빳하긴. 목잡아 비틀 것처럼 말하는 애한테 누가 술 대주고 싶겠냐?”
“치사하긴.”
“무슨 일 있었어?”
“묻지 마. 기분 꽝이야.”
유준은 삐죽 내밀어진 민하의 입술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입술을 볼 때마다 여름의 일이 떠올라서 미치겠다. 미친 새끼! 어디서 감히, 누구는 손가락으로도 한번 쓸어보지 못한 성역을 건드려! 다시 한번 시야에 잡히면 그 땐 정말 아작 낼 거다. 주먹으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늘 새침을 떨며 술도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찔끔거리며 마셔대는 애가 대뜸 소주를 사달라고 자기 학교까지 찾아온 거 보면, 뭔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문자 메시지가 왔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한 유준이었다. 민하가 자기 학교까지 비싼 걸음을 하시어 만나자고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아니, 먼저 연락한 적도 별로 없는 그녀였다.
“야야, 고만 해라.”
유준은 아예 나발을 불고 있는 민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병을 뺏었다. 에이씨! 그녀가 터프하게 뱉더니 아자씨! 여기 소주 한명 더 줘요! 하고 외친다.
민하는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씹었다. 취기가 알딸딸하게 돌았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자꾸만 생각나서 미치겠다. 오늘도 한대 차주고 싶었는데 이럴 때 나타나지를 않았다. 찾아다니다 포기했다.
자신이 왜 K대까지 왔는지 유준이 알면 난리 나겠지. 둘이 사귀기로 한 역사적인 날, 바로 좋아하는 여자의 입술을 뺏어간 천하의 도둑놈이 여자친구와 같은 학교 같은 과란 사실. 게다가 또 다시 대중이 보는 앞에서 여자친구가 그 놈한테 입술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아봐라. 평생 궂은 일 한번 못해봤을 듯한 저 허연 손을 부들거릴 것이다.
하긴, 그래봐야 어쩌겠는가. 민하가 보기에도 유준은 절대 강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한방에 날라 갈 게 뻔하다.
‘으으……. 절대, 절대, 유준한테만은 말할 수 없어!’
아니,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쪽팔려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떤 미친놈이 있어, 근데 그 미친놈이 나한테 반해서 두 번이나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 키스하고 ‘내 여자가 되라’는 쌍팔년도 대사를 읊더라, 하고 얘기하리?
어쨌든 마음이 심란했다. 기껏 시간을 옮긴 과외를 다시 취소할 정도로. 과방에서 나와 학교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괜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힐끗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수군거리는 말들도 귀에 들어온다.
어머, 쟤 걔야! 내가 어제 얘기했지? 중도 앞에서…….
웃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도서관 앞에서…….
그러게. 요즘 애들이란, 쯧쯧.
지금은 그 남자랑 같이 안 있나 보지? 근데 그 남자 유명한 남자라던데? 휴학 전에는 학교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대.
유명함 다니? 별꼴이다,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아악!”
“왜, 왜 그래!”
옆에 앉아 있던 유준이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다 비운 소주병을 들어올리는 민하의 동작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유준은 황급히 병을 뺏었다.
“민유준.”
민하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우리 키스하자.”
유준의 눈이 댕그래졌다.
“갑자기 왜 그래?”
“씨이, 키스해 줘……. 잉잉, 키스해 줘…….”
민하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유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유준은 불안한 눈으로 민하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그녀를 떼어내지 않았다. 유준의 입장으로는 굳이 떼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좋으면 좋았지.
“너, 진심이야?”
“엉.”
“분명히 말했다?”
유준은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내가 고자냐? 이런 찬스를 놓치게. 여자 쪽이 대시했는데도 걷어차는 놈은 남자도 아니다. 아니, 예의도 아니지. 유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30cm, 20cm, 10cm, 5cm…….
“안돼!”
민하의 입에서 외침이 새어나왔다. 그대로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
누가 보면 유준이 억지로 뭔 짓을 하려고 했다고 오해하기 딱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유준은 멍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민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애써 깜박이며 말했다.
“미, 미안해…….”
나, 성원 오빠가 아니면 안 되나 봐. 안 되나 봐…….
불쾌했던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유준과 키스하면 그 두 번의 기억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준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징글징글한 강인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안 된다. 안되었다. 역시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유준이라도 소용없었다. ‘싫지 않은’ 내지 ‘괜찮은’ 정도 가지고 도저히 키스는 할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들릴락 말락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미안해…….”
유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 왜 무리했냐 그래. 술기운을 빌려서도 안 될 거면서.”
“미안…….”
“됐어.”
고개를 들었다. 유준이 싱긋 웃는다.
“내키지도 않은 거 나도 바라지 않으니까. 대신 담엔 가차 없다? 니가 피해도 내가 그대로 덮쳐버릴 테니까.”
“으응…….”
농담조의 말에 민하도 배시시 웃었다. 근데 너……, 하고 유준이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 때 그거 못 잊은 거냐?”
“응?”
민하가 얼떨떨하게 되묻자,
“그 미친놈이 한 짓 말야.”
유준은 반은 허탈하고 반은 이를 악문 듯한 이상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한심해 뵈는 동작이었지만, 그런 어리버리한 표정에 고등학교 때부터 주변 여자애들이 캬아, 귀여워어! 하고 좋아하는 것을 자주 봤다. 자신도 여자지만 여자의 눈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새끼 제발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럼 진짜 한방에 날려 줄 텐데.”
“무슨 수로.”
그렇게 말하고는 민하는 실수!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의 존심을 건들다니 못할 짓이다. 저래 뵈도 민유준, 프라이드만큼은 누구한테도 안 뒤진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유준은 피식 웃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화가 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너,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요즘 검도 다니고 있다고.”
“검도?”
“그래. 지난번에 나름대로 쇼크 받았거든. 그리고 이래 뵈도 내 키가 180에서 1cm 모자란데, 약한 편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방에 나가떨어지다니.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 그지만 걱정 마. 담에 너한테 무슨 일 있으면…….”
유준이 손가락뼈를 우두둑 소리 내서 꺾었다.
“진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기대할게.”
민하는 웃으면서, 속으로만 가볍게 한숨쉬었다. 우리 학교 오면 그 자식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래. 아니, 나도 더 이상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8
토요일 저녁이었다.
아직까지도 유일한 가족인 민호 오빠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밤새야 한다는 전화가 조만간 올 수도 있다. 검사라는 직업, 정말 엄청난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요하는 일 같다. 저렇게 힘든 일을 뭐 좋다고 어려운 시험까지 쳐가면서 하고 싶어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간다. 고지식한 오빠한테야 딱 어울리는 직업이긴 하지만. 성은 언니가 불쌍하다. 신혼생활을 얼마나 함께 보낼 수 있을는지 원.
TV 화면에 시선을 박은 채 시덥잖은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웃고 있던 민하의 귀에 문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문 쪽으로 가다가 민하는 민호 뒤에 서 있는 인물을 보고 흠칫했다. 성원이 뒤에 서 있었다. 놀라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니, 최악이다. 집에서만 입는 진회색 트레이닝복은 며칠을 빨지 않았고 머리는 연변처녀처럼 질끈 묶었다. 화장을 안 하고 밖에 나가면 ‘아직도 고딩이냐’는 소리를 듣는 민하다. 성원은 이런 자신의 어설프고 어린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고. 여동생의 체면 따위는 아랑곳없이 불쑥 예고 없이 친구를 데려온 오빠를 잠시 노려봤다.
“미안. 너무 갑자기 와서 놀랬지?”
성원이 민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뇨, 아뇨.”
손을 내저었다. 성원이 와서 반갑지 않을 리 없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후줄근하다는 게 문제지. 이런 꼴, 성원에게만큼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받아, 초밥이다. 어차피 밥 따로 안했지? 사랑스런 여동생을 위해 사왔지롱.”
민호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뭔가를 내민다. 오빠가 워낙 저녁 먹고 오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맞춰 밥을 따로 해 두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뭐야, 밥을 새로 해야 하나?’ 하고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던 민하다. 좀 미안한 기분에 머쓱하게 웃으며 초밥이 담긴 종이봉투를 받아 쥐었다.
“근데 오빠 웬일이야? 성은 언니랑 만나지 않고?”
“야근이란다. 디자이너는 뭐 한가한 직업인 줄 아냐? 이쪽이 시간 나면 저쪽이 없고, 저쪽이 시간 나면 이쪽 발등에 불 떨어지고. 미치겠다, 정말. 이런 주말에 남자들끼리 만나서 집에 돌아와야 하는 기분이란!”
민호가 한숨을 내쉰다. 성원이 뒤에서 발로 걷어찼다.
“난 좋아서 니놈이랑 만난 줄 아냐? 니가 먼저 전화했잖아, 임마. 결혼 문제로 의논할 게 있다며. 모처럼 빈 주말, 난 만날 사람이 달리 없는 줄 알아?”
“아. 그러고 보니 너……, 그 여자랑은 잘 돼 가냐?”
초밥을 식탁에 늘어놓던 민하의 손이 멈칫, 하고 떨렸다. 성원은 그런 민하를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 지연 씨? 어.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다른 여자들처럼 투정도 많지 않은 편이고, 이해심도 많은 것 같고. 그쪽도 바쁘니까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엇, 민하야! 괜찮아?”
간장이 든 비닐을 찢다가 손이 미끄러진 것이다. 입고 있는 트레이너 앞쪽이 검게 물들었다. ‘그러게 좀 조심하지, 하여튼.’ 하고 속도 모르고 히죽거리는 오빠의 배를 주먹으로 힘껏 가격한 뒤, 민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런 말을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저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을까. 똑똑한 사람이잖아! 그렇게 몰라?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그렇게 모를 수 있어?
바보!
찔끔 배어나온 눈물을 닦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충전기 위에 올려 논 핸드폰이 ‘아리랑’을 연주했다. 촌스럽다고 친구들이 다들 구박한 벨소리다.
민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어제 허약체질 만났지. ]
낮은 음성. 지금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버,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 만났나? ]
질문에 대답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한다. 정말이지 제멋대로다. 정말이지 재수 없어. 민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만났어요.”
[ 치우랬잖아. ]
“싫댔잖아요. 근데 만난 건 어떻게 알았어요?”
[ 훗. ]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음산하게 웃었다.
[ 네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는 전부 꿰고 있어. ]
“이봐요, 당신이 뭔데…….”
[ 치워. ]
“싫어요.”
[ 경고했어. 후회하지 마라. ]
“무슨…….”
탁.
전화가 끊겼다. 민하는 어이 없이 핸드폰을 그러쥐고 있다가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웃어도 냉랭하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머리를 스친다. 불안……. 불안하다. 밖에서 민호가 빨리 오라며 독촉하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민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라면 좋겠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9
일요일.
한주의 처음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 날은 이른 아침부터 심란 그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시작되었다.
9시 47분.
민하는 시계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유준의 집 전화번호는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핸드폰으로 아무리 걸어봐야 받지 않는 걸.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반응이 없다.
처음 있는 일이라, 민하는 불안해졌다.
지난번에 키스를 제안했다가 자신 쪽이 거부한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때 분명 유준은 괜찮다고 말하며 웃었다. 덧붙여 집에까지 바래다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교시절부터 알아 온 민유준은 그런 일 갖고 삐치거나 할 속 좁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었다. 일요일인 오늘 아침 9시까지 민하를 데리러 오기로 했던 녀석은, 그러나 10시가 다 되어가도록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민하는 수첩을 보면서 유준의 집 전화번호를 꾹꾹 입력했다.
[ 여보세요? 엄마? ]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았는데 들린 목소리는 아직 고등학생인, 유준의 여동생의 것이었다. 마치 전화를 기다린 듯 반응하는 그녀에게, 민하는 놀라 더듬거렸다.
“저어, 유준이네 집이죠? 유준이 친구 민한데, 유준이 집에 있나요?”
[ 오빠, 병원 갔는데요? ]
“네?”
[ 어제 밤에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숨이 갑갑해지고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어떤 짐작 하나가 파득 스쳐지나갔지만, 민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버야. 아닐 거야.
“마, 많이 다쳤나요?”
[ 음……. 좀 다쳤어요. 팔이 부러졌대요. ]
한방 얻어맞은 듯한 머리를 간신히 추슬렀다. 병원 이름과 위치를 물어본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디 가냐?”
모처럼 시간 난 주말에도 거실에서 노트북과 자료를 보고 있던 일중독자 오빠가 부스스한 얼굴로 물어왔다. 민하는 재킷에 팔을 꿰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빠! 나 좀 태워다 줘!”
“뭐?”
“새로 산 차 뭣에 써? 나 좀 태워 줘! 병원 가야 된단 말이야!”
민호가 입을 헤, 벌렸다.
“병원? 너 어디 아프냐? 멀쩡해 뵈는데…….”
“빨랑 나와! 미적거리지 말고!”
“우씨, 아침부터…….”
“빨랑 안 와?”
여동생의 말을 안 들으면 심신이 고달파진다. 장가가려면 아직도 석 달이라는 기간이 남았다. 그 때까지는 이 집의 실권을 쥔 여동생에게 빌붙어 사는 수밖에 없다. 비굴하지만 어쩌겠는가, 에효……. 민호는 툴툴거리면서도 추리닝 바지 위에 잽싸게 점퍼를 걸친 후, 민하를 따라나섰다. 3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몸에 밴 신속 일변도의 동작이었다. 또한 매우 현명한 행동이기도 했다.
“유준아!”
“하아, 민하?”
꼴이 말이 아니다. 붕대를 칭칭 감은 머리. 깁스를 한 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한쪽 팔. 어떻게 당했는지 퉁퉁 부어오른 얼굴. 꽃미남, 이라는 별칭이 딱 어울리던 매끈한 얼굴이 저 지경이 되다니! 민하는 안쓰럽기 이전에 눈에 비치는 광경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이게 웬일이니?’ 류의 표정을 보자, 환자도 민망한 듯 눈을 껌벅인다.
“유준이 친구?”
유준의 어머니가 놀란 듯 물었다.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친구 서민하라고 합니다. 놀라셨죠? 이거…….”
어머니에게 꽃다발과 주스를 내미는 민하에게,
“지금 막 연락하려고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
유준의 어설픈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신 틈을 타서, 민하가 물었다. 유준이 허탈하게 다치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소한 동작조차도 거북했는지 입에서 윽, 하고 짧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도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얼굴은, 민유준이란 청년의 대책 없으리만치 선량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하, 쪽팔리다. 검도까지 배운다고 큰소리쳐 놓고 이런 꼴을 보이다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된 거야?”
“변명이긴 한데, 뒤에서 먼저 덮쳐왔어. 것도 한명이 아니라 세 명 정도가.”
“누구야? 그 사람들.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민하가 눈썹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유준은 목이 아픈지 고개는 차마 흔들지 못하고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아니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몰라. 난생 첨보는 사람들이었어.”
“돈 같은 거 뺏으러 온 건 아니고?”
“아니. 나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음……. 지갑은 건들지도 않더라고.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데? 아, 맞다. 검도 같은 거 한다고 깝죽대지 말고 약한 대로 살라나. 그게 너한텐 어울린다고.”
기분이 좋지 않다. 불안하다. 불안해서 죽을 것 같다. 어설픈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불안하다.
불안…….
“굉장히 분했는데, 솔직히 너무나 아파서……. 대꾸도 못했다.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까 병원이더라고. 으으, 쪽팔려 미치겠다. ……민하야? 왜 그래?”
- ……나라는 사람은 새를 바로 죽일 정도로 성질이 급한 건 아니지만, 노래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만큼 느긋하지도 않아.
민하는 손을 얼굴 앞에 세로로 모은 채, 무심코 뭔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유로운 듯, 즐거운 듯, 그러면서도 냉랭한 분위기가 전면에 배어 있던 강인의 얼굴. 그 표정, 그 말투.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 전체가 오싹해져 온다.
아냐.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
그런데…….
“유준아. 나 이만 가볼게.”
“어? 민하야?”
민하는 유준이 부르는 소리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멍한 동작으로 일어서서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
10
“선배, 얘기 좀 해요.”
회계수업이 끝난 후. 부산히 움직이던 다른 학생들의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문을 나서던 사람들도 죄다 몸을 틀어 돌아볼 정도로, 민하의 음성은 강의실 안에 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말해.”
강인은 오늘은 트레이드마크 같은 담배 귀걸이를 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은색 두터운 링 귀걸이를 귓불에 매달고, 검은 니트에 검은 팬츠로 올 블랙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블랙은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색이었지만,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가 ‘접근금지’라는 푯말을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비쳤다. 가만히 있어도 ‘얌전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한 성깔 하는 놈’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듯한 차가운 미모. 그런 강인이 흡사 까마귀처럼 검은 옷에 차가운 은색 액세서리를 한 모습은 싸늘한 이미지의 그림 그 자체였다.
“여기서요?”
“마음대로.”
강인은 민하의 물음에 두 손을 깍지 끼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아뇨, 나가죠. 나가서 얘기해요. 여기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
“데이트 신청?”
예주를 비롯해서 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보고 있음을 민하는 알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말 같잖은 소리에는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나가요, 제발.”
‘제발’이라는 말은 서민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재미있군. 어지간히 쇼크 받은 모양이지? 그러게 진작 노래했으면 되잖아.
강인은 입 끝을 희미하게 들어올리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그는, 민하의 어깨를 마치 서로의 마음을 허락한 연인들 사이에서 그러듯 단단히 감싸 쥐었다.
“왜 이래요!”
민하는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튕기면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나? 힘 빼지 마.”
강인은 민하가 아니라 강의실 내의 다른 사람들을 빙 둘러 보면서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팔은 진절머리 날 만큼 강인해서, 민하는 벗어나는 걸 포기하고 순순히 끌려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더 반항해 봐야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거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인의 팔에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그가 늘 차를 세워두는 유료주차장까지 끌려갔다.
“오늘은 안 탈 거예요.”
차에서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지만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여기 탔다간 또 다시 강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질문에만 대답해 주세요. 유준이, 어떻게 된 거예요?”
“허약체질 말인가?”
검은 옷의 남자는 차키를 손가락에 걸고 흔들면서 미소인지 조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희미한 일그러짐을 입가에 매달았다. 그 동작이며 표정이며, 얄밉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로 여유롭다.
“팔이 부러졌다고요! 솔직히 말해요. 선배가 시킨 거죠?”
“증거는?”
“…….”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흥, 심증은 증거가 될 수 없어. 내가 했다고 누가 그랬지?”
하나 죄의식이라곤 배어 있지 않은 말에 외려 확신이 섰다. 머리를 향해 열이 올라오고 숨까지 가빠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물면서 상대를 노려봤다.
“당신이야. 당신이 그런 거야……. 왜?”
“네 옆에 다른 놈이 있는 건 못 참으니까.”
“이런다고 내가 마음을 열어줄 것 같아요?”
거름 밭에 떠밀려 뒹굴고 있는 것처럼 더러운 기분. 상대가 히죽 웃었다.
“노래 부르고 싶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지만 지금 제 발로 내 품에 안기는 게 좋을 걸? 이런 일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게 싫다면 말이지.”
“못된 자식!”
민하가 강인의 팔을 때리려던 순간, 전과 다를 바 없이 팔목이 잡혔다. 그리고 연속동작처럼 그녀의 몸은 뒤에 세워진 차 보닛에 단단히 눌려졌다. 바보 같아! 숨이 막힌다. 그는 가볍게 누르고 있을 뿐인데, 몸을 비트는 것조차 힘들 정도다. 고통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 질렀다.
“하려면 맘대로 해 봐! 당신 혀를 깨물어버릴 테니까!”
더 이상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맘대로 될 것 같아? 웃기지 마! 비열한 자식! 비열한 자식!
“안심해.”
남자가 코끝으로 웃었다.
“더는 강제로 하지 않을 테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재미도 없고. 조만간 그쪽이 제 발로 걸어와서 스스로 대게 될 테니까 말이야. 훗, 내기할까?”
차분하다 못해 부드럽기까지 한 말투. 그런데 그 분위기가 묘하게도 살벌해서 민하는 등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면서, 자신의 얼굴 바로 위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대고 한껏 모멸의 언사를 뱉어주었다.
“웃……기지 마. 당신은 절대 못 이겨. 내가 선배한테 가는 일은 나 죽기 전엔 없을 테니까. 이런 방식은 그쪽을 경멸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란 걸 알아둬요.”
“과연 깡이 좋은 여자군. 갈수록 맘에 드는데.”
그가 몸을 뗀다. 그러자 거의 멈추다시피 막혀 있던 숨이 일시에 흘러나왔다. 콜록거리면서 상반신을 구부리는 민하의 귀에 대고 그가 태연히 말했다.
“버티려면 버텨 봐. 되도록 오래 버텨 줘. 나중에 널 맛볼 때 보다 달콤하도록 말이야. 난 인내심이 퍽 강하거든.”
그의 음성은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즐겁게 들렸다.
계속.
오른쪽 번호는 예전에 올리던 편수입니다. 즉 오늘은 예전 연재분의 10회까지 나간 거야요. 세자리 수인 이유는 저쪽 편수 기준으로는 아무래도 100편 넘게 나갈 듯한 예감, 아니, 확신이 들어섭니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T^T)>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1-27 13:22)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1-27 13:26)
댓글 '16'
Jewel/ 단역의 비애;
phoebe258/ 아하하; 강인이 같은 남자랑 정말 사귀게 되면 힘들어요, 피비님^-^;
비누인형/ 사기로 된 귀걸이야요. 담배모양의; 실은 저도 민호가 더 좋답니다.
까망사자/ 후; 뒷부분을 생각하니 저로서는 한숨이; 요즘 약간 슬럼프야요.
so/ 아하하하; 이런 모습까지 귀엽게 볼 수 있도록 제가 만들어야죠(부담 1백만배).
미진/ 음, 성은의 비중은 여기서 그리 크진 않지만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리체/ 진심이 되어야지, 암. 근데 과연 개연성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을지; [05][04][07]
phoebe258/ 아하하; 강인이 같은 남자랑 정말 사귀게 되면 힘들어요, 피비님^-^;
비누인형/ 사기로 된 귀걸이야요. 담배모양의; 실은 저도 민호가 더 좋답니다.
까망사자/ 후; 뒷부분을 생각하니 저로서는 한숨이; 요즘 약간 슬럼프야요.
so/ 아하하하; 이런 모습까지 귀엽게 볼 수 있도록 제가 만들어야죠(부담 1백만배).
미진/ 음, 성은의 비중은 여기서 그리 크진 않지만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리체/ 진심이 되어야지, 암. 근데 과연 개연성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을지; [05][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