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마치 세상이라도 끝난 것처럼 울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무심코 눈을 떴을 땐 까만 먹물같은 집채만한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고요한 적막감에 휩싸인 집안 가득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은 후였다. 베란다 창이 열려있었는지 선뜩한 한기와 함께 훤히 드러난 맨살을 따라 좁쌀같은 소름이 끼친다. 마치 냉수라도 뒤집어 쓴 듯한 몸의 떨림에 잠시 달아났던 감각들이 되살아나 너도나도 비명을 질렀다.

 

신우는 소파와 쿠션 사이에 끼어서 점점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켰다. 여기저기 결리다 못해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몸을 끌다시피하며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벽을 더듬었다. 울렁거리며 심장을 죄이는 익숙한 통증을 참아내며 신우는 간산히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스물 여섯해가 다 되도록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건, 어린 신우가 남긴 흔적들 중 하나. 어둠을 몰아내고 집안을 훤히 밝히는 불빛 한점에 한결 안정을 되찾은 신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향하고 있는 시각. 꼬박 10시간 이상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개운치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잠에 취해서라도 지금의 현실에서 달아나고픈 마음이 컸을터였다.

 

가슴의 통증을 달래며 애써 호흡을 고르던 신우는 거실을 지나 반쯤 열려 있는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 한 구석에는 아기자기한 화초들이 짝을 이루었고,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는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 하나가 자리했다. 애정을 기울일 무언가의 대상이 필요해 하나둘씩 키우기 시작한 화초들이 제법 모여 이제는 그럴싸한 작은 장원을 이룰정도다. 욕심만 앞세우다 제 생명을 이어가지 못한 아이들이 수차례……, 이른 아침햇살 아래서 수줍게 피어오른 꽃망울 하나에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이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모습에 마치 대다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했다.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이곳에서 황홀한 야경과 그들을 벗삼아 작은 티타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평소처럼 의자가 아닌 난간에 몸을 기댄 신우는 온몸을 쓸어내리는 미풍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엉킨 머릿속과 마음 속 근심을 잠재우고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한 바람을 담아, 오로지 호흡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간간히 들리던 밤의 소음마저 어둠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걸까. 모두가 잠 든 이 밤, 오로지 홀로 깨어있는 듯한 고요함이 전신을 짓눌렀다. 한뼘이나 내려앉은 어깨를 추켜올리고 양팔을 힘껏 뻗은 신우는 가벼운 스트레칭과 함께 눈을 떴다.

 

“하아. 바람 한번 시원하다.”

 

잠든 대지를 일깨우는 새벽공기처럼 상쾌한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호기있게 외쳤다. 누가 보았다면 마치 산 정상에라도 오른양 씩씩함까지 더하면서.

 

신우는 커튼처럼 드리워진 밤 하늘을 수놓으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이 마치 선인의 그것마냥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는 듯 했다. 길고 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돌아서야 할 때…….
길이 아니라면 돌아서야 하는 법.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기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어떠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를 일. 또한 모든 걸 되돌린다 하더라도 감히 예전과 똑같지는 않으리라.

 

삶에 있어서든 일에 관해서든 신우는 늘 스스로에게 당당하고자 노력했다. 누군가가 대신해 줄 삶이 아니었기에 늘 매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단 두 사람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항상 무언가에 위축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연인인 재준과의 관계에서는 소심했으며 우유부단한 그녀에 반해 거침없는 그에게 언제나 끌려가는 입장이었다. 때론 강압적인 재준이 버겁기도 하였지만 그의 결단력을 바랄 때도 많았다. 그를 만나온 1년이란 시간동안 재준이 이끄는 거친 물살에 이끌려, 가슴 속 한 구석에서 울리는 조용한 외침따위는 귀 기울여볼 여유조차 없었다.

 

신우는 애써 지금껏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을 이제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감히 두려웠기에 제대로 바라 볼 수 없었던 것들. 아주 오래전……, 기억에도 흐릿한 어린 신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늘 갈구했었다. 남들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그녀의 인생 절반을 지배했다.

 

사랑이란게 누구에게나 같은 색일 수는 없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우가 바라던 사랑은 바라만 보아도 가슴 떨리는 짜릿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든든한 울타리로 이어진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쉽게 깨어질 수 없는 견고한 성벽처럼 뜨거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을 늘 꿈꾸었다. 그 누구라도 좋았다. 허한 그녀의 마음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런 끝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불쑥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게 재준이란 남자였다. 첫 만남부터 거침이 없었지만 결코 도를 넘질 않았다. 미숙한 남녀관계로 인해 스쳐간 몇몇 남자들과는 달리 진득한 인내심을 보여줄 줄도 알았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따스한 그의 스킨쉽은 불쾌했던 첫 키스의 기억마저 말끔히 씻어냈다.

 

재준에게 바란 건 단 한가지였다. 오로지 그녀만을 향한 그런 자상함에, 따스함에 이끌렸다. 이런 남자라면……, 재준이라면 감히 그녀의 인생을 걸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대단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그녀가 뒤 쫓고 있었던 것은 사랑이란 허상을 씌운 안락함이었다. 정말 그녀가 재준을 사랑했다면 그 밤, 그 날 밤 스스럼없이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두려움, 뭔가 잘못되었다는 끔찍함에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을리가 없었다. 사랑은 커녕 처음으로 재준이 무서웠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행복하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만 쫓다 감히 재준의 사랑을 기만했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이다.

 

꼬였던 실타래가 어느정도 풀리기 시작하자 신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제서야 끄르륵 거리며 허기를 호소하는 뱃속의 아우성이 들렸다. 약혼신 당일부터 거의 먹은 게 없으니 내리 이틀을 굶은 셈이다.

 

욕실앞에서 속옷까지 남김없이 벗어던진 신우는 구겨진 드레스를 미련없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을 받아 딱딱하게 뭉친 근육들이 노곤하게 풀릴때까지 몸을 녹였고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욕실을 나섰다.

 

갓 지은 따뜻한 밥에 구수한 된장찌게, 두툼한 계란말이와 김으로 이루어진 간소한 밥상을 두고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모처럼의 포만감에 나른하게 졸음이 쏟아질 법도 했지만 며칠사이에 청할 잠을 한꺼번에 내리잔 탓인지 신우는 날이 밝아오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토요일 약혼 예식과 피로연 후,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일요일에는 둘이서 짧은 여행을 가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거기다 월요일 하루는 월차까지 신청해 놓았다. 재준과 함께 할 일정은 이미 틀어져 버렸지만 24시간 이란 시간이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되버렸다. 그냥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에는 잡생각이 많아질 것만 같고 거기다 재준이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릴 게 분명하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단 하루만에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지난 1년이란 시간을 완벽하게 정리할 순 없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혼 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걸 뒤엎기에는 재준이라는 넘어야할 산이 만만치가 않음이 분명했기에.

 

신우는 문득 몇 해전을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겨울 날, 처음으로 오른 혼자만의 여행길. 사립고를 다녔지만 내성적인 성격탓에 선뜻 여행을 청할만큼 흔한 친구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모 드라마를 통해 보았던 바다를 목표로 삼아 무작정 떠난 적이 있었다. 칼바람이 엄청난 겨울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눈앞에서 마주하던 그 설레임과 짜릿함은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결국 신우는 고민 끝에 기분 전환을 위한 혼자만의 여행에 오르기로 마음 먹었다. 예정에 없던 짧은 일탈이라 편안한 옷차림에 가방, 약간의 현금만 챙겨 집을 나섰다. 오전 9시경 신우는 원래의 목적지였던 강원도가 아닌 포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비워낸 신우는 예정된 일상을 맞았다. 긴장된 일주일의 시작, 화요일이었다. 출근과 동시에 회사 동료들의 약혼 축하가 이어졌고 초대장조차 돌리지 않았던 그녀의 무심함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점심까지 사는 여유도 부렸다. 부러움과 호기심에 호들갑 떠는 여직원들 사이에서 텅 빈 왼손을 보여야 했을때는 진땀이 나기도 했지만 흔히 있을법한 변명을 늘여놓는 대범함도 보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신경이 곤두서다못해 두통마저 생길지경이었다. 신우는 수시로 재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가도 정작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가방을 발견했을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팽개치듯 버리고 온 핸드백속에 잠들어 있을 그녀의 휴대폰이 있을리가 없었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바로 회사로 연락을 취해왔을텐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마땅히 그녀가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게 옳을테지만 비겁하게도 재준과의 대면을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아니 영원히 늦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평온한 주가 흘러가는 듯 했다.


 

금요일 오후 5시 30분 경. 즐거운 주말의 시작을 코 앞에 둔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질 시간이었다. 하던 업무를 마무리하고 책상 정돈마저 완벽하게 마친 이들은 정확히 6시를 알리자, 인사를 나누며 바삐 사무실을 빠져나기 시작했다.

 

외로운 솔로끼리 뭉치자며 즉석에서 술자리를 약속한 몇몇 직원들이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신우를 향해 불쑥 외쳤다.

 

“신우씨!, 퇴근 안하고 뭐해요? 다들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는데……. 아니, 약속 없으면 가볍게 맥주한 잔 하러 같이 갈래요?”
“아이쿠. 신우씨가 우리랑 같은 처진 줄 알아? 조금 있으면 모시러 올 약혼자가 있을텐데 무슨 걱정이야. 갈데도 없는 우리 처지나 걱정하자구. 그럼 신우씨 데이트 잘하고, 즐거운 주말 보네요. 우린 먼저 사라집니다.”

 

입사동기인 동시에 비슷한 나이, 그리고 아직까지 여자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일치감을 보인 그들은 자칭 사랑보다는 뜨거운 우정이라며 돈독한 동지애를 과시하곤 했었다.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티격태격 솔로 예찬과 솔로 타파를 외치며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신우 역시 웃으면서 소리쳤다.

 

“형우씨, 원상씨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 모습을 응시하던 신우의 얼굴에서도 꺼진 등불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초점없는 시선에는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아이처럼 혼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신우는 평일과 달리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라 평소처럼 곧장 집으로 가기가 싫었다. 그녀만의 아늑한 보금자리였지만 스무살이란 이른 나이에 독립해 혼자였던 시간이 많은 탓인지 가끔은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불꺼진 집으로 들여서기가 망설여질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가족이든 연인이든 세상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길텐데, 왠지 그녀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싫었다. 한때는 주말마다 쇼핑이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생활을 통해 의미없는 시간을 죽일 때도 있었다. 일부러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홀로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했었다. 재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라는 현실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뼈속까지 파고드는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낼 수는 없었지만…….

 

가방을 챙겨 든 신우는 저녁으로는 무엇을 먹으며 어떤 장르의 영화를 볼까 고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Rrrrrrrrrrrrrrrrrrrrrrr-.
사무실 입구에서 보안장치를 확인하던 신우는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시간은 벌써 6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 없었기에 업무상의 전화일 가능성 역시 희박했다.

 

Rrrrrrrrrrrrrrrrrrrrrrr-.
하지만 문제의 전화벨 소리는 그 누군가가……, 정확하게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듯 끈질기게 울어대고 있었다. 전화벨 따위는 듣지도 못한 듯 돌아서면 그만인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떨리던 호흡을 가다듬던 신우는 천천히 수화기를 손에 쥐었다.

 

“네,  디자인팀 이 신우입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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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3 02:06:00

뭔가 의미심장한 전화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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