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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옛날 옛적 열여덟이었던 남자와 여자
이상형후보군에서 내쳐진 리포터가 과장되게 낙담했다. 송재와 두 사람 건너 앉은 장연웅은 과연 아이돌 출신답게 예능계통 방송에 임하는 자세가 절륜했다. 그는 곁에 바짝 자리한 리포터의 어깨를 잿빛 페도라가 들썩이리만치 과격하게 당겨다 끌어안았다. 남은 손으로는 미간을 주물러 눈물을 짜는 시늉을 했다. 한편 내뱉는 소리는 다감한 위로가 아니라 업신여기는 농담이었다. 소속 기획사가 신비스럽고 애처로운 소공녀 콘셉트를 강력하게 고집한다고 했나. 주관적인 취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도 이상으로 음침한 분위기가 미망인에 가까운데. 발랄한 대꾸는커녕 내내 아련하다 못해 청승맞은 미소나 그어대 리포터에게 무안을 준 이소진이 거의 실수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이를테면 잠금 설정의 해제였다. 소진은 내심 혀를 깨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한결 말랑해졌다. 리포터와 기꺼이 합을 맞춰 곰살궂은 재간을 부린 연웅의 공이 컸다. 낯바닥이 좁아 뵈는 화려한 이목구비로도 모자라서 언변이며 순발력도 발군이라. 팬클럽 회원 수를 만 단위로 헤아릴 만도 했다. 전시가 아니고서야 만 단위 사람을 휘하에 거느려 도모할만한 업적 따윈 좀체 상상하기 어렵지만. 송재는 부러 허튼 생각에 몰두했다. 맞지 않는 남의 운동화에 억지로 발을 욱여넣은 채 달리기 시합에 나선 불편하고 어색한 기분을 잠재우려.
스물셋에 우연하게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벌써 경력 연차가 다섯 해를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부담스러운 비중으로 홍보목적의 연예정보프로그램 인터뷰에 끼이기란 몹시 생소한 경험이었다. 제작발표회견에 덤으로 딸려있던 이번과 비슷한 종류의 인터뷰는 마침 일정이 여의치 않아주어 약삭빠르게 피할 수 있었는데. 커프스단추를 매만지는 척 시계바늘의 위치를 곁눈질했다. 어림짐작 이상으로 소모한 시간이 길었다.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강행군 가운데 절실한 토막의 여유를 몇 차례분이나 갈취당하고 있었다. 명치까지 차오른 한숨을 애써 가라앉혔다. 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반복해서 바닥을 구르고 있음을 퍼뜩 의식했다. 초조함의 표현.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는 수단의 하나로 신경질적인 악역을 연기하느라 부러 만든 거짓습관이었다. 단 작정하고 몸에 배이게 한 습관에도 심각한 중독성이 있더란 게 문제였다. 역할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알았다. 개운치 못한 습관은 이미 송재에게까지 스며든 다음이었다. 무릎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놓고 눈길을 드는데 노골적으로 송재를 담고 있는 카메라렌즈를 맞닥뜨렸다. 불량스런 태도를 책 잡혀 추궁당할 노릇도 아닌데 괜스레 멋쩍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기지개를 켜면서 멀쩡한 뒷목이나 긁적였다. 남의 눈을 병적으로 의식하는 까닭에 예의범절을 두고 결벽증세까지 보이는 「Mr. Child」 서태헌이라면 도저히 용납이 어려운 천박한 짓거리겠지만.(캐릭터를 분석하면서, 만약 실존하는 서태헌과 송재 자신이 고교시절을 한 반에서 나기라도 했더라면 그 멱살을 잡아도 족히 여남은 번은 잡았으리라 거의 확신했다.)
「Mr. Child」는 화사한 색조의 영상과 감각적인 대사로 테를 두른 흔한 치정극이었다. 상식선에서 수습할 도리 없이 얽히고 꼬인 인간관계와 용암처럼 절절 끓는 애증 따위가 서사 전반을 지배했다. 점차 치정의 무게를 덜어가는 TV시리즈 추세를 쾌속으로 역행하는 쓸데없는 패기가 엿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들어 정통멜로 장르 TV시리즈의 성적이 죄 부진했으므로 반면교사로 삼을 만도 했는데. 감독의 경력은 띄엄띄엄 적어도 한 줄이 넘지 않았다. 사실에 수렴하는 소문을 듣기로 제작비 봉투가 얄팍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자연히 이름만으로 시청자들을 설레게 하는 이른 바 특급 스타를 낚지도 못했다. 방송사로서도 어려서부터 공부에 별반 뜻이 없는 막내아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적에의 기대치를 낮게 걸어두었음을 꿰고도 남았다. 개중 애매모호한 매력에 상대적으로 분량마저 변변찮으면서 막상 다루기에는 까다로운 서태헌 배역은 온갖 데서 호되게 까이다 종래 송재의 발치까지 떨어진 참이었다. 서태헌은 요컨대 종잇장처럼 평면적인 악역으로써 멀쩡한 허우대와 특출한 지성에 반비례로 되먹지 못한 인품까지 두루 섭렵해 놓았다. 송재의 사촌형이자 소속사의 매니지먼트 팀장 은상은 「Mr. Child」의 기획과 개요를 검토하고 자료묶음 위에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달필로 ‘버리는 패를 굳이.’라는 명쾌한 소견을 갈겨.
청개구리 놀음을 하기에는 아무렴 나이가 차고 넘쳐나는데 정황이 숨 막히도록 일관되게 부정의 방향을 가리키니까 오히려 세상 눈치를 봐서 봉해두었던 치기가 맹렬하게 동했다. 거의 혼을 태워 음모를 빚는 서태헌의 한심스러운 장인정신에도 새삼스러운 흥미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송재가 서태헌 역에 수락의 뜻을 비치자 장삿속이 밝은 대개 소속사 관계자가 우려를 표명했다. 인지도 도움닫기의 발판이 되기는커녕 시간과 체력을 깎아 먹고 작품을 고르는 안목마저 폄하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선택이라고 지적이 따갑게 날아들었다. 충무로 유망주의 자리에서 마냥 제자리걸음을 하다 막 기세가 오르려는 시점이었다. 깔끔하게 닦인 길을 타게끔 인도하려는 회사의 입장도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의지에는 따로 관절이 없어서 쉽사리 꺾어지지 않았다. 암암리에 일컬어지길 ‘차송재 마스터’ 은상만이 영양가 없는 만류를 시도조차 않았다. 사촌형제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나지막하게 할래, 굳이? 묻기에 물음표만 떼고 똑같이 돌려줬다. 할래, 굳이. 약지에 낀 반지를 두 바퀴 반 돌리고 난 은상이 비죽 웃었다. 해, 굳이. 믿음직스러운 인상과 기름칠한 혓바닥으로 반대론자들을 말랑하게 구워삶은 은상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계약을 마무리 짓고 심지어는 언론 배포용 홍보자료 승인까지 마쳐버렸다. 그도 송재와 마찬가지로 미처 살피지 못한 ‘버리는 패’의 뒷면이 ‘신의 한 수’임을 예견했을 리 없건만.
기실 「Mr. Child」는 치열한 편성다툼에서 판정패의 수모를 당했다. 달리 승부를 걸어볼 여지도 없이 빗대자면 도서벽지와 다름 아닌 케이블 드라마 채널로 유배당할 참담한 처지에 놓였다. 성과에 연연하다보면 긍지며 의욕이 남아나지 않기 마련. 여태까지 작품의 처분과 성패를 대체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온 터였다. 완성도에 대해서만큼은 체념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송재는 혀를 짧게 차고 감정 단속을 끝냈다. 상황을 모르는 척 담담하게 대본이나 들여다봤다. 회사 편에서도 대놓고 송재를 노려 들어오는 비난의 화살은 없었다. 대신 은상은 송재의 어리광을 마냥 편들어준 죄목으로다 윗선으로부터 야무지게 박살이 났다. 송재가 익히 겪어오길 그의 사촌형은 징그럽게 내구성이 좋은 물건이었다. 어쩌다 박살이 나더라도 잔해를 쓸어 모아서 다시 튼튼하게 조립하면 그만인 레고블럭 타입의 멘탈을 탑재했다. 염려도 죄책감도 없이 방패막이로 써먹기에 무척이나 알맞았다. 일견 착실하고 천진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태생적으로 사고가 치밀한 사촌형제 사이에 미리 암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사안이기도 했다.
애초 실패를 염두에 두고서 반쯤은 흥미본위로 패를 쥐었고 결과에 대해선 아쉬운 대로 납득한 참이었다. 고려도 하지 않은 애먼 쪽으로 길이 트였다. 「Mr. Child」와 비교되게끔 진작부터 편성을 따낸 퓨전사극이 미운새끼오리 「Mr. Child」의 활로를 닦아준 셈이 됐다. 퓨전사극, 세심하게 이르자면 액션활극의 전투 장면 촬영 중 주연배우 둘이 직접 말을 달리며 검을 겨루다 공교롭게 합이 어긋났다. 풀줄기도 베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모조 검 날이 허공을 갈랐다. 반동에 일순 균형을 잃은 둘은 그대로 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안전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현장의 여건상 사고 자체는 예사로웠으나 피해는 ‘부상투혼’따위의 머리말을 뽑을 기삿감에 그치질 않았다. 극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 둘은 각각 늑골 두 대와 천골이 나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대재앙이었다. 흙탕물이 튀어 사방에 얼룩으로 박혔다. 시쳇말로 ‘미드 퀄리티’를 표방했다며 홍보를 가장한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던 제작사와 방송사에 더해서 흠집이 난 채로 상품을 되돌려 받은 배우들의 소속사까지 하늘이 무너져라 암울한 곡소리를 뽑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송재는 다소간 안타까운 사고 소식에 묵념하는 비관계자일 뿐이었다. 무료한 신이 농간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하필이랄지. 마침이랄지. 비슷한 시기에 송재가 조연으로 분한 영화가 개봉을 해서 역대 최단기간최다관객동원 기록을 갈아치웠다. 필연적으로 버섯처럼 음지에서나 굴러다녀온 송재의 이름자도 직사광선이 눈 빠지도록 밝게 내리쬐는 곳으로 끌려나오게 됐다. ‘차송재’ 석자의 흔하지도 드물지도 않은 고유명사가 며칠 꾸준하게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을 노닐었다. 지레 소란을 떠는 축하인사를 한숨으로 챙기면서 나중 언젠가 사법고시 1차 합격자를 연기하게 된다면 지금의 감개를 참고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타일렀다. 곧 다른 주어를 취한 낭보가 떴다. 「Mr. Child」의 주연남우이자 여전한 인기아이돌 장연웅이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의 첫 주 판매량이 20만장을 넘어섰다. 여럿에게 호재였다. 한류신성 장연웅과 복병 차송재가 함께 탄 배 「Mr. Child」로 세간의 흥미가 묵직하게 쏠렸다. 엎어진 퓨전사극의 수습책을 강구하느라 골머리를 앓던 방송사가 「Mr. Child」 대체편성을 묘안으로 낙점할만한 배경이 열두 폭으로 깔렸다. 전개는 박진감 없이 달콤하게. 대타로 등 떠밀려 얼떨결에 타석에 들어선 「Mr. Child」는 미심쩍어하는 눈초리에 주눅 들지 않고 통렬한 홈런포를 쏴 올렸다. 결과, 감당해야하는 잡무가 여름철 초파리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날 줄 짐작도 못하고서 아무렴 최소한의 완성도는 챙기겠거니 당시는 흡족해하고 말았었는데.
계산 밖의 사소하고 번거로운 의무들은 요령껏 후미진 데 숨어있다 기회를 틈타서 쫓아 나왔다. 방송사 권력이 깡패라. 송재가 적잖은 무게로 발목을 붙든 부수적 책임에 시달리는 지금. 편성을 무르자고 덤비기에는 때가 한참이나 늦어버렸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지구력이 가진 바 재능 가운데 하나일까. 여전히 활기를 담뿍 머금은 음색으로 리포터는 인터뷰가 시작된 이래 제일로 유쾌한 이야길 꺼냈다. 마적소리에 홀린 시궁쥐의 행렬처럼 길이가 까마득했던 인터뷰가 마침내 끝자락을 드러냈다. 헛웃음이라도 터트리며 맞장구를 칠 기운이 모조리 고갈이 난 참이었다. 시청자 협심증 유발의 아이콘 서태헌이 아니라 연예인 차송재로 조명 아래에 서고 만 불편함을 견디느라 기력을 평소의 몇배로 소진했다. 태업의 변명이라 비아냥거림을 사도 쏴붙여 대거리할 여지가 없긴 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직업적 강박증. 「Mr. Child」 세계의 시계바늘이 도는 동안만은 되도록 예민한 만큼 총명하며 이기적이면서 자조적인 국민썅놈 서태헌으로써만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설 수 있길 바랐다. 촬영을 서둘러 속개할 수 있게끔 인터뷰를 매듭짓는 대가라면 최종 미션의 내용을 재고 따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물구나무를 서든 뒤로 몇 바퀴 재주를 넘든 없는 체면이 얼마 훼손되는 노릇이라도 개의치 않을 요량이었다. 송재는 잠자코 잇따를 지시를 기다렸다. 리포터가 손바닥 크기의 큐카드를 눈으로 훔쳐 훑고는 짐짓 뜸을 들였다. 눈두덩이 미묘하게 짓궂어진 본새가 영 께름칙했다.
“「Mr. Child」가 첫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잖습니까?”
아니라 정확하게는 ‘유년시절부터의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세 남녀의 성장통’이 기획의 핵심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사람마다 밑줄 긋는 자리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송재는 ‘성장통’에 무게를 둬 서태헌의 여백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주변머리 없이 참신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열악한 정황 조건에 송재의 자기반성은 깊어지지 못했다. 리포터가 팔을 연극적으로 내리그으며 대망의 최종 미션을 뱉어내놓았다.
“확실히 첫사랑은 남자 평생의 낭만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남자 분들 각자 본인의 리얼 첫사랑에게 한마디씩!”
그로부터 지목을 당한 남자 분들이라야 연웅과 송재 겨우 둘 뿐이었다. 리포터는 우선 가까이 앉은 연웅을 채근했다.
“진심으로 해주세요, 진심으로.”
주문 한번 까다로웠다.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고심을 있는 대로 내색하면서 퍽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연웅이 이윽고 자세를 바로 했다. 무심코 고개를 떨어뜨린 송재는 찰나 깍지를 껴 넓적다리 사이에 내려놓은 연웅의 손에 힘이 오르는 걸 보았다. 과연 대개의 남자에게 첫사랑은 평생의 낭만 따위가 아니라 불멸의 저주에 가까웠다. 난처한 웃음을 물기처럼 깨끗이 닦아내고 연웅은 돌연 정색을 빨았다.
“갖고 놀고 나서는 제자리에 돌려놓으세요, 다음부터 꼭!”
공격적으로 운을 떼놓더니만 채 말 두 마디를 못 넘겨 제풀에 웃음기를 섞어 버렸다. 독기가 말갛게 희석이 됐다. 직업정신 투철한 리포터는 웃어젖히는 중에도 예리하게 의표를 짚었다.
“아음, 존대하시는 거 보니 연상……혹시 그 유명한 옆집누나……?”
부러 음흉한 음조로 말꼬리를 이으려는 리포터를 연웅이 손사래를 쳐 훼방을 놨다. 터져 오르는 폭소 틈바구니에서 송재는 겉으로 무심하게 다음 차례를 준비했다.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 류다문. 열여덟의 류다문. 류다문. 무게감이 적당히 든 정갈한 이름이 명치에 얹혔다. 가슴께가 아릿했다. 되뇌기가 조심스러워 졌다. 철모르는 시절의 판타지라 얕잡고 허세를 부릴 수 없었다. 유치하게도, 아니 정말은 비참하게도 술기운에 젖어서 잠자리에 든 밤이면 얕은 꿈에 어김없이 녀석을 마주쳤다. 거지같은 결말에 호되게 뒤통수를 찍힐 줄 모르고, 열 여덟로 회귀한 꿈 속 차송재는 녀석의 단정한 등짝을 따라 걸으며 마냥 쪼개기밖에 못했다. 꿈이라고 빌어먹게 정직해놔서 멀티엔딩 따위는 취급을 않았는데. 무의식은 앞뒤 대중없이 과거사를 펼쳐놓다가도 마무리로 반드시 고교시절 마지막 날을 골랐다. 잔 눈발이 흩날리던 2월의 하루. 류다문을 돌려세우려 교복 재킷의 소맷부리를 우악스럽게 챘다가 애먼 소매단추 두 개만 쥐어뜯어 놨다. 핏대가 도드라진 주먹이 초라했다. 애써 매몰찬 녀석이 안쓰러워 차마 두 번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독감 앓듯 목이 따갑도록 메어서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차츰 거리를 늘려 작아지는 녀석을 멀거니 바라봤다. 안 돼, 라니 참으로 류다문다운 거절이라고 객쩍은 생각이나 하면서 섰던 데 그대로 무릎을 꺾고 앉았다. 머리를 처박은 양 무릎 사이로 너저분하게 풀어진 운동화 끈이 들여다보였다. 그제야 떠올랐다. 폐가 터져라 뛰어오던 중 끈을 밟고 넘어져 무르팍을 깨먹었었다. 다 큰 사내새끼가 울먹일 핑계거리로 대략 알맞았다. 얼얼한 무릎을 감싸 쥔 채 끅끅 울음을 삼키다보면 어느덧 잠에서 깨나 있었다. 누가 볼세라 축축하게 짓무른 눈가부터 손바닥으로 눌러 닦았는데 틀림없이 빈손에 덜그럭거리는 단추의 촉감이 거짓말처럼 생생했다. 도로 잠을 청하길 포기하고 속절없이 담배만 태우면서 중얼거렸던 혼잣말이 있다. 담배연기처럼 갈망에는 닿지도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져간 고백이 있었다. 따로 고민해서 찾을 필요가 없이 차송재가 첫사랑 류다문에게 건넬 말은 그뿐이었다.
마침맞게 리포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카메라 쪽으로 손짓을 냈다. 송재는 가만 빨간불을 넣은 카메라를 응시했다. 주목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과거를 뒤적여 류다문을 끄집어 낸 순간 차송재의 의향과 별개로 이미 드라마 홍보차원의 비즈니스만은 아니게 됐다. 자각하기 무섭게 사사로운 감정이 송재를 잠식해 들었다. 체온이 훅 내린 손을 주무르려다 소매의 고급 커프스단추에 피부를 긁혔다. 입안에 모래알이 굴러다녔다. 혀를 둘 데도 없이 온통 까끌했다. 목울대가 절로 달렸다. 다시금 뒤꿈치가 들썩댔다. 신사까진 멀었어도 애새끼 팔부능선은 진작 넘어선 줄로 알았건만. 이런 송재를 절대로 모를 고작 낡아빠진 첫사랑의 녀석 때문에.
“미안하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여태, 네 생각해서.”
앞서의 연웅이나 마찬가지로 송재도 푸스스 웃으며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속없는 마음이 멋대로 애틋해져서 도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걜 갖는 건 사랑이고 내가 갖는 건 도둑질라고 하고 싶나 본데. 욕심나서 뺏는 게 왜 악덕이지? 인정이니 의리니 개소리를 지껄여봐야 어차피 다들 파괴하고 약탈하면서 살아나가잖아. 나는 그걸 순리라고 불러. ……이해해? 현실을 긍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냉철한 궤변론자 서태헌이 이야기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악이 새하얀 입김으로 뿜어져 났다. 송재는 시험을 가까이 둔 모범생처럼 짧지 않은 대사를 여러 번 착실하게 곱씹었다. 강세와 끊어 읽는 포인트를 바꿔보기도, 어조를 달리해서 여상스럽게 또는 자조적으로 말해보기도 했다. 제작 형편이 뻔한 고로 분명 촉박하게 날려 적었을 대본에는 지문까지 낱낱이 소상하게 쓰여 있질 않았다. 미지의 영역을 차송재식으로 풀어나가는 학문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불평할 노릇만은 아니었는데. 마침 연웅의 소속사가 수완 좋게 그에 끼워 판 불량품이 하염없이 NG를 받아 송재에게 대기시간을 풍족하게 벌어주었다. 대본을 욕심껏 들이파고도 남았다. 감정이 말소된 연기를 펼쳐 사이코패스로 의심을 사는 여신 꿈나무에게 송재만큼은 유감을 품을 까닭이 없었다. 넘어간 대본 낱장의 구겨진 모서리를 정돈해서 읽던 쪽을 덮은 송재가 눈꺼풀을 나긋이 깔았다. 다시 바로 열렸을 때 그 눈은 겨울의 새벽녘처럼 서늘하며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룸미러에 Mr. Evil Child 서태헌의 메마른 눈시울이 한가득 비춰 들었다. 문유환에게로 향하는 서태헌의 비틀린 동경과 증오는 이를테면 유치. 흔들림을 감지했다면 비록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서슴없이 뽑아내는 게 옳았다. 버려질 때를 놓친 유치는 뿌리까지 시커멓게 썩어나 기형과 병증을 유발할 뿐이었다. 유환을 망치는데 급급해 스스로의 일부를 방치하고 종래는 성장을 포기함으로써 영영 완전한 어른일 수 없게 된 태헌이 웃었다.
“나와. 고은비. 나와서 말해. 이만큼 눈 감아줬으면 양심껏 나서서 밝혀야지 번거롭게 해 하길. 뭐 남자는 갈아치우고 싶은데 뺨 맞긴 무섭고 그런 건가. 그래. 그런 게 인간미라고도 하더라. 네 새 남자는. 아니 첫사랑이니까 예전 남자겠네. 아무튼. 네 말마따나 개새끼인 나한테 물려서 피 흘리기 싫었으면 애초에 그 저렴한 마음 간수를 잘 했어야 됐잖아. 피앙세 아가씨. 지금처럼 입술이나 씹으면서 문 뒤로 엿듣는 건 말야. 우리들 처음 만난 열두 살 때나 귀여운…….”
차체가 내지르는 육중한 신음이 대사를 끊어먹었다. 청량한 냉기가 내부로 들이닥쳤다. 활짝 열린 밴의 문짝 앞에 숫제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처럼 체격이 좋은 남자가 겨울 햇발을 등에 가득 이고 섰다. 남자의 정면으로 그늘이 짙게 졌지만 대강의 인상과 표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굵직한 선을 박력 있게 다뤄 그려낸 이목구비가 눈에 익다 못해 지겨웠다. 남자는 명백한 무례를 저질러놓고도 긴장감이 없이 서글서글한 웃음이나 터트렸다. 평소 겉치레를 부정하며 뻔뻔스러움이야말로 남자의 진정한 미덕이라 우겨온 물건다웠다. 모르는 사람들은 보통 쾌남 혹은 호인으로 그를 분류했지만 최측근들 사이에서 그는 고상한 은유로 태풍의 눈 까놓고 밝혀 지성을 갖춘 지랄견일 따름이었다. 덧붙여 송재 개인의 시점으로는 존경스러우나 닮자고 덤비긴 부담이 있는 멘토. 스스럼없이 밴 안에 발을 얹으며 은상이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여어. 국민개새끼.”
“틀려. 국민썅놈이야. 개새끼라고 하면 아버지까지 말린다고. 형은 그렇다 치고 백부께 면목 없어져 내가.”
“뭔 소리야. 내가 옛날부터 개새낀데. 우리 부친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시다. 멍멍.”
눈으로 훑어 차 내부를 기웃거린 은상이 자연스레 매니저 진우를 찾았다. 송재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어 은상을 말렸다. 의리로 편들어 농땡이를 눈감아준다고 여겼을까. 은상이 금세 사생활에서 사회생활로 기어를 바꿔 넣었다. 차송재의 친인척이 아니라 매니지먼트 팀장 차은상이 눈매를 가늘게 찢었다. 번거로워 대답을 음절단위로 자르려다 생각을 돌렸다. 융통성 없이 우직한 진우가 공연히 직무에 태만하기로 오해를 살까 봐 사정을 개략적으로 일렀다. 경호를 겸해 호랑이도 때려잡게 건장한 녀석이 엊그제부터 이따금 카랑카랑한 기침을 뱉어대고서 공연히 혼자 멋쩍어했다. 건강체질에 자부심을 가진 흔한 수컷에게 자기관리 범주의 일로 걱정하는 말은 않았는데. 오늘 아침쯤 해서는 울림에 장기가 바른 위치를 이탈하도록 기침이 거세어져 있을 뿐더러 열로 눈자위까지 벌겋기에 여유가 난 김을 놓치지 않고 종용해 병원에 보낸 참이었다. 수긍한 은상이 고개를 끄덕이다 무심결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퍼뜩 차내 난방에 생각이 미친 송재는 운전석 가까이로 상체를 일으켰다. 곱은 손가락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먹빛으로 죽었던 아이콘에 빨간불이 났다.
새끼가 아주. 타고난 통각이 원체 둔감해서 자연히 신변을 챙기는 데에도 무심해진 송재에게 은상이 새삼스럽게 질린 내색을 했다. 비슷한 맥락의 문제로 은상에게 타박을 맞은 경험이 횟수를 헤아리기가 무의미하리만치 많았다. 최근만 해도 그랬다. 극이 종반으로 치달음에 따라 서태헌은 벼랑으로 몰렸다. 동틀 무렵 하늘에 손톱자국으로 여리게 남은 달처럼 위태롭고 애잔한 처지가 됐다. 악역 필멸의 신파적 순리대로. 해가 찬연하게 빛을 뿌리는 해피엔딩의 세계에 서태헌이 설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서태헌으로써 송재는 식사를 끊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짧으나마 일생을 매달려온 가치관이 붕괴해가는 마당에 느긋하게 수저를 놀려 음식을 지분대기란 차라리 참선이었다. 식도락을 모르길 다행이라 고통도 곤욕도 견딜만한 선이었는데 사흘을 넘겨 단식이 이어지자 배부른 주위에서 발을 구르며 안달을 했다. 식습관이 고약하게 든 어린애의 부모처럼 애걸을 해서라도 먹이려다 당연하게 실패한 진우는 끝내 송재와의 약속을 어기고야 말았다. 본인에 따르면 최대 직위해제씩이나 각오한 숭고한 고자질이었다나. 송재는 밀고를 받고 식겁을 한 잔소리의 에미넴 은상으로부터 달팽이관이 마비되도록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뒤끝으로 서사시를 쓰는 남자를 상대로 반항은 단념했다. 마지못해 깨죽을 두 술 뜬 송재가 진우를 두고 열사라고 점잖게 책망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암적색 머플러를 풀며 은상이 다시금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히터도 안 돌릴 거면 뭐한다고 차에는 들어와 있냐고. 근성이라도 있어보이게 그냥 밖에서 얼어 죽지.”
“좀 전에 껐어. 입김 얼마나 나오는지 한번 본다고 그랬다.”
“너는 뭐 태릉 들어왔냐. 요령도 부리고 그래라 좀.”
“형한테 들키게 부리면 그게 요령이냐. 치밀하게 부려서 티가 안 날 뿐이야.”
지지 않고 대꾸하자 은상이 손바닥으로 송재의 뒤통수를 덮어 내리눌렀다.
“퍽이나.”
“어쩐 일이야, 근데.”
여태까지의 전적으로 따져 따로 특별한 목적이랄 게 없이 오다가다 들렀을 확률이 9할을 찍었다. 살갑지 않은 성격에 대놓고 반가워 환사는 못하고 정 없이 용건이나 캐물었는데. 사실 기습적으로 송재를 찾은 은상의 의중이란 아껴 몇 번을 재독한 책의 마지막 장처럼 빤히 읽혔다. 이를테면 차은상 방식의 관심표현과 배려였다. 차은상을 겪은 이라면 누구라도 확신할 터. 귀염성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동성의 피붙이를 우쭈쭈 성심으로 보살피리만치 은상의 성품이 섬세한 탓은 결코 아니었다. 은상이 직접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송재가 낯짝을 팔아 밥벌이를 하게 된 계기가 일단은 은상 본인에게서 비롯한 까닭이었다. 송재가 장난삼아라도 요구하거나 기대할리 없는 책임감을 은상은 알아서 뒤집어썼다. 물론 고리타분해 빠진 친가 쪽 어른이 사촌형제의 사이좋은 진로 이탈을 두고 ‘근묵자흑’의 예시로 들먹여 비난할 적에는 아무리 은상이라도 책임감만이 아니라 공경심이며 예우까지 깨끗이 걷어 치웠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사촌)형제는 용감하기는커녕 적당히 비겁했다. ‘피에 흐르는 광대본능’이라는 건들건들한 말대꾸로 권위의식이 주름으로 그려진 안면을 들이받기가 예사였다. 뒷목을 받쳐 잡는 어른에게 면목이 없지 말입니다, 하고 빠진 어투로 심드렁하게 지껄이는 송재와 죽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 잘리고 노는 시간 때우러 왔다 그래도 나 안 놀랜다.”
“왜 그러냐. 나 요새 노인네들이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고. 그렇게 순할 수가 없어.”
“글쎄. 저번 달에 봤을 땐가. 박이사가 나 붙잡고 요로결석 다 형 때문이라고 불경기도 어쩌면 형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거의 울먹이던데.”
“꼰대. 나 좋아하면서 수줍어하긴.”
한바탕 박이사의 비뚤어진 애정표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은상이 품을 뒤적였다. 맨입이 깔깔할 때가 되기는 했다. 은상은 흡사 만년필처럼 형태가 유연하게 빠진 전자담배를 꺼내어 한 모금 빨았다. 하루에 담배 반 갑을 족히 태우던 담배인삼공사의 호구에게 아내의 임신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다만 갑질이 병인 관계자와 접촉해 이빨을 터는 게 맡은 바 소임이라. 밑지는 말을 떼고 섞을 매개로 유용한 기호품을 단번에 끊기까지는 무리가 있었다. 형수와 딸림화음처럼 머리를 바짝 맞대고 의논한 끝에 담뱃재 특유의 매캐하고 기름진 오염의 냄새라도 몸에서 빼기로 했단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비틀어 빈 데에다 무향의 연기를 내쏜 은상이 짓궂은 눈웃음을 지었다. 송재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은상은 담배연기와 눈웃음을 싫은 소리의 예고로 써먹어 버릇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해은이가.”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한숨이 났다. 쌓이고 며칠이 지나 하릴없이 볕에 녹아내린 눈 위로 무심코 발을 디뎠다. 불쾌한 질척거림이 감각을 적셨다. 그런 기분이었다.
“나한테로 연락 넣었다. 너 만나게 판 좀 깔아 달래.”
“그 지구력으로 마라톤이나 뛰면 좋겠다. 젠장. 태릉엔 걜 보내야 돼.”
“야 내가 까놓고 하는 얘긴데 서해은이 정도면 호기심에라도 만나볼만 하지 않아?”
국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눈치 없는 척 은상이 무작정 숟가락을 담가 간이라도 보자고 들었다.
“약 팔지 마라, 형. 나한테 안 먹힌다.”
“새끼……너, 혹시 연예스쿠프 인터뷰서 말한 첫사랑인지 뭔지 때문에 그러냐? 미안한 걔.”
“……아냐.”
박자가 늦었다. 미처 치우지를 못하고 팔 뻗으면 손닿는 가까운 자리에 그대로 놓아둔 이름이 의식 한가운데로 치고 들어왔다. 저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야 있었어도 은상까지 납득시키긴 무리였다.
“야 설득력 있게 좀. 정말로 첫사랑이 문제야? 첫사랑한테 엿 먹어서 그래?”
“뭘 또.”
“이 참에 솔직하게 까봐. 아니, 예전부터 이해가 안가는 게. 좋다고 하는 여자가 없어 너는, 어떻게 된 새끼가.”
“형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나. 내 생겨먹은 성격이나.”
제풀에 혀가 꼬였다. 말을 꺼내서 끊기까지의 어조에 크게 낙차가 졌다. 자책조로 위아래 어금니를 가볍게 물었다 놨다. 대충 얼버무리긴 이미 틀렸다.
노는 손으로 턱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은상에게서는 더 이상의 다그침이 없었다. 그는 품이 넉넉한 겉옷에 주름이 겹겹이 지도록 팔짱을 죄어 끼고 뻐끔 담배연기나 흘렸다. 이따금 주문이라도 거는 모양으로 결혼반지를 두어 바퀴 돌리기도 했다. 검질기면서 압박적인 태세만으로는 숫제 베테랑 사채업차를 찜 쪄 먹었다. 날 새도록 기다려서라도 납득할만한 해명을 듣겠노라는 확고한 의지가 송재에게 끼쳐왔다. 송재가 무감한 표정을 깨트렸다. 여자에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를 의혹의 과녁으로 삼고자 하는 호사가들이 적지 않았다. 어차피 대중과 언론의 자극적인 입맛에 맞춰 왜곡되고 말 자기변호를 소신껏 때려치우면서 편견과 추문의 화살꽂이 노릇을 감수하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한편 여타의 이들이야 아무렇든 은상의 경우만큼은 청렴하다 못해 황폐한 송재의 사생활을 안쓰럽게 여길 뿐임을 알고 있었다. 저속한 재미를 추구하는 관심이나 우월감을 충족하려는 간섭 따위가 아니었다. 결국 송재도 바지 뒤춤을 주섬주섬 더듬어 볼품없이 우그러진 담뱃갑을 찾았다. 나무껍질처럼 마르고 터진 입술에 필터를 물렸다. 알싸한 박하향이 코끝까지 번졌다. 예비 아빠의 사정을 살펴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송재는 숨을 깊게 삼켰다.
“……사이에 뭐 대단한 게 있었던 건 정말 아니고. 류다문이, 첫사랑 걔가 나한테 1번 문제 같은 거라 그래, 그냥.”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앞뒤 없이 듣기에는 참으로 얼빠진 소리였다. 입술에 앉았던 필터가 부드럽게 뭉개졌다.
중학생이 되어 치른 첫 번째 수학시험에서 37점이라는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다. 앞자리에 8이하의 숫자를 박은 점수가 몹시 눈에 설었지만 전산처리상의 오류나 되먹지 못한 장난질을 의심할 수 없었다. 송재는 틀림없이 37점으로 치환될 만큼만 문제를 풀어냈다. 온당한 결과였다. 좀처럼 친근감이 생기지 않는 점수 옆으로 바짝 동의와 확인을 뜻하는 서명을 갈겼다. 햇살이 뒷목을 간질였다. 책상 발걸이를 가속페달처럼 눌러 밟았다. 목초지에 풀어놓고 양을 치듯 방임형 교육관을 내세운 부모님이라 뒷날 야단맞을 걱정으로 전전긍긍하지는 않아도 됐다. 다만 알이 두꺼운 금테 안경을 항상 콧등 중간쯤에 걸어 놓는 엄격한 눈초리의 수학교사가 야속할 뿐이었다. 시험문제의 난이도조절이란 출제교사 고유권한의 영역으로써 일개 학생이 배 놔 달라, 감 놔 달라, 턱짓으로 참견하는 편이 주제넘긴 했는데. 아무렴 괴팍하기로 교내에서 입지가 독보적이어도 그렇지 하필 1번 문제를 고난이도로 뽑은 악취미만큼은 존중해주기가 어려웠다. 그래. 그러니까 1번 문제를 웬만해선 풀 수 없도록 무작스럽게 얽어놓기란 반칙에 더해 승부조작이나 다름 아니었다. 최소한 차송재에게는 그랬다. 해결하기 버거운 1번 문제를 억지로 나중으로 제쳐두고는 도무지 다음 순번의 문제들에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기벽인지. 집착인지. 미련인지. 하다못해 탐구욕인지. 매달려야 답도 안 날 1번 문제가 돌부리처럼 가로걸려서 한 발이라도 나아가려는 마음을 자꾸만 자빠트렸다. 밉살스런 초침소리에 쫓겨 다른 문제로 펜을 끌어봐야 마음이 닳기밖에 안 했다. 열여덟 살 송재에게 떨어진 문제적 첫사랑 류다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투르게 녀석의 마음 가장자리나 맴돌았을 뿐 소망하던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마구 엉킨 녀석의 마음을 풀지 못했다. 아버지를 빼쏜 외골수, 열여덟의 한심한 소년 차송재는 시계바늘을 한 자리에 멈춰놓은 채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1번 문제 류다문에서 헤매고 있었다. 시간이 무릎까지 수북이 쌓이도록.
스물여덟의 겨울을 나는 청년 차송재가 희미하게 웃었다. 과외라도 붙이던가 해야지, 뒀다간 마냥 못 풀겠네, 은상이 어울리지 않게 다감한 음조로 정곡을 건드렸다. 면구해서 함부로 던진 눈길이 문득 대본의 맨 겉장 위 멋 부린 폰트로 적힌 「Mr. Child」에 머물렀다. 정말은 저 모순적인 타이틀에 홀렸다. 지레 뜨끔해서 집어든 다음에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겨울이 스쳐 코끝이 시큰했다. 서태헌만이 아니라. 설익은 연정을 열여덟에 내려둔 채 나머지만 어른으로 데려온 스스로 또한 Mr. Child라고 송재는 새삼 자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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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내 첫사랑 얘기가 엄청 흔했어서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싶기도 했고
이래저래 일만 벌려놓고 토낀 적이 많아서 올리는 것도 망설였습니다만
쓰고 싶어서 썼으니까! 하면서 그냥 슬그머니 얹어놓습니다.
제목이 이따우인건 습관이에요.
제목이 이따우라니요~~~ 저는 버져비터님 제목 너무 센스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