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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포츠센터에 용무가 있는 사촌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같이 백화점에 나왔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냉면집에 들른 참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순간 낯선 남자와 함께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진이 선우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의외의 장소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니, 친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선우가 반짝 손바닥을 드는 순간 진이 냉큼 시선을 거두고는 못 본 척 시침을 뚝 떼었다. 어라, 하며 바라보는 사이 동행인과 뭔가 쑥덕거리며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진이 자리 안내를 받다가 말고 밖으로 나갔다.
“어, 뭐야.”
선우가 들고 있던 손을 도로 내려놓으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 안내를 받다가 말고 식당을 나가버리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아는 사람이에요?”
총총히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덩달아 쳐다보고 있던 서정이 그에게 물었다.
“네. 스포츠센터 요가 코친데, 그냥 나가버리네요.”
“자리가 없었나?”
서정이 새삼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식사 시간이라 붐비기는 했지만 빈자리가 없는 정도는 아니다.
“아니요. 내가 여기 있는 거 보고 나간 것 같아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우가 헛웃음을 쳤다.
“어머, 왜요?”
“모르겠어요. 인사하려고 손을 드니까 팩하니 고개 돌리고는 그냥 나가버리는데요.”
“설마요. 혹시 그쪽에선 도련님을 못 본 거 아닐까요?”
서정이 희한한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동석해 먹자고 할 사이도 아니고 기껏해야 인사 한 마디 나누는 게 전부일 텐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고 무서운 일이라고 줄행랑을 치는 건지.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딱 떠올랐다.
“그건 아니에요. 나랑 시선 마주치니까 깜짝 놀라던데요.”
“왜 그랬지?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원래 좀 별난 데가 있는 사람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대강 결론을 짓고 다른 얘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에게 부담을 느낄만한 행동, 아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데 왜 저리 유난을 떨며 밀어내려는 걸까.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깨어나 보니 창밖으로 어스름이 깔렸다. 선우는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하였다. 7시 10분. 습관적으로 프로야구 실시간 방송을 켜서 KJ 드래곤즈의 경기 진행 상황을 확인하였다. 8회 초, KJ가 3대 1로 리드 중이다. 안도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진동을 하였다.
“이게 무슨 냄새예요?”
주방을 서성거리며 서정을 돕고 있던 동우가 그의 얼굴에 대고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강선우, 장 좀 봤다고 뻗었냐?”
“그러게 말이야. 차라리 러닝을 2시간 뛰고 말지, 진짜 피곤하네.”
“너 운동 쉬더니 체력이 너무 떨어진 거 아니야?”
“오랜만에 사람 많은 데서 시달려서 그럴 거예요. 동생한테 자기가 할 일 미루고 큰소리치는 것 좀 봐. 당신도 백화점 한 번 갔다 오면 녹초 되잖아.”
주방에 있던 서정이 선우의 역성을 들며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낮잠은 안 잤다.”
관심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사촌 형의 낯선 모습에 선우는 몰래 웃음을 씹어 삼켰다.
“형수님, 동우 형이 요리 하는 데 도움은 좀 돼요? 방해 한 건 아니죠?”
“차라리 잠을 자라는데도 기어이 말 안 듣고 방해 중이에요.”
두 사람이 합심해서 몰아세우자 동우가 허탈한 웃음으로 항복 선언을 하였다. 희희낙락 주방으로 들어선 선우의 입이 일순 떡 벌어졌다. 조촐하던 식탁이 화려한 수라상으로 완벽 변신하였다. 김치잡채에 갈비구이, 국물이 자작자작한 김치찌개, 만날 먹는 배추김치조차 서정의 손길이 닿으니 품위 있고 정갈한 모양새로 탈바꿈하였다.
“우와, 형수님! 그새 이렇게 요리를 다 만드신 거예요? 요리가 아니라 요술을 부리신 것 같은데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공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쇼핑하러 돌아다닌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는 건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별건 없어요. 갈비구이 좋아하신대서 대충 흉내만 내봤는데 맛이 있을지는 몰라요.”
서정의 얼굴에 쑥스러운 홍조가 피었다.
“일단 모양부터가 달라요. 그동안 내가 만든 음식 먹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다 나네요.”
우렁찬 감탄에 동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 많이 만들었어.”
“근데 왜 형이 생색을 내지? 만든 건 형수님인데?”
“내 결혼기념일 날인데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니까.”
짐짓 서러운 목소리에 동우를 제외한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와인이 대세인 시대지만 선우는 역시 맥주가 반주로는 최고였다. 양식, 한식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음식에 다 잘 어울리는데다 물을 많이 마시는 그와는 최고의 궁합이었다. 한창 기분 좋게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식탁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갑자기 문자가 빗발쳤다.
“잠깐만요.”
선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문자 내용을 대강 확인하였다.
“오늘 경기 이겼다고 문자 보내는 거예요. 아이고, 이 모자란 놈들. 간만에 경기 이기고 좋단다.”
입으로는 신랄한 척 굴지만 이겼다는 소식을 전하는 선우의 표정이 환했다.
“너 허리는 좀 어때?”
동우가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물었다.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면 행여 그의 마음에 부담이 될까봐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가장하는 것이다. 허리 부상은 어때요? 길거리에서 사인을 청하는 사람들은 안부 인사처럼 건네는 말이지만 막상 가족들에게는 아플까봐 차마 건드리지 못 하는 상처처럼 예민한 문제였다.
“뭐, 아직은 그냥 그래.”
“너 우 코치한테 요가 개인 강습 받는다며. 잘 가르치는 것 같아?”
냉면집에서 쌩하니 시선을 피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묘한 반감이 피어올랐다.
“아직은 모르지. 일단 믿고 배우는 거야. 요가가 부작용 있는 수술이나 약물도 아니고 별 부담 없으니까.”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식당에서 봤던 그 코치한테 배우는 거예요?”
“네.”
대답과 동시에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피식, 묘한 웃음을 나누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동우가 궁금한 얼굴로 묻자 서정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 뭐 별일은 아니야. 그 요가 코치라는 분이 식당으로 들어오다가 도련님이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나가버리더래. 희한하지?”
“마주치기 곤란한 상황이었겠지,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싱겁게 반응을 하니, 본의 아니게 얘기를 전한 형수가 무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선우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하였다.
“아니, 전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어. 형수님하고 같이 앉아 있는데, 고개를 딱 돌리니까 우 코치가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더라고. 그런데 내가 있는 걸 딱 보는 순간 갑자기 옆에 서 있던 사람한테 뭐라 뭐라 얘기하더니, 테이블 안내를 받다가 말고 식당을 나가버리더라니까. 그러니 희한하다고 하지.”
선우의 목소리에서 열띤 흥분이 묻어났다. 상황을 파악한 동우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그래. 황당했겠다.
“근데 우 코치 뽑은 게 형이라면서? 그럼 우 코치에 대해서 잘 알겠네.”“면접 때 잠깐 얘기 좀 나눈 건데, 뭐.”
“면접할 때 이상한 점 전혀 못 느꼈어?”
동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던데.”
똑 부러진다는 소리에 선우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날카롭게 부러져서 조그만 스쳐도 피가 날 지경이니 문제다. “너무 똑 부러지시지. 수업 시간에 어떻게 치유 요가를 하게 된 건지, 이력에 대해서 물었다가 쫓겨날 뻔 했어.”
“어머, 왜요?”
서정이 물었다.
“수업 시간엔 수업만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과외 선생도 학력을 묻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수업과 전혀 연관 없는 사담은 아니다, 그랬죠. 내 입장에서 사적인 관심으로 오해 받긴 싫었거든요.”
“그런데요?”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서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음을 재촉했다.
“자기가 못 미더우면 수업을 안 들어도 된대요.”
“어머, 진짜요?”
못 믿겨하는 서정과는 달리 동우가 돌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넌 뭐랬어?”
기대하는 얼굴에 대고 선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래기는. 그냥 수업 시작합시다, 그랬지.”
“바로 깨갱한 거야?”
“거기서 수업 안 하겠다고 일어서면 누가 잘 했다고 상주나?”
“잘 했다.”
한바탕 크게 웃고 났더니 찜찜했던 기분이 어느새 날아갔다.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왔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아파트 1층 상가에 있는 호프집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조용한 단지를 쩌렁하게 울렸다. 선우는 알록달록한 상가 간판들을 가로등 삼아 상철의 집이 있는 오피스텔을 향해 걸었다. 볼을 스쳐가는 봄바람이 달콤한 맛이 날 것처럼 보드라웠다. 허리만 괜찮았다면 지금 이 순간을 한 점 거리낌 없이 만끽할 수 있을 텐데, 마음 한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불안감이 봄의 낭만을 방해하였다.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이 온다. 운동량이 가장 많은 투수들이 질색을 하는 무더위지만, 선우는 찬바람이 부는 가을보다는 차라리 여름이 나았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 허리가 나아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자그마한 놀이터를 지나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정해 보이는 커플의 뒷모습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짓던 선우의 얼굴이 이내 굳었다. 낯익은 뒷모습은 분명히 진이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백화점에서도 보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단지 내 오피스텔에 스포츠센터 강사들이 제법 살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우 코치도 거기에 포함 되는 줄은 몰랐다. 걸음을 늦추어 저들이 먼저 타고 간 다음에 갈까,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이번에도 백화점에서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선우는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남자를 지나쳐 진의 옆에 자연스럽게 섰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의 표정이 뜨악하게 굳었다.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안 보는 척하면서 선우를 쳐다보았다. 미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맞다. 오빠, 나 잠깐 편의점에 들러야 된다. 깜빡 잊고 안 산 게 있어.”
긴급구호 약품이라도 잊은 것처럼 진이 쌩하니 걸음부터 옮겼다.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뭔데 그래? 연희야, 기다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던 선우가 놀란 눈을 치켜떴다.
연희라고? 우진, 외자예요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설마 가명을 쓰면서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건가. 순간 상철에게 들었던 여러 가지 뜬소문들이 떠오르며, 지저분한 상상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뭐 그리 숨길 일이 많아서, 인사 한 마디 못 하고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건지. 진이 치는 유별난 바리케이드가 갑자기 너무 비겁하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댓글 '3'
문자받고 좋아하는 거 보니까 선우가 얼렁 그라운드로 돌아갔음 좋겠다는 생각이 마구
(아직은 우코치랑 썸씽이 없어서 안되지만)
그나저나 이름이 달랐나보네요!
선우가 딱 연희라는 이름을 가명으로 생각하는 점이 재미있어요 선우는 배신감 비슷한 걸 느낀 모양이지만
왜 아는 사람이 이름이 두개면 뭔가 더 생각할 여지가 있을 법도 한데 본인이 아는 <우진>은 일단 진짜로 놓고 생각하는 게.
마지막에 비겁하고 시시하다는 문장은 참 ㅋㅋㅋ 운동선수다워서 웃을 부분이 아닌데 좀 웃었어요
뭐 이래저래 스포츠계 스캔들이 많아도 정공이랄까, 페어플레이랄까, 운동계 특유의 정직함 같은 건 역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잔꾀같은 거 안 부리는.
그나저나 '진'에 비해서 '연희'는 좀더 여성스럽고 유한 느낌인데 우코치님 사연이 점점 궁금해집니다!
오랜만에 들렀는데, 안 읽은 글이 2편이나 있어서 어찌나 행복했는지요~~ 늘 사람냄새..따뜻한 느낌이 넘치는 리앙님 글 좋아라하는데요..진이,,연희가 마음문 열 그날까지, 선우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