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4.

“선우 씨, 요가 배운다면서요?”11시 반 태보 수업을 마친 이윤희 강사가 러닝머신을 하고 있는 선우에게 다가왔다. 어깨와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탱크탑에 하체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타이즈 차림의 그녀가 나타나자 평일 낮 무미건조하게 운동에 전념하던 남자 회원들의 시선이 한군데로 쏠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선우가 러닝머신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요가실에서 한다면서요. 다들 알던데요, 뭐. 그래서 효과는 좀 있어요?”
“어제 한 번 했어요.”
싱거운 대답에 윤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러닝머신 팔걸이에 기대어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바람에 탱크탑 위로 가슴이 비어져 나올 것처럼 봉긋 솟았다. 애기 머리통만한 근육을 팔뚝에 매달고 거울 앞에 서 있는 남자들한테 보이는 과시욕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나도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쑤시는데, 효과 있으면 같이 좀 배워요.”
정말로 허리가 아파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로 알았다.
“그건 근육통이에요. 파스 한 장 붙이면 나을 거예요.”
선우가 빙글거리며 놀리자 윤희가 발끈하며 달려들었다.
“오래 됐어요. 고질병이라구요. 파스 붙여서 될 게 아니에요.”
“수업할 때 허리 돌리는 거 보면 파스도 아까울 지경이던데요.”
윤희가 싫지 않은 표정으로 핏, 웃으며 눈을 흘겼다.
“됐어요. 같이 배우기 싫으니까 괜히.”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선우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에 희로애락을 낱낱이 드러내는 솔직담백한 여자와 같이 수업을 하면 활기차고 재미있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에게 요가는 즐기려 하는 운동이 아니라 살기 위해 붙잡고 있는 유일한 구명줄이나 마찬가지다. 허튼 데 한눈 팔 수 있는 여유가 없다.
-하루에 1시간 이상, 허리를 쭉 펴고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걸으세요.
어제 요가 선생이 했던 말을 기억하며 묵묵히 걷기에 전념하고 있을 때 불쑥 윤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근데요, 우 코치랑 둘이서 수업하면 답답하지 않아요?”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 것 같아 선우는 내심 웃음이 지어졌다. 수업 외에 다른 얘기를 하면 요가실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우 코치의 수업 태도가 경직된 것은 사실이었다.
“왜요. 집중되고 좋은데요.”
윤희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우, 나 같으면 우 코치랑 단 둘이 한 시간도 못 버틸 것 같아요. 말을 안 할 거면 남의 말에 맞장구라도 잘 치던가. 무슨 인형도 아니고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무튼 사람이 좀 음침해요. 강사들 회식도 잘 안 나오고, 누구한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도 못 봤어요. 자기 수업만 딱 마치고 사부작 빠져 나가니까, 우 코치하고는 인사할 일도 거의 없다니까요.”
몇 시에 오든 수업은 정해진 시간에 시작돼서 끝이 나니, 지각하면 선우만 손해라던 그녀의 칼 같은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공과 사를 잘 긋는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원래 성격이 좀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편인 모양이다. 별로 첨언할 얘기도 없고 해서 선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싱거운 반응을 우 코치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이고 윤희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우 코치 얼굴만 봐도 좋죠? 하여간에 남자들이란. 그렇지만 우 코치한테 관심 가져봐야 소용없어요. 임자 있는 몸이니까.”
“결혼 했어요?”
선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과 우 코치라니, 쌍화차에 얼음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뇨. 애인이 있다고요.”
선우가 김새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에이, 난 또. 요즘 시대에 누가 남자 친구한테 임자라는 표현을 써요.”
“보통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죠.”
“이럴 때 유명한 말이 있죠.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는 건 아니다.”
별 뜻 없이 이죽거리는 소리에 윤희가 저 혼자 발끈하였다.
“평범한 골키퍼가 아니에요. 비주얼이 훌륭한, 대학 병원 의사라구요.”
인사도 잘 안 하고 내뺀다는 사람이 자기 남자 친구를 소개시켜줬을 리는 없을 텐데 용케도 외모에 약력까지도 꿰고 있었다.
“남의 애인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노상 붙어 다니니까 그렇죠. 저번 주말에도 마트에서 둘이 장보고 있던데요. 우 코치도 애인 앞에서는 평범한 여자더라고요. 생글생글 잘만 웃던데요.”
윤희가 샐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내심 무심한 바위처럼 보이는 여자가 애인 옆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아무튼 평범한 골키퍼는 아니라고요.”
윤희가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다.
“제 아무리 철벽 골키퍼라도 모든 골을 다 막는 건 아니에요.”
억지로 강요하는 분위기에 괜히 삐딱해져서는 선우가 반박을 위한 반박을 하였다.
“그러다 아웃 돼요.”
모호한 소리에 선우가 눈초리를 찌푸리며 물었다.
“아웃?”
“개인 수업 못 하게 된다고요.”
“에이, 설마!”
선우가 황당한 감탄사를 내뱉자 윤희가 쌍심지를 켜며 달려들었다.
“우 코치가 왜 저녁 타임 하다가 오전타임으로 옮겼는데요. 자기한테 관심 보이는 남자 회원들 피해서 그런 거예요. 남자 회원들하고 엮일까봐 개인 강습도 안 해요. 선우 씨는 본부장님 덕분에 특별히 받을 수 있었던 거라고요.”
헬스장에 소속된 코치가 남자 회원과 일대일 강습을 피하려고 개인 강습을 안 한다니,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어이구, 무서워라.”
건성으로 내뱉는 소리에 윤희의 얼굴이 발끈 달아올랐다.
“어, 자신만만하다 그거죠?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오늘 수업 끝나고 우 코치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보세요. 무시 당한다에 만원 걸게요. 꼭 물어봐요. 알았죠?”
내가 왜 그런 내기를 해야 하냐고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윤희가 쌩하니 등을 돌리고 헬스장을 빠져나갔다. 요가 수업까지는 아직 30분 전. 관심을 보이는 순간 수업에서 내쫓는다는 그 대단하신 분은 요가실에서 한숨 푹 자고 있을 것이다.

“오른쪽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상체를 비트세요.”
이번에도 예외 없이 오른쪽 방향이다. 스트레칭을 많이 받아왔지만 이렇게 한쪽으로만 편향되게 하는 적은 처음이다.


“계속 오른쪽으로만 운동을 하나요?”
선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물었다.
“당분간 그럴 거예요. 뭉쳐 있는 왼쪽 근육을 풀어주는 게 급선무라서.”
차분한 표정, 낮게 울리는 깊은 목소리, 적은 말 수. 진이 하는 말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신뢰감이 느껴졌다. 타인에게 신뢰를 갖게 하려면 말을 하는 사람이 확신을 갖고 있어야 가능할 터. 선우는 이제 고작 이십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어떻게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요가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는지, 약력이 궁금해졌다.
“의학 쪽으로 따로 공부를 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치료 요가를 하게 되셨어요? 부상 원인을 파악해서 그에 맞는 요가 동작을 접목한다는 게 보통 내공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실제로 효과가 굉장히 좋은 걸로 알고 있고요.”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치료 요가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못 돼요. 특별히 전문적인 공부를 한 것도 없고요. 그저 타고난 감각이 남들보다 좋은가보다, 짐작할 뿐이에요.”
담담한 답변에 선우는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근거 없는 감에 의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려서.
“이제 수업할게요.”
더 이상은 말을 걸지 말라는 엄포처럼 느껴져서 선우는 순간 황당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높게 벽을 치는 것인지, 의아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입에서 냄새 안 나요?”
불편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하고 싶지 않아서 선우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 이미 수업 모드를 발동하고 있는 진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니요. 못 느꼈어요.”
진지한 대답에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 말고 코치님.”
“저요?”
침착하던 진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하루 종일 그렇게 말을 안 하면 입에서 냄새 안 나냐고요.”
선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진은 농담을 받아줄 의향이 전혀 없는 표정으로 썰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웃음기 없는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요가실 안의 공기가 썰렁하게 가라앉았다.
“수업 시간에는 수업만 했으면 합니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결계의 선을 또렷하게 그어놓았다.
“말이 너무 없으셔서 농담으로 한 말이었어요. 혹시 마음 상했으면 기분 푸세요.”
“아뇨, 기분이 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수업 시간에는 수업만 하자는 얘기였어요. 굳이 개인적인 얘기는 할 필요도 없고, 솔직히 불편해서요.”
경력에 대해 묻는 것을 개인적인 관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순간 이 코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관심을 보이는 순간 수업에서 아웃된다는.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에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전 그냥 수강생으로서 코치님의 이력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과외를 한다고 치면 과외 선생님의 학력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처럼, 그런 호기심 말이에요. 그게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제가 못 미더우시면 수업을 안 하셔도 돼요.”
전혀 예상치도 못 한 말에 선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고작 이런 정도의 트러블로 수업을 듣지 말라는 얘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선우의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그럽시다, 하며 깔끔하게 끝내버리고 말까. 아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물며 코치의 경력을 꼭 알아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와 가까이 지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입술 꾹 다물고 수업만 하면 그뿐이다.
“네, 알겠습니다. 수업 합시다.”
선우가 반쯤 체념하는 심정으로 한 발 물러섰다.
“다리 앞으로 쭉 펴세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진이 수업을 시작하였다. 뭐랄까, 어지간해서는 여자에게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차올랐다.
얄밉다!


댓글 '2'

버져비터

2012.11.06 23:24:56

말도는 건 역시나 무서운 것 같아요

저런식으로 악의없이(요기 경우엔 아주 없지는 않은 거 같지만) 와전되는 거겠죠

마지막에 우코치를 얄미워하는 게 되게 좋지 말입니다

얄밉다!가 이렇게 팍 이해가 될 줄이야 ㅋㅋㅋ

뭐랄까 저렇게 확 선긋기 당하면 엄청 마이너스적으로 못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얄밉다가 되는 게 되게 좋았어요

신기한게 나의 공주님 인물들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아도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져요 히힣

핑키

2013.01.16 17:58:34

진의 비밀스런 과거가 넘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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