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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말없이 자신이 건넨 이혼합의서를 바라보고 있는 예석을 바라보았다. 정식으로 얼굴을 맞댄 건 거의 일 년 만이었다.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그를 보니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 귀화가 확정되지 않았잖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이혼서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예석이 입을 열었다. 건조하고 아무 느낌이 없는 말투였다. 단순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그건 제 문제입니다.”
나른하기까지 했던 예석이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한국을 떠나리라. 저 남자를 더 이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두자. 자신에게 동정심 외의 어떤 감정도 없는 그를 바라보는 건 무척 힘이 든 일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3년, 그와 만난 건 한 손으로 꼽힐 정도였지만 그녀는 그 시간들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그건 목마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소금물과 같은 거였다. 마실 수밖에 없지만 곧 다시 목이 말라왔다. 그래서 다시 한 모금 소금물을 마시면 아주 잠깐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곧 더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찾아오는 거였다.
그녀의 검은 눈이 질끈 감긴다. 차갑기만 한 예석의 얼굴이 눈부셨다. 저 얼굴을 보면 욕심이 생겼다. 이대로 영영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픈 욕심.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처음부터 차가운 저 남자가 그런 제안을 했던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일을 바로잡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지금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면, 그 생각만으로 다시 한 번 숨이 막혀 왔지만 그녀는 그 한숨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리라. 눈을 뜨면 다시 고달픈 일상이 시작된다고 해도, 이제는 눈을 떠야할 때였다.
“밥은 먹었나?”
생각에 잠겨 먼 눈을 했던 크리스의 시선이 천천히 입을 여는 예석에게로 가 닿았다. 지금도 잊지 못할 예석의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밥은 먹었나?”
그녀가 깨어났을 때 처음 들려온 목소리는 굵직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굉장히 남자답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 거기에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주는 느낌은 이질적이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어.”
예의상 발언이었겠지. 그가 실은 자신이 식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성식과 그녀는 혼인신고가 채 되어있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불법체류라는 상황에 처하게 될 형편이라는 것도. 또한 성식과의 결혼을 깰 경우엔 선불로 받은 천 만원이라는 돈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다시 성식에게 돌아가고 싶냐, 할 때 그녀는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코앞에 기다리는 게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 한 발자욱을 떼고 있는 사형수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예석은 마치 저승사자와 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라 예석이 무섭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기도 했다.
“결혼을 해야 해.”
-네?
뜻밖에 말이었기에 크리스의 반응은 조금 느린 것이었다. 크리스는 검은 눈썹을 깜빡, 깜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던져진 상황에서 벗어날 동아줄이 되어줄게, 내가. 대신 당신은 내가 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주는 건 어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걸요.
“당신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아니 떠날 수 없다고 들었지. 내가 그 남자에게 돌려줄 천 만원을 줄게. 지금 당신 상황이 꽤 곤란해졌어.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본국으로 돌아가야할지도 몰라. 지금 당장.
예석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차피 결혼이라는 거 할 생각도 없었으니, 잘 하면 효도 한 번 하는 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굳게 다짐했던 마음도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하는 결혼이라. 억지로이기도 했지만, 아니기도 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가치의 문제이고. 그는 사라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또한 그는 절대 결혼 따윈 하지 않겠노라 마음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진짜가 아니라면, 법적으로만이라면, 그가 결혼한 것과 하지 않은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그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생각이었다. ‘오빠가 위장결혼해 주는 건 어때?’ 하는 사라의 엄청나게 당황스런 발언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어지는 견수의 얼굴은 둘째 치고, 그건 그가 허락할 수 없었다. 사라. 그 바보 같은 아이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하나도 모르고 내뱉고 있었다. 위장결혼이라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런 건 자신 같은 사람에게 어울렸다. 사랑이 필요하지도, 사랑을 원하지도 않는 자신 같은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위장결혼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사라라는 여자는. 다만 사라에게 이 여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지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20대 초반의 치기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준다고 믿고 싶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녀에게 남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사랑하는 바보 같은 사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게 어떤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지. 다만 닥친 상황에 당황한 채 그런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었다.
그 바보 같은 생각을 실행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마, 그녀도 하지 못했으리라.
-장난하지 마세요.
심한 장난이었다. 크리스의 검은 눈동자에 모멸감이 드리운다. 차라리 사라의 곁에서 꺼져버리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눈앞의 남자가 사라를 좋아한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저런 눈빛이었다. 무언가 골칫거리를 떠안은 사람처럼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저 별 볼 일 없는 여자애 때문에 네가 얼굴을 이렇게 망쳐놓았다는 거야? 뭐, 친구? 박사라. 넌 네가 가진 가치가 얼마나 되는 줄 정말 모르는 거야? 네게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잊었어? 네가 흘린 수많은 땀들이 이런 작은 일 하나하나에 흔들린다는 걸 정말 몰라? 그런데 서견수와의 스캔들은 둘째 치고라도 얼굴에 그런 상처까지 만들어와서는 지금 잘 했다는 거니? 지금 제정신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분노는 강력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쳤으니까.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얼마나 업신여기고 있는지는 절로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얼마나 사라를 보석보다 눈부시게 바라보는지도.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성식이 이유도 알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그에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징그럽고 벌레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 얼핏 크리스는 예석의 시선이 성식의 그것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손에 닿기라도 할까 꺼려지는 거미줄 같은 걸 대하는 느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넌 네 숙소로 돌아가. 어서.”
“이대로 크리스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대표님. 네? 제발요.”
“윤실장. 뭐 해. 데려가.”
“네, 대표님. 가자, 사라야. 네가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대표님.”
윤실장이 사라의 팔을 잡아끌었고, 사라는 ‘크리스.’라 그녀를 부르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무심한 듯 태연한 듯 그런 사라를 바라보았다. 제발 사라가 그녀 때문에 죄책감이나 그런 비슷한 감정 따위는 갖지 않길 바라며. 예전부터 그랬다. 사라는 쓸데없이 착했다.
-그게, 가능할까?
“뭐?”
아. 크리스는 화가 난 듯 인상을 쓰는 예석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무심코 필리핀어로 중얼거렸음을 깨달았다. 움찔.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영어나 필리핀어를 쓸 때마다 성식은 욕을 하는 거냐며 그녀의 얼굴을 후려치곤 했다. 아. 이 사람은 성식이 아니지. 깨달은 건 잠시 후였다. 크리스는 쭈볏쭈볏 손을 내렸다. 상대방을 그런 폭력성 짙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경계심을 버린다면 그녀는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넌 자유를 얻게 될 거야, 내 자유를 똑같이 보장해줄 수만 있다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인 후, 예석은 그렇게 말했다. 넌 자유를 얻게 될 거야, 라고. 크리스의 눈에 그런 예석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누구도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는 얘기는커녕,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심지어 자신을 낳은 아빠라는 사람은 지옥불에 떨어질 년이라고 심하게까지 그녀를 이야기했다.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그녀는 갑작스레 몰려드는 목마름에 메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축였다. 그 모습을 빠트리지 않고 모두 지켜보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쳐다보는 예석의 시선이 놓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오래 귀찮게 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제가 이 땅에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면 바로 이혼해드리겠습니다.”
“뭐, 그러든지. 그럼 나랑 결혼하겠다는 얘기로 알고 이만 가지. 자세한 얘기는 내일 변호사를 불러서 다시 합시다.”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긴 채 예석은 그렇게 병실을 떠났다.
“3개월. 3개월”
톡톡. 손목의 시계를 두드려대던 예석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았다. 그 냉정하고 차가운 눈동자에 크리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냉정한 남자. 냉정하지만 따뜻한 남자. 냉정하고 따뜻하지만 그래도 가질 수 없는 남자.
“정확히 3개월이 남았군. 그새 생각이 변한 거야?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으려면 아직도 3개월이 필요하잖아. 그게 우리의 약속이잖아. 아니면 이제 한국을 떠나기라도 할 셈인가?”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의 심장을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뭐?”
“누군가와 결혼을 할 거라면, 한 시라도 더 유부남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을 더 빼앗고 싶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였다. 이혼, 이라는 건 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흘려듣듯 한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부인 채로 그와 영원히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더욱 그랬다. 이렇게 계속 폐를 끼쳐도 되는 걸까. 내 자신의 자유를 위해 저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도 괜찮은 걸까.
“대체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결혼, 누가? 이미 당신이랑 결혼해서 유부남 딱지 붙인 게 2년이나 됐는데. 누가 나 같은 놈이랑 결혼을 해준다는 거지?”
자신의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일까. 처음엔 차분했던 음성이 점점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금방이라도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느냐고 추궁이라도 할 것 같아 그녀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 헛소리에 신경 쓸 시간 없을텐데.”
“네?”
“그런 헛소리에 신경 쓸 시간에 운전 연습이나 더 하는 게 어때. 벌써 몇 번째야. 운동신경이 없는 거야? 아님 연습할 차가 없어?”
“…….”
갑작스런 예석의 말에 크리스는 이번엔 정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녀가 운전면허를 따고 있다는 건 사라와 예린 밖에 모르는 일인데. 더구나 기능에서 2번이나 고배를 마셨다는 건 그 둘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명색이 우린 부부인데.”
명색이 부부지만 그들은 거의 같이 살고 있지 않았다.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건물에 살고 있었기에 마주칠 일 따위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거라 단정 지어 생각했다. 가끔씩 험하게 차를 몰며 나가는 뒷모습이라거나, 지친 안색으로 살고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 예석의 모습을 훔쳐보기만 했던 그녀로서는 그가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아닌지, 밥은 잘 챙겨먹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도 그녀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만 돌아가. 손님이 올 거야.”
“하던 얘기는.”
“그 얘긴 끝났어. 정리는 3개월 후에. 당신의 귀화가 결정되면. 내가 죽고 못 사는 여자가 나타난대도 그 후에 모든 걸 정리할 거야, 알겠어?”
“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뭐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예석의 한 마디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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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글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단편으로 시작해서 쓰다 쓰다 20페이지가 목표였던 글이
60페이지가 되었습니다. 글도 이자가 붙는 걸까요 -_-;;
하지만 60페이지 되었음에도 안 끝났다는 게 함정;
끝내보고 싶지 말입니다....;;;
헉, 이게 얼마만인... 앞부터 다시 정독하러 갑네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