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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연인
오르페우스는 뭇 여성들이 한 눈에 반해 구애를 해 올 정도로 잘 생긴 남자라고 한다. 그는 또한 연주 실력이 뛰어났는데, 각종 악기를 두루 잘 다루어 가히 천재라 할 만 했다. 그런 그에게는 부인이 있어 에우리디케라 했다. 그녀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한 남자에게 쫓겨 에우리디케는 죽고 만다. 천재적인 음악가의 성분은 둘째치고 여인이 남자에게 쫓기다 죽음에 이르는 일은 너무나 흔해 운영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오르페우스라는 남자나, 에우리디케라는 여인, 둘 다 반신의 몸으로 죽음에서 도망갈 수는 없으나 특별히 경계의 땅, 운영의 장승대에서 만남을 갖게 되었다는 게 운영과 얽히게 되는 일이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대왕. 대왕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운영은 그녀의 세계에서 ‘염라대왕’이라 부르는 저승의 왕 ‘하데스’를 맞이하여 허리를 숙였다. 현 저승의 왕 하데스는 그녀의 스승의 스승 대에 저승의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들었다. 원래라면 단 한번을 제외하고 평생 안 만나고 살아도 관계없는 존재이다. 운영이 스승으로부터 무녀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그녀는 하늘의 왕과 저승의 왕의 면식을 보았다. 지상을 잇는 경계의 땅의 주인과 면식을 익히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법도이자 의무였다. 때문에 평생 단 한번을 만나고 만날 일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운영은 인간이자, 인간의 수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영겁의 시간을 사는 신들의 시간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오, 무녀. 원래라면 허락되지 않을 일일 터 인데, 이 땅을 허락한 것에 감사하오.”
운영에 대한 예인지 저승의 왕은 운영의 나라, 즉 조선의복 검은 색 도포를 입고 나타났다. 이것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옥황상제와 달리 저승의 왕은 과묵하고 표정도 굳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에우리디케는 절반은 상제의 피를 이은 자식으로 특별히 저승의 왕이 감사를 할 이유는 없었는데, 상제와 대왕은 형제라 하더니 형제로서 감사를 표현하는 지도 몰랐다.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하데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전대 상제의 딸과 인간의 만남을 주선한 적이 있다하더니 그 얘기를 하고 있는가보오.”
“저희 세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죠. 이제는 환생의 원에 들었으니 그들이 여기를 방문할 일은 없겠지만요.”
운영은 아득히 펼쳐진 초록 들판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운영도 칠석을 좋아했고, 어렸을 때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동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커가면서 생각해보니 일 년에 한 번 뿐이라니 안타까워 슬퍼졌다. 그리고 슬프게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경계를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령과 저승사자 뿐 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승사자조차 전생을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니 ‘령’만이 경계를 지나 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살아있는 반신과 죽은 령의 만남을 주선하니, 설사 전례가 있다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 년에 단 하루만 허락했다. 이것만은 운영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
하데스의 곁에는 하얀 망사를 머리에 쓴 여성이 서 있었다. 어쩐지 멍 해보이기도 했고, 굳은 듯이도 보였다. 그리스 의상을 입은 여성은 폭이 넓고 주름이 잡힌 간단해 보이는 하얀 옷을 입고 넓은 천을 자신의 몸에 맞춰 허리띠를 하고 어깨 양쪽에 핀으로 천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키톤이라 불리는 의상 양식이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절반은 틀어 올리고 절반은 허리까지 풀어놓은 그녀는 얼굴을 가리듯 크고 흐릿한 망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비록 죽은 자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나온 여인치고는 좀 이상하게 밋밋하고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
저승의 왕을 따라 낮선 장소에 이끌려왔으니 두려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싶어 운영은 그녀에게 인사말을 건네지 않았다. 운영은 단지 장소 제공자일 뿐이고, 상제와 대왕이 아닌 자가 경계의 땅을 장소로 제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을 터, 관계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운영은 손을 들어 지팡이를 만들어냈다. 무(無)에서 줄기가 자라듯 꿈틀거리며 생겨난 나무 막대기의 머리 부분은 새가 대(臺)에 앉아있는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솟대’였다. 운영은 솟대 모양의 지팡이를 바닥에 꽂듯이 두들겼다. 그러자 짧은 풀들로 덮여있던 들판에서 덩굴나무가 자라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금세 보랏빛 꽃을 피우며 서로를 얽으며 기둥과 지붕을 만들었고 땅 속에서 자란 듯이 두꺼운 덩굴들이 툭 튀어나와 앉을 자리를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장관은 놀랐는지 표정이 없던 여인의 눈이 커졌다. 여인은 한 손을 들어 활짝 핀 보라색 등나무 꽃에 손을 뻗었다. 등나무 꽃의 짙은 향기와 함께 익숙한 그리스의 따뜻한 공기로 주변의 날씨가 변해있었다.
“당신이 준비가 되었다면 반대쪽의 문을 열겠습니다. 에우리디케.”
생전 처음 본 다른 나라의 여인이 자신을 향해 자신의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신기해 에우리디케는 운영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방금까지도 저승의 왕과 듣도 보도 못한 말로 대화를 나누던 여자가 발음조차 정확한 말투로 말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운영은 에우리디케가 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계절의 변화와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차이도 느끼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운영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등나무 쉼터에서 떨어져 걸어가더니 지상으로부터의 문을 열었다. 공기가 갈라지더니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통로가 열렸다. 에우리디케에게 익숙한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 배경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 믿었던 연인이자 반려가 나타났다.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
운영은 그 순간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생기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반짝거리는 여인의 모습에 운영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르페우스!”
저승의 왕이 흥분한 남자를 근엄한 말투로 저지했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은 연인이 동시에 저승의 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를 갖추어라, 여기는 하늘도 지하도 간섭할 수 없는 경계의 땅. 이 땅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너희는 천지가 부서진다 해도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터.”
오르페우스라 불린 남자는 그제서야 낮선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운영은 남자의 눈길에도 무심했다.
“이 경계의 땅 어디든 상관없으니 시간을 보내십시오. 어느 장소에 있든 때가 이르면 두 사람은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다음 1년 후까지 아쉬움을 남기지 않길 바랍니다.”
운영은 필요한 말을 사무적으로 읊고는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대왕?”
운영은 낮은 구릉 위에 지어진 정자를 향해 걸어가며 하데스에게 차를 권했다. 살짝 치맛자락을 움켜진 운영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독특한 장식이 된 나무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분 좋게 지나갔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비로소 서로 외의 것에 관심을 두었다. 푸르게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오색의 천이 늘어진 나무는 예쁘고, 화려했으며 기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낮은 구릉 위의 정자와 노랑, 파랑, 빨강, 하양, 초록으로 물든 다섯가지 색깔의 천이 늘어져있는 나무는 서낭당과 신목을 연상시켰지만, 그들은 머나먼 동쪽의 문화를 몰랐고 경계의 땅의 독특한 분위기로 생각했다.
“정말 어디로든 가도 상관없습니까?”
오르페우스는 운영이 아닌 저승의 왕을 향해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운영은 고개를 돌려 오르페우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도 아무것도 없지만, 가고 싶다면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한 운영은 풀숲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다만, 인간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에 있지는 않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운영은 자신이 거할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고, 장승대라는 정자와 신목과 닮은 나무를 세웠다. 지상의 신목과 달리 이곳의 신목은 단순한 상징에 불과했지만, 운영에게 익숙한 풍경이기에 그녀는 이 고즈넉한 풍경을 사랑했다. 이 땅 너머에는 경계의 땅의 주인이었던 여인들이 살던 장소가 주인 없이 풍경에 녹아있었다. 경계의 땅에서 시간이라는 것에는 의미가 없었지만, 주인이 사라진 장소는 나무와 풀숲이 우거져 ‘마음’이 없는 장소임을 나타낸다. 운영은 종종 자신의 스승이 거한 장소는 방문하지만, 다른 전대 주인들의 장소에는 거의 가 본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한 스승과 함께 스승의 스승이 살던 장소는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제 그것도 기억의 저편에 잊혀져가고 있었다. 운영은 또 다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하데스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사람이 방문할 일이 없다보니 새삼 여기에 대해서 살필 생각을 못했는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구나. 오랜만에 스승의 거처나 갔다 올까?’
타인의 눈에 이 땅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방황할 연인들을 생각하니 등나무 의자와 지붕을 만들고, 저승의 왕에게 차를 대접할 생각을 했다.
“그럼.”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손을 꼭 잡고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높은 정자 밑에 있는 등나무 의자는 감시당하는 기분일 것 같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루뿐이니 마음 편히 어디라도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운영은 그늘도 없는 들판이 안쓰러웠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무녀.”
하데스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운영을 불렀다.
‘그리고 보니 대왕은 표정이 굳은 게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걸까?’
운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대왕은 제 스승님을 백작부인이라 불렀죠.”
하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황한 걸까?’
“그녀는 백작부인이었으니까요.”
“스승님은 상제보다 대왕을 더 좋아했죠. 저는 잘 모르지만, 대왕의 이야기를 아주 즐거운 듯이 하셨어요.”
하데스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러셨겠죠.”
약간의 원한이 느껴지는 건 운영의 착각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종종 듣는 이야기로는 상제도 대왕도 스승님과 스승님의 스승님에게까지 꽤나 놀림을 당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무섭게 느껴지던 상제와 대왕의 존재가 운영은 어쩐지 즐거웠다. 경계의 땅의 주인이 되어서도 그들에게 별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 탓이었을 터다.
“경계의 땅에 오는 것을 저어하셔서 기분이 안 좋으신 건가요?”
운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데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무녀. 결코 무녀가 싫다거나…….”
“……?”
“흠흠, 그것이 아니라, 본인은 이렇게 법칙을 깨고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것이 불길하다 여길 뿐이오.”
운영은 이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하늘과 지하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게 법칙이지만, 지하는 지하만의 법칙이 있기 마련이죠. 쓸데없는 짓이었을까요?”
“무녀가 신경 쓸 것 없소.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상제와의 문제니까. 무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소.”
운영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은 그런 저를 참 꾸짖으시겠지만…….”
“끙……, 확실히 그대의 스승은 참 호기심도 관심도 많은 분이셨지…….”
“그것이 당대 경계의 땅의 주인의 ‘소명’이라 하셨으니까요.”
“…….”
다시 생각해도 참 당혹스러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데스를 슬쩍 보며 운영은 중얼거렸다.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요?”
“이번엔 남자로 태어나 여자들을 후리고 계실거요.”
“풋!”
아무리 저승의 왕이라고 해도 환생이나 전생까지는 알 수 없다. 전대 경계의 땅의 주인이었던 마리 메리안 백작부인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왕의 정부에 이른 성공한 직업여성이었다. 왕의 정부가 되기 이전부터 많은 남자들을 휘둘렀고, 정치적으로 왕의 정부가 된 재능 넘치는 여성이었다. 말년에는 왕의 친구였으며, 많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 땅의 주인이 되었는지는 별개로 치고, 그런 여성이었으니 아무리 상제와 대왕이라 해도 남자의 몸으로 당해낼 턱이 없었다. 바람둥이 상제를 대놓고 욕하며 상제의 비편만 들었으니……. 주인이 바뀌어도 상제는 이 땅을 쳐다보기도 싫어했다. 진저리를 치자면 대왕보다 상제가 더 했을 것이다. 오히려 대왕에게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욕을 해댔다. 뭐……, 오십보백보일지도.
“…….”
하데스는 평소에는 거의 표정도 없을 것 같던 운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놀랐다.
“아, 죄송해요. 차도 없이 얘기만 했네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운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데스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편안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서릿발 같은 말투로 경고하던 운영의 스승, 백작부인의 제자사랑이 생각났지만, 길지 않은 잠깐의 만남이니 뭐 어때라는 가벼운 기분으로 하데스는 전대 주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판타지인가요? 흥미진진... 근데 과객연가님 전에 쓰시던 글은 지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