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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퇴근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일에 쫓겨서 저녁시간을 놓쳐 버려서, 하루 한 끼 먹는 끼니를 놓쳐버렸기 때문이죠.
해서 우울한 기분을 그대로 안고 집에 와 봤더니 어머님이 절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나 : ... 이건 또 무슨 냄새에요?
엄마 : 응. 새 요리를 해 봤어.
나 : ... 나 오늘 밥 4그릇이나 먹었는데...
... 이렇게 거짓말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희 어머님은 주관적인 딸내미의 시선에서 봐도 요리를 못하세요...
물론 익숙해진 음식이나, 어머님이 자주 하셔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고 맛도 있는 일반적인 반찬거리야 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만.
몇 년 전 부터 구청에서 주관하는 요리교실을 다니시면서 여러가지 새 요리를 익히시더니만, 식구들을 상대로 시험해 보시기 시작하시더군요...;;;
덕택에 당시 군대에 있었던 동생을 제외한 저와 아버님은 불어서 곤죽이 되어버린 크림치즈 스파게티;;; 라든가, 겨자 범벅이 되어 먹으면 재채기를 해 대는 통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는 양장피라든가;;;; 뭐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체험하며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오래 전, 제가 도시락을 친구들과 먹게 되어 남의 집 음식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아버님께 던졌던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나 : 아빠. 아빠는 어떻게 엄마 음식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었어?
아버님 : 그건 너희 엄마가 너희 할머님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사람은 다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거든.
... 얼마 뒤, 할머님의 된장찌개를 맛본 뒤 저는 아버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군요...;;;;)
어쨌든 간에. 이 덕에 제 무슨 요리든 괴식으로 만드는 솜씨도 어머님과 할머님 탓으로 돌릴 수 있어서 (남들이 요리 못한다면 무조건 '유전이야!' 로 말을 끝낸다...;;;) 좋긴 하지만, 어머님이 새 요리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사실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시더군요.
어머님 : 비싼 굴소스까지 샀단 말이야.
나 : ... 이번엔 뭐에요?
어머님 : 중국풍으로 간을 한 돼지고기와 청경채 볶음.
나 : 밥은요?
어머님 : 네 아버지가 다 먹었단다.
... 불쌍한 아버님.
제가 오기 전 까지는 얼마나 시달리셨는지요...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거겠죠.
나 : 얘 아직 안 왔나요?
어머님 : 오늘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늦게 온다고 전화 왔어.
나 : ... OTL
어쨌든 그 순간부터 저는 자기 최면에 들어갔습니다.
괜찮을 거다. 맛은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며칠 전에 배고파서 할 수 없이 먹었던 집에서 직접 만든 요구르트도 쉰내가 잔뜩 나서 먹을 수 없는데다가 식초맛이 첨가된 듯한 어딘가 참을 수 없는 기묘한 맛이 나긴 했지만 어쨌든 한 그릇 다 먹었지 않나.
배도 고프니 마침 잘 되었다. 어떻게든 먹어 보자.
그리고 일단 고기 (그나마 좋아하니까) 를 한 입 입으로 넣었습니다.
... ...

... 도저히 말로는 표현 못할 포스가 밀려오더군요.
기름기 때문인가 싶어서, 이번에는 청경채를 먹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 이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룡님. 그래도 축복받으신 거에요...
전 이 중국식 돼지고기 청경채 볶음을 네 접시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