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3.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는 요리 전문 월간지 테이블의 에디터 우민경이라고 합니다. 장소 섭외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테이블에서 장소 섭외를?!

상상도 못 한 얘기에 진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지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장난 전화를 의심했을 것이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장소 섭외라면 촬영 때문인가요?”

화들짝 놀란 속내와는 달리 진하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울렸다. 현지가 냅킨을 꽂다가 말고 놀란 표정으로 “방송국이에요?”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아니야, 진하가 입 모양으로 대답을 해주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 에디터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신년 특집으로 가정집 분위기가 나는 레스토랑에 대한 기사를 기획 중인데 지인에게서 삐꼴로 자르디노를 추천 받았다는 얘기였다. 에디터와 촬영 시간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막연하게 실감이 났다. 테이블의 기자가 삐꼴로 자르디노를 섭외 했다. 삐꼴로 자르디노에 대한 기사가 난다!

“언니, 무슨 전화예요?”

궁금한 표정으로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현지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테이블 에디턴데, 장소 섭외 가능하냐고.”

“에디터가 뭐에요?”

“잡지사 기자.”

“어머! 그 기자가 우리 가게에 와봤대요?”

“아니, 와보진 않았대.”

“혹시 돈 요구는 안 해요? 저번에 보니까 방송 출연 하려면 브로커도 거치고 막 그렇던데. 전화 건 여자가 기자인 거는 확실해요? 브로커일 수도 있는데.”

매스컴에서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뉴스가 세상 소식에 무덤덤한 현지의 귀에도 들어갔던 모양인지, 현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어설프게 아는 지식을 늘어놓았다.

“자기 입으로 기자라고 했어. 브로커는 아닌 게, 만약에 돈을 요구할 것 같았으면 촬영 시간 잡기 전에 미리 우릴 찾아왔겠지.”

그러자 현지가 절반쯤은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근데 와보지도 않은 집을 어떻게 알고, 기사로 쓴단 거예요?”

“가정집 분위기가 나는 레스토랑 특집 기사를 기획하면서 장소 물색 중에 우리 가게를 추천 받았대.”

그제야 좀 수긍이 되었는지 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근데 언니, 테이블 되게 유명한 잡지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요.”

삐꼴로 자르디노에서 매달 정기 구독으로 받아 보고 있는 잡지를 말하면서, 마치 전생의 기억이라도 더듬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으로 짓고 있는 모습이 어이없어서 진하는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저기 책장에 꽂혀 있는 게 뭐였더라?”
진하가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벽에 매달아 놓은 책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장 안에 꽂혀 있는 잡지의 이름이 테이블인 것을 확인하고 현지가 무안하게 웃었다.

“아. 맞다, 맞다. 우리 가게에서 받아보는 잡지였지. 내가 본래부터 책하고는 영 거리가 멀거든요.”

“그러면서 애들한테는 책 읽어라 잔소리 하지?”

“책 읽으란 잔소린 잘 안 해요.”

다섯 살, 여섯 살이면 한창 책 읽기가 중요한 나이인데, 하는 염려가 들었지만 속으로 삼키었다. 대학생 이모들이 있고, 아직 젊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계신데 어련히 알아서 챙기실까. 스스로 거침없이 밝힌 바, 현지는 문제 많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대가로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해서 스물다섯 나이에 혹을 둘씩이나 달고 사는 것이라고. 결혼하고 처음 1년간은 친정아버지가 퇴근길에 매일 그녀의 신혼집에 들러서 제대로 잘 지내고 있는지, 혹시 가출을 한 것은 아닌지 감시를 했다는 처음 들었을 때 진하는 설마, 하며 믿기지가 않았다. 현지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6년 남짓 가정을 꾸려온 가정주부로서의 단단한 내공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매사 권태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안정적인 그녀에게 그런 위태로운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다는 게 영 상상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실감이 나지 않던 얘기가 피부로 확 와 닿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현지가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였다.

-언니, 근데 삐꼴로 자르디노라는 영어가 무슨 뜻이에요?

영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란 말을 어떻게 하면 자존심 상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며 난감했던 기억.

“언니 그럼 잡지책에 삐꼴로 자르디노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진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지가 입을 떡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우와, 진짜 잘 됐다!”

“테이블 같은 잡지에는 대단하고 특별한 레스토랑만 소개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더라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현지를 향해 진하가 쑥스럽게 웃었다. 뭐랄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런 대박 행운이라니. 막 기쁘기보다는 난생 처음 긁어본 복권에서 1등 맞은 것처럼 얼떨떨하고 또 조금은 황당한 기분도 들었다.

“무슨 소리에요, 언니. 처음부터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나. 난 언니가 해준 요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더라. 양식 못 먹는 촌스러운 입맛이지만 언니가 해준 스파게티는 한 그릇 뚝딱이잖아요.”

진심 어린 칭찬에 진하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패였다. 느닷없는 섭외 전화보다는 매일 자신의 음식을 먹는 사람의 칭찬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마음에 새겨졌다.

“오늘 점심은 특별히 더 신경 써서 만들어야겠다.”

“오케이! 근데 언니, 잡지에 나면 우리 이제 대박 나는 거예요?”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발언에 진하는 풋 웃고 말았다.

“대박까진 몰라도 홍보는 많이 될 거 같아.”

“자리도 얼마 없는데 손님 갑자기 몰려들면 어쩌죠? 미리 테이블 숫자 좀 늘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비좁은 공간을 어쩌겠는가.

“차라리 밖에다 천막 치고 포장마차를 만들어버릴까.”

푸념 섞인 농담에 현지가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어, 그거 좋겠다! 잘 꾸며놓기만 하면 어디 스키장 산장에 놀러온 기분 들 것 같아요.”

진지한 반응에 당황스러워진 진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그렇지만 너무 춥지. 불 피우고 고기 구워먹는 집도 아니고 레스토랑에서 손바닥 비비면서 스파게티 먹고 싶어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왜요. 난로 놔두면 되죠. 놀이터 손님 대기석에 난로 하나 두니까 엄청 따뜻했잖아요.”

현지의 얘기를 듣고 보니까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지붕 앞쪽으로 뼈대를 살짝 세우고 비닐을 씌우면 테이블 네 개 정도 들어갈 공간은 충분했다. 아담한 공간이니 큰 난로만 하나 들여놓아도 난방 효과가 제법 클 것이었다. 두꺼운 담요까지 구비해 두면 밤 시간은 몰라도 햇볕이 좋은 날 낮 시간 정도는 충분히 손님맞이가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이다. 오, 현지! 아이디어가 좋은데?”
진하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흥분하자 현지가 우쭐한 표정으로 조신하게 귀밑머리를 넘겼다.

“제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지가 문득 생각지도 못 한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혹시 테이블 기자한테 우리 가게 추천했다는 사람 말이에요, 놀이터 사장님 아니에요?”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순간 그렇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현우라면 요리 잡지 에디터 몇 명 정도 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으니까.

“아까 봤을 때도 암말 없었는데.”

그렇지만 그건 별로 대단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촌 동생 아이디로 블로그에 댓글을 달기도 했는데!

“사장님 나름으로는 언니 자존심 지켜준다고 그랬을 수도 있죠.”

만약 그런 이유라면 그녀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 자존심이 왜 상해. 잡지에 추천해주셨으면 감사할 일이지.”

아무래도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진하는 볼일을 핑계로 화장실에 들어와 현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좋은 소식! 방금 전에 요리 전문 잡지 <테이블> 에디터가 장소 섭외 가능하냐는 전화를 걸어왔어요.

1분도 안 돼 곧장 문자가 도착했다.

-이럴 수가! 놀이터에는 그런 연락 없었는데.......

괜히 충격 받는 척 너스레를 떠는 현우의 얼굴이 떠올라 진하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충격 받진 마세요. 가정집 분위기가 풍기는 레스토랑 특집 기사라니까.

문자를 보내고 기다리는 진하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가정집에 저택을 끼워 넣을 수는 없었겠네. 이제야 수긍이 가는군.

“애걔걔. 잘난 척은!”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잘난 사람이 잘난 척을 하면 당연히 재수가 없어 보여야 되는데 이 남자는 밉지가 않았다.

-섭외 전화를 거신 에디터 말씀이, 지인의 추천으로 삐꼴로 자르디노를 섭외하게 됐다고.

저 쪽에서 먼저 고백을 할 리는 없고, 진하가 먼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문자가 아니라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음성으로 직접 고백할 작정인가. 전화를 받는 진하의 입가가 긴장으로 살짝 굳어졌다.

“네, 여보세요.”

-자, 전화 걸었으니 실컷 자랑해요. 문자로 감질나게 하지 말고.

아무래도 섣불리 고백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제가 지금 전화를 길게 할 시간이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혹시 그 지인이 사장님?”

-지인? 아, 테이블 에디터한테 삐꼴로 자르디노를 추천했다는 지인 말이에요?

황당해 하는 반응에 진하는 헛다리를 짚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두고 시침을 떼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어, 아닌가 보다. 그냥, 혹시 해서 물어봤어요. 내 주변에 잡지사 기자하고 인맥이 있을 사람은 사장님 밖에 없거든요.”

상황이 묘하게 돼버렸다. 아무리 악의가 없다고 해도 의심은 의심인지라, 진하는 혹시나 현우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미안해졌다.

-만약에 내가 그 지인이었다면 어쩔 생각이었는데요?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한 턱 거하게 쏘려고 했죠.”

나쁜 의도로 물어본 말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 진하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얘기를 했다.

-그럼 한 턱 쏴요.

얼렁뚱땅 우기는 소리에 진하는 그만 황당한 실소가 터졌다.

“뭐예요, 지금. 사장님이 잡지사에 소개시켜준 지인이라고 우기시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는 증거 있나?

“제가 사장님을 몰라요? 아까 반응 딱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요, 뭘.”

-그럼 진하 씨 주변에 나 말고 잡지사 에디터랑 알고 지내는 사람 누가 있어요? 없다면서요.

“그냥 우리 가게에 들른 손님일 수도 있죠.”

-거 봐. 확인할 방법이 없네. 오늘 퇴근하지 말고 무조건 가게에서 기다려요.

“한 턱 내라고요? 어디 가고 싶은데요?”

-가긴 어딜 가요. 최고 요리사가 있는데.

달콤하게 들리는 소리에 진하의 볼이 붉어졌다.

“와, 빈말이라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요리사님, 예전 시식회 때 먹었던 모듬 살라미 먹고 싶어요.

농담처럼 건넨 말이 귓가에 간지럽게 날아왔다.

“살라미 아니고 살루미예요.”

괜히 어색한 기분에 굳이 현우가 한 말을 지적하였다.

-보통 살라미라고 하잖아요.

“이탈리아의 햄을 총칭하는 말은 살루미고, 살라미는 살루미의 한 종류예요.”

-알았어요. 모듬 살루우미 먹고 싶다로 정정할게요.

시위라도 하듯 지적당한 루 발음을 과장되게 발음하는 유치한 모습조차 귀엽다. 누가 봐도 근사한 남자를 멋지다 감탄하는 것은 별일 아니지만, 귀엽다고 느끼는 것은 병이 깊다는 뜻이었다. 위험!


댓글 '3'

margot

2011.11.21 18:00:55

유명해지면 좋기는 하겠지만 어쩐지 걱정이 앞서네요....

그래도 진하에게는 너무 잘된일이에요~~~

큐리

2011.11.23 18:54:07

혹시 어머님이 요식업체 전문잡지인 테이블도 구독하고 계시지는 않겠죠?

 

핑키

2011.12.01 01:00:35

잘되도 걱정 안되도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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