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1.


하루 사이에 삐꼴로 자르디노는 크리스마스였다. 놀이터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현우는 우뚝 멈춰 서서 깜짝 변신한 삐꼴로 자르디노를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람 키보다 큰 전나무에 꼬마전구가 촘촘하게 감겨 있고 나뭇가지마다 매달아 놓은 볼이 햇빛 아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야트막한 울타리 너머 가게 앞마당에 늘 보이던 목재 테이블은 붉은색과 초록색이 혼용된 체크무늬 식탁보를 씌우고 촛대와 와인 병을 세팅해 놓으니 근사한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처럼 보였다. 유리창에 매달린 크리스마스 리스와 가게 앞 야트막한 울타리에 매달려 있는 산타클로스 인형이 짊어지고 있는 선물 보따리에 쓰여 진 Merry christmas를 본 순간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어제 하루 휴무를 맞아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진하 혼자서 이렇게 마술을 부려놓았던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현우는 삐꼴로 자르디노의 출입문을 열며, 짐짓 산타클로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때 이른 인사말을 건넸다.

“어때요? 꾸며놓으니까 제법 근사하죠?”

혹시라도 혼자서 무리하느라 몸살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했던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진하는 아주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들떠 있었다.

“장식을 할 거였으면 나하고 미리 상의를 해야지. 이렇게 치사하게 혼자서만 선수를 칠 줄이야.”

으름장을 놓는 현우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에이, 그건 치사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죠. 잘 나가는 놀이터랑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뭔가 한 발 앞서가야 하지 않겠어요? 똑같이 하면 안 되죠.”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바라보는 진하를 향해 현우가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무슨 경쟁을 혼자서 하나.”

현우의 도발에 진하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반문하였다.

“지금 그 말은 삐꼴로 자르디노는 놀이터의 경쟁상대로도 생각 안 한단 뜻이에요?”

“당연하죠.”

“와, 세상에. 어이없어라. 우리 요즘 손님 많이 늘은 거 모르세요? 예전의 삐꼴로 자르디노를 생각하심 안 된다고요.”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는 진하를 빙글거리며 바라보고 있던 현우가 짐짓 서운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

“어떻게 친한 이웃사촌을 경쟁상대로 생각할 수가 있어요. 서운하네.”

그러자 진하가 한 방 맞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우와, 말 바꾸시는 것 좀 봐.”

“진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삭막한 사람이었네.”

“아우,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렇게 아버지랑 하나도 안 닮을 수가 있어요? 아저씨는 그렇게나 젠틀한 신사였는데 사장님은 완전 능글능글 능구렁이에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가 어지간히도 얄미웠는지, 진하가 분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어린애처럼 흥분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다가 현우는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 일이라는 건 정말 모르는 거로구나. 이진하와 이렇게 마주 서서 다른 무엇도 아닌 아버지 얘기를 하며 웃고 있다니. 그의 집안에서 아버지 얘기는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금기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가벼운 농담이라니, 그게 가능하리라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솔직히 생긴 건 내가 낫잖아요.”

“악, 잘난 척까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쳐다보던 진하가 졌다는 표시를 하며 카운터 위로 풀썩 엎어졌다.

“아이고, 아저씨. 어떻게 이런 아들을 낳으셨어요.”

느닷없이 카운터를 쿵쿵 내리치며 비통하게 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현우는 그만 박장대소를 하였다. 정말이지, 조폭가문의 며느리 같은 영화보다는 수 백 배 더 재밌는 여자다.

“그런데 오늘 메뉴는 뭐예요?”

아까부터 가게 안에 떠도는 고소한 냄새 때문에 식욕이 동하던 중이었다. 그의 질문에 진하가 체념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구슬픈 넋두리를 읊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왜 사장님 아침밥을 매일 차려야 되냐고요. 어머니는 홍콩에서 언제 오시나요?”

“벌써 오셨어요.”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는 듯 당연하게 말을 하자 진하가 뒷목을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그런데 왜 여기서 아침을 드세요?”

“에이, 그럼 진하 씨 혼자 밥 먹어야 되잖아요. 사람이 한결 같아야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 쓰나. 나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 아니에요.”

큰 인심이라도 베푸는 것 같은 적반하장에 진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만 포기하고 싱크대 위에 커다란 접시를 내려놓았다. 뭘까? 쳐다보는 현우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오늘은 주먹밥이네.”

“마침 날치알 사둔 게 있어서요. 속에 든 건 별로 없어요. 어묵 맵게 볶은 거랑 멸치 볶은 거 두 가지인데, 어떤 걸로 드실래요?”

“둘 다.”

뻔뻔스러운 대답이 어이없게 들렸는지, 진하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네, 네. 많이 드세요.”

냉장고 문을 열더니 매실 장아찌를 꺼내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작게 썰어 주먹밥 옆에 보기 좋게 담아내는 익숙한 손놀림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현우가 문득 물었다.

“밖에 저 테이블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진하가 음식을 담다가 말고 창밖을 내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저거요? 제 아이디어예요. 왜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얼굴에 대고 현우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저게 장식용이었구나. 어쩐지, 손님이 한 번도 앉는 걸 못 봤다 했다.”

덜렁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빈 테이블을 빗대는 소리에 진하가 욱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서 그랬지만 요즘엔 날씨가 추우니까 그런 거죠. 12월에 누가 바깥에 앉고 싶겠어요. 이제 봄만 돼 보세요. 야외 테이블에 서로 앉으려고 할 걸요.”

“아, 장식용이 아니었어요?”

“모르는 척 하시는 것 좀 봐라. 사장님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시는 거 알아요?”

투덜거리는 소리를 웃어넘기며 현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정말 봄 되면 테이블 몇 개 더 내놔야 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지면 손님들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 해요. 봄, 가을은 특히 야외 테이블이 몇 개냐에 매상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마당에 나무들이 커서 잘만 꾸며놓으면 제법 근사하겠어요.”

싱크대에 서서 손을 씻고 있던 진하가 물을 잠그고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유리 너머 마당을 내다보았다.

“저기가 원래는 상가로 용도 변경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썼어야 되는 공간인데 차를 세워두면 시야가 막혀서 보기 싫겠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비용이 좀 들더라도 유료 주차장이랑 계약을 맺고 여기는 그냥 정원으로 둬야겠다 싶어서 저렇게 남겨둔 거예요. 처음 생각에는 손님이 이렇게 없을 줄은 모르고 야외 테이블 내놓고 손님 받으면 주차비보다야 훨씬 남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진하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불었다.

“지금 그 얘기 다른 사람들한테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라니, 누구요?”

진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변에 친한 사람들. 이찌로나 브라운 슈가.”

그러자 진하가 헷갈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이찌로 사장님한테야 안 했겠지만 유선 언니한텐 했나? 기억 안 나요.”

“절대 얘기 하지 말아요.”

“왜요?”

“자칫하면 구청에 신고 들어가는 수가 있어요.”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아요. 원래 신고라는 건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거니와 신경도 안 써요. 무슨 대단한 원한 관계가 아닌 이상 일부러 시간 들여서 그런 수고를 들이진 않죠. 바로 근처, 그러니까 내 가게 때문에 매상에 타격 받은 가게의 주인들이 벼르고 벼르다 신고하는 거죠.”

“헉, 그럼 나 사장님한테 방금 이 얘기 한 거 실수한 거였네요.”

“방금 얘기했잖아요. 매상에 타격 받는 가게의 주인들이라고.”

그러자 진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네, 자꾸 잊어먹고 위대하신 놀이터와 맞먹으려 들어서 죄송해요. 이거 드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세요.”

진하가 씨름 선수 주먹만 한 주먹밥이 두 덩어리와 총총히 썬 매실 장아찌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국물은 따로 만든 게 없는데, 녹차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녹차. 그냥 티백으로 줘요.”

“티백은 없어요. 금방 만들어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공연한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녹차 통을 꺼내고 티 주머니에 녹차를 퍼 담는 진하의 표정이 콧노래라도 나올 것처럼 즐겁고 신나 보였다. 뭐랄까, 선물을 준비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며 설레는 것 같은 그런 느낌과도 비슷하다. 귀찮을 법도 한데 매번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일을 하는 진하가 신기하고 보기 좋아서, 현우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녹차 통의 뚜껑을 닫아 선반에 도로 넣는 단순한 동작조차 진하에게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익숙한 리듬이 느껴졌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순간 살짝 드러난 가슴골에 순간 움찔 시선을 떼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이 많은 일을 다 할 생각을 했어요? 힘들었을 건데.”

현우는 괜스레 목청을 가담으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아니요, 전혀요. 내 가게 열어서 이렇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다니, 꿈같더라고요.”

진하가 녹차가 담긴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수줍게 웃었다. 입가에 스미는 미소가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현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에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항상 당황스러웠다.

“놀이터도 화요일 날 크리스마스 장식 해야겠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밀려 현우는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왜요?”
“그렇게 좋아하는데 진하 씨한테 크리스마스 장식 좀 맡겨야 될 것 같아서.”

황당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던 진하가 이내 파안대소 하였다.

“내 가게라고요, 내 가게! 제가 언제 남의 가게 장식 해주는 게 꿈이랬어요. 우와, 사장님은 진짜 일 부려 먹는 기술 하나는 타고 나셨어요.”

“어, 남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들으시면 서운하시겠네.”

“어머, 말도 안 돼.”

“난 어제 근무 중인데도 와서 도와줬잖아요. 휴무 때 당연히 와서 도와줘야지.”

그러자 진하가 입을 떡 벌리며 황당해했다.

“일 하는 거 구경하면서 커피 마신 게 도와준 거예요?”

“저기 벽에 양말, 누가 걸어줬더라.”

키가 안 닿아 의자를 딛고 올라가려는 그녀를 대신해 걸어준 양말을 굳이 지적하며 생색을 내자 진하가 항복 표시를 하며 유쾌한 웃음소리를 쏟아냈다.

“제가 졌어요.”

현우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고 주먹밥의 비닐을 벗기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매장에서 걸려온 전화인가 싶어서, 서둘러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죄를 짓다 걸린 것처럼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어머니였다.

“잠깐만요, 전화 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는지, 진하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저예요.”

-밥은 먹었니?

“먹었어요.”

-어디서?

“매장에서요.”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걸 일일이 전화로 체크하다니. 더군다나 이진하의 앞에서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고 짜증스러워서 목소리에 날이 섰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아니에요. 바빠서 그래요.”

-그래. 알았다. 오늘 퇴근하고 일찍 들어올 거지?

퇴근이 늦어지면 전화로 독촉은 해도 퇴근 시간을 챙기는 경우는 없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오랜만에 우리 아들 얼굴 보고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러지.

찜찜한 기분으로 알았다고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는 순간 진하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마주쳤다.

“어머니에요.”

“네, 그런 것 같았어요.”

뭐라 둘러댈 말이 마땅치 않아 주먹밥의 비닐을 마저 벗기고 있는데 진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장님, 근데 어머니한테 너무 무뚝뚝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무뚝뚝하다고?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멍한 표정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진하가 피식 웃으며 나무라듯 말을 했다.

“이래서 아들은 키우는 재미가 없다고 하나 봐요. 아침은 먹었나,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거셨는데 그렇게 무섭게 얘기를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진짜 아들만 아니었으면 서운해서 다시는 전화 안 걸 것 같아.”

막상 진하의 얘기를 듣고 나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침 식사 챙기고 일찍 오란 말을 한 것뿐인데 과하게 짜증을 낸 것은 사실이니.

“그런가.”

군말 없이 수긍하는 현우를 쳐다보며, 진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옥의 대마왕이라더니, 아들 아침밥은 챙기는 평범한 어머니였네요, 뭐.”

전혀 예상 밖의 농담에 현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농담 소재로 삼다니. 여전히 웃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으로 확 퍼지는 참기름 향, 톡톡, 씹히는 날치알,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콤한 어묵, 입안의 모든 자극을 깨끗하게 정돈해주는 녹차.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유쾌한 농담들을 주고받는 지금 아마 그는 행복한 것 같았다.


댓글 '2'

margot

2011.11.07 14:06:10

꼭 폭풍전의 고요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큐리

2011.11.08 17:28:51

정중에서 가장 끈끈한 정이 밥정(?)이라고 현우와 진하가 한솥(?)밥을 계속 먹다보면 어려운 난관도 함께 헤쳐나갈 동지애도 함께 쌓이겠죠? 어머님이 사랑의 방식을 관리(?)하고 집착하는 방식에서 믿고 내려놓는 방식으로 바꾸셔야 할텐데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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