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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세상에, 대리 운전을 불렀을 정도면 많이 마셨단 얘기잖아. 웬일이야. 분위기 엄청 좋았구나!”
마감을 앞둔 삐꼴로 자르디노에서는 유선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어제 밤 현우와의 만남에 대해 시시콜콜히 분석 중이었다. 출근길에 잠깐 들른 유선을 붙잡고 현지가 어제 밤 놀이터 사장님이 퇴근 시간에 맞춰서 차 갖고 마중을 왔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떤 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졸지에 왕자님에게 간택 받은 신데렐라가 되어버린 통에 진하는 정색하며 손사래 치기 바빴다. 많이 놀랐고, 그러나 따뜻했고,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만의 감상이었다. 현우와의 만남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벌써 결론을 내렸다. 기대하는 게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헛된 기대를 가질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순대 볶음에 소주 먹으니까 잘 들어가더라고요. 식당 하는 사람들, 남의 가게 가서 먹는 거 쉽지 않잖아요.”
“근데 정말 메뉴 선택이 의외다. 치즈에 와인 마시게 생겨서는 웬 순대 볶음에 소주야. 상당히 반전인데.”
유선이 소탈한 취향마저도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냥 매너가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첫 데이트에 무슨 순대 볶음집이야. 그런 건 자기 친구들이랑 가서 먹을 일일지. 나 같음 화났을 것 같아요.”
마감이 끝나면 쌩하니 퇴근하기 바쁜 현지마저도 오늘은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가담하였다.
“데이트 아니라니까. 내가 극장 못 간지 한참 됐다고 처량하게 얘기하니까 그럼 말 나온 김에 한 번 보러 갑시다, 이렇게 된 거라고 몇 번을 말하냐고요. 그리고 순대 볶음은 내가 먹고 싶어 해서 간 거야. 극장 안에서 어느 배고픈 커플이 순대를 몰래 싸갖고 와서 먹는데, 엄청 맛있어 보이더라고. 아무튼 다 좋은데, 제발 데이트 소리는 하지 말자, 오케이?”
행여나 말을 잘못 옮기기라도 해서 현우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근데요, 퇴근길에 차 갖고 마중 와서 영화 보고 술 마신 게 데이트지, 데이트가 별 건 가?”
당사자가 아니라는데도 기어이 맞는다고 박박 우기는 적반하장에 진하는 하는 수 없이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우리끼리 웃자고 얘기하는 거야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사장님은 여기서 인기 스타잖아. 브라운슈가만 해도 사장님 보러 놀이터 간다는 회원들이 한 둘이 아니라면서요. 말 나기 시작하면 소문 만들어지는 건 순식간인데, 데이트니 뭐니 하는 소리라도 들리면 좋은 마음으로 영화 한 편 보여준 사장님 입장은 뭐가 되며, 영화 한 편 보고 와서는 데이트라고 떠들어댄 내 입장은 또 얼마나 우스워지겠어. 제발 부탁인데, 데이트 소리만 좀 뺍시다.”
“그건 그렇다. 우리가 생각이 좀 짧았네.”
“미안해요, 언니. 데이트 소리 안 할게.”
진지한 사과에 도리어 미안해진 것은 진하였다.
“아, 나도 데이트면 좋지! 그렇지만, 콩나물 국 한 그릇 얻어먹은 죄로 영화 보여주고 밥까지 사줬더니, 그걸 갖고 데이트라고 우기는 여자는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열 받는 건 왜 진하 씨한테 부탁을 했냐는 거야. 그깟 콩나물국은 나도 끓여줄 수 있는데. 해장국은 내 전문인데!”
유선이 일부러 발끈하는 척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언니도 그럼 출근 시간을 앞당기세요.”
현지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자 유선이 도끼눈을 뜨며 달려들었다.
“같이 문 열었는데 진하 씨 가게 선택해서 들어가면 더 열 받거든! 솔직히 놀이터에 갔을 때도 사장님이 진하 씨만 편애하는 거 좀 티 나더라.”
편애라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이었던가. 그렇지만 진하는 애써 마음을 억누른 채 아무것도 아닌 얘기에 들뜨지 말자, 되뇌었다.
“편애는 무슨. 언니야말로 단골손님이라고 엄청 아는 척 하던데요, 뭘.”
“그러니까! 그게 자기랑 같이 가서 그런 거라니까. 나 혼자 갔을 땐 말 한 마디 건 적 없었거든.”
어리석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진하는 이 순간 진심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개업 전에 시식도 부탁하고 그러느라 저하고는 그래도 부딪히는 일이 몇 번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편하기는 했겠죠, 뭐.”
그러자 현지가 놀란 표정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 언니. 사장님한테 시식을 부탁했어요?”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현지 때문에 진하는 뭔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시식을 부탁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될 정도로.
“언니가 의외로 끼가 있다.”
현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묘한 소리를 하였다.
“내가? 무슨 끼?”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진하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현지가 당황스러웠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끼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언니는 도움을 받을 분들한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잘 아는 것 같단 얘기였어요. 예전에 일자르디노 서 사장님도 그렇고 놀이터 사장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어렵게 생각하면서 섣불리 다가가질 못 하는데 언니는 굉장히 친근하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게 되게 부럽다고요.”
현지는 아무 의도 없이 순수하게 한 말이겠지만 일자르디노의 서빙 직원들 사이에서 그녀의 어머니까지 거들먹거리며 어떤 얘기들이 오고 갔는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진하의 입장에서는 뭔가 불쾌한 어감이 느껴질 수밖에 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거론한 두 남자가 부자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현지는 얼마나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일까. 그 부분이 껄끄러워서, 진하는 아직까지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도와줬으면 해서 솔직하게 부탁한 것뿐인데.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아?”
진하가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는 현지를 대신해 유선이 나서서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다.
“내 생각엔 오히려 반대로 진하 씨가 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은데. 계산 없이 순수하게 사람을 대하니까. 돌아가신 일자르디노 사장님이야 내가 잘 모르지만, 강동원 같은 남자는 의도적인 접근에 절대 안 속아 넘어가. 태어날 때부터 여자의 관심을 받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남자들은 흑심 감추고 접근하는 여자들 귀신 같이 알아본다는 거. 왜냐, 그런 여자가 한 둘이 아니거든. 일종의 생존본능이랄까. 그 사람은 그냥 진하 씨가 아무 사심 없이 대하는 게 편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안 되는 거라니까. 왜냐, 흑심을 품었거든! 아무리 자연스러운 척 해봐야 강동원 눈엔 수상쩍은 냄새가 느껴진다니까.”
유선이 시선을 마주하며 동의를 구하자 현지가 펄쩍 뛰었다.
“어머머, 우리라뇨. 거기서 전 빼주세요. 난 사장님 같은 선수 스타일 남자 별로라니까요.”
유선이 봐준다는 표정으로 너그럽게 웃었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해 주마.”
“정말이에요. 전 진짜 사장님 같은 스타일 싫어요.”
현지가 입술까지 앙 다물며 강하게 말했다.
“뭘 또 굳이 싫기까지. 그건 좀 너무 오바다.”
“진짠데?”
“그럼 만약에 강동원이 자기한테 무릎 꿇고 한 번만 사겨달라고 하면 거절할 거야?”
“당연히 거절하죠.”
대답하는 현지의 표정이 매우 결연해 보였다.
“그럼 저 남자가 나한테 왜 하필 날 좋아하냐면서 불쾌해할 거야?”
그러자 결연하던 현지의 표정이 살짝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뭐 불쾌할 것까지야.......”
“은근히 좋을 것 아니야.”
“좋을 건 없죠. 그렇지만 만인이 좋아하는 잘생긴 남자가 굳이 나한테 좋다고 하는데 싫지는 않겠죠.”
“그럴 땐 싫다는 표현을 쓰는 게 아니라 취향이 아니란 말을 써야 하는 법이라네.”
“이거나, 그거나.”
“엄연히 다르거든!”
토닥거리는 두 사람의 얘기를 흘려들으면서, 진하는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서현우. 서진구 사장님의 아들. 그녀의 인생에서 큰 도움을 준 남자 두 명이 부자관계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인연이었다. 남녀 간의 오랜 우정은 한쪽의 일방적인 애정이 기반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현우와 오래도록 우정을 나누는 것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뜨겁지만 짧은 사랑보다는 술 한 잔 나누며 웃을 수 있는 편안한 우정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촘촘한 체로 마음 속 불순물들을 거르고 거르면 언젠가는 평온하고 잔잔한 감정만 남을 것이다.
현우는 홀 매니저에게 일찌감치 카운터를 맡기고 커피를 진하게 뽑아 정원으로 나갔다. 벌써 11월도 끝자락. 바람이 뺨에 닿는 감촉이 싸늘했다. 그는 겨울의 찬 공기에서 느껴지는 이 알싸한 느낌이 좋았다. 대기 손님들을 위해 놓아둔 난롯가에 서서 뜨거운 커피를 한 모근 넘기는 순간 느닷없이 기침이 튀어나왔다. 아침부터 목이 따끔하더니, 아무래도 감기가 들은 모양이었다.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이틀 연속 마셨으니 기력이 쇄할 만도 하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는 길 건너 삐꼴로 자르디노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저기에 지금 이진하가 있겠군. 이상하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유쾌한 미소가 지어졌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을까? 아침부터 벌써 몇 번씩이나 핸드폰을 향해 되묻는 질문. 이렇게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도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어제 그녀의 입에서 오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애초에 모든 것이 어머니의 왜곡된 시선이 만들어낸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으므로. 여태껏 아버지에 관한 억측들 대부분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핸드폰을 끄집어내기가 힘든 것은, 어쩌면 그와의 관계로 인해 진하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 때문이었다. 쿨럭쿨럭, 간질간질한 고통을 끝내 이기지 못 하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이 멎자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문자 정도는 누구한테라도 하는 건데.
-마감 했는데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해요?
핸드폰과 환하게 불이 켜진 삐꼴로 자르디노를 번갈아 쳐다보기를 한참 동안 하다가 목이 빠져라 문자를 기다리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재킷 주머니 안에 넣는 순간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서둘러 손을 빼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은 마감 끝나고 브라운슈가 유선 언니랑 셋이서 수다 떨다가 좀 늦어졌어요. 이제 들어가야죠.
어제 마감 시간에 맞추어 진하를 데리러 갔을 때 그를 쳐다보던 현지의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셋이서 모여 무슨 얘기로 수다의 꽃을 피웠을지 대충 예측이 가능했다. 포화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난감했을 그녀를 상상하니, 괜스레 쿡쿡 웃음이 났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금방 답이 왔다.
-그럼요. 전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요. 사장님은 괜찮으세요?
동지끼리 건배 하자며 발그레하게 웃었던 주제에 별로 안 마셨다고 시침을 뚝 떼다니, 어이가 없군.
-안 괜찮아요.
-저런! 이틀 연속으로 과음을 하셨으니 탈이 나실 만도 해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역시 문자는 별로 재미없다. 감정이 죄다 드러나는 표정과 폭포수처럼 시원스레 쏟아내는 웃음소리가 없으니 영 심심하다. 그는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깜짝 놀래줄 요량으로 노크도 없이 삐꼴로 자르디노의 문을 연 순간 텅 빈 가게 안 주방에서 분주하게 몸을 놀리던 진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엄마야!”
우당당탕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현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놀랐어요?”
그냥 좀 놀려줄 심산이었지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머, 사장님! 이 시간엔 웬일이세요. 전 도둑 든 줄 알았어요.”
충분히 짜증스러울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재미있는 해프닝이라도 경험한 양 가슴을 쓸어내리며 환하게 웃었다.
“손님 많이 늘었다더니 믿을 수가 없네. 불 켜진 가게에 누가 들어오면 손님이란 생각을 먼저 해야지, 대뜸 도둑이란 생각부터 하다니.”
“문 잠갔거든요. 어, 근데 어떻게 여셨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에 대고 현우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미니까 열리던데?”
“어머, 정말요? 아까 유선 언니 가고 난 담에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여간에 이놈의 건망증.”
한심한 표정으로 제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진하를 쿡쿡대며 쳐다보다가 현우는 카운터에 팔을 기대고 주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바탕 요란한 소리를 낸 것치고는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밀가루 반죽이 담긴 양푼은 바닥에 얌전히 떨어져 있고, 싱크대 구석으로 나무 밀대가 쿡 처박혀 있다.
“다행히 반죽은 무사하네.”
“그러게요. 어쩜 이렇게 절묘한 포즈로 떨어질 수가!”
진하가 기특하다는 듯 양푼을 주워서 싱크대에 올려놓고는 행주로 꼼꼼하게 닦았다.
“도둑이 그렇게 무서우면서 어떻게 혼자 남아 있어요?”
말을 하는 현우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문 잠그면 괜찮아요.”
“불 켜진 식당에 문을 잠그는 건 예의가 아니긴 한데.”
현우의 지적에 진하가 고개를 들고 진지한 얘기를 할 때면 늘 그렇듯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기는 한데요, 시간에 불 켜놓고 있으면 술에 거나하게 취하신 분들이 무작정 들이닥쳐서는 영업 끝났다고 말을 해도 술 내오라고 막무가내세요. 와,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제일 말 안 통하고 배짱 세신 분들이 술 취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두 번이나 이찌로 사장님한테 인수인계 부탁했다가 그 담부터는 그냥 속 편하게 문 잠가버리고 일해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현우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난 예전에 화장실 들어간 손님 기다리느라 밤 샌 적도 있어요.”
“어머, 왜요?”
“여자 손님이었는데, 인사불성이 돼서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 거예요. 변기에 앉아서 그대로 잠이 든 거지. 막무가내로 열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놔두고 문 잠글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기다려야지.”
“같이 온 친구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소개팅 한 남자랑 같이 왔는데 계산만 하고 내빼더라고.”
“어머, 세상에. 치사해라.”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개팅 한 여자가 키핑해 놓은 술을 가로채서 먹고 간 남자도 있는데.”
진하가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정말요?”
“다음 날 바로 와서 너무 당당하게 키핑해놓은 술 달라고 하기에 줬는데, 이틀 후에 여자 분이 친구랑 와서는 그 술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 친구 분이 드시고 가셨는데요, 했더니 옆에 친구가 뭐 그런 놈이 다 있냐고 버럭 화를 내더라고. 맘에 안 든다고 애프터도 안 한 자식이 술은 왜 마시고 가냐고.”
“우와,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네요.”
해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진하를 빤히 쳐다보다가 현우가 툭 내뱉듯이 물었다.
“근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뭐가요?”
“왜 놀이터 놔두고 이찌로한테 손님을 넘겨주는 건데?”
“놀이터는 바쁘잖아요.”
말을 하는 얼굴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핑계 대기는.”
빙글거리며 이죽거리자 억울했는지 진하가 정색을 하며 쳐다보았다.
“어머머, 핑계 아니에요.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데에다 어떻게 술 취한 손님을 데려가라고 맡겨요. 성가시기만 하죠. 그렇지만 이찌노는 달라요. 그나마도 반갑고 기쁠 수 있거든요. 사장님은 우리처럼 손님 안 드는 가게 주인 마음 모르실 거예요. 진짜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요. 어쩌겠어요. 동병상련인 가게끼리 서로서로 챙겨줘야죠.”
우리란 말을 쉽게도 갖다 붙이는군. 현우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어, 사장님 감기 걸리셨어요?”
현우가 주먹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잔기침을 몇 번 하자 진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염려하는 눈빛에 지레 불편해져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신다, 그래서 되게 건강한 줄 알았는데, 사장님도 은근히 허당이시네요.”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너무나 의외라, 뭐랄까 현우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낯간지럽게 호들갑 떠는 상황에 너무 질려서 그런가, 유머로 응수하는 이런 식의 반전이 오히려 뭐랄까, 신선하고 그리고 유쾌했다. 좀 재수 없게 표현하자면, 나한테 허당이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그런 상황이랄까.
진하의 밝은 성격에 현우가 넘어가는군요 ㅎㅎ
그나저나 현우 어머니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서 불안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