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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우리 조폭가문의 며느리 쓰리 볼까요?”
진히가 고른 영화는 놀랍게도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는 코미디, 그것도 무려 3편이었다.
“조폭가문의 며느리?”
설마, 농담으로 한 번 해본 얘기겠지. 현우는 반신반의하며 진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폭가문의 며느리 영화 홍보 포스터를 꺼내 들고 유심히 읽고 있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진짜 있기는 있구나. 더군다나 오랜만에 큰마음 먹고 와서 고른 영화가 이거라니, 뭐랄까, 조금 충격적인 영화 취향이었다.
“1편 봤는데 정말 재밌더라고요. 2편은 안 봤는데 건너뛰어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와, 이 진지한 자세라니. 현우는 그만 너털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난 1편도 안 봤어요.”
그러자 진하가 생각지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1편도요?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해주던데. 전 두 번이나 봤어요.”
“두 번 다 그렇게 재밌었어요?”
현우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네. 근데 두 번 째 볼 때는 처음처럼 웃기진 않았어요.”
놀리려는 건지도 모르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게 재밌어서, 현우는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 왜 웃으세요?”
“여기 잠깐만 있어요. 티켓 끊어 갖고 올게요.”
현우는 가만히 웃음을 깨문 채 매표소로 가서 영화 티켓 두 장을 끊었다. 조폭가문의 며느리 티켓을!
연인들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심야의 상영관에서 조폭가문의 며느리는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한밤중의 극장 데이트에서 조폭 가문의 며느리가 좌충우돌 사고치는 그림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진하가 매우 의아하다는 듯 듬성듬성 비어 있는 좌석을 둘러보았다.
“한산하니 좋네요. 뒷자리에 앉아서 등받이 발로 차는 사람도 없고.”
현우가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범인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바로 앞 줄 왼편 사이드에 앉아 있는 커플이었다. 엄연히 음식물 반입이라고 명시돼 있는 상영관 내에서 저리도 당당하게 순대를 사갖고 들어와서 먹다니. 저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극장 들어올 때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 현우가 내심 혀를 차고 있을 때 진하가 앞줄의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밀스레 속삭였다.
“사장님, 저 사람들 순대 먹고 있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현우가 미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전에 진하가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더니 순대였어요. 와, 진짜 맛있겠다. 그러고 보니 순대 먹어본지도 참 오래 됐네요. 언제 한 번 먹으러 가야겠다.”
현우는 부럽게 웃고 있는 진하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극장은 음식물 반입 금지예요.”
“그렇기는 하지만, 저 사람들 진짜 배고 고팠던 것 같아요. 엄청 허겁지겁 맛있게 먹잖아요.”
그거면 된 거 아니냐는 식으로 흐뭇하게 웃는 모습에 현우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우리는 저런 사람들을 그렇게 너그럽게 봐주면 안 돼요.”
“왜요?”
“꼭 데이트를 극장 와서 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배가 고팠으면 극장 말고 삐꼴로 자르디노 가서 피자 먹고 놀이터에서 와인 한 잔 하고 그랬어야지.”
“어머. 사장님 얘기 듣고 나니까 괜히 화가 나네요. 왜 배고픈데 극장에 와서 순대를 먹는담. 냄새 나게.”
진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뒤늦게 불평을 쏟아내자 앞 쪽 두 사람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졌는지 뒤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움찔 딴청을 피우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진하와 말을 몇 마디 나누고 나니까 방금 전까지 악취라고 여겨지던 순대 냄새가 별로 불쾌할 것도 없는 음식 냄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와, 정말 신나게 웃었네요. 본편만한 속편 없다지만, 이건 속편이 더 재밌는 거 같아요.”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하는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조폭마누라의 활약상에 대해 재잘거렸다. 별로 재미있을 것도 없는 장면을 보면서도 어찌나 유쾌하게 웃는지, 티켓을 끊어주었다는 게 뿌듯해질 지경이었다. 황당한 상황설정과 단순무식한 캐릭터로 밀어붙이는 영화의 웃음 코드가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진하가 두 사람 몫 이상으로 자지러지게 웃었으면 됐지.
“난 오늘 극장 오면서도 설마 우리가 볼 영화가 조폭가문의 며느리가 될 거란 생각은 상상도 안 해 봤어요.”
“왜요?”
당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물어보는 무구한 얼굴에 대고 현우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극장에서 조폭가문의 며느리를 보자는 사람 자체를 처음 봤어요.”
“그래요? 정말 희한하네요. 이거 엄청 히트 친 영환데.”
“고백 하나 해도 돼요?”
“뭔데요?”
진하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조폭 나오는 코미디 싫어해요.”
“어머, 정말요? 그럼 다른 거 보자고 미리 말씀 하시죠. 전 다른 거 봐도 상관없었거든요. 진짜로.”
“에이, 보지 말자고 할 분위기가 아니던데. 1편을 두 번씩이나 봤다는데 어떻게 다른 거 보자고 말을 꺼내요.”
현우의 입가에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명절 때 재방송을 계속 해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본 거였어요. 제가 그렇게 좋아했으면 2편도 챙겨봤죠. 꼭 봐야 된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어요.”
진지하게 반응을 보이는 게 재미있어서 현우는 계속 장난을 걸었다.
“포스터까지 꼼꼼히 읽고 있던데 뭐.”
“아니, 그건 그냥 있으니까 무슨 내용인가, 하고 본 거였어요. 사장님이 싫어하시는 줄 알았으면 다른 거 봤죠. 그래도 막상 보니까 괜찮았죠?”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얼굴에 대고 현우는 부러 과장되게 표현을 했다.
“전혀. 하나도 안 웃겼어요.”
진하가 완전히 충격 받은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머. 웬일이야. 저 혼자만 재미있었나 봐요.”
더 했다가는 사과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라 현우는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재밌게 봤어요.”
그러자 진하가 단박에 그럼 그렇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영화 보시면서 많이 웃으시는 걸 내가 봤는데.”
“영화 말고 진하 씨 자지러지는 게.”
“저만 그렇게 웃었나요, 뭐. 다 자지러지던데.”
얼굴이 벌게져서는 무안해 하는 모습에 현우는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안 웃기는 코미디 영화보다야 몇 배는 재미있는 여자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진작부터 집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고 있었는데 이제야 눈치를 채고는 진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긴. 순대 먹으러 가야죠.”
“순대요? 갑자기 순대는 왜. 아, 아까 영화관에서 그 사람들 때문에? 왜요. 제가 또 그렇게 그 사람들을 부럽게 쳐다봤어요?”
자조적으로 묻는 그녀의 질문에 현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대답을 했다.
“엄청.”
일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도 순대 볶음 집은 빈 테이블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북적거렸다. 두 사람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그란 양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순대 볶음 2인분하고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사장님 오늘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아요. 말만 하면 소원을 척척 들어주네.”
진하는 주걱으로 순대 볶음 양념을 솜씨 좋게 섞으며 환하게 웃었다. 깻잎 향이 고소하게 올라오는 게 제법 맛있어 보였다.
“소원 한 번 시시하네. 겨우 조폭가문의 며느리랑 순대 볶음이에요?”
“그게 어때서요. 그 정도면 훌륭하죠.”
순대 볶음을 젓고 있는 진하의 표정을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현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밝고 유쾌하고 명랑한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진하와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즐거운지 알았다. 단순히 그녀가 재미있는 말을 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즐거운 기운을 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근데 사장님, 그거 아세요?”
진하가 순대를 젓다가 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뭘요?”
“나 아직까지도 사장님 성함을 몰라요.”
에이, 설마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런! 진짜네.”
“여태껏 이름 물어볼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우리끼리는 사장님 부르는 애칭이 따로 있거든요.”
“애칭? 그게 뭔데요?”
“합의 없이 발설해도 되려나.”
별것도 아닌 일로 망설이며 미적거리자 현우가 성급하게 몰아붙였다.
“애칭 가지고 합의는 무슨. 그냥 말해요.”
그러자 진하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비밀스레 속삭였다.
“강동원이요.”
현우는 비쩍 마르고 눈이 퀭한 영화배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랐어요?”
“강동원을 두고 말랐다니요. 그건 말랐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에요. 슬림하다고 해야 되는 거예요.”
진하가 당치도 않다는 듯 발끈하며 강동원의 편을 드는 것이 과히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강동원 팬이었어요?”
“에이, 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두 번씩이나 챙겨본 조폭가문의 며느리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고 발뺌하더니 또 그러네. 그냥 인정하고 편해져요.”
“제가 강동원 팬 하고 싶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에요. 팬은 모름지기 팬카페에도 가입해야하고, 강동원이 인터뷰에서 무슨 말했는지 죄다 꿰뚫고 있는 건 물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강동원이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다 챙겨봐야 하는 법이라고, 유선 언니가 가르쳐줬어요. 저 같은 사람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어요.”
“그건 완전 열성팬이고, 별것도 아닌 일을 갖고 편드는 것도 팬은 팬이지.”
“그건 아니죠. 연기력이 아니라 외모 얘기였잖아요. 강동원의 외모에 어떻게 감히 토를 달겠어요. 유선 언니가 그건 진리요, 기준이랬어요.”
“그게 바로 팬이라니까!”
참다 못 한 현우가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소주 한 병이 다 비워지고 취기가 적당히 오를 때쯤 진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근데 사장님, 아직도 이름 안 가르쳐주셨어요.”
현우가 들고 있던 소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싱겁게 웃었다. 막상 이름을 대려고 하니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서현우예요.”
“서현우.”
진하가 가만히 이름을 되뇌더니 뭔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도 서 씨네.”
“누가 또 서 씨예요?”
“사실은 일자르디노 사장님도 서 씨였거든요.”
순간 술기운이 확 깼다. 여기서 갑자기 아버지 얘기가 나올 줄이야.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현우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감추며 빈 병을 흔들어 보이며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그 왜 현지 씨 있잖아요. 우리집 서빙 직원이요. 그 친구가 일자르디노에서 한 1년 정도 서빙을 했었거든요. 현지 씨가 사장님 처음 딱 보더니 일자르디노 서 사장님하고 웃는 입매가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놀이터에 가면 일자르디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진하의 웃음이 어쩐지 씁쓸해 보여서 현우는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냥 밝혀야 할까. 하지만 물어본 것도 아닌데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혹시 돌아가신 분하고 닮았단 말을 해서 마음 상하신 건 아니죠?”
현우의 침묵을 잘못 오해하고 진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현지 씨가 잘 봤네요.”
여기서 침묵한다는 것은 명백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서 진실을 전해 듣고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뭘요?”
진하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느슨하게 웃으며 물었다.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현우는 내심 긴장이 되었다.
“일자르디노의 서진구 사장님이 우리 아버지예요.”
“네?!”
바싹 얼어붙은 진하의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젓가락이 양철 테이블에 쨍그랑 부딪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았던 분위기가 저 한마디에 차갑게 식진 않겠죠...
진하 성격에는 더 반가워할거 같은데요 ㅎㅎ
암튼 둘이 첫 데이트 했는데 둘은 알란가 모르겠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