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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놀이터는 삐꼴로 자르디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오는 거지. 진하는 부러움 섞인 눈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잘 되는 레스토랑은 입구부터 후끈거린다.
“어머, 웬일이야. 사람 진짜 많네요.”
오늘 있을 환영식의 주인공 현지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감탄을 내뱉었다. 식사 시간에 맞춰 가면 자리 잡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말에 설마, 하며 마지막까지 의심을 눈길을 거두지 못 하는 눈치더니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게 내가 늦게 가면 자리 없다 그랬잖아.”
6시로 정한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 장본인인 유선이 의기양양한 기세로 현지를 쳐다보았다. 놀이터에서 식사를 하는 게 처음인 두 사람과는 달리 유선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들르는 단골손님이다. 거의 대부분 여자들로 구성된 베이킹 클래스의 회원들이 회식 장소를 정할 때마다 놀이터만 고집한다며 지긋지긋하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로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서빙 직원 현지의 환영회를 놀이터에서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장날 약장수처럼 목청에 힘을 주며 놀이터 칭찬을 하는 통에 양식은 별로, 라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현지가 꼭 가보고 싶다며 마음을 바꾸었으니까. 물론 홍보 포인트는 음식이 아닌 잘 생긴 서빙 직원들이고.
“도대체 얼마나 잘 생겼는지 궁금해 죽겠네.”
미성년자 딱지 떼자마자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다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연상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스물다섯 나이에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현지가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대단한 명작이라도 기대가 과하면 실망하게 되는 법. 기대를 낮추시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이 시간에 저리도 붐비는 이유가 뭘 것 같아? 태반이 여자들뿐인 저 많은 인파가 단순히 맛있는 음식 좀 먹겠다고 굳이 놀이터를 고집해서 온 것일까.”
어찌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는지,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질 정도다.
“저기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는 뭐, 그냥 그런데요.”
현지가 주차 안내를 하고 있는 직원을 가리키며 김새는 소리를 했다. 슬슬 불편해지려는 유선의 심기를 느껴져 진하는 얼른 중재에 나섰다.
“무슨 소리야. 저만하면 훤칠하지! 언니 말 대로 현지 씨 기대가 너무 크네. 놀이터 방송국 아니야. 그냥 레스토랑이야. 레스토랑 직원한테 연예인 같은 수준을 기대하면 안 되지.”
진하가 지원 사격을 나서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유선이 표정을 느긋하게 풀었다.
“오, 표현 죽이네. 바로 그거야. 놀이터는 방송국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라는 거. 그렇지만 당신의 그 당치도 않은 연예인 수준의 기대를 채워줄 히든카드가 하나 있지!”
유선이 진하를 향해 너는 알고 있지 하는 사인을 보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다. 유선이 마르고 닳도록 찬양하던 놀이터의 강동원이 아닌가 말이다. 사장님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 진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잘 생겼어요?”
“직접 봐. 보는 순간 이 남자가 그 남자구나, 필이 딱 꽂힐 것이야.”
유선이 궁금해 하는 현지를 향해 훗, 자신만만한 미소를 날리고, 입구 앞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세 명이요.”
“네, 잠시만이요.”
직원이 무전기에 대고 자리를 확인하고 있는 동안 진하는 난생 처음 나이트클럽에 가던 스무 살 때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삐꼴로 자르디노를 시작한 이후 다른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리고 드디어 먹어보는 놀이터의 음식. 그야말로 개봉박두의 심정이 아닌가 말이다.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바바리코트에 미니스커트로 무장하니 이 세상 어디에서든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네, 세 분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진하는 들어가기 전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며 목에 두른 스카프를 슬쩍 매만졌다. 왜 이렇게 차림새에 신경이 쓰이는 건지, 애써 모른 척하며.
“세상에, 일자르디노하고는 완전 딴판이네요.”
현지가 진하의 귀에 대고 진하는 자리를 안내받으면서 부지런히 시선을 움직였다. 카운터 앞에서 직원들을 동선을 살펴보고 있는 사장님의 옆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음악 소리 왜 이렇게 커요. 귀가 다 아프네.”
현지가 귓가에 대고 투덜거리는 소리에 진하는 주방 앞에 서 있는 사장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새삼스레 쿵쿵 울리는 비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이렇게 큰 소리를 의식조차 하지 못 하다니. 정신 차리자, 이진하. 그렇지만 직원들의 동선을 지켜보고 서 있는 남자의 옆모습이 저렇게 근사할 수가 있다니. 유선의 찬양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에게 덤덤하던 그때가 지금으로서는 그저 믿기지 않을 뿐이다.
“신나고 좋은데?”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쿵쿵쿵쿵쿵, 이름도 모르는 클럽 음악이 심장을 두드리는 거서 같은 느낌이 진하는 나쁘지 않았다. 얼핏 자유분방한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소품들 하나, 하나 적재적소에 각도까지 계산해 치밀하게 놓아두고 바닥이며 유리창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다. 어느 세련된 도시의 창고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와 다소 크다 싶을 정도로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는 놀이터가 점잔빼며 앉아 있는 데가 아니라 유쾌하게 떠들고 신나게 즐기는 장소라고 아주 명쾌하게 정의내리고 있는 느낌. 그래서 상호명이 놀이터였구나, 이제야 막연하게 이해가 갔다.
“어, 사장님이 우리 본 것 같아.”
유선이 진하의 귀에 대고 비밀스레 속삭였다. 자동반사적으로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현우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진하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 안내 받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니가 말한 히든카드가 저기 주방 앞에 서 있는 남자 맞죠?”
현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유선에게 물었다.
“한 눈에 필이 오지?”
“진짜 끝내주네요.”
깐깐하게 굴던 현지에게서 마침내 인정을 받아내자 유선이 항복 선언이라도 받아낸 것처럼 으스댔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자자, 일단 메뉴부터 골라요. 뭐 먹을까요?”
진하가 두 사람 앞으로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자기가 알아서 시켜.”
“언니, 난 밥 종류로 시켜주세요. 안 느끼한 걸로.”
유선은 음식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현지는 밥이면 된다는 분위기라 진하는 음식에 관심 없는 두 사람을 몫까지 열심히 메뉴판을 정독하였다. 처음에는 너무나 다양하게 구비된 주류들에 놀랐고, 그 다음엔 그 많은 주류들과 매치시켜 먹을 수 있도록 센스 있게 구성된 메뉴들에 감탄했다. 술을 안 즐기는 여자들끼리 식사, 퇴근 후 직장 동료와 함께 시원한 맥주, 소개팅 상대와 칵테일, 기념일을 맞아 애인과 와인 한 잔.......놀이터는 아주 다양한 욕구를 센스 있게 충족시키는 장소였다. 역시 잘 생긴 남자 직원 하나를 미끼로 손님을 이렇게 많이 오게 할 수는 없는 거였다. 당연한 진리를 마음으로 새긴 채 진하는 김치 해물 라이스와 히트, 라고 빨갛게 강조 되어 있는 메뉴 중에 바비큐 플레이트와 샐러드 스파게티를 골랐다.
“이 동네 프로들이 단체로 웬일이에요. 긴장되게.”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메뉴판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꾹 들어갔다. 진하가 고개를 들자 사장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있었다. 시식회 이후 이렇게 가깝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 편하게 나오질 않았다.
“삐꼴로 자르디노에 직원이 새로 들어와서, 환영회 하러 왔어요.”
잠자코 있는 진하를 대신해서 유선이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조신하게 말을 꺼냈다.
“어머, 언니. 목소리가 갑자기 왜 이래요?”
현지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내 목소리가 뭘.”
유선이 무안한 표정으로 새침하게 맞받아쳤다.
“술을 많이 드세요.”
뜬금없는 현우의 얘기에 유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술 드시면 목소리 화통해지시잖아요.”
현우가 싱긋 웃으며 쳐다보자 유선이 순간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을 돌렸다.
“우리 뭐 먹을까. 진하 씨, 뭐 골랐어?”
“좌석은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안 바꿔 드려도 돼요?”
“아뇨, 괜찮아요.”
영문을 모르는 진하가 무구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난번이랑 똑같은 자리라 신경이 쓰이실까 봐 염려가 되네요.”
모른 척 하는 것으로 방어전선을 치던 유선이 그만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와,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고객 기밀을 이렇게 폭로하시기예요?”
“왜요. 좋은 건 소문을 내야죠. 옆 테이블에서 목소리 좀 낮춰달라고 부당한 태클을 거는데도 싸움 없이 넘어가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거든요.”
“와, 진짜. 은근슬쩍 다 털어놓으시는 것 좀 봐.”
억울한 듯 항의하는 유선의 얼굴 만면에 유쾌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아직 말 안 했습니다.”
“와, 갑자기 더워지네.”
둘만 아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진하는 괜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언니한테 시끄럽다고 뭐라고 한 거예요?”
유치한 질투를 누군가 알아채기라도 할까봐 진하는 일부러 명랑하게 물었다.
“술 좀 들어가면 원래 다들 목소리가 좀 커지잖아. 여기가 무슨 도서관도 아닌데 다소 시끄럽더라도 저 인간이 술 좀 했나 보다, 하고 이해해주고 넘어가주면 되는 걸 갖고 조용히 좀 하라고 태클을 거는 거야. 그것도 커플 둘이서 나란히 앉아서. 나는 애인이랑 왔으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건 말건 신경도 안 쓰겠다. 권태기 스트레스를 남한테 시비 거는 걸로 푸는 건지. 어휴, 내가 진짜 성질 같아선 한 바탕 뒤엎으려다가 순전히 사장님 때문에 참은 거예요.”
“이런! 하마터면 경찰 부를 뻔했군요.”
사장님이 유선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진하는 가슴이 쓰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거야. 좀 보고 웃으면 어때서. 원래 유쾌하고 재미있는 언니인데, 웃는 게 당연하지. 억지로 이해를 하려고 해도 아픈 가슴은 여전하였다.
“언니 덕분에 사고 면하셨는데 한 턱 쏘세요.”
농담인 양 은근히 분위기를 몰고 가는 현지 때문에 진하는 순간 뜨끔했다. 사야 할 것처럼 분위기 조성했다가 사면 좋은 거고 정색해서 한 소리 할라치면 그냥 농담한 것뿐이라며 괜한 사람 치사하게 만드는 이런 식의 대화는 설령 농담일지라도 싫다.
“한턱은 이쪽에서 내셔야죠. 경찰 부르면 경찰서 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브라운슈가 사장님이에요.”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표정으로 쑥 빠져나가는 재치에 감탄하며 진하는 내심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엄청 잘 생기긴 했는데,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능글능글 선수 같아. 저런 남자랑 사귀면 여자 속 무지하게 탈 것 같아요. 인물값 한단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니까요.”
현지가 저쪽으로 걸어가는 사장님의 뒷모습에 대고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능글맞은 건 맞는 말 같지만 선수라고?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 각자 보이는 대로 느끼는 건데 몇 번 더 봤다는 걸 이유로 잘난 척 토를 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난 속 태우더라도 저렇게 잘 생긴 남자랑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유선의 즉각적인 반응에 현지가 샐쭉한 표정으로 피, 입바람을 불었다.
“결혼해서 살아봐요. 바람기 있는 남편 둔 여자들 십 년은 먼저 늙어요.”
“인물값 한단 말 난 전적으로 안 믿어. 아는 오빠 중에 경찰관이 한 명 있는데 꽃뱀으로 잡혀 들어오는 여자들 보고 첨엔 무지 기함을 했대. 꽃뱀이라고 하면 티비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 요염하고 야하게 생긴 그런 여자들인지 알았는데, 잡혀 들어온 여자들 보면 하나같이 엄청 수더분하고 향토적인 아줌마들이라는 거야.”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하가 듣기에도 이건 좀 충격이었다.
“에이, 설마.”
“진짜야. 도대체 저 여자들의 어디에 그렇게 푹 빠져들었을까 신기하더래.”
“수더분한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꽃뱀인지 눈치를 못 채고 걸려들 수도 있겠다.”
“바로 그거지.”
“예전에 일본에도 남자 여섯 명 죽인 꽃뱀 사건 있었잖아요. 결혼을 빙자해서 재산 빼돌리고 다 죽인 사건. 그때 그 여자 사진이 올라왔는데 완전 이상하게 생긴 아줌마더라고요. 그래서 일본 남자들은 눈도 삐었다, 완전 어이없었는데 우리나라 남자도 똑같단 말이에요?”
“국적은 달라도 남자는 다 똑같은 법이야.”
유선이 황당해하는 현지를 향해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려주었다.
“남자가 다 똑같으면 우리 신랑하고 사장님하고 저 극명한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현지의 느닷없는 자폭하는 발언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사장님 같은 남자는 의무적으로 혼자 살아야 돼. 한 여자의 차지가 되는 건 너무 불공평해. 그냥 모두의 것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유선의 확고한 주장에 엉뚱하게도 사장님한테 여자 친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마 있겠지. 사장님 옆에 누군가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막연하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괜히 우울해지면서, 불공평하다는 유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절로 이해가 됐다. 그때 멀리 서 있는 사장님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현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근데, 사장님 누구 좀 안 닮았어요?”
“강동원.”
유선의 당연한 대답에 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강동원 말고요. 웃을 때 눈매가 누굴 좀 닮았는데.”
“누구?”
“돌아가신 일자르디노 사장님하고 안 닮았어요?”
동의를 구하는 현지의 눈빛에 진하는 일순 당황스러워졌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현지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일자르디노 사장님 그렇게 돌아가신 거 보면, 사람 인생 참 허무해요. 언니는 얼마나 놀랐겠어요. 우리한테야 그냥 사장님이었지만 언니한텐 좀 특별한 분이었잖아요.”
뭐라 대답하기도 뭣해서 진하는 그냥 서글프게 웃고 말았다.
“사장님 살아계셨으면 일자르디노 주방은 언니 차지였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진하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해.”
“황당한 소리 아니에요. 사장님은 따로 식구도 없으시고, 언니를 딸처럼 아끼셨잖아요.”
딸이라는 말에 머리가 번쩍 했다. 어머니가 장례식장에서 당했던 그 수모가 어쩌면 가게 안에서 흘러나온 소문 때문에 불거진 오해였었던가.
“아저씨가 왜 가족이 없어. 아드님 있는데. 그리고 아저씨 나한테 매번 말 높이시면서 거리 두시던 분인데, 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그래. 무슨 얘기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유선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진하는 내심 뜨끔했다. 모르고 한 소리일 텐데 지나친 과민반응이다.
“그냥 별 얘기 아니에요. 예전에 요리 배우던 레스토랑 사장님 얘기가 나와서 잠깐. 아무튼! 일단 건배부터 해요.”
아무래도 술을 너무 오랫동안 멀리한 모양이다. 고작 맥주 세 병에 세상이 흔들리다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수다스럽고 이유도 없이 웃음이 터지는 걸 보니 취하긴 취했다.
“언니, 그만 일어나야 될 것 같아요.”
신랑하고 통화를 몇 번 하더니 현지가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이제 겨우 여덟신데 들어오라고 한단 말이야?”
취기가 도는 건 유선도 마찬가지인지 목소리가 컸다.
“우리도 그만 일어나요.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손님도 많은데.”
실내를 둘러보던 유선이 빈 테이블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하는 수 없이 수긍을 했다.
“그래, 일어나자. 계산은 얼마 나왔어? 내가 절반 부담할게.”
“오늘은 제가 살게요.”
“왜. 내가 먹은 건 낼 거야. 직원도 아닌 게 덤으로 껴서 왔는데.”
“덤이라뇨. 스페셜 게스트지.”
“그래도 미안해서.”
“그 동안 언니한테 케이크 얻어먹은 게 얼만데요. 진짜 됐어요.”
그제야 수긍을 하고는 유선이 미안한 표정으로 지갑을 도로 가방에 넣었다.
“고마워. 덕분에 잘 먹었어.”
두 사람은 먼저 나가 있고 진하는 혼자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 앞에 섰다. 술기운 탓에 어색하고 수줍은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슨 말이든 다 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뉴들이 굉장히 기발하고, 뭐랄까 통통 튀네요. 어쩐지 사장님하고는 좀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요.”
“맛없었단 얘기네.”
전혀 다른 해석에 진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손바닥을 휘휘 저였다.
“제가 언제요. 샐러드 스파게티, 발사믹 드레싱, 와 정말 기발하고 맛있어요. 최고!”
진하가 엄지손가락을 척 펴보이자 사장님이 짐짓 김샌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별로란 얘기를 돌려서 한 거였구나.”
어, 말이 왜 그렇게 돼? 아, 사장님하고 분위기가 다르다고 했다는 말 때문에 이러는구나. 진하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어쩐지 기분이 묘하게 설렜다. 뭐하는 거야, 싶어서 진하는 얼른 계산서를 내밀었다.
“계산은 됐어요.”
“네? 왜요. 어머,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계산하면 모른 척 받으려고 했는데 하필 진하 씨가 내네. 에이, 안타까워라.”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은 달콤한 착각에 이대로 붕 하늘까지라도 날아갈 것만 같다.
“진작 말씀을 해주시지, 그럼 맥주 말고 와인 시켰을 텐데.”
“그럴까 봐 말 안 했지.”
아무래도 병이 깊어진 모양이다. 별 뜻 없는 농담에 이토록 가슴이 뛰다니.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진하는 냉큼 인사를 하고 서둘러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마주보고 서 있다가는 사장님께 이 묘한 감정을 들키게 될 것만 같아서.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밤공기가 유난히 달콤하게 느껴졌다.
진하가 뭔저 야릇한 감정을 느꼈네요 ㅎㅎ
그럼 이제 현우와는 그저 맘편하게 대하지는 못하겠어요 ㅋㅋ
남녀관계의 시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