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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침 운동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외사촌 동생인 수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우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수영이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오빠 간밤에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야?
수영이 묻는 폼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블로그 주인인 세미짱인지 하는 여자가 쪽지라도 보낸 모양이다. 얌전히 넘어갈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지만 설마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방법을 취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남들한테 보이는 걸 중요시하는 여자라 공개적인 댓글로 반격을 할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데?”
현우는 걷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모른 척 질문을 되돌렸다.
-그냥 모른 척 하지. 웬일로 블로그에 반박 댓글을 다 달았대?
“사정이 좀 있었어. 근데 넌 웬일로 아침부터 일어나 있냐? 아직 한참 자고 있어야 될 시간 아니야?
괜스레 머쓱해져 현우는 은근슬쩍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제 자야지.
그럼 그렇지.
현우는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날리고 차 문을 열었다. 제법 괜찮은 대학을 그럭저럭 준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영은 취직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인터넷 쇼핑이 유일한 소일거리인, 팔자 늘어진 백수다. 외숙모의 전언에 따르자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서 뭘 살까 뒤지는 게 하루 일과라고. 외삼촌은 자신의 막내딸을 남의 집에 시집보내기도 죄송스러운 인물이라고 스스럼없이 비난을 퍼붓지만 현우에게 있어 수영은 외가 식구를 통틀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상대다.
“취침 시간이 나날이 뒤로 밀린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5시 전에는 잤잖아.”
-그러게. 아마 담 달 쯤엔 정상적으로 밤에 잘 수 있을 것 같아.
현우는 유쾌하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너 집에서 안 쫓겨나는 게 신기하다. 외삼촌이 당신 딸한테는 관대하시네. 용돈까지 줘가며 데리고 사는 거 보면.”
-무슨 소리야. 이틀에 한 번씩 안방에 끌려가서 일장연설 들어주고 있는데.
“내가 너면 차라리 취직을 한다.”
외삼촌의 연설을 이틀에 한 번씩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음 소리가 절로 났다.
-무슨 소리야. 삼십 분만 딴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데. 익숙해지면 생각보다 쉬워. 암튼 그건 그렇고, 블로그 주인한테 온 메일이나 어서 확인해. 그 얘기하려고 전화했어.
일부러 전화를 걸어 확인하란 얘기를 할 정도면 메일에 뭔가 내용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뭐라는데?”
-오빠가 남긴 댓글 얼른 지우래. 안 그러면 오빠가 누군지 밝혀내겠대. 오빠가 놀이터 사장인 거 다 알고 있는 눈치야.
“그건 그 여자가 어떻게 알아?”
현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모르지. 그러게 흔적을 왜 남겨. 오빠가 뭐라고 변명 해 봤자, 자기 가게 흉 본 글 보고 열 받아서 남의 아이디로 들어가 화풀이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고. 암튼 그건 뭐 오빠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난 그만 잔다.
자기 가게? 수영은 그러니까 그가 놀이터에 관련된 글에 댓글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수영의 성격이라면 일부러 블로그로 찾아가 글을 찾아 읽는 수고를 했을 리가 없기는 하다. 현우는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일부러 사실을 정정하지 않은 채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자라.”
현우는 핸드폰을 내려둔 채 애매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정의감이 샘솟아서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을 떨었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기는 하다.
“사장님!”
현우가 놀이터 쪽으로 난 길을 향해 우회전을 틀기가 무섭게 삐꼴로 자르디노의 문이 열리더니 진하가 양 손을 크게 휘저으며 차를 세웠다.
“무슨 일 있어요?”
현우는 차에서 내려 차가 있는 데로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진하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네. 희소식이에요.”
도대체 무슨 좋은 소식이기에 붉게 홍조를 띈 얼굴 한 가득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다.
“뭔데요?”
“어제 말씀 드렸던 그 블로그 글에요, 밤사이 댓글이 하나 달렸어요!”
블로그, 댓글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현우는 차에서 내린 것에 대해 극심한 후회가 들었다. 애초에 남의 일에 이렇게 끼어드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블로그에 댓글 하나 단 게, 이렇게까지 큰 여파를 줄 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좋은 평가였나 보군요.”
속으로야 진땀을 흘리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어디까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받을 수밖에.
“네! 저희 집에 온 손님인데,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굉장히 해박하신 분이더라고요.”
바로 면전에 대고 극찬이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현우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졌다.
“그거야 그렇겠죠. 나도 우리 가게 음식 맛있다는 손님처럼 음식에 해박한 전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민망함을 깨기 위해 일부러 던진 신랄한 농담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던 진하가 정색하며 얘기를 다시 꺼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글만 봐도 딱 인격이 느껴졌어요. 세미짱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배려하면서도 본인이 하고자 말하고자 하는 의견을 또박또박 내놓는데, 아무리 세미짱이라도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왜냐, 그 분은 의견을 냈을 뿐 누구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거든요. 인터넷 상에서는 착하고 예의바른 탈을 쓰고 있는 여자라 간신히 성질을 죽이고는 있지만 아마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예요. 그 생각을 하니까 왜 그렇게 웃음이 나던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호호 웃는 폼이 어찌나 고소해 보이는지. 이거야 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기묘한 상황에 현우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해야 이 민망한 대화를 끝낼 수 있을까,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네, 뭐. 아무튼 좋은 소식이네요.”
적당히 얘기를 마무리 짓고 도망치려는데 진하가 느닷없이 두 손을 모아 현우를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다 어제 사장님이 상담에 응해주신 덕분이에요. 세미짱에 대한 원망을 죽이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고 일어났더니 그런 선물 같은 댓글이 짠하고 나타나 있더라고요. 감사합니다.”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진지한 태도에 현우는 움찔 뒷걸음질이 쳐졌다.
“생각한다고 달려가더니, 마음 편히 잤단 말이에요?”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현우는 짐짓 흥분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개그 신공을 펼쳤다. 농담이 제대로 먹혔는지, 진하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경쾌한 웃음소리를 사방에 흩뿌렸다.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는데요, 뭐. 낮에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면 돼요.”
이번에는 현우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농담을 받는 센스가 제법 훌륭하다.
“아, 그렇구나. 난 얼른 가서 손님 맞을 준비해야겠다.”
현우가 차 문을 열며 일부러 바쁜 척을 해 보이자, 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얄밉게 쳐다보았다.
“와, 순간 사장님이 세미짱처럼 느껴졌어요. 오늘 하루도 제 몫까지 대박 나세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원한 서린 목소리로 대박을 외치는 소리에 현우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으로 접으며 크게 웃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흰색 티셔츠에 검정색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주차장에서 나오는 현우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를 인사를 건넸다.
“응, 그래. 수고.”
현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테이블을 바깥으로 옮기고 있는 어린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곧장 홀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성가신 일부터 처리하자는 생각에 수영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다음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세미짱이 보낸 메일을 발견하고 클릭하려던 현우의 손동작이 일순 멈칫했다.
어, 이건 또 뭐지?
세미짱의 메일 바로 위에 있는 메일 제목이 현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에이프릴님, 삐꼴로 자르디노 주인입니다.
삐꼴로 자르디노 주인이라면, 진하잖아!
댓글이 감동이란 얘기를 하기 위해 달리는 차를 세우더니 기어이 메일까지 보낸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적어 보냈을까 생각을 하니, 등 뒤로 진땀을 흘렀다. 현우는 빤한 내용의 세미짱의 메일을 뒤로 미루고 진하가 보낸 메일부터 먼저 클릭해 열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이 예의인 걸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메일함을 두드려봅니다. 혹시 과한 부담으로 느껴지신다면,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가주세요.
사실은 어제 밤에 세미짱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제 입장에서 봤을 때 그 글은 너무 편파적이었고 그래서,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었거든요. 반박 댓글을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몰라요. 글이란 말과는 달라서 한 번 남기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을 테고, 자칫하면 후련함보다는 후회가 더 클 수 있겠다는 걱정 때문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컴퓨터를 꺼버렸어요.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도저히 잠이 오질 않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스승처럼 여기는 분의 레스토랑으로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일러바쳤답니다. 제 얘기를 다 듣고난 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레스토랑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삐꼴로 자르디노의 음식이 맛이 있다면 평가는 바뀌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손님이 찾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저에게 그것보다는 손님이 다른 가게들을 제치고 굳이 제 가게를 찾아와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잘못’해서 손님이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잘하는지 몰라서 손님이 오지 않았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요. 오픈 전에 고민했어야 할 문제를 뒤늦게 생각하느라 새벽을 분주하게 보내고,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자 들어갔던 세미짱님의 블로그에서 에이프릴님의 댓글을 읽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왜 손님이 안 오시지, 하는 생각만 했지 몇 안 되는 손님 중에 내 음식을 맛있게 드신 분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거든요.
사실 전 화가 났던 게 아니었어요. 무섭고, 겁이 났어요.
누구나 그렇듯 큰 꿈을 품고 가게를 오픈했고, 너무나 당연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였는데 오픈을 하고 보름이 다 되도록 손님은 뜸하고 하릴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가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망해라, 망할 거야, 하는 말을 들으니까 그게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현실로 되어버릴 것만 같았거든요.
에이프릴님의 댓글이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 제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 하면 된다는 희망을 줬거든요. 그리고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러브레터보다 감미롭고 달콤하게 느껴졌답니다. 어떤 손님이었을까, 알고 싶어서 당장 에이프릴님의 블로그로 달려가 모든 글들을 읽었지만 도무지 그려지는 얼굴이 없네요. 매우 세련된 분위기의 이십 대 여자 분이라는 게 제가 그린 그림의 전부예요. ^^
실은 제가 지금 삐꼴로 자르디노의 구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메뉴를 구상 중에 있어요. 저희 가게의 정기 휴무인 셋째 주 화요일 날 에이프릴님을 초대해 새로운 메뉴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싶습니다. 혹시 그 날이 안 된다면 제가 에이프릴님의 날짜에 맞출게요.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답변 부탁드립니다.
못 오신다고 하시면 잠깐 서운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정말 괴롭거든요. T_T
현우는 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누가 볼세라 서둘러 메일함을 닫아버렸다. 맙소사.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 세미짱의 블로그에 반박 댓글을 남기면서도 진하의 반응은 조금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저 다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녀의 음식은 그 정도의 배려를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구절절한 고백으로 되돌려 받게 되다니, 예상치 못 한 격렬한 반응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가야 되는지, 암담했다.
그나저나 스승이라니. 뭘 했다고 스승이라는 거야.
“형, 혹시 무슨 일 있어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재환이 주방으로 걸어다가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아니야,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심각한 일 아니죠?”
“아냐, 일 해.”
“네.”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재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우는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수영이 보기 전에 진하의 메일을 지우는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녀석이라, 진하의 초대에 응하겠다며 성가시게 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현우는 메일함으로 다시 로그인해 들어가,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고 진하가 보낸 메일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는 내용을 복사해 따로 저장해두었다. 뜨거운 진심을 다해 보낸 메일을 일고의 주저함 없이 지워버린다는 게 영 마음이 찜찜했던 것이다. 진하의 메일을 삭제한 다음 세미짱의 메일을 열었다. 근거도 없이 댓글을 단 사람이 삐꼴로 자르디노의 사장일 것이라고 단정을 짓고는 댓글을 지우지 않으면 신분을 폭로하겠다는 협박 성 메일.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보통 상대를 위협할 때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하게 마련이니.
도대체 뭘 근거로 절 삐꼴로 자르디노의 사장일 것이라 확신하시는 것인지요.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안타까운 마음에 한 자 적은 걸 이런 식으로 매도하시는 건가요?
확실하게 말씀드리지만, 전 삐꼴로 자르디노의 사장 아닙니다. 측근도 아닙니다.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메일을 통해 답 글을 지워 달라 요구한다면, 세미짱님의 블로그에 메일 전문을 모두 공개하겠습니다.
이제 진하의 메일에 회답만 하면 끝이다.
시식회 참석은 불가능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손님으로 찾아뵙죠.
용건만 간단히 써 보낸 다음 보낸 메일함으로 들어가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메일함을 완전히 닫았다.
이제 끝이다.
간신히 한시름을 돌리고, 놀이터의 오픈 준비를 하는 현우의 머릿속으로 진하의 메일에서 본 민망한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스승님? 감미롭고 달콤한 러브레터?
나 참, 살다 별 경험을 다 해보네.
현우의 입가에 난감한 미소가 걸렸다.
맛집 블로거 세미짱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블로거가 많다죠??
진하의 마음이 잘 표현된 메일을 받은 현우도 이제는 발뺄수 없을거 같은데요 ㅎㅎ
정말 현우 말대로 일이 점점 커질거 같아요~~